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장. 광기(狂氣)
한, 일 양국 정부와 의회, 국민은 절대 상대국가에 질 수 없다는 기이한 열기에 휩싸였다.
유엔 사무국장의 기자회견이 있던 뉴욕은 밝은 대낮이었지만, 그 소식이 전해진 한국과 일본은 늦은 밤이었다.
당연히 한국의 국회의사당은 물론이고 일본의 의회 역시 깊이 잠든 시간이었음에도 국민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각국 의원들은 오밤중에 소환을 당했다.
일 초라도 더 빨리 협상안 비준을 마쳐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기라도 한 것인지, 한일 양국의 비준 절차는 실시간으로 상대국에 전달됐다.
양국 국민은 뭔가에 씌기라도 한 것처럼 맹렬한 광기를 내비쳤는데, 이는 오랜 세월 쌓인 양국 관계가 얼마나 곪아 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 사례가 됐다.
양쪽 다 부지런히 움직였지만, 먼저 비준을 마친 국가는 일본이었다.
한국보다 무려 17분이나 빨리 비준을 마쳤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일본 국민들은 승리의 함성을 내 질렀다.
상대국보다 먼저 비준을 마친 국가가 승리한다는 왜곡된 정보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일본보다 늦게 비준을 마친 한국 정부와 의회는 거꾸로 된서리를 맞았다.
평소에도 일을 거지같이 하더니, 국가의 명운이 걸린 일임에도 불구하고 느려터져서 결국 승리를 빼앗겼다고 생각한 것이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환호를, 다른 한쪽은 땅이 꺼지라고 한숨을 내쉴 때 추가 소식이 전해졌다.
* 비준 날짜가 하루 이상 차이가 날 때, 패한 것으로 간주한다.
“뭐? 하루 이상 차이가 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젠장, 17분 차이밖에 나지 않았잖아.”
한국과의 대결에 승리했다며 한껏 들떠있던 일본은 멍한 표정이 됐고, 비준이 늦어져 패하고 말았다던 한국은 한숨을 멈추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오예! 17분 늦은 정도는 아무런 영향도 없다는 말이네?”
“천만다행이다. 그야말로 망연자실했었는데. 휴우.”
그때 두 번째 소식이 전해졌다.
* 비준 관련으로 승부가 결정될 경우, 90조 엔의 배상금으로 양국 문제를 봉합한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잠깐만. 비준 결과는 90조 엔 배상금 문제일 뿐이라고?”
“그럼 다른 협상문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상대보다 더 빨리, 비준을 마치는 것만이 지상과제인 양 행동했던 양국 국민들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조금씩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얼마나 무서운 짓에 열광하고 환호했는지를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우리 무…… 무슨 짓을 해 버린 거냐.”
혼돈에서 빠져나온 국민들은 덜컥 두려움에 휩싸였다.
“비준하지 않았다면…… 고주몽 회장 혼자만의 문제였네?”
“정부와 의회의 비준이 없었다면, 저 협상문은 그냥 떠드는 소리에 불과했다는데?”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지금 우리 손으로 독도에 마라도에 제주도까지 일본 아가리에 밀어 넣은 거야?”
“오 마이 갓!”
한국 국민들이 기함한 표정을 짓고 있을 때, 일본 국민들 역시 현기증에 비틀거렸다.
“야베 이 인간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멍청아. 야베 총리는 최선을 다했다고.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른 건 바로 우리였어!”
“대마도와 오키나와를 한국에 줘야 한다고?”
“이건 무효다! 다 무효야!”
뒤늦게 두려움에 휩싸인 양국 국민은 비준 동의안을 무효화시키고자 했지만, 이미 배는 떠나버렸고 물은 엎질러져 버렸다.
한국과 일본에서 협상 내용을 비준하고 공식화했다는 소식이 바다 건너 뉴욕까지 논스톱으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이상. 무조건 이기는 수밖에 없다.”
“그래. 우리가 이기면 해결되는 거잖아. 미리부터 덜덜 떨 이유는 없다고.”
“고주몽 회장이 이길 수 있겠지?”
“야베 총리가 분명히 이길 거야. 다들 그렇게 생각하지?”
* * *
본 회의장 투표가 연기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얼마 되지 않아, 양국에서 협상안 비준이 이뤄졌다는 소식이 뒤따랐다.
“아니 뭐가 이렇게 빨라? 벌써 비준이 이뤄졌다고?”
“그쪽은 지금 오밤중 아니었어?”
이게 되겠어? 라고 생각했던 기자들은 물론이고 각국 정부들까지 ‘어? 어어어어 억?’ 하는 소리를 냈다.
2차 대전 이후 국경선 변화가 거의 없던 세상이다. 그런데 무력을 통한 전쟁이 아닌 유엔 회원국들의 투표 결과에 따라 새로운 국경선이 만들어질 판이다.
각국 정부 대변인은 이번 사태에 적잖은 우려를 내비쳤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두 나라는 세계 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경제 대국이다.
어느 나라든 문제가 생기는 순간, 세계 경제 지표에 문제를 일으킬 게 분명했다.
그러나 당사국이 아닌 이상, 이 문제에 직간접적으로 끼어들 명분이 없었다.
자칫 말실수라도 했다가 편들었다는 소리를 듣게 되면 그건 그것대로 차후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걸 미쳤다고 해야 하는 거냐. 아니면, 전쟁 없이 분쟁을 해결할 새로운 방안이 만들어졌다고 봐야 하는 거냐.”
“그게 뭐가 됐든 간에, 이번 대결에서 진 나라는 망한다고 봐야 할걸.”
“땅이야 그렇다 쳐도 배상금을 내놓으려면 허리띠를 졸라매야…… 아니, 한동안은 쫄쫄 굶는다고 봐야겠다.”
“굶는 것으로 끝나면 다행이게?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반목과 경쟁을 끊임없이 반복해온 배척 국가들이라고. 패배한 쪽은 못해도 10년 이상은 뒤처지게 될걸.”
“10년? 내가 보기엔 두고두고 뒤꽁무니만 바라보게 될 것 같은데?”
기자들은 결과에 따른 향배를 두고 설왕설래 의견을 주고받았다.
* * *
“믿을 수가 없군. 저게 진짜로 진행이 되다니.”
미국 대통령 당선자 존 오루크는 황당한 표정이 됐다.
“저렇게 될 거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알렉스는 담담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속마음까지 담담하진 못했다.
처음 이 계획을 전해 들었을 땐 알렉스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일축했기 때문이다.
“당선자님도 결정을 내리셔야지 않겠습니까?”
알렉스의 질문에 존 오루크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까지 상황을 끌어낸 점은 높이 평가하네. 하지만 고주몽 회장이 이길 수 있는지는 끝까지 지켜봐야지 않겠나.”
“이기지도 못할 싸움을 여기까지 끌고 왔겠습니까?”
“물론 자신감이 없었다면 시작도 하지 않았겠지. 하지만 일본은 만만치 않은 나라야.”
존 오루크의 말에 알렉스는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무시할 수 없는 국가긴 하죠. 하지만 이번엔 너무 많은 악수를 두었습니다. 자신들이 만든 수렁에 빠져 결국 헤어날 수 없는 지경이 될 겁니다.”
“솔직한, 내 입장을 이야기해 볼까?”
“네. 경청하겠습니다.”
“나는 한국이 이기든 일본이 이기든 딱히 관심이 없네.”
존 오루크는 TV 화면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재차 말을 이었다.
“고주몽 회장의 약속이 지켜질 수 있는가. 그것이 중요할 뿐이지.”
“당연히 그렇게 될 겁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네.”
“머리 위에 올라탄 상전을 치워버리는 일은 나도 환영하는 바네.”
“그런데요?”
“그렇다고 새로운 상전을 모시는 것은 바라지 않네.”
존 오루크의 말에 알렉스는 웃음을 보였다.
“고주몽 회장님의 본진은 한국입니다. 그리고 한국과 미국은 아주 멀리 떨어져 있죠.”
“거리가 중요한가? 하루면 세상 어느 곳이든 갈 수 있고, 전화 한 통이면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세상이네.”
“회장님은 상하 관계가 아닌 평등한 관계를 원하십니다. 성격상 귀찮은 일은 딱 질색하시는 분이거든요.”
“하하하하. 귀찮은 것을 딱 질색하는 성격이라. 하지만, 지금 벌이고 있는 일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다지 와 닿지 않는 말이군. 어찌 보면 집요하기까지 하지 않은가.”
“아니요. 그래서 더 신뢰할 수 있는 분입니다.”
알렉스는 고개를 흔들며 말을 이었다.
“회장님은 먼저 누군가를 건드린 적이 한 번도 없으니 말입니다.”
“흠.”
“후보님도 나름 보고서를 받아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뭐. 그렇다고 하더군. 건드리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다고.”
“네. 호의엔 호의로 적의엔 적의로 답하는 분입니다. 당선자님이 회장님을 적대하거나 괴롭히지 않는 한 가장 가까운 친구로, 또 후원자로 남으실 분입니다.”
“나도 바라는 바네. 하지만 로즈차일드는 뿌리가 깊고, 드리운 그림자 역시 넓네. 고주몽 회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쉽지 않을 거야.”
“적의 적은 친구라고 했습니다. 회장님이 약속대로 결과를 보인다면 당선자님도 그에 상응하는 답을 내주셔야 한다는 점.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알렉스의 말에 존 오루크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알렉스의 말이 은연중 ‘경고’로 들렸기 때문이다.
“아, 오해는 없었으면 합니다. 좋은 친구는 선물을 주고받는 데 있어 계산이 정확한 사람이라고 배워서 말입니다.”
알렉스의 말에 존 오루크가 피식 웃음을 보였다.
“재무부 출신다운 말이로군.”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이것도 직업병인가 봅니다. 세상을 숫자로만 바라보다 보니 계산이 어긋나면 주체를 못 하겠더란 말입니다.”
“선물을 주고받는데 계산이 정확한 사람이 진짜 친구라. 그 말 새겨듣도록 하지.”
두 사람은 그 말을 끝으로 대화를 마치고 TV 방송에 집중했다.
서로 주고받은 약속은 본회의장 투표 결과에 따라 공염불이 될지, 아니면 끈끈하게 이어질 새로운 인연이 될지 결정지어질 것이다.
“CNN 제인 폰다입니다. 지금, 이 시각 세계의 시선이 뉴욕에 집중이 되고 있는데요. 유엔 본부에 나가 있는 설리번과 연결해서 현장 상황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설리번?”
― 네. 제인.
“현장 분위기는 어떤가요?”
― 이곳 본회의장은 각국 기자들과 방송팀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만큼 한국과 일본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 충격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잠시 뒤, 한국의 고주몽 회장과 일본의 야베 총리가 이곳 본회의장에서 각각의 입장을 이야기하고 유엔 회원국들의 투표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설리번은 어느 쪽이 유리한 것 같은가요?”
― 기자들 사이에선 일본의 우세승을 점치고 있습니다.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협상문 내용이 대부분 일본 측 요구였다고 합니다.
“아, 협상문 작성에 일본 측 입김이 더 많이 들어간 모양이군요.”
― 네. 고주몽 회장이 내세운 것은 9천억 달러 배상이었는데, 일본 측에서 판을 키웠다고 합니다. 그 때문에 고주몽 회장보다 일본이 더 유리한 패를 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듣기로는 라스베이거스 도박사들까지 이번 일에 베팅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 라스베이거스뿐 아니라 전 세계가 결과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월가에서도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월가에서 민감하게 지켜본다는 것은. 승패에 따라 엄청난 돈이 움직이기 때문이겠죠?”
― 그렇습니다. 주가를 예를 들면 쉬울 것 같은데요. 이긴 쪽은 지수가 올라갈 것이고 진 쪽은 하락하게 됩니다. 월가도 한국과 일본의 승부에 베팅해야 할 상황이죠.
“아, 듣고 보니 그렇겠군요. 월가의 승부사들은 어느 쪽에 베팅하고 있을까요?”
― 이곳 현장 분위기와 다를 바 없이, 일본 쪽에 투자금이 몰리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너튜브 방송을 통해 고주몽 회장의 습격 장면이 방송되긴 했지만, 그것만으로 국가 배상 운운하기엔 부족하다는 평이 많기 때문입니다.
▶ 미치겠다. 왜 일본이 유리한데!!!
▷ 한국 망한 건가?
▷ 회장님. 아니 되옵니다. 이건 아니잖아요!!
▷ 그래. 그냥 고주몽 혼자 망하는 게 낫다. 왜 우리나라가 고주몽 삽질에 한 묶음으로 팔려가야 하는가!
▶ 망할 자식들. 고주몽 똥꼬 신나게 빨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팽이냐?
▷ 아무리 잘해도 한 번 실수하면 개 되는 세상.
▷ 멍청이들아!!! 고주몽이 망하면 나머지는 멀쩡할 것 같냐? 고주몽 손에 우리나라 대기업 20개가 들려있다고!
▶ 하느님, 알라님. 부처님. 제발~~~
▷ 천국교회로 기도하러 오세요! 여기서 기도하면 온 우주가 도와줍니다. 헌금한 만큼 우주의 기운이 고주몽 회장에게 전달됩니다.
▷ 이젠 별 거지 같은 것까지 끼어드네. 헌금은 개뿔. 그냥 구걸해라.
현장 분위기를 전하며 결과를 예측하는 방송은 CNN 뉴스 채널뿐만이 아니었다.
본회의장 취재 허락을 받은 거의 모든 방송사가 비슷한 내용을 내보내며 일본의 승리에 손을 들어주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대기실에서 뉴스를 지켜보고 있던 야베와 일본 관료들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세상 모든 나라가 일본의 승리를 예상한다는 말에 그나마 남아있던 불안감마저 깔끔하게 털어낸 표정들이다.
대기실 문이 열리고 유엔 직원이 얼굴을 내밀었다.
“본회의장 입장하실 시간입니다.”
“다들 일어나지. 고주몽이 떠들어대는 헛소리를 지켜볼 시간이라는군.”
야베의 농담 섞인 소리에 다들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가시죠. 총리대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