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4장. 채권 쟁탈전
진핑 주석이 집무실을 박살 내고 고성을 내지르고 있을 때쯤, 북한으로 들어갔던 안문수가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안문수는 외장 하드 하나를 조심스럽게 테이블에 올려놨다.
“이게 뭡니까?”
“연판장입니다.”
“연판장?”
“네. 회장님에 대한 충성맹세입니다.”
“충성이요?”
연판장에 충성맹세까지. 생각지 못한 내용이 연이어 튀어나왔다.
‘북한 쪽 종특인가? 충성이니 맹세니 하는 걸 정말 좋아하네.’
민족 간에 전쟁을 일으키고 북쪽에 자신만의 나라를 세웠던 김진성이 집단세뇌 계통으로 능력이 출중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지만…….
‘하긴 선군정치 운운하는 것도 통치수단의 하나였다고 하니. 충성 운운하는 게 그쪽에선 보편적인 말일 수도 있겠네.’
주몽이 눈짓하자, 박산호가 외장 하드를 연결했다.
“영상 파일입니다.”
“영상 파일?”
“세상이 바뀌었지 않습니까. 종이에 이름 적고 수결하는 건 구식방식이라서.”
“훗. 그것도 그렇군요.”
안문수의 설명에 주몽이 웃음을 보였다.
“궁금하네. 박 부장님. 그거 한 번 틀어보세요. 21세기 연판장이라는데 한번 확인이나 해봅시다.”
“네. 대표님.”
“제가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주몽이 그렇게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안문수는 교육 방송 수능 일타 강사처럼 화면에 나오는 인물들이 누군지,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어느 정도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지에 대해 세세히 설명했다.
북한의 정치체계는 물론이고 현재 흘러가는 분위기까지. 얼마나 열심히 설명하는지, 입에 거품이 보일 정도다.
얼떨결에 ‘북한’ 과목 과외받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한 달도 안 된 것 같은데. 그간 준비를 많이 하긴 했었나 봅니다. 친중파와 김씨 일파까지 섭외한 것을 보면.”
“하하. 부지런히 돌아다녔습니다.”
안문수는 칭찬이라도 바라는 강아지처럼 주몽을 바라봤다.
주몽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질문을 던졌다.
“양 과장 팀과 협력을 하고 있다 들었는데, 문제는 없겠습니까?”
“양 선생 능력이 출중하더군요. 크게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디데이는 잡았습니까?”
“회장님께서 좋은 날을 알려주시지요.”
“내가요?”
주몽은 그걸 왜 자신이 결정하냐는 듯 안문수를 바라봤다.
“현장 상황에 따라 그쪽에서 결정해야 할 부분인 것 같은데.”
“그거이. 공화국 내부는 문제가 없는데, 중국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 중국.”
“네. 중국이 문젭니다.”
한국과 미국이야 주몽이 꽉 잡고 있으니 문제가 될 게 없지만, 북한에서 혁명이 일어나면 중국은 얼씨구나 지화자를 외칠 거라고 했다.
“중국이 밀고 내려올 수도 있다는 말입니까?”
“최악의 상황도 생각해 두어야지 않겠습니까.”
“그럴 엄두도 나지 않게 만들어줘야겠군요.”
“그렇게만 된다면야…….”
안문수는 입맛을 다시며 기대 섞인 눈빛으로 주몽을 바라봤다.
“조만간 연락을 주죠.”
“네. 회장님.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안문수가 물러가자, 주몽은 곧바로 필립에게 연락을 넣었다.
“필립. 더 이상 미룰 필요가 없겠습니다. 이제 시작할까요?”
― 회장님이 직접 오시는 겁니까?
“네. 그럴 생각입니다.”
― 기대하겠습니다.
“하하. 저야말로 기대하겠습니다.”
* * *
북경에 머물던 필립은 홍콩으로 이동을 했다.
채권 폭탄에 정신이 없던 중국은 필립이 민감한 지역으로 이동을 하자, 촉각을 곤두세웠다.
“필립 카네기가 홍콩으로?”
“네. 주석님.”
“일을 더 키우겠다는 심산인가.”
“우리 쪽을 더 압박할 생각인 듯합니다.”
“홍콩 분위기는.”
“그게…… 좋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또 우산이라도 들고나온 건가?”
“그건 아닙니다.”
“그럼?”
“영국에 대한 지지 선언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흐…… 미치겠군. 한족의 자긍심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겠다는 건가.”
정확히는 공산당이 싫어요, 였지만 진핑 주석은 한족의 자긍심을 가져다 붙이며 그들을 민족의 배신자, 국가 반역자로 몰았다.
“영국에 조차되기 전부터 100년 넘게 외세에 젖어 든 땅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중화의 정신을 내팽개치다니. 영국을 지지한다는 자들을 밀착 감시하고 기회가 될 때마다 해결해.”
“사복 공안들을 배치해 두었습니다. 적절한 기회를 통해 입을 다물게 만들겠습니다.”
수영 선수도 수영하다 익사를 할 것이고, 자동차 전문 드라이버도 운전하다 죽어 나갈 것이다.
“미국이 진짜 채권을 팔려는 걸까?”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도 미국의 진의를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만일의 상황에 대비해서…….”
“채권을 사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이군.”
진핑 주석은 씁쓸한 표정이 됐다.
입맛에 맞지 않는 음식을 비싼 돈 주고 사 먹는 그런 표정이다.
그때 왕수 부장의 스마트폰에 문자 하나가 날아들었다.
― 소더비. 청국 채권 공개 경매 추진!
문자를 확인한 왕수는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경악한 표정이 됐다.
“또 무슨 일인데?”
“주…… 주석님. 미국이…… 미국이.”
진핑 주석은 답답하다는 듯 왕수를 바라봤다.
“소더비를 통해서 채권을 경매처리 하겠다고 합니다.”
“뭐어어어어어어!”
* * *
“ABB 카렌이 전해드립니다. 필립 카네기 국무장관이 청나라 채권을 소더비에서 경매 방식으로 처리하겠다는 발표가 있은 뒤, 이곳 홍콩은 혼란의 도가니가 되고 있습니다. 미국의 행동을 지지하는 홍콩 시민과 반대하는 시민들로 나뉘어 연일 시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 혹시 폭력 사태가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ABB 뉴스 스튜디오에서 앵커가 재차 질문을 던졌다.
“과격 양상을 보이곤 있지만, 아직 직접적 폭력 사태는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과열 속도가 워낙 빨라서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이 어려운 상태입니다.”
― 채권 경매에 참여한 나라는 어떻게 됩니까?
“현재 확인된 나라는 영국과 대만, 한국의 Go 컴퍼니입니다.”
― 채권 관련국인 중국은 참여하지 않는 겁니까?
“중국은 이번 사태에 대해 비난 성명을 내고…… 아, 방금 들어온 속보에 의하면 중국도 경매에 참여하는 것 같습니다. 왕수 외교부장이 방금 북경을 떠나 이쪽으로 출발을 했다는 소식입니다.”
― 그야말로 세기의 경매가 될 것 같은데요. 소더비에선 어떤 방식으로 경매를 진행한다고 합니까?
“소더비는 이번 경매가 국가 간 민감한 사안을 담고 있어서 공개 방식으로 진행을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 민감한 사안인데 비공개가 아니라 공개로 진행을 한단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비공개로 진행할 경우, 결과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다는 판단을 내린 것 같습니다.”
― 그렇군요. 소더비 측도 부담이 적지 않을 테니. 세계가 보는 앞에서 행사를 진행하고 모두가 납득할 결과를 내놓은 다음 발을 빼겠다는 그런 생각인 것 같군요. 카렌.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있는데 말입니다.
“네.”
― 대만과 영국은 이해가 되는데, 한국은 나라가 아니라 기업이 참여했습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요?
“네. 필립 카네기 국무장관은 채권을 처리하는 게 목적일 뿐, 구매 주체에 대해선 가이드 라인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충분한 돈만 가지고 있다면 나라가 아니라 개인이라도 경매에 참여할 수 있는 상태입니다.”
― 수고했습니다. 카렌. 새로운 소식이 들어오면 다시 부탁드립니다.
“네. ABB 카렌이었습니다.”
홍콩 특파원과 연결을 마친 ABB 스튜디오는 이번 사태에 대해 계속 말을 이어갔다.
“중국으로선 속이 타겠군요. 채권을 인정하고 바로 처리했다면, 1조 달러면 충분했을 텐데 말입니다. 경매낙찰가가 어느 정도까지 올라갈지 모두 궁금하실 겁니다. 이 부분에 대해 스튜디오에 경매 전문가를 초청해서 말씀 들어보겠습니다…….”
삑―
방송을 보고 있던 주몽이 리모컨을 누르자 화면이 어두워졌다.
“요란하네요.”
주몽의 말에 제이코가 웃음을 보였다.
“세상에서 불구경만큼 재미있는 볼거리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크크. 바다 건너 불구경인가요.”
필립이 채권을 들고 찾아갔을 때 처리를 해 버렸다면, 일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잠시 이슈 거리가 되긴 했겠지만, 결국 청나라를 계승했다는 중국의 입장을 더 단단히 만들어줬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중국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간 해 왔던 것처럼 중국이 중국해 버렸고, 채권 사태는 세계적 특급 이슈로 성장을 했다.
중국과 미국의 채권 문제를 넘어 홍콩 반환이라는 새로운 이슈로 관심을 끌기 시작했고, 그 관심이 가속화되다 보니, 이젠 홍콩의 소유권이 채권을 가진 쪽에 있다는 의견까지 튀어나오는 상황이다.
세계 각국 전문가들과 국제법 연구자들까지 방송에 나와서 채권과 홍콩을 하나로 묶어 이야기하니 아무리 얼굴에 철판 두른 중국이라도 해도 무시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중국이 지갑을 어디까지 열까요?”
제이코가 무척 궁금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빼앗기지 않을 때까지 열어야 할 겁니다.”
“빼앗기지 않을 때까지라면.”
“나도 그렇지만, 영국도 청나라 채권엔 관심이 없다는 걸 알고 있잖아요.”
주몽의 말에 제이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주몽의 Go 컴퍼니와 리벤지 파운데이션 장기 회원들의 목표는 중국 그 자체다.
채권 쪼가리 따위 누구 손에 들어가든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뜻이다.
그저 바라는 게 있다면, 1조 달러짜리 채권이 얼마나 비싸게 중국에 팔리냐 하는 것이다.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외화를 최대한 털어내는 게 이번 작전의 목표기도 했지만, 홍콩 소유에 대한 명분 때문에 그렇게라도 헛돈을 쓰게 만들어야 외환 위기설을 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충 예상하시는 가격이 있을 것 아닙니까?”
“최소한 내가 써낸 가격보다는 더 높게 내지 않을까요?”
“하하. 하하하. 그렇네요. 보스보다 낮은 가격을 쓰는 순간, 강도도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할 테니.”
“강도가 아니라 간도입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강도.”
“간도!”
주몽은 재차 발음을 교정시켰다.
웃음 띤 얼굴로 간도를 강도로 발음하던 제이코는 이게 그렇게 중요한 일이냐는 듯 주몽을 바라봤다.
“제이코를 제이콩 이렇게 부르면 좋습니까?”
“크흠. 무슨 느낌인지 이해했습니다. 다시 한번 해 보죠. 가앙도? 강도?”
“네. 제이콩.”
“…….”
* * *
홍콩 소더비 경매장은 취재진으로 북새통을 이뤘다.
공개 경매라고 알려졌지만, 그렇다고 개나 소나 다 들어가 경매를 지켜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더비는 UN에서 그랬던 것처럼 방송권을 비싸게 팔아먹었고, 내부 상황을 촬영 및 송출할 수 있는 방송국은 비싼 비용을 치른 극소수에 불과했다.
“경매 참가를 선언한 국가들이 지금 속속 도착하고 있습니다. 영국과 대만, 중국과 한국의 Go 컴퍼니 대표 고주몽 회장이 모습이 보입니다.”
기자들은 악다구니를 써가며 현장 소식을 알렸다.
경매장 인근은 홍콩 경찰과 사설 경호원들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고 있었기에 참여자들은 어렵지 않게 경매장 안으로 이동을 했다.
소더비에서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경매 참가자들은 약속이나 한 듯 로비에서 마주쳤다.
채권을 소더비에 맡겨버린 필립 카네기 국무장관과 미국 측 인사들이 활짝 웃는 얼굴로 경매 참가자들을 맞이했다.
왕수 부장은 차갑게 굳은 표정으로 필립을 노려놨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습니까?”
“끝까지 채권 처리를 거부한 쪽은 중국이었습니다.”
“거부를 한 게 아닙니다. 시간을 달라고 한 것이었지.”
“그랬던가요?”
“그 많은 돈을 일시에 처리해 달라고…….”
필립은 왕수 부장의 말을 끊고 들어갔다.
“왕수 부장님의 말대로라면 경매 참가도 불가능한 일일 텐데 말입니다.”
돈이 없다면서 경매 참가는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는 반문이다.
“…….”
왕수 부장은 이를 악물고 필립을 노려보다가 성큼성큼 경매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필립은 왕수 부장과 중국 쪽 일행을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흘리더니, 영국과 대만 쪽 참가자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몽과 악수를 하며 눈빛을 주고받은 뒤, 경매장 안으로 이동했다.
경매는 시간을 끌지 않고 곧바로 시작됐다.
“채권 확인을 하겠습니다.”
경매사의 말에 붉은 천에 덮여있던 유리 상자가 공개됐다.
경매 참가자들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는 정도였지만, 경매 현장을 촬영하고 있는 방송국들은 실물 채권을 방송에 내보내기 위해 카메라를 들이댔다.
경매사는 채권 경매 방식에 대해 간단히 설명했다.
“이번 경매는 경쟁입찰 방식입니다. 각각 순서에 따라 금액을 제시하고 경쟁국이 포기할 때까지 계속됩니다.”
경매사의 입에서 경쟁입찰이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왕수 부장의 얼굴은 더욱 흉하게 일그러졌다.
이번 경매가 중국을 곤란하게 하려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곧바로 알아차린 것이다. 하지만 그걸 뻔히 알면서도 피할 수가 없으니 일이 정말 고약하게 됐다.
“경쟁입찰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실 수도 있습니다만, 이는 경매품이 가지는 특성 때문에 고려한 방식임을 알려드립니다. 모두 아시는 것처럼. 이 채권은 과거 역사 문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비공개 입찰 방식으로 진행을 했다가 불복하는 상황이 일어나는 것보다, 경쟁자들을 확실히 물리치고 채권을 가져가는 것이 더 확실하고 공정하다고 판단을 내렸습니다.”
경매사가 입찰 방식을 설명하자, 옵서버로 자리 잡은 각국 참관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매가 제대로 진행이 되는지 공증인 입장으로 참석을 한 것이다.
“경매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겠다면 지금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경매사의 질문에 카메라가 참가자들 쪽으로 이동했다. 영국과 대만, 중국과 Go컴퍼니는 경매 방식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입찰 순서는 알파벳 순서를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중국(c), 영국(e), Go컴퍼니(g), 대만(t)입니다.”
경매사는 채권의 시작가를 알렸다.
“청나라에서 발행한 채권의 최초가는 1조 달러입니다. 중국 측에서 가격을 제시하시면 됩니다.”
경매장의 시선이 곧바로 왕수 부장에게 집중이 됐다.
‘젠장. 가격을 싸게 말해도 문제고, 비싸게 말해도 문제군.’
경매 참가 1번 타자가 된 왕수 부장은 시작부터 얼굴이 썩어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