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 대가-3화 (3/529)

<-- 3 회: 1권 - 프롤로그. 가문의 삼남 + 1장 되돌아오다 -->

「카록 곡물 상회」

개업을 했으니 이제 직원을 채용할 차례였다. 혼자 다 해먹어도 문제없지만, 그래도 한 명은 두어야 이것저것 자잘한 일을 시켜먹을 수 있다.

나는 종이와 펜을 꺼내 직원 채용 공고를 휘갈겨 썼다.

「카록 곡물 상회에서 글과 숫자를 아는 직원을 모집합니다. ‘맥스의 쉬어가는 집’ 여관의 건너편에 위치. 업무시간과 급여는 면접 시 협의.」

같은 글을 여러 장 써서 사람이 많이 다니는 거리에 붙여두었다.

이걸로 준비 끝이다.

곡물상 경력만 72년!

거기다 미래도 알고 있는 내가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회귀 전이야 많은 실패를 겪었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안 된다.

직원을 모집한지 사흘이 지났지만 아직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귀족이나 마법사 등이 아닌 이상 글과 숫자를 아는 사람은 흔치 않은 것이다.

하지만 나는 느긋하게 기다렸다.

적어도 한 사람은 고용할 수 있다는 걸 나는 회귀 전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게 누군지도 안다. 그때 고용한 첫 직원이 무려 40여 년간 나를 위해 일해 주었으니까.

이제 슬슬 그 녀석이 나타날 때가 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저기, 시, 실례합니다.”

키가 멀대 같이 크고 다소 어리바리하게 생긴 청년이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잔뜩 긴장한 나머지 식은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그의 이름은 한센. 회귀 전에 나의 오른팔이었던 녀석이었다.

“저, 저는 직원을 모집한다는 글을 보고 찾아온…….”

“여, 한센. 오랜만이네.”

아차, 실수.

너무 반가운 나머지 나도 모르게 알은체를 하고 말았다.

“제, 제 이름을 어떻게?”

뜨끔한 나는 대충 얼버무렸다.

“진정한 상인일수록 정보 수집을 게을리 하지 않는 법. 약초상의 소심한 아들 한센이라면 분명히 내 기억 안에 있다.”

“그게 정말이십니까?”

한센은 깜짝 놀랐다. 자신에 대해 알 정도로 정보에 밝다니 놀랄 수밖에.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다니, 어리바리한 건 여전하구나.

“물론. 넌 부친을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함께 살았지. 평민이면서 글과 숫자를 아는 건 어머니께 배워서야. 게다가 어머니 성격이 불같으신 분이라 어려서부터 호되게 혼나며 자란 나머지, 거꾸로 소심한 성격이 되어 버렸어.”

“마, 맞습니다.”

놀라는 한센을 보니 재미있었다. 

“워낙 소심해서 오늘처럼 중요한 날에는 극심한 긴장감을 느끼겠군. 아마 긴장감을 완화시키는 자기만의 습관이 있을 거야. 예를 들면 여자 속옷을 입는다던지…….”

“히이익!”

한센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하하, 물론 마지막 말은 농담이야. 설마 정말로 여자 속옷을 입었을 리는 없잖아. 변태도 아니고, 안 그래?”

“마, 마, 맞습니다.”

한센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계속 놀려주고 싶었지만 이쯤 하기로 했다.

“어쨌든 너는 사흘 만에 나타난 지원자이니 즉시 채용할게. 급여는 우선 월 2레디나. 어때, 동의해?”

월 2레디나라는 말에 한센의 얼굴이 밝아졌다. 신규 직원에게 주는 급여 치고는 많은 편이었다. 한센 녀석의 충직함을 알고 있기 때문에 좋은 조건을 제안한 것이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우리 상회의 첫 직원이 됐군. 잘 부탁해.”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우리는 서로 악수를 했다.

그렇게 한센을 직원으로 고용했다.

숙식 문제, 상회 개업, 직원 고용 등 일주일도 안 돼서 모두 일사천리로 해결해버렸다. 역시 한 번 인생을 살아본 연륜이 있어서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아직 해야 할 일이 딱 하나 남아 있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때마침 한센이 아침 일찍 출근을 했다.

“여, 좋은 아침.”

심부름 보낼 일이 있었는데 때맞춰서 한센이 직원으로 들어와 줬다.

한센은 겉보기에는 어리바리하지만…… 음, 실제로도 어리바리하다. 하지만 내가 한센을 높이 사는 것은 충성심과 성실성이었다. 

회귀 전에 한센은 어리바리하다는 이유로 내게 온갖 구박을 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센은 무려 40여 년간 내 곁을 지켜주었다.

쓸모없는 얼간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월이 지나보니 처음부터 끝까지 줄곧 내 곁을 지키며 뒷바라지를 도맡아준 유일한 녀석이었다.

그게 너무나 고마워서 말년에 한센이 은퇴할 땐 500레디나를 주었다. 녀석이 병으로 죽자 그의 무덤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괘씸한 놈, 이번에는 나보다 더 오래 살게 만들 테다. 그래야 내가 죽을 때까지 부려먹지. 흐흐.

한센은 레스토랑이나 다름없는 사무실을 두리번거리다가 아무 테이블에나 앉았다. 그리고는 다소 뻘쭘한 기색으로 내게 물었다.

“저, 주인님.”

“단주라고 불러.”

“예, 단주님. 저는 이제 무슨 일을 해야 할까요?”

“좋은 질문이야.”

나는 미리 준비해둔 돈 자루를 한센에게 툭 던져주었다. 돈 자루 안을 확인한 한센은 깜짝 놀랐다. 거기에 500레디나가 들어 있으니 놀랄 수밖에.

“이게 무슨 돈입니까?”

“심부름 좀 해야겠다.”

“심부름이요?”

“레던 왕성에 있는 마법길드에 가서 정령석을 하나 사와.”

이 레던 왕국에서 마법길드는 수도인 레던 왕성에 딱 하나 있었다. 

“이런 큰돈을 제게 맡기셔도 됩니까?”

“괜찮아. 난 널 믿는다. 한센.”

“다, 단주님…….”

살짝 감동한 듯한 한센. 나는 친절히 그 감동에 찬물을 끼얹어주었다.

“그 돈 들고튀면 니네 엄마한테 이를 거거든.”

“…….”

한센의 만면이 일그러졌다.

“열흘이 지나도 안 돌아오면 돈 들고 튄 걸로 생각하고 조치를 취할게.”

“여, 열흘?! 최소한 보름은 주셔야…….”

“자, 출발해!”

나는 한센에게 여비로 따로 3레디나를 주었다.

“다, 다녀오겠습니다.”

한센은 기운 없이 출발했다. 음, 레던 왕성에 왕복하면 보름쯤 걸리겠군.

보름동안 달리 할 일이 없어 여관 객실에서 뒹굴고 놀았다. 오리털 베개를 부둥켜안고 뒹굴다가 심심해지면 식당으로 내려가 맥주를 마셨다. 여관 주인 맥스가 말상대를 해주었는데 그의 용병 시절 경험담은 제법 흥미진진했다.

그렇게 보름이 후딱 지났다.

한센은 후줄근한 몰골로 돌아왔다. 왕복하는 동안 노숙을 했을 테니 거지꼴인 게 당연하지.

“여기 사왔습니다.”

나는 한센이 내미는 정령석을 받아들었다.

은은한 푸른빛을 내는 주먹만 한 돌멩이.

이것이 바로 대자연의 기운, 즉 정령의 힘이 서려있는 정령석이었다. 몹시 귀한 광물로 마법길드에서만 구할 수 있다.

“잘했어.”

“단주님께서 주신 여비가 1레디나 남았습니다만…….”

“아아, 가져. 상이야.”

한센의 안색이 환해졌다.

“먼 길 다녀오느라 피곤할 텐데 오늘은 일찍 퇴근하고 쉬도록 해.”

“감사합니다!”

1레디나를 받고 희희낙락해진 한센은 싱글벙글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홀로 사무실에 남겨지자 나는 슬슬 계획했던 일을 하기로 했다. 

“정령과 계약을 하겠다. 이번에는 성공하겠지.”

그렇다!

내가 전 재산 1,500레디나 중 3분의 1이나 들여서 정령석을 산 이유는 정령석이 정령 계약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애당초 정령친화력을 많이 타고나지도 않았을 뿐더러, 연세도 많으시군요.”

나이가 많아서 회귀 전에는 실패했던 정령 계약. 

하지만 지금은 창창한 열여덟이다! 

물론 철없던 옛날처럼 특별해지고 싶다는 집착은 없었다. 나는 이번 생도 평범하게 보낼 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길가에 떨어진 다이아몬드를 보고도 못 본 척 그냥 지나칠 수는 없잖아? 

상행을 다니다보면 몬스터나 산적을 수도 없이 만나게 된다. 정령술을 익히면 그럴 때 큰 도움이 된다. 

“슬슬 시작해볼까.” 

미리 준비한 망치로 정령석을 빻아 가루로 만들고 사발에 담아 물에 탔다. 정령석 가루가 물에 녹아 끈적끈적하고 이상야릇한 액체가 만들어졌다. 

그 액체를 손가락으로 찍어서 바닥에 마법진을 그리기 시작했다. 

하도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다행히 마법진을 그리는 방법은 또렷하게 떠올랐다. 회귀 전에도 정령사가 가르쳐준 마법진을 그리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고생 끝에 완성된 마법진 위에 서서 나는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태초부터 존재해온 자연계의 위대한 정신이여, 나의 영혼의 부름에 응답해다오.” 

제발 성공해라. 

500레디나나 들였다고! 

파아앗! 

내 바람에 화답하듯 마법진에서 밝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이 너무 아름다워서 취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빛은 점차 사그라졌다.

뭐지? 설마, 이번에도 실패란 말이야?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마법진을 바라보았다.

제발, 제발!

……결국 빛은 완전히 사그라졌다.

어느새 저녁이 되어서 어두컴컴해진 사무실에서 나는 마법진 위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

허탈감이 밀려왔다. 

이번에도 실패냐. 그래, 정령술 따위 있으면 좋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그만이야. 그런 거 할 줄 몰라도 사는 데는 문제없으니까.

하지만 내심 기대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에이 참, 결국 500레디나를 그냥 날리고 말았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시도하지도 말 것을! 

나는 실망에 차서 후회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파앗!

마법진이 새겨진 바닥에서 한 줄기의 가느다란 빛이 흘러나왔다. 

“응?”

나는 흠칫 놀라 그 가는 빛줄기를 응시했다.

두 줄기, 세 줄기…… 바닥에서 흘러 올라오는 빛의 가닥이 점점 늘어났다. 

다섯 줄기, 여섯 줄기, 일곱 줄기…… 순식간에 수십 가닥의 빛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대체 이게 뭐지?!

실패한 게 아닌 건가?

나는 잔뜩 긴장한 채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이한 현상을 살펴보았다. 

꾸물꾸물.

수십 가닥의 빛줄기가 내 눈앞에서 털실뭉치처럼 뭉쳐졌다. 

빛줄기 뭉치는 찰흙처럼 꿈틀거리며 모양이 변했다. 팔, 다리, 머리…… 그것은 점점 사람의 형상을 띠기 시작했다.

이윽고 완성된 것은…….

“얼레?”

나는 얼이 빠져버렸다.

완성된 형태는 열 살 남짓한 자그마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크기는 겨우 손바닥만 한 정도.

안전모처럼 생긴 동그란 모자를 눌러 쓰고 어깨에는 자기 키보다 더 큰 삽을 매고 있는 모습이 앙증맞고 귀여웠다. 작은 몸집은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소녀가 정령임을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실패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흥분을 억누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넌 이름이 뭐니?”

내가 묻자 정령 소녀는 머뭇거리다가 대답했다.

-노움.

말하고는 수줍어하는 노움. 그게 어찌나 귀엽던지 확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꾸욱 참아야 했다.

“대지의 정령 노움이구나?”

노움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계약을 해주겠니?”

-좋아.

“정말?”

-정말.

노움은 환하게 웃으며 나에게 손을 뻗었다. 나도 반사적으로 손을 뻗었다. 

앙증맞은 노움의 손과 나의 손이 맞닿았을 때, 묘한 기분이 느껴졌다.

두근두근.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질적인 느낌이 노움과 맞닿은 손을 타고 뇌리를 관통했다. 

마치 감각이 서로 연결된 듯한 동질감이 들었다. 감각뿐만이 아니었다. 아예 나와 노움이 영혼까지 합쳐져 하나의 생명체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노움과 교감하면서 나는 눈앞에 기름진 흙이 넓게 펼쳐진 땅이 눈앞에 보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두 발로 딛고 선 대지가 더없이 소중하고 따스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대지의 정령인 노움에게 깃든 대지의 의지가 나에게 전달된 것이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격에 나는 까닭 없이 왈칵 눈물을 흘렸다. 

왜 눈물이 흐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마도 노움과 교감한 영향인 듯했다.

노움이 손을 떼자 교감도 끝나버려서 감동이 뚝 멎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에 노움을 바라보았다. 

-이제 우리는 하나. 주인님은 이제 나의 주인님이야. 

“고마워.” 

-나 많이많이 불러줘야 해. 

“물론이지.”

-약속. 

“그래, 약속.” 

내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자 노움은 두 손으로 그걸 꼬옥 잡고 흔든다. 그렇게 계약이 끝나자 노움은 마법진이 새겨진 바닥으로 스며들듯이 사라졌다. 

마치 꿈을 꾼 것처럼 나는 멍하니 노움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았다. 

한참 후에야 서서히 희열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돼, 됐다…….” 

기쁨에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 시작했다. 

“됐다! 정령사가 됐어!” 

나는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큰소리로 환호했다. 

만 명 중에 한 명 꼴이라는 재능! 

재능이 있다 해도 정령석을 구할 돈이 없으면 꿈조차 꿀 수 없다는 정령사! 

마법사보다도 훨씬 희귀하여 하급 정령사라 해도 어느 귀족 가문이나 쌍수를 들고 환영한다는 정령사가 된 것이다. 이 아무 재능도 없는 평범한 내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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