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장. 동무들. 내 말 좀 들어보라우.
“동무들. 공화국의 미래를 위해서 이야기 좀 하자우.”
남조선 혁명 전사 총책 안문수의 연락을 받고 찾아온 김기성 소좌와 하진건 대좌는 시큰둥한 표정이 됐다.
“안문수 동무. 사람을 불러놓고 기껏 한다는 소리가 그기요?”
김씨파 호위사령부 소속 김기성 소좌가 짜증을 내뱉었다.
“이보라오. 안문수 동무. 동무가 공화국 미래를 논할 서열은 아니지.”
친중파 당정치국위원 보좌로 활동하고 있는 하진건 대좌도 내키지 않는 표정이 됐다.
한국에서 386세대, 혹은 486세대라 부르는 것처럼 김기성과 하진건은 서열은 높지 않지만, 젊은 층을 이끄는 신진기수다.
고위서열 당원과 장성급을 제외하면 가장 영향력 높은 인물들이라 할 수 있었다.
파당을 직접 끌고 가는 위치는 아니지만, 그래도 썩은 내 나는 윗대가리들과 달리 진심으로 공화국을 걱정하는 자들이었다.
혁명파 동지들 사이에서도 대화가 통하는 자들로 인정받고 있었기에 어떻게든 이번 거사에 참여시켜야 하는 핵심 인물로 선정됐다.
나이는 50대 중반이 넘어선 안문수가 가장 윗줄이지만, 순수하게 영향력만 놓고 본다면 두 사람이 더 윗줄이라고 할 것이다.
“동무들. 남조선에 고주몽 회장이라고 들어봤지?”
정보통제를 받는 인민들도 국경에서 넘어온 온갖 정보를 접하며 산다.
직접 정보를 다루는 위치에 있는 김기성과 하진건은 당연히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아새끼래. 남조선에서 제일 부자라고 들었습니다만.”
“자본주의 망아지 새끼 이야기를 여기서 왜 꺼내는지 모르겠군.”
안문수는 품에서 통장 하나를 꺼내 들었다.
“한번들 보라우.”
“이게 뭐이래?”
“은행거래장.”
“은행거래장?”
하진건이 의아한 표정을 지은 반면, 김씨파에 몸담은 김기성은 한때 외화관리국에서 업무를 보았기에 은행거래장이 어디서 발행된 것인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이거이. 스위스 꺼 아님네까.”
“길티. 스위스에서 발행한 거래장이지비.”
“동무. 남조선에서 하라는 혁명은 하지 않고 허튼짓만 하고 다녔소?”
하진건이 미간을 찌푸렸다.
“병신같은 소리 하지 말고 날래 펼쳐 보라우.”
안문수가 거래장부터 확인하라고 재촉했다.
“보는 게 뭐 대수라고.”
김기성이 손을 내밀어 거래장을 펼쳐 들었다.
“!”
거래장 안에 찍혀 있는 숫자를 확인한 김기성이 입을 쩍 벌렸다.
“이…… 이게 뭐이요?”
“돈 모르네?”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보오? 이 큰돈이 어디서…… 설마.”
“기래. 그 설마가 맞지비. 남조선 고주몽 회장이 내놓은 자금이지비.”
“무시기 소리를 하는 기야? 이 보라우 김기성이. 도대체 얼마가 찍혀 있기에 그런 표정을 짓는 긴데?”
“시…십.”
“뭐이?”
“십억.”
“헉! 십억? 남조선 돈?”
남조선 돈 10억이면 미화 백만 달러 가치다. 하진건 역시 깜짝 놀란 표정이 됐다.
“동무. 남조선 10억이 아니라. 미국놈들 10억이요.”
김기성은 화폐 발행국이 한국이 아니라 미국이라고 정정해줬다.
“그거이 뭔 소리야? 미제 놈들 돈 10억이면…… 꿀꺽.”
하진건은 긴장된 눈빛으로 마른침을 집어삼켰다.
“우리 공화국 일 년 예산의 8분지 1이 지금, 이 거래장에 들어있다는 말이요?”
하진건과 김기성은 거래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자가 이걸 왜 동무에게…….”
“그자? 남조선 제일 부자라는 그놈?”
김기성의 말에 하진건이 재차 질문을 던졌다.
“동무들. 공화국 미래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생각이 좀 드오?”
“도…… 동무. 지금 공화국을 자본주의 망아지 새끼에게 팔아치우자는 건 아니지?”
“쯧. 팔긴 누가 판다는 기야. 막말로 판다고 하면 살 사람은 있고? 아. 떼놈들이 군침을 흘리긴 하겠구만기래. 싸게 후려쳐서 가져가려고.”
“그럼 뭐이가!”
하진건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동무. 목청 낮추라우. 고사포에 몸뚱이 날아가고 싶어서 기래?”
안문수가 쉿! 하면서 손가락을 입술에 얹었다.
하진건도 자신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 싶었는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보라우. 중간에 끼어들지 말고.”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
“다 듣고 나서 묻든지 따지든지 하오.”
“일단 들어는 보지.”
솔직히 돈도 돈이지만, 이렇게 큰돈을 왜 내주었는지가 더 궁금했기에 하진건도 한발 물러났다.
“하진건 대좌 파벌은 친중을 노선으로 하고 있소.”
대놓고 친중파 운운하는 안문수의 말에 하진건이 발끈한 표정이 됐다.
“그따위로 부르지 말라우. 우리가 아니면 중국에서 콩 가마니라도 가져올 수 있을 것 같소?”
“알지. 잘 알지. 매국노 운운하는 새끼들은 현실감각이 마비된 놈들이라는 거 아주 잘 알고 있지.”
안문수가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살짝 일그러졌던 하진건은 끙 소리를 내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김 동무는 공화국의 품위유지를 위해 노력하고 있고.”
“공화국 인민이라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요.”
“그것도 알지. 기래서 내래 미래를 좀 이야기하자는 거지비.”
재차 공화국 미래를 꺼내 들자, 처음 시큰둥했던 표정과 달리 한 번 들어는 보자는 쪽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거창하게 공화국 미래 기랬는데. 내래 짧고 굵게 한 마디만 하갔어.”
김기성과 하진건이 고개를 끄덕이자, 안문수는 다시 말을 이었다.
“공화국이 잘 먹고 잘살고,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고사포에 맞아 죽지 않을 수 있다면, 동무들은 어찌하겠소.”
“그런 공화국을 원치 않는 사람도 있음메?”
“그럼 내 다시 묻지. 지도자 동지나 중국에서 그런 공화국을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하오?”
“이것 보시오. 안 동무. 남조선에서 굴러다니다 보니 감이 떨어진 거요? 어디서 함부로 지도자 동지를 입에 담는 것이오!”
김기성이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안문수를 노려봤다.
“주름살 느오. 인상 긁지 말고 속내나 이야기해 보시오. 동무들은 동무들이 몸담고 있는 파당이 공화국을 더 발전시킬 수 있다고 보시오?”
“당연히!”
김기성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지만, 하진건은 잠시 머뭇거렸다.
중국 공산당의 도움을 받아 식량 자원을 들여오고 있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굶어 죽지 않기 위해서다.
거기다 중국 공산당이 도움을 주는 것 역시 공화국을 진심으로 걱정해서 그렇겠는가. 공화국을 조선성(朝鮮城)으로 만들고자 하는 저들의 야욕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고 저들의 손을 뿌리칠 수도 없지. 핵무장 원년을 기점으로 공화국이 고립된 지 벌써 수년이 넘었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인민들은 누가 먹여 살리오?”
발끈한 김기성과 달리 하진건은 그나마 현실적 답을 내놓았다.
“김 동무는 여전히 생각에 변화가 없소?”
안문수는 김기성에게 재차 질문을 던졌다.
“무슨 말을 듣고 싶은기요!”
“몰라서 묻소? 지금 이대로 가다간 굶어 죽거나, 아님 미제 놈들 폭격기에 터져 죽겠지. 다 알면서 외면하면 기게 해결책이 되오?”
이번엔 안문수가 살짝 언성이 높아졌다.
나도 알고 너도 알고 모르는 놈들 하나 없는데, 왜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하냐는 듯.
“기럼 어쩌자는 거요? 그나마 공화국이 유지되고 있는 것은 위원장 동무가 버티고 있기 때문임을 잘 알지 않소.”
김기성의 목소리가 처음과 달리 살짝 수그러들었다.
“기래서 내가 왔소.”
안문수는 은행거래장을 툭툭 건드렸다.
“혁명자금이지비.”
“…….”
안문수의 입에서 혁명이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두 사람은 돌처럼 굳어버렸다.
“동무. 미쳤소?”
김기성은 언제 목청을 높였냐는 듯 개미 기어가는 소리를 냈다.
“이 돈이면 해볼 만하지 않겠소?”
“지금 돈이 문제가 아니지 않소. 공화국에서 혁명이라니. 고사포가 아니라 사지가 뜯겨 죽을 일이요.”
“기래서. 지금 이렇게 숨만 꼴딱이고 있으면 살아날 구멍은 있고?”
안문수가 싸늘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노려봤다.
“동무들. 그나마 두 사람은 정신이 똑바로 박혀 있다고 들어서 내래 이런 기회를 마련한 것이오. 김씨파당에 속해 있던 친중파에 속해 있던. 두 사람 모두 공화국을 어떻게든 지켜내려고 그러는 거 아니요.”
“…….”
“하지만, 한계도 뻔하오. 지도자 동지는 언제 죽을지 모르고, 중국은 틈만 나면 밀고 내려오려고 발악을 하는데 두 눈 멀쩡히 뜨고 그걸 지켜만 볼 생각이었소?”
“방법이 없지 않소!”
“방법이 왜 없소? 여기 이렇게 자금까지 준비해 왔지 않소. 남조선 돈으로 1조. 이거이 다가 아니라 겨우 착수금이라면 믿겠소?”
“차…… 착수금?”
“10억 달러가 겨우 착수금?”
이 돈이면 함경도 인민들을 일 년간 먹이고 재울 수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돈이다. 그런데 이 큰돈이 겨우 착수금이라고?
“자본주의 망나니니 뭐니 그딴 소리 지껄이지 마시오. 나나 동무들이 먹고 싸는 것도 다 그 돈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
“동무들. 일본이 어찌 됐는지 알고는 있소? 고주몽 회장 동무에게 밟히고 찍혀서 너덜너덜해졌소.”
“그게…… 진짜였소?”
“당연히 진짜지. 고주몽 회장 덕분에 남조선이 어찌 됐는지 살펴보길 바라오. 동무들이 뭘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테니까.”
“좋소. 그건 내 확인해 보면 알겠지. 지금 중요한 건 고주몽이라는 자가 왜 이 큰돈을 내줬냐는 것이오. 그걸 알아야 뭘 하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니요.”
여태껏 고민 중인 김기성과 달리 중국을 넘나들며 식량 수입에 힘쓰고 있는 하진건은 좀 더 현실적으로 접근했다.
“혁명을 이야기하기 전에 고주몽 회장의 재산부터 알려주겠소.”
“재산 운운하는 것이 그자가 돈이 많기는…… 뭐. 기래. 많기는 하네.”
하진건은 은행거래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제 놈들 돈으로 1조 달러. 남조선 돈으로 천조!”
“개인이 기렇게 돈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기게 말이 되오?”
“그럼 착수금 1조는 말이 되고?”
안문수의 반문에 하진건은 입이 딱 달라붙었다.
“우리 공화국 작년 예산이 8조라지?”
“기렇소.”
“남조선에선 기래도 30조 운운하던데. 반 토막도 아니고 아주 완벽히 내려앉았기만 기래.”
“…….”
안문수의 투덜거림에 두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어깨에 힘이 빠졌다.
그래도 한 땐 30조를 넘나들 정도로 성장을 했는데, 국제 제제가 몇 년째 계속되니 그마저 졸아버렸다.
“듣기로 강성파들이 남침 운운하고 있다던데. 그것이 사실이요?”
“뭐라도 해보자는 뜻에서 나온 말이라고 들었소.”
“아새끼들. 미쳐도 단단히 미쳤어. 뭐라도 해보자면 공화국이 살아날 방도를 연구해야지. 전쟁 나면 북이고 남이고 다 죽는 걸 몰라.”
“진짜 전쟁을 하자는 게 아니라…….”
“남조선 겁줘서 뜯어 먹겠다는 거 아니요.”
“…….”
“그런 뻔한 공작이 지금도 통할 것 같소? 다 헛짓거리에 불과하오. 만에 하나 남조선에서 구호품이 들어온다고 해도 인민들에겐 돌아가지 않을 것이고.”
안문수는 놈들이 앞에 있으면 당장 쏴 죽여버리고 싶다는 듯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딴 소리는 그만하고. 혁명 이야기나 해 보시오.”
“다 쓸어버리고 공화국을 새 출발시켜야지.”
“새 출발? 기게 가능하겠소?”
“혁명이 성공하면 고주몽 회장이 공화국에 직접 투자를 할 것이오. 자잘하게 1조 2조 투자하는 게 아니라, 최하 십조 단위요.”
“그렇게만 된다면야…….”
“혁명에 성공했다고 해도 그게 가능하겠소? 공화국에 대한 제제는 여전할 텐데.”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김기성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당연히 안되지비.”
“기럼 혁명 하나 마나. 똑같은 것 아니요.”
“아니지. 기존 공화국을 싹 쓸어버리고 새로운 나라를 만들면 되지 않갔소.”
“새로운…….”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