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장. 리벤지 파운데이션
존 오루크는 천문학적인 소송금액에 식겁한 표정이 됐다.
“재판이 끝나고 나면, 배상 처리를 하는데 후보님의 사인이 들어가겠죠.”
“알렉스.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한다고 해 놓고 말을 뱅뱅 돌리는 것 같군. 그냥 원하는 걸 이야기 해 보게. 내가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존 오루크는 배상금 지급 문서에 자신의 사인이 들어가는 꼴은 죽어도 못 보겠다는 듯 이를 악물었다.
“그 전에 한 가지 묻고 싶습니다.”
“뭘 말인가?”
“트롤프 대통령이 미친 짓을 한 건 맞습니다만, 따지고 보면 이게 꼭 미국 탓은 아니지 않습니까.”
“응? 그게 무슨 소린가?”
“일본 말입니다.”
“일본? 아! 일본! 그렇지. 이 모든 게 그놈의 일본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
존은 알렉스가 무슨 말을 하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맞습니다. 일본이 엉뚱한 짓을 벌이는 바람에 이 난리가 난 겁니다. 제가 비록 Go 컴퍼니 사람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엄연히 미국인입니다. 그것도 한때 미국의 경제를 책임지는 관료였죠.”
“그렇지. 알렉스 자네는 미국인이고 미국 관료가 맞네.”
“그래서 고민을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미국의 피해를 줄일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Go 컴퍼니와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을까…….”
“그래서 답은 찾았나?”
“네. 찾았습니다.”
“그럼 뜸 들이지 말고 그냥 이야기를 해 주게.”
“소송하십시오.”
“응? 소송이라니.”
“일본 말입니다. 이게 다 일본 때문에 벌어진 일이고 그 때문에 미국이 손해를 보게 되었지 않습니까.”
“Go 컴퍼니에 배상한 돈을 일본에서 보충한다?”
“보충으로 되겠습니까? 당연히 그쪽도 징벌적 배상을 적용해야죠.”
“음…….”
존은 잠시 고민스러운 표정이 됐다.
말은 그럴듯했지만, 일본이 쉽사리 인정하겠는가 말이다.
“참고로 말씀을 드리자면…….”
알렉스는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리벤지 파운데이션이 발촉됐습니다.”
“복수 재단이 실제로 만들어졌다고?”
“네. 그리고 기간제이긴 하지만 회원도 가입하는 중입니다.”
리벤지 파운데이션은 고주몽 개인의 복수를 위해 만들겠다던 재단이다. 그런데 무슨 회원이 있다는 말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G20 국가 중 열세 개 국가가 회원으로 가입했습니다.”
“허허. 열세 개 국가가 고주몽 회장의 복수 재단 회원이 되었다고?”
“네. 그들도 발등에 불이 떨어지긴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대로 멍청히 있다간 박살이 날 지경인데. 당연히 다른 곳에서 벌충해야죠.”
“그 대상이 일본이다?”
“원흉 아닙니까. 거기다 고주몽 회장님을 암살하는 정도가 아니라, 남한을 혼란으로 몰아넣고 전쟁 상황까지 만들 뻔했습니다. 후보님 잊지 마세요.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우리 미국 병사들을.”
“…….”
“만약, 한반도에 전쟁 상황이 벌어졌다면 주한미군은 물론이고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과 본국에 있는 군인들까지 동북아 전쟁의 희생양이 됐을 겁니다. 중국과 러시아까지 덤으로 끼어들 텐데 그걸 무슨 수로 막아냅니까. 후보님은 대통령 임기를 전쟁으로 시작해 전쟁으로 마감해야 했을 겁니다.”
“끔찍하군.”
“끔찍하다 뿐입니까. 현대전은 돈의 전쟁입니다. 중국과 러시아를 멸망시키지 않는 한 피해보상금을 받아낼 방법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과연 항복할까요? 패배를 인정함과 동시에 나라가 거덜 날 텐데 말입니다.”
“핵…… 전쟁인가.”
“결국, 그렇게 되었을 겁니다. 혼자 죽느니 같이 죽는 걸 택할 놈들이죠. 실제로 핵까지 가지 않는다고 해도 그걸 빌미로 동반 자살을 이야기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전쟁은 전쟁대로 하고 남는 것 없이 휴전으로 마무리되겠죠.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 경제가 엉망진창이 되었을 겁니다.”
“허허. 미치겠군.”
“네. 그 미칠 것 같은 상황을 일본이 만들어낼 뻔했습니다. 그리고 그걸 막아낸 사람은 바로 고주몽 회장님이시죠. 우리 미국 입장에서도 고 회장님은 영웅이라고 불려야 할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망 처리에 시민권 박탈에 자산동결이요? 초강대국 세계 1위! 정의로운 국가로 명예를 중히 여기는 미합중국이 절대 해선 안 될 짓을 해 버린 겁니다.”
존 오루크의 이마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망할 놈의 트롤프. 똥을 싸도 아주 거하게 싸버렸군.”
“거기다, 후보님도 회장님 덕분에 선거판을 확실히 굳힐 수 있게 되었죠.”
이번 일이 있기 전부터 이미 유리한 형국이긴 했지만, 선거는 막판까지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싸움이다.
언제든 단숨에 뒤집힐 수 있는 게 선거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렉스 말대로 트롤프가 벌인 악수 때문에 표 대결을 벌이기도 전에 완승에 가까운 형국이 됐다.
“고주몽 회장이 아니었다면 3차 대전이 벌어졌을 수도 있었겠군.”
존 오루크 입에서 ‘긍정’적인 답이 흘러나왔다.
알렉스는 문서 두 장을 꺼내 존 앞에 내려놨다.
“이건 뭔가?”
“한 장은 리벤지 파운데이션 기간제 회원가입문서고 다른 하나는 후보님을 위해 따로 준비한 겁니다.”
존은 문서를 들고 내용을 살폈다.
회원가입문서는 별다를 내용 없이 말 그대로 6개월짜리 단기 회원증이다.
다른 하나를 살피는데 그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게 정말인가?”
“네. 후보님의 당선을 축하하는 회장님의 축하선물입니다.”
존 오루크는 300억 달러짜리 무기구입명세서를 바라보며 씩 웃음을 지었다.
“군수업체가 공화당 쪽을 지지한다는 거 알고 계실 겁니다.”
“아무래도 그렇지.”
“하지만 이걸 보여주면 공화당 쪽으론 오줌도 누지 않을 겁니다. 이왕이면 지지도 높은 대통령으로 임기를 시작하시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존 오루크는 가슴에 꽂혀 있던 만년필을 꺼내 거침없이 사인했다.
“고 회장님에게 감사한다고 전해주게. 그리고 내 임기 시작과 함께 첫 훈장의 주인은 고 회장님이 되실 거라는 것도 말씀드리게.”
“꼭 전해드리겠습니다.”
존과 알렉스는 회원가입증과 무기계약과 관련된 문서를 한 부씩 나눠 가졌다.
* * *
주몽의 특사들은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 미친 듯이 세계를 돌아다녔다.
한국과 일본을 제외한 모든 국가에서 회원가입을 받아내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채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채찍과 당근의 위대한 결과라 할 것이다.
“보스. 중국에서도 이번 일에 동참하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럼 이제 발표를 할 시간이군요.”
“네. 보스. 병원 레퍼런스 룸에 기자들이 대기 중입니다.”
“갑시다.”
주몽이 고개를 끄덕이자, 로건이 재빨리 휠체어를 밀었다.
“로건 PMC 인력 수급은 준비가 잘 되고 있나?”
“물론입니다. 국방부에서 협조적이라 큰 문제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대다수 PMC가 외국에 근거지를 둔 것과 달리 주몽의 Go 컴퍼니 산하 PMC는 한국에 본사를 두었다.
대규모 PMC를 운용하려면 훈련과 병력을 수용할 수 있는 장소가 가장 큰 문제다.
그 때문에 처음 PMC를 만들고자 결정했을 때 미국이나 호주 쪽을 염두에 뒀다.
하지만 군 개혁, 병력 감축에 따라 용처가 불분명해진 군부대, 훈련소 등이 주몽의 손에 들어왔고 굳이 외국으로 나가야 할 이유가 없어졌다.
거기다 병력 감축 때문에 상당수 장병이 군을 나와야 하는데, 이들의 경우 일반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했다.
군과 일반 사회생활은 백만 년 이상 동떨어진 세상이다 보니 평범한 회사에 들어가는 것도 힘들었고 그 안에서 일을 하기도 쉽지가 않았다.
PMC 입장에선 다수의 군 경력자가 필요한 상황이니 병력을 감축해야 하는 군으로선 그야말로 불감청 고소원,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관계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로버트의 정보부도 변화를 맞이했다.
구(舊) 기무사 인력과 국정원 전, 현직 인력을 회사에 대거 받아들인 것이다.
차차 외국계 직원도 늘려나가야겠지만, 무엇보다 주몽의 본진을 먼저 탄탄하게 만드는 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이는 로버트와 친분이 있던 NSA 출신 칼의 배신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타국(他國) 기관 출신의 신뢰도가 뚝 떨어진 것이다.
기자회견장에 주몽이 모습을 드러내자, 곧바로 플래시가 터져 나왔다.
주몽이 눈을 찡그리자 박산호 부장이 곧바로 마이크를 잡았다.
“한국 기자분들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플래시 사용은 금지입니다. 외신기자분들은 ISO 감도 조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한국 기자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스트로보와 감도 조정을 끝낸 상태지만, 외신기자들은 뒤늦게 조작을 하느라 부산한 반응을 보였다.
“회장님의 발표가 있겠습니다.”
박산호의 말에 방송국 카메라가 주몽에게 집중됐다. 휠체어를 타고 나타난 주몽은 로건이 넘겨준 마이크를 잡고 기자들을 바라봤다.
“Go 컴퍼니 고주몽입니다.”
찰칵, 찰칵.
플래시 없는 셔터음이 좌중에 울려 퍼졌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많은 이들이 죽고 다쳤습니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겁니다.”
주몽은 카메라를 바라보며 눈 끝에 힘을 주었다.
“여러분은 모두 알고 계실 겁니다. 누군가 불법적으로 또는 불합리하게 저를 공격하거나 죽이려 든다면 합당한 응징을 받게 되리라 선언한 것을 말입니다.”
“리벤지 파운데이션!”
“복수 재단?”
“설마, 그걸 진짜 하겠다고?”
“못할 건 또 뭐야? 막말로 고 회장이 뭘 잘못했어? 지금까지 해 온 일만 평가해도 구국의 영웅 그 자체라고.”
“그렇지. 그런데 대우는 못 할망정, 오히려 죽이려 들었지. 자신들의 비리를 파헤치고 기득권을 앗아갔다는 이유만으로 나라를 반 토막 내려 했어.”
기자들 사이에 쑥덕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주몽은 소란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자는 말도 안 되는 짓이라고도 하고, 혹자는 불가능한 일이라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주몽은 목소리를 높였다.
“맞고도 눈치를 봐야 하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용서를 빌어야 하는 그런 비굴한 짓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에, 선언합니다. 지금 이 시간부로 Go 컴퍼니 산하, 리벤지 파운데이션을 공식 발촉합니다.”
주몽의 선언과 함께 요란한 셔터음이 회견장을 가득 메웠다.
“봐. 내 말이 맞지? 복수를 천명할 거라고 했잖아.”
“와. 미치겠다. 그런데, 누구에게 복수하지?”
“바보냐? 전 세계 사람들에게 생중계됐잖아.”
“야쿠자?”
“쯧쯧. 야쿠자 놈들이 고 회장님과 상대가 되겠냐.”
“그럼 일본이겠네.”
“일단은 그럴 것 같다.”
“일단이라니?”
“G20 국가들이 회장님 시민권 박탈에 죽은 사람 취급하고는 재산까지 강탈하려 했잖아. 그것도 유야무야 넘어갈 사항이 아니지.”
“그런데 고 회장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그게 될까? 국가를 상대로 싸우겠다는 말인데.”
박산호는 기자들에게 자제를 부탁했다.
“기자님들. 아직 회장님 말씀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박산호의 말에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리벤지 파운데이션은 지금 이 시각. 각국에 소송을 시작했을 겁니다. 어떤 소송인지는 굳이 말씀드리지 않아도 모두 잘 알고 계시죠?”
“시민권 박탈과 자산 강탈에 대한 소송이 드디어 시작이 되나보군. 아주 볼만 하겠는걸.”
기자들은 한동안 기삿거리 떨어질 일 없겠다며 다들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리고 소송과 무관하게 파운데이션은 일본을 공격할 생각입니다.”
기자들 사이에 웅성거림이 커졌다.
“일본은 과거 대한제국에 그랬던 것처럼 낭인들을 보내 저를 암살하려 했고 또 그걸 빌미로 한국을 혼란에 빠트리려 했습니다.”
주몽의 외침에 일본 쪽 기자가 항변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거슨. 증거가 없으므니다!”
주몽은 일본 기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리가 하얗게 센 백발의 노인이다.
“한국에선 기자가 발언을 하기 전에 지켜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신분을 먼저 밝히시죠.”
박산호가 언론 책임법을 들먹였다.
“산케이 신문 한고꾸지사장이무니다. 구라다 가쓰히로이므니다.”
“네. 계속 말씀하시죠.”
박산호가 발언권을 주자, 구라다 가쓰히로는 흥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증거를 내놓지 못하므니믄 누명이므니다!”
재차 터져 나온 항변에 기자들은 일본인과 주몽을 번갈아 가며 촬영했다.
“그래요?”
“그렇스므니다.”
“하긴, 그게 일본 방식이긴 하죠.”
주몽은 백발의 일본인 기자를 바라보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럼 니들이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가지고 와. 그러면 나도 믿어줄게.”
“나니?”
“사고는 일본이 쳤는데, 내가 왜 그걸 증명해야지? 억울하면 니들이 증명해야지. 절대 그런 적 없다고. 안 그래?”
“무… 무례하므니다!”
“무례는 무슨.”
주몽은 일본인 기자에게서 시선을 돌려 카메라를 바라봤다.
“야베 총리. 그쪽이 그런 일을 벌인 적 없다는 증거를 가져오면 내 재산 전부를 내주지.”
“회장님. 너무 성급한 말씀이신 것 같습니다.”
“그러다 일본에서 증거를 가지고 오면…….”
기자들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주몽의 발언에 걱정 섞인 말을 던졌다.
“그러면 줘버리죠. 한 입으로 두말하면 되겠어요?”
“하지만!”
“대신!”
주몽은 기자의 말을 끊었다.
“일본이 결백을 증명할 때까지. 리벤지 코퍼레이션은 열일하겠습니다.”
주몽의 발언에 기자회견장이 단숨에 소란스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