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장. 울고 넘는 박달재
주몽은 물론이고 경매에 참여한 각국 대표들 시선이 왕수 외교부장에게 집중됐다.
시작가는 채권 가격 그대로 1조 달러로 시작했지만, 채권에 맞물린 과거가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목을 옥죄는 상황이다.
미국 덕분에 얻어걸린 경쟁국들과 달리 중국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채권을 회수해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시작부터 화끈하게 질러서 덤빌 엄두를 못 내게 만들거나 그게 아니라면 상대국들이 어디까지 생각하고 나왔는지 슬쩍 간을 보면서 경매를 진행할 것인가.
왕수 부장은 고민 섞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1조 1천억.”
가격을 들은 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단숨에 1천억 달러를…….”
“다른 나라들도 이 정도는 각오하고 나왔겠지. 설마 1, 2억 달러 높여서 채권을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하겠어?”
“누가 채권의 주인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대가를 톡톡히 치르겠군. 현금으로 그 많은 돈을 지급하기 쉽지 않을 테니까.”
옵서버들은 중국의 호가에 이런저런 반응을 쏟아냈다.
“1조 1천억 나왔습니다. 다음은 영국입니다.”
여왕의 특사로 파견된 영국 대표 윌리엄 G 스콧이 스치듯 주몽에게 눈인사하더니 느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1조 1천 1억.”
윌리엄은 중국보다 딱 1억 달러를 더 붙여 올렸다.
왕수 부장의 얼굴에 짜증이 일었다.
‘감히…… 중국을 상대로 장난을 치겠다는 거냐?’
분위길 보니 자신이 얼마를 부르든 간에 1억 달러를 더 붙이는 작전을 들고나온 게 분명했다.
‘제 앞가림도 못 하는 주제에.’
로즈차일드라는 일개 가문에 휘둘려 나라가 망할 뻔했던 영국이다.
‘운 좋게 살아났다고 해도 EU 탈퇴 이후 악화일로를 걷는 주제에 겁도 없이 중국에 덤비다니. 이번 일이 마무리되고 나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윌리엄은 왕수 부장의 싸늘한 눈빛에 미소 띤 얼굴로 슬쩍 고개를 까딱였다.
‘정말 우리와 척을 지겠다는 것이오?’
왕수 부장의 눈빛에 윌리엄은 소리 없이 입 모양만 까딱거렸다.
‘1억 달러 레이즈.’
왕수 부장의 얼굴에 혈관이 툭 불거졌다. 대놓고 엿 먹어보라는 그런 태도다.
두 사람의 신경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경매 진행자는 곧바로 다음 차례를 호명했다.
“Go 컴퍼니 차례입니다.”
“1조 1천 2억.”
“오호…….”
영국에 이어 주몽도 1억 달러를 덧붙이자 여기저기서 반응이 흘러나왔다.
1억 달러. 한화 1,000억이 기본 호가로 자리를 잡은 것도 그렇지만, 누가 얼마를 부르던 딱 1억 달러를 더 붙이겠다는 의지가 엿보인 것이다.
‘고주몽 네 이놈…!’
왕수는 윌리엄에 이어 주몽에게도 잡아먹을 듯 살벌한 눈빛을 날렸다.
“다음은 대만입니다.”
짜증 가득한 중국, 여유 넘치는 영국, Go 컴퍼니와 달리 대만 대표는 필사의 각오라도 한 사람처럼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1조 2천억.”
단숨에 천억 달러를 높여버린 대만 측 호가에 경매장이 일순 술렁거렸다.
“1조 2천억 맞습니까?”
경매 진행자가 재차 금액을 확인했다.
“맞습니다. 우리 대만은 이번 기회를 빌려 청나라의 정통 후계자가 누구인지 확실히 밝힐 생각입니다. 그와 더불어 압제와 폭력에 시달리는 홍콩을 대만의 품으로 돌려놓을 생각입니다.”
대만 대표의 발언에 왕수 외교부장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감히…… 꽁무니를 빼고 섬에 틀어박힌 주제에.’
대륙을 장악하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가고 있는 중국과 달리 대만은 고만고만한 중소국가로 전락한 지 오래다.
거기다 하나 된 중국을 내세우고 있는 중국으로선 눈엣가시와 같은 존재가 대만이었다.
“1조 3천억!”
왕수 부장은 대만 따위 따라붙을 엄두도 내지 말라는 듯 1천억 달러를 높여버렸다.
이제 겨우 한 바퀴 돌았을 뿐인데, 3천억 달러가 늘어났다.
경매를 지켜보고 있는 옵서버들 사이에 감탄사와 한숨 소리가 섞여 흘러나왔다.
불구경과 싸움 구경이 최고의 볼거리라더니 명불허전이라는 그런 눈빛들이다.
“1조 3천 1억.”
이번에도 영국은 1억 달러를 높였고, 뒤이어 주몽 역시 거기에 1억 달러를 덧붙였다.
“1조 3천 2억.”
1억 달러로 엿 먹이기 작전이 반복되자, 왕수 부장의 얼굴에 쩍! 균열이 일었다.
이대로 두었다가는 끝도 없이 1억 달러에 발목 잡힐 지경이다.
대만이 대표가 입을 열려는데, 왕수 부장이 딴죽을 걸었다.
“잠깐.”
경매 진행자는 문제라도 있냐는 듯 왕수를 바라봤다.
“지불 능력은 확인하고 진행하는 겁니까?”
왕수는 대만 대표를 노려보며 문제를 제기했다.
“그 말씀은 지불 능력이 없으면서 호가만 높이고 있다는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경매 담당자의 말에 왕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1조 3천억 달러요. 이 돈이면 나라 하나 정도 망하고 흥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지 않소.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입으로만 떠드는 거라면 이 경매는 무효요.”
왕수는 싸늘한 눈빛으로 대만 대표를 노려봤다.
“대만이 그 돈을 감당할 수 있기는 한 거요?”
왕수 부장의 말에 대만 대표가 발끈하려는데, 경매 담당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건 중국 측이 걱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뭐라?”
“중국이 그랬듯. 경매에 참여한 국가들은 담보금으로 1천억 달러를 제출했습니다.”
경매 담당자의 말에 영국과 주몽, 대만 대표가 고개를 끄덕였다.
“감당 못 할 호가는 돈만 잃게 된다는 의미죠.”
낙찰과 동시에 3일 안에 돈을 입금해야 한다. 1초라도 늦는 순간, 담보금만 날려 먹고 낙찰은 무효가 되는 것이다.
바보가 아닌 바에야 1천억 달러의 담보금을 날려 먹는 머저리 같은 짓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중국 측 문제 제기는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경매 담당자는 대만 대표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호가를 말씀해 주시죠.”
“1조 3천 5백억!”
대만 대표는 중국에 무시당한 걸 화풀이라도 하겠다는 듯 단숨에 1조 3천 5백억 달러로 가격을 높여버렸다.
‘빌어먹을…….’
왕수 부장은 어금니가 부서지라 이를 악물었다.
채권을 경매에 부쳐버리겠다는 미국의 음모를 사전에 알았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채권을 회수해 버렸을 것이다.
그저 경제 압박용 카드로만 생각했던 것이 최악의 상황을 몰고 와 버렸다.
‘이러다 두 배까지 가격이 올라가게 되면…….’
왕수 부장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마음 같아선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고 싶었지만, 미국이 깔아놓은 판은 말 몇 마디론 회수가 불가능한 사태까지 틈이 벌어졌다.
‘이놈들 모두 한패임이 분명한데도 반박에 나설 수가 없으니…….’
과거는 과거일 뿐, 이제 와서 홍콩이나 간도 반환을 주장한다는 것은 억지라고 떠드는 순간 영국은 물 만난 고기처럼 날뛸 것이다.
똑같은 논리를 들먹이며 홍콩 반환 자체가 무효라고 떠들어 댈 테니 말이다.
‘빌어먹을 명분!’
홍콩은 중국 경제를 견인하는 입구와 같은 곳이기도 했고, 금융 시장을 선도하는 출구 역할도 함께하는 곳이다.
거기다 민주주의 운운하며 툭하면 시위가 반복되는 곳인데, 만에 하나 홍콩이 손아귀를 빠져나가게 되면 그 여파는 중국 본토까지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성(城)별로 중앙 정부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 지고 있는 이때, 홍콩이 됐든 간도가 됐든 영토 분쟁까지 벌어졌다간 외부가 아니라 내부의 적에 망가지고 말 것이다. 특히, 진핑 주석의 영구집권에 불만을 가진 파벌들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날 게 분명했다.
‘미치겠군. 일이 어쩌다 이렇게…….’
진짜 빼도 박도 못하는 외통수에 걸려들었다.
“중국 차례입니다.”
경매 담당자의 재촉하는 목소리가 고막을 흔들었다.
‘채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회수를 해야 한다. 이건 고민하고 말고 할 여지가 없어. 승부다.’
“중국 차례…….”
“1조 6천억!”
“우와!”
“1조…… 6천억?”
“중국이 돈이 많기는 많구나.”
“젠장. 다른 나라 몇 년 치 예산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 던지네.”
“그냥 채권이 아니잖아. 홍콩 프리미엄이 추가됐다고 봐야지.”
“처음부터 채권을 회수해 갔으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야.”
“평소 하던 대로 버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던 거겠지.”
“국제신용을 밥 먹듯 무시하는 중국이 이번엔 아주 제대로 물렸어.”
옵서버로 참여한 각국 대표들은 다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왕수 부장은 옵서버들이 뭐라고 떠들던 관심도 없다는 듯 비릿한 눈빛으로 영국을 노려봤다. 그리고 폭탄선언을 날렸다.
“이번에도 1억 달러를 높여 부른다면, 중국은 채권 매입을 포기하겠소.”
‘따라서 올 테면 따라와 봐!’ 가 아니라, ‘이번에도 따라오면 니가 그냥 독박 써!’ 작전을 내세운 것이다.
아무리 영국이라도 해도 3일 안에 1조 6천억을 현금으로 마련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그렇게 예상을 한 것이다.
“자신 있으면 받아보시오.”
만에 하나 저 돈을 내고 채권을 매입해 간다고 해도…….
‘승자의 저주에 걸릴 것이다.’
아무리 배가 고프고 탐이 난다고 해도 감당 못 할 물건은 집어삼키는 게 아니다.
배가 찢어져 죽거나 그거 소화하느라 옴짝달싹 못 하는 사이 본래 가지고 있던 물건까지 다 날아가는 수가 있으니 말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순식간에 윌리엄에게 집중됐다.
이번에도 1억 달러를 추가할 것인지. 아니면 중국의 노림수가 먹혀들 것인지 말이다.
영국 대표의 표정이 굳어졌다.
윌리엄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더니 기권을 선언했다.
“영국은 여기까지인 것 같습니다. 기권합니다.”
“오…… 왕수 부장의 작전이 먹혀든 건가?”
“이렇게 되면 Go 컴퍼니 고주몽 회장에게 바통이 넘어가는 건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군.”
영국의 기권 선언에 시선이 주몽 쪽으로 집중됐다.
“이번엔 순서를 바꿨으면 하는데 말입니다.”
주몽의 입에선 호가가 아니라 순서를 바꿔 달라는 요구가 흘러나왔다.
“1조 6천억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포기할 것인지만 말하면 될 것 아니오.”
왕수 부장이 단박에 반발을 하고 나섰다.
“뭐 그렇긴 합니다만,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말입니다. 한두 푼도 아니고 기분 내키는 대로 이야기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이번에 마련한 돈은 내 개인 자금만 들어가 있는 게 아니라서 말입니다.”
주몽의 말에 경매 담당자가 질문을 던졌다.
“시간을 따로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대만에서 먼저 이야기한다면 순서를 바꾸는 것 정도는 가능합니다.”
대만 대표는 1조 6천억이란 금액이 튀어나온 순간부터 어깨를 축 늘어트린 상황이다.
국채까지 팔아가며 돈을 준비했지만,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넘어서 버렸다.
“대만은…… 기권입니다.”
대만 대표마저 기권 선언을 하자, 장내가 술렁거렸다.
이 분위기가 계속 이어진다면 채권은 중국 손에 넘어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Go 컴퍼니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경매 담당자가 주몽을 바라봤다.
“Go 컴퍼니는…… 1조 7천억을 제시합니다.”
“왓!”
“1조 7천억? 고주몽 회장이 가진 재산을 훌쩍 넘어서는데. 이거 어떻게 하려는 거지?”
“모르지. 대한민국이 지원 사격에 나선 것일 수도 있고. 리벤지 파운데이션에서 따로 투자자를 끌어들였을 수도 있지.”
“하긴, 혼자만의 돈이 아니라고 했던 것 같네.”
사람들의 의문이 솟구치는 가운데, 주몽이 한 마디 덧붙였다.
“나는 여기까지가 한계입니다. 만약 중국이 1억 달러를 덧붙인다면…….”
주몽의 말에 사람들 시선이 집중됐다.
“패배를 인정합니다.”
주몽의 발언에 왕수 부장의 얼굴이 대번에 썩어들어갔다.
자신이 내세운 전략을 주몽이 그대로 베껴서 사용한 것이다.
경매 진행자는 곧바로 왕수 부장에게 바통을 넘겼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기서 중국이 기권한다면, 채권은 Go 컴퍼니 고주몽 회장에게 넘어갈 것입니다.”
왕수 부장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목소리를 높였다.
“1조 7천 1억!”
“오!”
“결국엔 중국이.”
“현금 동원력이 어마어마하군. 이거 3일 안으로 처리 못 하면 낙찰 무효가 된다고 들었는데.”
“이렇게 되면 최후 승자는 미국이 되는군.”
“1조 달러 채권을 1조 7천억 원에 팔아먹었으니…….”
왕수 부장은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채권을 회수하긴 했지만…….
‘왕빠단! 중국의 복수가 얼마나 무서운지 깨닫게 해주마!’
왕수 부장은 으드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며 경매장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3일 뒤. 중국이 1조 7천 1억 달러를 지불하고 채권을 회수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