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회: 1권- 2장. 움직이다 -->
통상 우리가 사는 세계를 자연계라고 한다.
자연계는 물질계와 정령계로 구분 짓는다.
쉽게 설명하자면 물질계는 눈에 보이는 세계이고 정령계는 우리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정령들의 세계이다.
정령은 대자연에 깃든 의지의 결정체다. 폭풍이 몰아치고 화산이 폭발하고 대지가 흔들리는 모든 자연의 조화는 정령의 힘이다.
정령은 상중하로 등급이 나뉘고 그 위로도 최상급 정령과 정령왕이 존재한다.
정령사 또한 계약한 정령에 따라 등급이 나뉘는데, 나처럼 이제 막 대지의 하급 정령 노움과 계약한 초보는 하급 정령사라 할 수 있었다.
……라는 것들은 책을 보고 알게 된 지식이었다.
어제 정령 계약에 성공한 나는 잔뜩 흥분해서 서적상에게 달려가 정령술에 관한 책을 구입했다.
‘정령술의 입문’이라는 책을 밤새 다 읽어버렸다.
몹시도 뿌듯했다.
마법사보다도 훨씬 희귀한 정령사가 되다니.
정령친화력을 가진 사람은 만 명 중에 한 명꼴. 게다가 정령친화력을 가졌다고 다들 정령사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돈이 있어야지 돈이!
정령석 하나에 500레디나인데 웬만큼 잘 사는 귀족이 아니고서야 엄두도 못 내는 것이다.
또한 대부분은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살아간다.
나는 노움을 소환해보기로 했다.
“소환, 노움.”
-불렀어?
쑤욱!
“으헉!”
노움이 두더지마냥 땅바닥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놀랐어? 미안.
“아냐, 괜찮아.”
-나 불러줬네. 기뻐.
“그러니?”
기뻐하는 노움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내가 뭘 해주면 돼?
“음…… 사실 시킬 일은 없어. 그냥 불러봤어.”
-그럼 놀아도 돼?
기대 어린 어린아이의 얼굴.
“응.”
신이 난 노움은 이리저리 사무실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처음 물질계로 소환된 정령은 호기심이 왕성하다던데 그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저 조그마한 것은 커다란 삽을 어깨에 멘 채 이리저리 쏘다니며 돌 벽도 만져보고 창문의 유리도 톡톡 두드려본다. 모든 게 다 신기한 모양이다.
나는 그저 귀여운 노움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서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그때 한센이 출근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단주…… 엑?!”
인사하다말고 노움을 발견하고 기겁하는 녀석.
-주인님. 누구야?
노움의 물음에 나는 친절히 대답해주었다.
“바보란다.”
-바보?
노움은 한센을 보며 말했다.
-안녕, 바보.
“……이건 뭡니까, 단주님?”
“뭐로 보여?”
“허, 허깨비?”
“쯧쯧, 바보구나.”
-바보.
노움도 따라한다. 귀여운 것.
한센은 노움을 기가 막혀서 듯이 바라보다가 문득 무언가가 생각난 모양이었다.
“호, 혹시 정령입니까?”
“정답.”
“에엑?! 정령사이셨습니까?!”
그럼 내가 정령사지, 허깨비 부리는 샤먼이겠냐?
날 바라보는 한센의 눈빛이 갑자기 위대한 성인을 바라보듯 경외에 차 있다.
노움은 다 놀았는지 폴짝 내 어깨로 뛰어 올라왔다.
나는 노움과 노닥거리며 그날 오전을 보냈다.
그런데 소환을 한 지 약 4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눈이 침침하고 살짝 현기증이 느껴졌다.
정령친화력을 많이 소진한 까닭이었다.
‘정령술의 입문’에서 봤는데, 정령친화력은 일종의 정신력이라고 했다. 대자연의 의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정신적인 에너지, 그게 정령친화력이다.
정령친화력이 고갈되면 두꺼운 백과사전 한 권을 잠시도 쉬지 않고 통째로 읽은 듯한 피로가 온다고 한다. 혹은 하루 종일 말을 타고 달린 것과 비슷한 멀미가 느껴진다고도 했다.
일단 노움을 소환할 수 있는 시간이 4시간 정도라는 걸 알아냈다.
노움에게 능력을 발휘해 물리력을 행사하게 시켰다면 그 시간은 훨씬 줄어들 터였다.
여기까지 안 것만으로도 일단은 만족하기로 했다.
“노움, 오늘은 재미있었니?”
-응. 인간은 재밌는 걸 많이많이 만들어.
“아쉽지만 오늘은 그만 돌아가야 해.”
-힘을 다 썼구나?
그 힘이란 정령친화력을 말하는 거겠지.
“응.”
노움은 그만 놀고 돌아오라는 엄마의 말을 들은 아이처럼 아쉬워했다.
-알았어. 힘을 많이 쓰면 주인님이 힘드니까.
“에구 착한 것.”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노움은 배시시 웃으며 좋아했다.
-또 놀게 해줄 거지?
“그럼. 정령친화력이 회복되면 다시 불러줄게.”
정령친화력은 정신력의 일종이므로 잠을 자거나 하며 휴식을 취하면 회복된다.
-응. 나중에 봐, 주인님.
노움은 땅속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고 나니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나는 한센에게 말했다.
“한센, 낮잠 타임이다.”
“……예?”
“2시에 깨워줘. 지금은 피곤해서 일을 할 수가 없어.”
일을 하기는 했냐고 묻는 듯한 한센의 건방진 눈빛을 무시하고 나는 테이블에 머리를 기대 낮잠을 청했다.
2시가 되자 한센이 깨워주었다.
아직 정령친화력을 소모한 피로 탓에 머리가 띵~ 했지만 참고 일을 하기로 했다.
“슬슬 일을 해볼까.”
“저, 단주님.”
“왜?”
“우리 상회는 언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하죠?”
상회를 설립한지 보름이 넘었는데 상회다운 일은 한 번도 안 했으니 궁금해 할 만도 했다.
“지금.”
“네?”
“따라와. 일단 자금을 더 확보해야겠다.”
“무언가 계획이 있으시군요?”
“당연하지. 날 뭐로 보는 거야? 내가 마음만 먹으면 2년쯤 뒤에는 금화의 바다에서 헤엄을 칠 수 있다고.”
“…….”
한센은 불신감이 투철한 눈빛으로 날 본다. 뭐냐, 그 건방진 눈길. 날 못 믿는 거얏?
농담이 아니고 나는 정말로 엄청난 돈벌이를 해낼 자신이 있었다.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회귀 전 이맘때의 나는 초보 곡물 상인으로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대책 없이 밀을 왕창 구입해놓고는 막상 판매처를 찾지 못해 우왕좌왕하는 바보였다. 그렇다 보니 창고에는 내가 멋모르고 사놓은 밀이 한가득 쌓여 있었지.
집 사고 하녀 고용하고 남은 돈으로 밀을 잔뜩 산 바람에 자금이 바닥난 나는 파산 위기에 직면했다.
그런데 1년 뒤에 기적이 벌어졌다.
대흉년!
레던 왕국을 비롯한 대륙 중부를 휩쓴 대흉년으로 밀 값이 폭등했다.
창고에서 먼지가 쌓여 있던 밀을 몇 배나 높은 가격에 팔아치워 손해를 만회하고도 남는 이익을 거뒀다.
그야말로 구사일생.
이제 살았다 싶어서 신이 났더랬다. 그러나 이듬해에는 심각한 전염병이 돌아서 웃을 수가 없었다.
대흉년과 전염병의 이중 크리티컬로 대륙 총인구의 약 30%가 골로 가버렸다. 실로 무시무시한 재앙이었다.
곡물 생산량 감소, 인구 급감으로 엄청난 경기침체가 오자 파산하는 상인들이 속출했다.
밀을 팔아 번 돈이 아니었으면 나도 회생불능의 타격을 입었을 터였다.
그렇다.
나는 내년의 대흉년도, 다음해의 전염병도 알고 있다.
대흉년에 대비해 밀을 잔뜩 사두고, 전염병에 대비해 약초를 왕창 확보하면 어떻게 될까? 돈의 파도가 밀려오는 소리가 들리지 않나?
‘두 재앙으로 우리 영지도 절반이나 되는 영지민을 잃었어. 하마터면 우리 가문이 멸문할 뻔했지. 그런 재앙을 모면하기 위해서라도 노력해야 해.’
대흉년과 전염병이 온다고 떠들어봐야 나만 미친놈 취급당할 뿐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재앙으로부터 최소한 우리 영지라도 지키는 것이었다. 비록 나에게는 상속권이 조금도 없는 영지지만, 아버지와 아서 형님께 그동안 입은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을 기회 아닌가.
그렇게 돈을 왕창 벌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느긋하게 평범하고도 행복한 마이 라이프를 즐길 심산이었다.
예쁘고 착한 마누라와 결혼해서 우리 노움처럼 깜찍한 딸들을 낳아 길러야지. 으흐흐흐.
나와 한센이 도착한 곳은 쿤트 남작가의 저택, 즉 나의 친가였다.
“여기서 기다려.”
한센을 놔두고 나는 저택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문을 지키는 문지기들도 날 알아보고 길을 열어줬다.
청소를 하던 시녀를 시켜 아버지에게 내가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리도록 했다.
잠시 후 아버지는 물론이고 아서 형님까지 모습을 드러냈다.
“카록, 왔느냐?”
“예, 아버님.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녀석, 한 달도 안 지났는데 그새 탈이라도 났겠느냐?”
“아버님, 여기서 이러지 말고 함께 티타임이나 갖죠.”
“그러자꾸나.”
아서 형님의 말에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택 2층의 테라스에서 우리는 티타임을 가졌다. 바깥 정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허브티의 감미로운 향을 맡고 있으니 기분이 몹시 좋았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셋이 한 자리에서 차를 마셔본 것도 70여 년만이구나.
“상회를 개업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에는 우왕좌왕할 줄 알았더니 행동이 빠르구나. 역시 상인이 적성에 맞는 것 같아 다행이다.
아버지는 나를 칭찬해주셨다.
“과찬이십니다. 아직 본격적인 사업은 시작도 안 했는데요.”
그러자 이번에는 아서 형님이 입을 열었다.
“독립한다고 나선지 한 달도 안 됐는데 우리가 보고 싶어서 찾아온 건 아닐 테고, 무슨 어려운 일이라도 생긴 거냐?”
날 걱정해주는 아서 형님의 씀씀이가 고마웠다.
“에이 형님, 사내가 체면이 있지 홀로 서겠다고 나간 지 한 달도 안 돼서 도와달라고 찾아왔겠습니까?”
“하핫! 듣고 보니 그렇구나. 이 형이 실언을 했다.”
“도움이 필요한 문제가 아니라니 다행이다. 그런데 벌써 가족이 그리워진 건 아닐 텐데, 무슨 일이냐?”
아버지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돈을 빌려주십시오.”
“돈?”
아버지의 안색이 변했다.
“1,500레디나가 부족하진 않았을 텐데, 혹여 사기꾼이라도 만나 다 털렸느냐?”
“아닙니다. 큰 사업을 해보고 싶습니다.”
“큰 사업? 돈이 얼마나 필요한 것이냐?”
“여유가 되시는 돈은 전부 빌려주십시오. 내년 겨울까지 50% 이자까지 쳐서 갚겠습니다.”
“대체 무슨 사업인지 들어보자꾸나.”
내년에 대흉년이 온다고 말했다간 내 정신 건강을 무척 염려하시겠지.
난 적당히 꾸며 이야기하기로 했다.
“제가 여기저기 소식을 알아본 결과 올해에 대륙적으로 밀 값이 폭락했습니다. 지난 5년간 한 번도 가뭄이나 홍수 같은 악재가 없었던 덕분이죠. 하지만 지난 5년간 계속 가격이 폭락했으니 슬슬 바닥을 치고 다시 오를 때가 됐습니다. 이에 대비해서 밀을 매입해두려고 합니다.”
“흐음…….”
천생 뼛속까지 기사이신 아버지는 이런 분야에 어두우셨다. 대신 아서 형님이 입을 열었다.
“네 말은 일리가 있다. 허나 만약 내년에도 풍작을 하면 밀 값은 더 떨어져 막대한 손해를 입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