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장. 부산입니다.
“오빠?”
제이코가 묘한 눈빛으로 엘리스를 바라봤다.
“한국에선 여자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를 일반적으로 그렇게 불러요.”
“흠. 그래?”
“네. 그래요.”
엘리스는 별 것 아니라는 투로 이야기했지만, 제이코가 보기엔 느낌이 전혀 달랐다.
‘차갑기만 하던 엘리스에게 이런 면도 있었나.’
조카에게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알고 있는 제이코다.
과거 주몽과 관련된 일로 적잖게 신경이 쓰였는데 이러다 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닌지 은근히 걱정됐다.
‘나쁘게만 생각할 일은 아니기도 한데…….’
솔직히 주몽과 엘리스가 이어질 수만 있다면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다.
‘별 것 아니라고 했지만, 표정은 그렇지가 못하네.’
화면에 집중하고 있는 엘리스. 당연히 주몽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은연중 주몽을 부축하고 있는 여성에게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따로 내색은 하지 않고 있지만, 주몽 옆에 다른 여자가 붙어 있으니 꽤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다.
“어엇!”
“이런!”
주몽과 이야기를 나누던 곽준규가 사생결단이라도 될 듯 달려드는 모습에 잡혔다.
그때 주몽을 부축하고 있던 여자가 앞으로 튀어 나가더니 곽준규를 제압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와우.”
“…….”
제이코는 놀람과 감탄 섞인 반응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다.
주몽이 경련을 일으키며 쓰러지자 컴퍼니는 곧바로 비상 상태가 돼버렸다.
“처…… 청와대로!”
“빨리!”
* * *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폭로된 주몽 사망, 생환, 시민권 박탈, 자산 동결 소식은 이런 결정을 내린 각 나라 정부에 심각한 부담으로 돌아왔다.
물론 이 와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안면몰수를 내비친 나라들도 있다.
달을 보고 닭이라고 우기는 일본이 그랬고 대국 자존심을 엉뚱한 곳에 발휘하는 중국 정부도 그에 속했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해 시민의식이 높은 나라들은 매서운 역풍이 되어 정부를 지탄했다.
당사자는 쿠데타 세력과 맞서 싸우며 나라를 지키는 영웅적인 면모를 선보였는데, 그를 지지하고 돕지는 못할망정 인정머리 없이 뒤통수를 날려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상을 가했고 야당과 정치적 경쟁자들에게 좋은 먹잇감이 됐다.
선거를 앞둔 트롤프 진영은 주몽의 생환만으로도 머리가 지근거리는 상황이었는데, 방송이 대 놓고 그 사실을 폭로해 버리는 바람에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물어 뜯겼다.
안 그래도 한 수 밀리는 선거판이었는데 스스로 자신의 목에 비수를 꽂아 넣은 셈이 됐다.
“저들을 지켜만 볼 건가?”
뉴스를 살펴보던 로버트가 신경질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지금이라도 뭔가 대응을 해야지.”
“당연히 그럴 거야. 하지만, 지금은 보스가 깨어나는 게 먼저야.”
제이코의 말에 로버트의 시선이 주몽 쪽으로 이동했다.
“괜찮겠지?”
“상처가 많긴 하지만, 목숨에 지장이 있을 정도는 아니라고 했어.”
“후우…….”
로버트는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내 잘못이다.”
로버트의 말에 제이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거나 예기치 못한 일이었으니 마음에 담아두지 말라는 등의 말을 해 줄 수 없었다.
이번 일은 로버트의 경호 실패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놈은 찾았나?”
내부에서 정보를 교란하고 적들의 움직임을 감춰버린 칼 로이건 때문에 피해가 막심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응징을 해야 했다.
제이코는 다신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철저히 단속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생각 자체가 들지 않을 정도로 컴퍼니의 힘을 보여줘야 한다고 했다.
“현상금은 걸어놨다.”
“현상금?”
겨우 그게 전부냐는 듯 로버트를 힐난했다.
“안태완 때와 비슷하다. 도무지 흔적을 찾을 수가 없다.”
안태완 이름이 흘러나오자, 제이코 역시 표정이 달라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아.”
국가가 직접 나서서 적색수배까지 걸었음에도 흔적조차 찾을 수 없던 안태완이다.
그런데 자신들의 감시망을 뚫고 한국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내란 사태를 일으키고 조종하기까지 했다.
“일본 정부가 엮여 있다고 해도…… 과한 부분이 있지.”
로버트 역시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쉽겠군. 이런 일을 판단하고 해석하려고 칼 로이건을 영입한 건데.”
제이코가 재차 칼 로이건을 운운하자, 로버트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놈 이야기는…… 그만했으면 좋겠군.”
“듣기 싫으면 놈을 잡아내. 이번에도 안태완처럼 꼬리를 잡지 못하고 차후 문제가 발생한다면…….”
“내 목숨을 내놓지.”
“그거…… 받아다…… 어디다 쓰라고요…….”
“보스!”
“보…… 보스! 깨어나셨습니까!”
“두… 사람 떠드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워서 안 깰 수가 없네요.”
주몽이 끙 소리를 내며 몸을 뒤척였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찢어진 자리 다시 다 꿰맸습니다.”
“끙. 여긴 어디…….”
“병원입니다.”
‘그랬지. 하필이면 그때 전이가 와서…….’
“얼마나 된 거죠?”
“꼬박 사흘이 지났습니다.”
“삼 일이나…….”
전이가 있다 해도 하루면 멀쩡히 깨어났는데, 이번엔 몸 상태가 엉망이다 보니 시간이 더 많이 흘러간 모양이다.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아니… 요. 잠시만요.”
주몽은 그러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물 좀…….”
“네. 여기.”
로버트가 물컵을 들고 주몽의 입에 조심스럽게 흘려 넣었다.
반 컵 정도 물을 받아마신 주몽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좀 살 것 같네.”
살짝 갈라져 있던 목소리가 조금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의사를…….”
“아니요. 안태완 소식부터 보고하세요.”
이번 일의 배후에 안태완이 있다는 걸 확인한 이상, 다른 무엇보다 그자의 신병을 확보하는 게 급선무다.
그를 잡으면 그와 손잡은 자들 또 그를 지원한 자들까지 모두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제이코가 난감한 표정이 됐다.
“반응이 시원치 않네요. 곽준규 부하들이 잡아두었다고 하지 않았나요?”
“네. 청와대에서 직접 안태완 체포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게…….”
“역시 놓친 건가요?”
“안태완을 감시하고 있던 자들은 모두 시체로 발견됐습니다.”
“허…….”
주몽은 어이없는 표정이 됐다.
곽준규도 바보가 아닌 이상 달랑 한두 명으로 감시를 하진 않았을 것이다.
“모두 일곱이 당했고, 총기에 의한 사망입니다.”
“안태완의 조력자 또는 부하들이 함께 움직이고 있다는 말이군요.”
“이명환 대통령이 총력을 다해 수사 중입니다.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겁니다.”
주몽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됐다.
‘꿈을 꾼 게 아니란 말인가.’
주몽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보스…?”
“잠시만요. 생각 좀.”
“네.”
‘꿈이던, 아니면 전이된 기억이었던 간에 안태완은 이틀 뒤, 공해상으로 시체로 발견이 된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만약 이게 현실로 이뤄진다면 이번 전이는 다른 때와 성격이 다르다고 봐야 할 것이다.
‘젠장. 머리가 터질 것 같네.’
주몽은 머릿속에 흘러든 기억들을 하나둘 되새기며 순차적으로 구성을 해나갔다.
‘다른 시간, 다른 세상이 아니라 미래의 기억이라니.’
형태는 기억 전이가 맞았지만, 이번엔 ‘다른’ 내가 아니라 지금의 내가 죽음을 맞이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이 됐다.
‘확인해 보면 알 수 있겠지.’
“로버트.”
“네. 보스.”
“양 과장을 불러주세요.”
로버트는 이유를 묻지 않고 곧바로 양하석을 호출했다.
“제이코, 로버트.”
“네. 보스.”
“말씀하십시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에 어떤 질문도 받지 않을 겁니다.”
“네?”
제이코와 로버트는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언제고 설명할 기회가 생기면 그때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러니 질문은 사절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잘 가지 않습니다만.”
“지금처럼 질문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
주몽이 ‘지금 그거처럼’이라고 지적을 하자, 제이코는 머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로버트 역시 주몽의 말에 의아한 생각이 들긴 마찬가지였지만, 어차피 되물어도 같은 답이 흘러나올 게 뻔했기에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다.
드르륵. 병실 문이 열리고 양하석 과장이 들어왔다.
“아! 대표님 깨어나셨군요.”
양 과장은 반가운 표정으로 재빨리 다가왔다.
“부산에 요트 선착장이 있습니다.”
“네? 아. 네. 알고 있습니다.”
“선착장에 있는 요트 중에 ‘342 아레스’라는 배를 찾으세요.”
양하석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다가 제이코와 로버트를 바라봤다.
뭐라도 좋으니 설명 좀 해 달라는 눈빛이다.
하지만 두 사람도 양하석과 같은 상황이라 딱히 해 줄 말이 없다.
“지금 시간이 몇 시죠?”
“아침 7시입니다.”
“내려가서 요트 위치만 파악해 두세요. 주변에 의심을 사지 않아야 합니다.”
“네.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안태완이 그 배에 숨어 있습니다. 새벽쯤 바다로 빠져나갈 계획이니 그 전에 잡으세요.”
“네? 안태완이요?”
“보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그걸 어떻게 알고 계시는 겁니까?”
세 사람은 내 지시에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질문은 사절입니다. 늦기 전에 움직이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절대 놓치면 안 됩니다. 무조건 살려서 데려와요.”
“네!”
양하석이 병실을 나가자 로버트와 제이코는 금방이라도 질문을 쏟아낼 듯 주몽을 바라봤다.
“그…….”
“그걸…….”
“질문은 사절이라고 했습니다. 나중에,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야기해 줄게요.”
과연 그런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자신 또는 미래의 기억이 전이되고 있다면 그 말을 누가 믿어줄까. 미친놈 취급이나 받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한동안 답답한 표정으로 주몽을 바라보던 두 사람은 ‘알겠습니다.’ 하며 한발 뒤로 물러났다.
어떤 말을 해도 주몽이 입을 열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의사부터 부르겠습니다.”
“네. 그렇게 하세요. 아, 그리고.”
“네. 보스.”
“나를 도와줬던 여자분 말입니다.”
“성희주 씨 말씀이군요.”
“네. 정말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주몽의 말에 로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방송을 봤습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죽었겠죠.”
주몽은 당시 상황을 떠올리며 로버트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도 좋습니다. 은혜를 갚을 방법을 찾아주세요.”
“물론입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그리고 성희주 씨도 지금 병원에 있습니다.”
“네?”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바라보자, 제이코가 대답했다.
“보스만큼은 아니지만, 성희주 씨도 자잘한 상처가 있더군요.”
“여자 몸에…… 흉터가 남게 된 건가요?”
주몽은 난감한 표정이 됐다.
“다행히 심한 상처는 아니고 위치도 드러난 부위는 아닙니다. 잘 치료하면 큰 문제 없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병실 문이 열리며 의사‘들’이 뛰어 들어왔다.
“깨어나셨다고요?”
우르르 떼로 들어온 의사들이 제이코와 로버트를 밀치며 침상 앞에 자리 잡았다.
“회장님의 주치의를 맡은 병원장 김학도입니다.”
“아. 네.”
의사를 부른다기에 상처를 확인할 담당의 정도가 찾아올 거로 생각했다. 그런데 병원장이라는 노인네가 주치의를 자처하며 눈을 번뜩이자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성형외과 과장 형상민입니다.”
“신경외과 과장 신경민입니다.”
“외과장 임장도입니다.”
병원장과 함께 들어온 중년의 의사 세 명이 연달아 자신을 소개했다.
“아. 네…….”
주몽은 연신 얼떨떨한 표정으로 인사를 주고받았다.
“어깨와 옆구리 상처가 깊긴 했지만, 다행히도 내장을 건드리지 않았습니다.”
“얼굴에 난 상처와 몸에 난 상처 모두 흉터가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신경 손상도 없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하늘이 도왔습니다. 회장님.”
의사들은 어떻게든 한마디라도 더 하려고 신경전까지 벌였다.
“저기, 마음 써 주는 건 고맙습니다만, 정신이 어지러워서…….”
“아, 이런! 죄송합니다. 회장님. 구국의 영웅이신 회장님께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병원장이 죄송스럽다는 듯 허리를 숙였다.
과장들 역시 이등병처럼 병원장을 따라 허리를 숙였다.
‘대충 이유는 알겠는데 적당히 좀 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