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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대가-5화 (5/529)

<-- 5 회: 1권- 2장. 움직이다 -->

“예, 형님 말씀이 옳습니다. 하지만 완전히 확신할 수 있는 일이 세상에 어디 있겠습니까. 아마 연륜 있는 곡물상이라면 올해에 승부수를 띄울 게 분명합니다. 저 또한 승부를 해보려고 합니다.”

“그건 도박이 아니냐.”

아버지가 우려를 표하셨다.

이제 마지막 카드를 꺼내야겠군.

“제가 아직 어리지만 이것은 어린아이의 치기가 아닙니다. 제 각오가 어떠한지 보여드리겠습니다.”

나는 바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버지와 아서 형님이 그런 내 행동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노움.”

그러자 바닥에서 쑤욱 노움이 튀어나왔다.

-또 불렀네?

생글생글 웃는 노움.

“네 얼굴이 보고 싶었거든.”

내 말에 노움은 부끄러운지 몸을 배배 꼬며 기뻐했다. 

점심에 낮잠을 자서 정령친화력을 약간이나마 회복한 상태였기 때문에 아직 피로는 느끼지 않았다.

“얼굴을 봤으니 오늘은 이걸로 만족해야겠네. 내일 또 불러서 실컷 놀게 해줄게 이만 돌아가렴.”

-정말이지?

“그럼.”

-알았어. 바이바이.

노움은 다시 사라져버렸다.

그 일련의 광경을 바라보던 아버지와 아서 형님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는 정령사가 되었습니다.”

그 말에 두 사람이 침묵을 깨고 놀라움과 흥분을 드러냈다.

“정령! 맙소사!”

“정령술은 언제 익혔느냐?! 설마 그동안 숨겨왔던 게냐?”

“그럴 리가요. 얼마 전에 우연히 책을 보고 배웠습니다. 혹시나 싶어서 시도해봤는데 정령 계약에 성공했습니다. 오늘은 이 기쁜 소식을 알려드리고 싶기도 했습니다.”

“정말 기쁜 소식이구나! 네가 그런 재능이 있었다니, 왜 진작 알아보지 못했을까!”

아버지는 진심으로 기뻐하였다. 내가 어릴 때부터 오러도 마나도 재능이 없어서 자괴감을 느꼈던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만약 제가 사업에 실패해 가문에 손해를 끼친다면 상회를 접고 평생 가문을 위해 무보수로 봉사하겠습니다. 제 인생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나의 각오에 아버지와 아서 형님을 상당히 놀란 기색이었다.

우리 쿤트 남작가는 가난한 편이라서 마법사가 없었다. 물론 2서클 수준의 하급 마법사야 얼마든지 고용할 수 있지만, 최소 3서클 이상이 아니면 쓸모가 없다.

하지만 정령사는 마법사보다 훨씬 귀한 존재다. 막 정령과 계약한 나 같은 하급 정령사도 3서클을 마스터한 마법사와 동일한 대우를 받는다. 

특히 정령술은 정해진 스펠대로 펼쳐야 하는 마법보다 훨씬 활용도가 높았다. 대지의 정령 노움의 경우 흙으로 건물도 지을 수 있고 밭을 일구는 등 영지에 유용한 일들을 할 수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정령사의 일평생은 충분히 담보로서의 가치가 있었다.

아버지는 마침내 결심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4천 레디나를 빌려주마. 이게 내가 마련할 수 있는 돈의 전부다.”

“감사합니다. 아버님!”

“하지만 담보 따위는 필요 없다.”

“예?”

이번엔 내가 놀랄 차례였다.

“바보 녀석. 가족끼리 인생을 담보로 잡느니, 무보수로 봉사하느니 하는 게 아니다.”

아서 형님도 웃으며 맞장구쳤다.

“아버님 말씀이 매우 옳다. 우리는 기꺼이 네 성공도 실패도 함께 끌어안을 것이다. 한 가족이 아니냐.”

“아버지…… 형님…….”

나는 가슴이 찡해졌다.

이렇게 날 감동시키다니, 역시 아버지와 큰형님이었다. 회귀 전이나 지금이나 나를 염려하고 위해주는 두 사람의 마음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노력해야 한다.

이 고마운 사람들에게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사업에서 반드시 성공을 거두어야 한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버지와 아서 형님은 날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저기, 그런데…….”

“음? 또 뭐냐?”

아버지가 물었다.

“이왕 감사한 김에 부탁을 한 가지 더 해도 될까요? 매입한 밀을 보관하는 문제인데 곡물 창고를 무상으로 대여해주실 수 있는지…… 헤헤헤.”

두 사람은 기가 찬다는 듯이 날 바라보았다.

“좋다. 영지의 창고를 마음대로 써도 된다.”

아버지가 화통하게 말했다.

“그리고 구입한 밀을 운송하는 문제도…….”

“어이구, 이 녀석아! 아예 날로 먹어라!”

기어코 아서 형님에게 꿀밤을 맞고 말았다.

“아하하하.”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쑥스럽게 웃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이, 밀을 보관하는 비용도, 운송하는 비용도 장난이 아닌 것이다.

밀을 족히 수천수만 포대는 살 텐데, 그 어마어마한 양을 무슨 수로 운송한단 말인가?

짐마차 수십여 대가 몇 번을 왕복해야 한다. 또한 용병단을 고용해서 호위도 맡기면 운송비가 구입비만큼 소모된다. 시골 촌구석일수록 물가가 비싸지는 건 이런 이유다.

또 그 많은 물량을 보관하는 것도 문제였다.

창고 한두 개로는 부족한데, 창고를 대여하는 비용도 장난이 아니다.

때문에 나는 체면불구하고 아버지의 도움을 빌리는 수밖에 없었다. 

뭐, 어때? 난 열여덟 살밖에 안 됐다고. 아직 응석부려도 되는 나이잖아, 안 그래?

결국 나는 가문으로부터 4천 레디나를 빌리고, 추가로 밀을 보관할 창고와 운송까지 해결하게 되었다. 물론 공짜로 도움받기에는 민망했기 때문에 돈을 벌면 이 은혜를 갚겠다고 약속했다. 

아마 내년이 되면 날 도와주길 잘했다고 생각하시게 될 것이다.

여기까지는 모두 계획대로였다.

좋아. 앞으로 2년 안에 승부를 본다. 이대로 영지와 내 남은 해피 라이프를 위해 돌격이다!

저택에서 나오자마자 나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한센에게 말했다.

“조만간 후디니 자작령으로 갈 거야.”

“후디니 자작령이라면…….”

“여기서 동쪽으로 열흘거리에 있는 이웃 영지야. 밀 곡창지대로 소문난 동네지. 밀을 잔뜩 구입하기에 딱 적당한 곳이다.”

“그럼 이제 뭘 해야 합니까?” 

“좋은 질문이야. 우선 후디니 자작령까지 왕복하는 동안 우리를 경호할 소규모 용병단을 알아봐. 아참, 돌아오는 길에 서적상에게 정령술에 관한 책을 더 구해달라고 주문 넣어둬.”

“네.” 

“아차차.” 

“또 시키실 일이 있습니까?” 

나는 10레디나를 꺼내 한센에게 건넸다. 

“아무 신전에나 들려서 힐링포션 하나 사와.” 

“알겠습니다.” 

한센은 지시를 받자마자 헐레벌떡 달려갔다. 역시 잡일을 해주는 녀석이 있으니 편하다.

*   *   *

한센의 어머니는 병으로 일찍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 약재상을 운영해왔다.

사실 약재상은 여인의 몸으로는 힘들다. 약초밭을 가꾸는 전문 농부나 약초꾼들이 여자라고 우습게보고 가격을 후려치거나 강짜 부리기 일쑤다.

하지만 한센의 어머니는 엄청난 여장부였다.

집채만 한 덩치. 솥뚜껑 같은 손. 누구 하나 때려잡을 듯한 부리부리한 눈빛. 화나면 식칼이라도 들 것 같은 무서운 성질머리.

산과 숲을 헤집고 다니며 산전수전 다 겪은 거친 약초꾼들도 한센의 어머니의 위용(?) 앞에서는 슬그머니 기가 죽었다.

한센은 그런 어머니에게서 약재상 일을 배웠다. 당연히 장차 자신이 약재상을 물려받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뜬금없이 말했다.

“길가다 벽보 붙은 걸 보니 카록 곡물 상회에서 직원을 모집한다더라.”

“네? 카록 곡물 상회요?”

“그래. 이 영지의 셋째 공자님이 연 상회 말이다. 너 거기에 취직해라.”

“……에이, 전 약재상 일 해야죠.”

“약재상은 나 혼자서 충분해.”

“하지만 전…….”

“시끄러!”

어머니의 포효가 한센의 입을 틀어막았다.

“생각을 해봐라. 영주님의 셋째 아들이 하는 상회가 이 코딱지만 한 약재상과 비교가 되겠느냐? 사내새끼라면 큰물에서 놀아야 하는 법이야.”

“하지만 그는 이제 막 성인이 된 귀족가의 도련님이잖아요. 장사라고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애송이일 게 분명해요. 그런 사람 밑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고요. 카록 곡물 상회인지 뭔지 금방 망할 걸요?”

“멍청한 녀석! 상인에게 속단은 금물이야. 카록 공자가 어떤 사람인지 최소한 네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란 말이야!”

“저 그냥 약재상 주인 하면 안 돼요?”

“이노무 새퀴! 오냐. 이 어미가 친히 네 약해빠진 정신머리를 세탁해주마!”

“히, 히이익!”

다음날 한센은 절뚝거리며 카록 곡물 상회로 찾아갔고, 우여곡절 끝에 채용되었다. 

카록은 한센의 추측과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능력이 없어 가문에서 쫓겨난 거라고 사람들은 수군거리는데, 막상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아 보였다.

뭘 해야 하는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풋내기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정령사가 무능력하다고 가문에서 쫓겨났을 리는 없지 않은가.

취직하자마자 한센은 일복이 터졌다. 채용된 다음날 대뜸 레던 왕성에 다녀오라 하질 않나, 이젠 슬슬 일을 해보자면서 이것저것 잘도 시켜댄다.

한센은 헐레벌떡 뛰어다녔다.

먼저 영지에 있는 아르스교의 신전에서 10레디나짜리 힐링 포션을 사고, 서적상에게 정령술에 관한 책을 구해달라고 주문도 했다. 

용병길드를 찾아가 경호 업무를 전문으로 하는 소규모 용병단들의 리스트를 받았다.

돌아가는 길에 어머니의 약재상 근처를 지나게 되었다. 

‘약재상에 들려서 물이나 한 잔 마셔야겠다.’

열심히 뛰어다닌 탓에 목이 말랐던 한센은 약재상으로 향했다.

그런데 약재상에 가보니 문이 닫혀 있었다.

‘이 시간에 일을 안 하실 리가 없는데?’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걱정이 된 한센은 집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집에서 몸져누워 있는 어머니를 본 한센은 깜짝 놀랐다. 

“어머니! 어디 안 좋으세요?”

“호들갑 떨지 마. 허리 좀 삐끗했을 뿐이야. 니미럴, 그깟 약재상자 몇 개 무겁지도 않더니만…….”

‘그러고 보니 어머니 연세가 벌써 쉰이 다 되셨지.’

한센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어머니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왜 몰랐을까.

늘 기운 넘치는 어머니의 모습만 봐서 모르고 있었다. 어머니도 나이 들어 약해져간다는 것을.

“뭘 재수 없게 꼬나봐? 일하러 썩 안 꺼져?”

“어머니가 아픈데 어딜 가요?”

“이 새퀴, 너 설마 잘렸냐? 이 시간에 집엔 왜 왔어?”

“어휴, 안 잘렸어요! 약재상이 닫혀 있어서 걱정돼서 왔어요.”

“난 멀쩡하니까 네 일이나 해!”

하지만 누워계시는 어머니를 보자 발걸음이 쉽사리 떨어지지가 않았다.

한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가족이라고는 두 사람뿐. 자신이 아니면 어머니를 간호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자신은 상회에 출근해 일해야 하니 걱정이었다.

고민 끝에 한센이 말했다.

“어머니, 저 당분간 일 쉬고 어머니를 돌봐드릴게요.”

“뭣이야?!”

어머니는 끙끙대며 몸을 일으켰다. 불같이 화난 눈으로 쏘아보며 소리쳤다.

“지금 누구 초상났냐? 그래, 어미가 아직 안 뒈져서 네 앞길을 막는구나. 그냥 콱 죽을 테니 내 시체를 밟고 가라!”

“히익! 아, 알았어요! 간다고요!”

*   *   *

돌아온 한센이 내게 힐링포션을 건넸다. 

“여기 사왔습니다.”

“다른 일은?”

한센은 이번에는 서류를 꺼내 내게 주었다.

“용병길드에서 받은 8인 이하의 소규모 용병단 리스트입니다. 그리고 서적상에게 주문도 했습니다.”

“응, 수고했어.”

“저기, 단주님. 그보다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는데…….”

“뭔데?”

한센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당분간 쉬면 안 될까요?”

“뭐야?”

“어머니가 허리를 삐끗하셔서 누워 계시는데 간호를 해드려야 할 것 같아서…….”

“헤에? 그거 큰일이네. 그런데 어머니가 일 쉬고 간호해달라고 하셨어?”

“아, 아니요. 오히려 신경 끄고 자기 일이나 잘 하라며 화를 내셨는데요.”

“그럼 쉬지 말고 계속 일해.”

“예?”

“어머니가 하라는 대로 해야 효자지, 안 그래?”

“하, 하지만…….”

“왜? 일을 못하겠어? 직장 때려 치고 그냥 집에 갈래?”

“그건 아니지만 어떻게 어머니를…….”

한센은 울상이 되었다.

“뭐, 장난은 이쯤 해두고. 옜다, 선물이다.”

나는 실실 웃으며 한센에게 선물을 주었다. 그것은 바로 한센에게 사오라고 시켰던 힐링포션이었다.

힐링포션을 받은 한센은 멍해졌다.

“다, 단주님, 이건…….”

“선물이라고.”

“서, 설마, 제게 주시려고 이걸 사오게…….”

“당연하지.”

회귀 전에도 한센의 어머니가 허리를 다쳐 아픈 적 있었다. 그때 한센이 일을 쉬겠다고 하는 바람에 나한테 무진장 욕을 처먹었다. 일주일간 휴가를 주긴 했지만.

한센의 어머니는 허리는 나았지만 건강이 안 좋아져서 약재상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었더랬다. 그 후로 몸이 안 좋은 어머니는 두고두고 한센의 걱정거리였다.

“어머니가 다치신 건 어떻게 아시고…….”

한센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한센아, 한센아. 내가 순순히 쉬게 해줄 것 같냐? 그거 어머니 드리고 내일도 아침 일찍 출근해라. 네 허리가 먼저 두 동강 나도록 부려먹어 주마, 알간?”

그런데 한센의 표정이 묘했다. 몹시 감격한 얼굴로 날 멍청히 바라보고 있었다. 허허, 저 녀석 설마 감동 먹었나?

“예, 단주님!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실컷 부려먹어 주십시오!”

“말 안 해도 그럴 생각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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