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장. 의도? 그런 거 없는데. 그냥 돈만 갚아요.
진핑 주석은 필립의 채권 처리 요청에 대해 긴급회의를 열었다.
막무가내로 일주일 안에 1조 달러를 내놓으라는 미국의 요청이 알려지자, 회의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말도 안 됩니다!”
“주석님. 이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돈을 일주일 안에 내놔야 한다고요? 이건 미국의 횡포입니다.”
부주석과 공산당 부장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을 성토하는 분위기가 됐다.
“그래서 방법은?”
진핑 주석의 질문에 소란스럽던 회의장이 일순간 조용해졌다.
“나도 이게 미국의 횡포이고 협박이라는 걸 안다. 그러니 성토는 그만하고 해결책을 내놔!”
진핑 주석의 외침에 외교부장 왕수가 입을 열었다.
“이는 우리 중국에 전면전을 선포한 것과 다름없습니다. 트롤프 때도 그렇지만, 미국은 우리 중국의 성장을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왕수의 말에 진핑 주석이 계속 이야기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홍콩은 물론이고 간도 역시 중국의 고유영토입니다. 채권과 무관하게 말입니다.”
“그 말은 채권을 무시해 버리자는 건가?”
“시간을 벌어야 합니다. 일주일이라고 했지만, 저들도 그게 가능한 요청이 아님을 알고 있을 겁니다.”
“대외압박용이다?”
“우리가 고개를 숙이길 바라는 겁니다. 자신들 위치에 도전하지 말라는.”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건가?”
“미국을 제치고 1등 국가가 되는데 20년 계획을 수립한 지 1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 계획을 안정적으로 밀고 가려면 우리가 저들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라는 느낌을 전해줘야 합니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이군.”
진핑 주석의 말에 왕수 외교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채권을 처리하는 부분은 나눠서 내는 형태로 진행해야 합니다. 그 많은 돈을 일시에 내줬다간 외화보유고에 충격이 갈 겁니다.”
“미국이 우리 요청을 들어줄까?”
“가랑이 사이를 기어서라도 기회만 얻어내면 됩니다. 채권은 핑계이고 따로 원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직접 만나서 그걸 확인해 보겠습니다.”
“유방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군.”
“지금의 미국은 항우와 다를 바 없습니다. 일대일로 협력 국가를 더 늘리고 범아시아 협력체계를 마련해 서구와 맞서야 할 것입니다. 힘을 앞세웠던 초패왕은 결국 사면초가에 갇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원론적인 이야기지만 왕수 외교부장의 말대로 지금 당장은 이 방법 말고는 없다고 봐야 했다.
미국과 전쟁을 벌인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일단 고개를 숙이고 이인자 자리에 만족하고 있다는 몸짓이라도 취해야 할 것이다.
왕수 외교부장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꼭 북한을 흡수하고 한국의 버릇을 고쳐놔야 합니다. 속국이자 조공국에 불과했던 변방 오랑캐였음을 이번 기회에 확실히 상기시켜줄 겁니다.”
“북한의 흡수 계획은 5년 뒤부터 시작하기로 한 것 아니었나?”
북한의 3대째 지도자 김성은. 그의 건강 상태가 갈수록 악화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는 중국이다.
할아버지 김인성에 대한 향수와 지도력을 덮어쓰기 위해 단기간 무리하게 몸을 만들면서 건강에 적신호를 달고 사는 김성은이다.
한때 친중파 세력이 숙청을 당하고 뭉텅 잘려나갔지만, 꾸준히 10년에 걸쳐 세력을 다시 구축한 중국이었고 북한 공산당 일부를 자신들 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김성은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거나 쿠데타가 일어나는 순간, 친중파 세력의 ‘공식’ 요청을 받아 북한에 진주할 계획이다.
그 와중에 제2의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것도 계획에 포함되어 있다.
그 계획에 한국을 점령한다던가 하는 목표는 없다. 미국이 그걸 지켜만 보지도 않을 것이고 자칫 이웃 국가로 전쟁이 확대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원하는 것은 그저 전쟁을 통해 한국이 망가지는 것이다.
첨단산업과 5차 산업의 선두 국가로 부상 중인 한국이 무너진다면 아시아 경제권은 온전히 중국 손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그간, 일본에 대한 처리가 문제였는데, 그 귀찮은 일은 한국이 알아서 처리를 해 준 상태다. 일본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계획을 완성한다면 중국은 천명(天命)은 손에 쥐고 아시아 종주국으로,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번 황제국으로 거듭날 것이다.
“김성은은 아직 젊은 나이라 후계자가 없는 상태입니다. 하지만, 젊은 나이와 무관하게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죠.”
“공작을 펼치자는 이야기군. 그 시간을 당길 수 있게.”
“북한이 손에 들어오는 순간, 중국은 태평양 시대로 나아가게 됩니다.”
“미국이 남중국해를 압박하는 것처럼 우리도 북태평양으로 진출을 한다? 역으로 압박에 나서자는 말이군.”
“미국의 전략은 한국과 일본을 시작으로 인도에 이르기까지 대중국 전선을 만드는 게 목적입니다. 이걸 무너트리고 미국을 밀어내기 위해선 북한의 흡수는 필수입니다.”
“그러기 위해선 당연히 한국의 허리를 꺾어놔야 할 것이고.”
진핑 주석의 말에 회의에 참석한 이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 대한 경제 압박은 어떻게 되고 있나?”
“한국 관광과 국내에 진출한 한국 기업의 불매 운동이 진행 중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지시도 내린 적이 없다는 걸 분명히 하게.”
“물론입니다. 인민들이 애국심 때문에 솔선수범한 것입니다. 당은 그 어떤 간섭도 지시도 내린 적이 없습니다.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중국 기업들이 한국 기업들의 불법 행위에 분노해 소송을 제기 중이라고 합니다.”
“하하. 그런가? 기업들 역시 애국심이 넘치는군.”
미 국무장관의 압박에 연신 인상을 찡그리고 있던 진핑 주석은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외교부장.”
“네. 주석님.”
“필립 국무장관을 만나서 미국이 만족할 만한 조건을 협상해 내게. 분할 납부가 됐든, 채권 무효가 됐든. 우리가 어깨를 펴고 태평양에 진출하는 그날까지 시간을 벌어.”
“네! 주석님.”
왕수 부장은 곧바로 필립 카네기를 찾아갔다.
“외교부장 왕수입니다.”
“국무장관 필립 카네기입니다.”
왕수와 마주 앉은 필립은 곧바로 채권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답을 가져오신 거겠죠?”
필립의 질문에 왕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카네기 국무장관님. 귀국의 요청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은 알고 계실 겁니다.”
“불가능이요? 그럴 리가요. 제가 알기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채권을 회수해 갈 수 있다고 봅니다만.”
“1조 달러에 달하는 돈입니다. 그게 가능할 리 없지 않습니까.”
“좋은 대답을 기대했는데, 실망이군요.”
“이런 일은 서로 간에 원하는 바를 맞춰가며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가야지 않겠습니까.”
“더 나은 방향이라. 채권 회수를 다른 방법으로 상충시키겠다는. 그런 의미입니까?”
“국무장관도 그런 의도로 중국을 방문하신 것 아닙니까.”
왕수는 채권은 핑계일 뿐이고 진짜 원하는 것은 따로 있지 않냐는 듯 속내를 알려 달라고 했다.
“다른 의도라. 아쉽게도 이번 방문은 해묵은 채권을 처리하는 것 말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흠.”
미국의 속내를 단번에 알아낼 거라곤 생각지 않았지만, 필립 카네기의 반응은 예상보다 너무 단조로웠다.
‘진짜 채권 처리가 목적이라고?’
왕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지 마시고. 말씀해 주시죠. 우리가 뭘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혹, 인공섬 때문입니까?”
왕수의 말에 필립은 고개를 흔들었다.
“인공섬이라니 더욱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허허. 서로 다 아는 이야기 아닙니까. 그러지 마시고…….”
“왜 자꾸 같은 말은 반복하게 만드는지 모르겠군요. 4일 남았습니다. 그 안에 채권을 처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필립은 더 이상 나눌 이야기가 없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대화를 마치기도 전에 성큼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 필립의 모습에 왕수는 이를 악물었다.
중국을 무시하는 미국의 태도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는 입장이다. 미국이 원하는 게 뭔지. 그걸 알아내야 이번 일을 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카네기 장관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채권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니라면 더 나눌 이야기 없습니다만.”
“그 채권…… 3년에 걸쳐 분할…….”
“불가합니다. 정확히 4일 뒤. 그때까지 회수해 가기 바랍니다.”
“최소한의 시간은 주면서…….”
“백 년이 넘게 유예해준 채권입니다. 이제 와 무슨 시간을 달라는지 도무지 모르겠군요. 존 오루크 정부는 이번 기회에 채권을 깔끔하게 정리해 주길 바랄 뿐입니다.”
필립은 그 말을 끝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버렸다.
“진짜 채권 회수가 목적이라고?”
왕수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왕수는 미국의 진짜 속셈을 알아내기 위해 부단히 필립을 쫓아다녔지만, 매번 같은 답만 돌아왔다.
“내일이 마지막 날이군요. 결정은 내리셨습니까?”
필립은 만날 때마다 카운트다운이라도 하듯 날짜를 셌다.
“네. 결정을 내렸습니다.”
“호, 그래요.”
필립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왕수를 바라봤다.
“귀국의 채권은 어떻습니까?”
“미국의 채권을 말하는 겁니까?”
“네. 채권을 채권으로 처리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 같아서 말입니다.”
중국은 트롤프 정부와 무역 전쟁을 벌이면서 의도적으로 미국 채권을 시장에 풀어왔다.
현재 보유하고 있는 채권은 1조 1천억 달러 수준. 청나라 채권과 거의 비슷한 규모다.
“불가합니다.”
“네?”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채권은 아직 만기가 안된 물건입니다.”
“만기 날짜와 상관없이 미국 쪽도 손해 보는 거래는 아닐 텐데요.”
“우리가 채권을 가지고 온 것은 돈을 받기 위해서지 또 다른 채권을 쟁여놓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
“그러니, 내일까지 부탁드립니다. 전액 현금으로 채권을 회수해 가길 바랍니다.”
끝까지 같은 말만 반복하는 필립의 태도에 왕수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렇지 못하겠다면 어떻게 할 겁니까?”
“법대로 해야죠.”
“법대로라. 훗.”
왕수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우리가 보유한 미국 채권을 시장에 내 던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고 그러는 겁니까?”
“미안합니다만 나는 경제관료가 아닙니다. 그런 부분은 재무성 사람들과 나눠야 할 이야기 같군요.”
“…….”
“내일까지입니다.”
“카네기 장관. 우리 중국과 진짜 전쟁이라도 벌일 생각이요?”
왕수 부장의 말에 필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중국은 참 이상합니다. 돈을 빌렸으면 갚는 게 기본 아닌가요? 상식적인 문제에 왜 전쟁을 들먹이는지 모르겠군요.”
“지금 미국의 요구가 그렇지 않습니까. 궁지에 몰아도 살아날 길은 열어 준다고 했습니다.”
“이런 이런, 지금 청나라 채권 하나 처리하는데 중국이 망하기라도 한다는 겁니까? 제가 알기로 채권을 처리해도 외화보유고는 여전히 튼튼하다고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돈은 있지만, 주고 싶지 않다. 뭐 이런 태도 아닙니까.”
“…….”
“그런데 귀국은 돈을 갚기보다 오히려 전쟁, 미국의 채권을 운운하며 협박을 하는군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부장님이 말하는 의미가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일은 아주 심플합니다. 돈을 갚던지. 아니면 법대로 하던지.”
필립과 왕수의 대화는 쳇바퀴 돌듯 이번에도 서로의 말만 하다가 파투가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