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장. 야베 웃다.
야베가 굳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미국 대통령 당선자라니!”
“그게. 저희도 잘…….”
일본이 연락을 넣은 쪽은 현 백악관. 그러니까. 트롤프 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는 부통령 라인이다.
차기 대통령과도 당연히 연을 이어야겠지만, 미국 대선 기간 중 고주몽과 전쟁을 치르는 통에 이쪽엔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었다.
이유야 어찌 됐든 한 달 남은 정권이라고 해도 행정명령권이 현 정부에 있기에 급한 대로 의견을 전달했고, 긍정적 반응을 받아낸 상태다.
하지만, 만에 하나 차기 정부가 이를 뒤집어 버린다면 죽 쒀서 개 주는 꼴이 될 것이다.
“그래도 쉽지는 않을 겁니다. 아까 고주몽이 통화하는 걸 보지 않았습니까.”
“네. 맞습니다. 고주몽도 미국 측 처지를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고주몽이 어떻게 차기 정부와 연결이 됐는진 모르겠지만, 아무리 미국 대통령이라고 해도 오랜 세월 구축해 온 태평양 전략을 손바닥 뒤집듯 할 수는 없습니다.”
미국의 전략적 기조가 바뀌지 않을 거라는 점엔 너나 할 것 없이 동의했다.
“지금 그걸 몰라서 묻는 게 아니잖아! 고주몽은 존 오루크와 직접 통화를 할 정도로 친분을 가지고 있다는 게 문제지!”
야베가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최악의 사태를 가정해서 대책을 꺼내 봐!”
“최악이라 봐야. 오키나와 기지가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는 것인데. 그건 이미 불가능하다는 걸 확인했고. 남은 것은…….”
“오키나와를 포기하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요구를 해 올 수도 있다는 점이지.”
“네. 하지만, 그건 우리가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미국을 설득해서 오키나와 기지를 옮기라고 버티면 그만입니다.”
“한국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들 수 있다는 말이지?”
“네. 그걸 상정하고 계획한 일이지 않습니까. 오키나와 대신 반대급부로 원하는 부분이 있다고 해도 우린 버티면 그만입니다. 무효화 전략이 우리의 최종 목표니 말입니다.”
“미치겠군. 뭐든 속전속결로 진행이 되니 대응이 쉽질 않아.”
본래 자신들이 이길 걸 상정하고 내세운 협상 방식이지만, 상황이 거꾸로 되니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팠다.
야베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야베와 일본 측 협상단은 유리한 고지를 잃지 않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대응법을 논의했다.
오키나와는 물론 그 대신 다른 땅을 내놓으라고 해도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고 미국부터 넘고 오라고 버티기에 들어갈 것이다.
영토 할양은 5년 뒤에 마무리가 된다.
그 안에 할양 방식을 마무리 짓지 못하면 협의 자체를 무산시켜버릴 수 있다.
대마도는 버텨낼 방법이 없지만, 오키나와까지 잃을 수는 없는 일이다.
야베는 협정문 항목을 뚫어지듯 바라보더니 ‘어쩌면’하는 소리를 냈다.
“뭔가 좋은 방법이라도…….”
“고주몽이 내놓을 방법이라 봐야 몇 가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내용을 끝까지 물고 늘어진다면 그조차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관료들은 야베의 설명을 듣더니 너나 할 것 없이 ‘오오!’ 하는 소리를 냈다.
“5년이다. 5년만 버티면 오키나와 문제는 흐지부지 만들어 버릴 수 있다.”
“하이!”
차기 국무장관과 국방장관으로 내정된 필립 카네기와 왓슨 브레드가 협상장에 도착했다.
흩어졌던 협상단은 곧바로 재소집됐고, 오키나와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그랬듯이 한국도 돌파구를 찾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대응 방법을 논의했지만, 이렇다 할 답을 찾아내지 못했다.
어쩌면 ‘미국’이라는 국명에 지레 겁을 먹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오랜 세월 미국을 거스르지 않고 눈치껏 몸을 숙여온 한국 정부의 관성 때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자칫 미국의 심기를 건드렸다가 더 큰 손해를 볼 수도 있다는 그런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런 한국 측 협상단과 달리 주몽은 느긋하게 티타임을 즐겼고, 재협상이 시작된 지금도 긴장감이라곤 1도 느껴지지 않는 편안한 표정을 유지했다.
김덕영이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한국 대표단을 이끌고 있는 김덕영입니다. 갑작스럽게 자리를 청한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닙니다. 우리 미국 기지와 관련된 사항이니.”
국무장관 예정자 필립 카네기가 개의치 말라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영토 할양과 관련해 작은 문제가 생겼고….”
김덕영이 재차 입을 여는데, 일본 방위성 대신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영토 할양 문제입니다. 작다고 할 수 없죠.”
“뭐, 작든 크든. 아무튼 일본 측은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 기지를 비울 수 없으니. 영토 할양이 불가하다고 말하는 중입니다.”
김덕영은 영토 할양 조건과 거주민 이주, 미군 기지 이전 등의 문제를 설명했다.
“우리도 이쪽으로 이동하면서 대략적인 사항은 전달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편하겠군요. 미국 측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우리가 기지를 옮기지 않으면 일본은 영토 할양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게 되는 건가요?”
필립의 질문에 김덕영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했다. 김덕영이 머뭇거리자 일본 측 관계자가 대신 대답을 했다.
“협의에 따르면 5년 안에 땅을 비워야 합니다.”
“그 말은 5년이 넘도록 땅을 비울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협의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아무래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본은 자신들이 원하는 바가 바로 그 부분이라며 생각을 숨기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국방장관 내정자 왓슨에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키나와 기지는 우리 미국에 전략적 주요 거점입니다. 중국의 남하를 막고 태평양 전선을 유지할 수 있는 킬 포인트니 말입니다.”
“하이. 일본은 미국의 입장을 백분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일본은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하하. 이거 난감하군요. 일본과 한국은 우리 미국의 동맹이지만, 양국 영토 분쟁엔 끼어들 수 없는 위치인데…….”
“끼어들어서도 안 되고. 끼어들면 욕을 바가지로 먹게 될 겁니다.”
잠자코 지켜보던 주몽이 대뜸 입을 열었다.
한국과 일본 관계자들이 최대한 외교적 수사를 사용하려고 노력한 반면, 주몽의 말투는 거침이 없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네. 고주몽 회장님.”
“기지 이전 안 할 겁니까?”
“양측 영토 분쟁에 있어선 끼어들 이유가 없지만, 오키나와에 있는 기지 이전에 관해서는 재고의 가치가 없습니다.”
필립은 단호한 말투로 불가를 외쳤다.
일본은 희희낙락하는 표정이 됐고, 한국 쪽에선 연신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역시 그런가.”
주몽은 고민스러운 표정이 됐다.
주몽도 억지를 부리자면 못할 것도 없다.
할양 시점에 맞춰 미군에게 하루 동안 모두 공해상으로 물러나 있으라고 떼를 써서 일본 측에서 제기한 거주민 소거 불가를 무산시켜 버릴 수도 있다.
협정안에 어긋나는 건 아니니 일본 측도 반대할 명분이 없을 것이다.
물론 그 조건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선 미국에 적잖은 선물을 쥐여 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오키나와를 통으로 먹는 일이 될 것이니 어지간한 조건엔 꿈쩍도 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어쩌면, 오키나와 일부를 홍콩처럼 떼어가려 할지도 모를 일.’
자신들이 버티면 한국은 오키나와를 먹을 수 없으니 어지간한 조건은 들어줘야 할 것이다.
존 오루크와 동맹 관계가 됐다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미국 대통령이고 미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존재다.
오키나와 일부를 조차지 형태든, 또는 오키나와를 조각내 할양을 받아 낼 수만 있다면 미국 근대사 이후 최초로 영토를 늘린 영웅으로 기록될 것은 물론이고 재선은 고민할 필요도 없게 된다.
‘쳇. 미국 입장에선 양손에 떡이군.’
주몽은 턱 끝을 만지작거리더니 필립을 향해 질문을 던졌다.
“좋습니다. 안된다는데 굳이 이전해 달라고 억지를 부를 수는 없죠.”
“회…회장님. 그렇게 쉽게 포기해 버리시면….”
김덕영과 한국 측 협상단이 당황한 표정이 됐다.
“어쩝니까. 안된다는데. 다른 나라도 아니고 미국 아닙니까. 한국도 주한미군을 데리고 있는 입장에서 군사적, 지리 전략적 요충지를 포기하라고 할 수는 없는 겁니다.”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김덕영은 아쉬운 표정으로 ‘그래도 이게 끝은 아니겠죠?’ 하는 눈빛을 보였다.
“여하튼, 일본은 미군 기지를 비울 수 없어서 할양이 불가능하고. 미국은 전략적 요충지를 포기할 수 없어서 이전이 불가하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할양을 약속받은 땅을 포기하는 것도 웃기는 일입니다.”
주몽은 일본과 미국 측 관계자를 쓱 둘러봤다.
“미스터 카네기.”
“네. 회장님.”
“협상장 구경이나 하자고 오지는 않았을 테고. 미국 쪽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생각이라면 어떤…….”
“미국 입장은 전략적 요충지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한국은 오키나와를 받아야 할 입장이고 말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양국 영토 문제엔 관여할 생각이 없습니다.”
필립은 어느 쪽 손도 들어 줄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주몽은 씩 웃는 얼굴로 재차 입을 열었다.
“예를 들면, 오키나와에 99년짜리 조차지를 염두에 두고 있다거나.”
움찔.
99년짜리 조차지 이야기가 나오자, 필립과 왓슨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역시나, 그걸 노리고 있었구만.’
주몽의 말에 일본 측은 발끈한 표정이 됐고, 한국 측은 ‘오오, 그래. 오키나와를 먹는데 조차지 정도야’하는 표정이 됐다.
“그건 안될 말입니다.”
야베는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영토 할양이 끝나고 나면, 조차지를 내주던 미군을 쫓아내던 그건 한국이 알아서 할 일입니다. 영토 주권을 포기한 일본이 관여할 문제는 아니죠.”
주몽은 발끈하는 야베에게 ‘넌 권한이 없잖아?’ 하는 눈빛을 날렸다.
“조차지를 만들던, 오키나와를 쪼개서 미국의 새로운 주로 편입시키던. 그 전에 영토 할양이 정상적으로 마무리되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혹시나 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할양 일자에 미군을 공해상으로 물러나게 한다거나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불가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야베는 그 정도 꼼수는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는 듯 콧방귀를 날렸다.
“그건 일본이 관여할 문제가 아닌데 말입니다.”
“고주몽 회장님이 뭔가 오해를 하시는 것 같은데. 사람이 빠져나갔다고 거주민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닙니다.”
야베는 숨 쉴 시간도 없이 말을 이었다.
“거주민 이주입니다. 사람만 빠지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모든 걸 이전해야 마무리가 된다는 말입니다!”
야베는 협정서를 펼쳐 들고 ‘이주’라고 적힌 문구를 정신없이 두들겼다.
“이는 사람이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기지 전체를 이전하지 않는한!”
야베가 ‘이전’이라는 문구를 물고 늘어지자, 눈을 반짝이며 ‘굿 아이디어!’ 했던 한국 측은 물론이고 코를 벌름거리며 입맛을 다시고 있던 미국 역시 ‘쯧’하는 소리를 냈다.
협상장 분위기가 순식간에 일본 측으로 기울었다.
협상 내내 침울한 표정을 고수하고 있던 야베는 이제야 살 것 같다는 듯 웃음을 되찾았다.
‘외교관들이 협상 문구 하나에 목숨을 거는 이유가 다 있었구나. 단어 하나 때문에 일이 엉망으로 꼬이네.’
주몽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탁자를 툭툭 두들겼다.
‘기지 이전이라…… 기지 이전.’
어떻게든 기지만 이전시키면 해결될 일인데, 오키나와 근처는 망망대해다.
‘기지 규모가 작은 것도 아니고 방법이 없나…… 젠장. 이사를 시키고 싶어도 마땅한 장소가 없네.’
주몽은 문뜩 생각 하나가 스쳤다.
‘확인을 해 봐야겠지만, 가능성이 있다면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의 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겠어.’
“잠시 휴정합시다.”
“휴정을 하나 마나, 결과는 달라질 게 없을 겁니다.”
야베는 히죽 웃는 얼굴로 주몽을 바라봤다.
한국 측 협상팀은 물론이고 미국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 한국 측 요구를 빌미 삼아, 오키나와에 빨대를 꽂을 생각이었는데, 협정문 항목이 발목을 잡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이 됐다.
막말로 이전을 하겠다고 나서면 일본도 난감한 입장이 되겠지만, 이게 성질난다고 기지를 다른 위치로 옮길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미국의 태평양 전략을 송두리째 바꿔버린다면 모를까. 오키나와를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쯧. 이렇게 되면 일본 측 편을 드는 게 더 낫겠군.’
미국 측 관계자들은 아쉬운 눈빛이 됐다.
주몽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곧바로 Go 컴퍼니가 머무는 장소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