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장. 먼저 먹는 놈이 임자 아닌가?
“한국 내에서 고주몽의 위치를 어떻게 봐야 하나?”
트롤프의 질문에 국무장관이 입을 열었다.
“대통령과 동급 또는 그 이상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이가 없군. 1년도 안 되는 시간에 그게 가능한 일인가?”
“한국 내 기득권 세력을 밀어내고 국회를 장악한 것도 그렇지만, 상위권 대기업들을 모두 장악한 것이 컸습니다.”
“내 말은. 돈이 있다고 해서 그런 일들이 가능하냔 말이지.”
“여러 상황이 겹친 것도 있지만, 고주몽이 벌인 일들이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거기다 한국의 대통령은 반쯤 허수아비 신세였지 않습니까.”
CIA 국장이 부연설명을 했다.
“그 말은 한국과 관련된 일은 고주몽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게 되었다는 거지?”
“네. 그렇습니다.”
“쯧. 골치 아프군. 완전히 신종 독재자가 탄생했어.”
트롤프의 말에 국무위원들은 내심 어이없는 표정이 됐다.
트롤프야 말로 글로벌 갱스터라는 온갖 욕을 처먹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자신들도 언제 어떻게 트위터로 해고를 당할지 알 수 없어 마음을 졸여왔다.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거나 문제를 제기하면 가차 없이 목을 날려대니 제대로 된 조언을 하기가 겁날 지경이다.
“고주몽이 죽게 된다면 한국은 그야말로 난리가 나겠군.”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국회는 물론이고 대통령과 기업들까지 모두 고주몽 라인을 타고 있어서…… 거의 내전에 준하는 쟁투가 벌어질 겁니다.”
“껍데기만 민주주의지 고주몽 왕국이나 다름없는 신세군. 거기다 후계자나 와이프도 없으니 아주 개판이 되겠어.”
트롤프는 짜증을 내면서도 내심 부러운 표정이 됐다.
자신은 뭐라도 해 볼까 하면 온갖 곳에서 반대를 외쳐대는 통에 골머리를 섞었는데, 고주몽은 뭐가 됐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이끌 수 있는 위치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른 복권 당첨자들은 하나 같이 인생 내리막을 걸었는데, 고주몽 그자는 운도 좋군.”
“제이코 코엔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CIA 국장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선거 지원과 차후 고주몽의 미국 활동에 대해 협상을 하는 동안 제이코는 깔끔한 협상 능력을 선보였다.
“고주몽 사망 시 벌어질 수 있는 매뉴얼을 꼼꼼히 작성해 봐. 한국이야 내전을 겪든 말든 미국에 있는 자산은 우리가 관리해야지 않겠어?”
트롤프는 주몽이 가진 돈과 자신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고주몽은 잠시 미뤄놓고 선거 이야기나 하지.”
“네. 대통령님.”
오전 10시 30분 무렵.
선거 지원과 관련해 한참 회의를 진행 중이던 백악관에 느닷없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고주몽이 헬기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제이코는? 그도 죽은 건가?”
“아직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그걸 말이라고 해? 제이코는 고주몽의 자금집행관이야. 그에게 문제가 생긴다면 약속된 자금을 받을 수가 없다고!”
“CIA와 대사관에 제이코 신병을 확보하라고 지시를 해 두었습니다.”
“고주몽이 죽었다면…… 알렉스를 불러!”
“네. 대통령님.”
역대 대통령 누구보다 돈 계산이 빠른 트롤프다.
제이코의 생존은 둘째 치더라도 고주몽이 진짜 죽었다면 미국 내 그의 자산부터 살펴봐야 했다.
“재무장관.”
“네. 대통령님.”
“공인된 자산 말고 페이퍼 컴퍼니쪽으로 빼돌린 자금들 지금 즉시 조사를 들어가시오.”
트롤프의 지시에 국무위원들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
페이퍼 컴퍼니라해도 비자금이나 불법 자금으로 조성된 계좌가 아니라면 딱히 건드릴 방법이 없다.
종이 쪼가리 회사라 해도 정상적으로 만들어졌고 투입된 자금에 문제가 없다면 법적으로 제재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재무장관의 표정에 트롤프가 한 마디 덧붙였다.
“고주몽이 죽었다면 그와 맺었던 협정이나 시민권도 더는 의미가 없지.”
트롤프의 말에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부터 고주몽에게 주어진 권한이나 혜택은 그의 돈을 미국에 묶어두기 위한 편법에 지나지 않았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트롤프 대통령은 곧바로 문서 하나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직접 사인까지 해서 문서를 내밀자 다들 궁금한 표정으로 트롤프를 바라봤다.
“고주몽과 맺었던 협정이 무효가 됐다는 행정명령.”
“네?”
국무위원들은 잠시 어이없는 심정이 됐지만, 그렇다고 그걸 밖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가 대통령으로 있는 동안 이보다 더 황당한 행정명령도 수차례 받아봤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좀.”
“놉! 고주몽이 죽었다는 게 알려지면 다른 나라들도 발 빠르게 움직일 거야. 내 말이 틀렸나?”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렇다고 우리가 먼저 이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있지. 공개된 재산은 상속세를 때리고 페이퍼 컴퍼니에 들어가 있는 돈은 불법 자금으로 압류조치 하게. 그중 일부는 선거자금으로 쓰일 거고 나머지는 나와 당신들 은퇴자금이 돼 줄 테니까.”
억지에 가까운 이야기지만, 백악관이 마음먹으면 못할 일도 아니다.
‘이런 쪽으로 진짜 머리 잘 돌아가네.’
‘하긴, 다른 나라들도 뭔가 수를 내긴 할 테지. 그 많은 돈을 멍하니 구경만 하진 않을 테니까.’
‘이러다 문제 생기는 거 아냐? 퇴임 전까지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했으면 하는데…….’
국무위원들은 트롤프의 이 명령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될지 나름 머리를 굴렸다. 하지만 트롤프는 그런 시간조차 아까운 모양이다.
“롸잇나우!”
“네. 대통령님.”
트롤프가 작성한 명령서는 곧바로 각 부서에 전달이 됐다.
이민국은 주몽의 시민권부터 무효화시켰고 그와 동시에 그가 받고 있던 혜택도 소멸이 됐다.
재무부와 NSA는 곧바로 주몽의 계좌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가 살아있을 땐 불법이지만, 당사자가 죽어버렸으니 거리낄 게 없었다.
“알렉스가 도착했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주몽의 연결책이자, 미국 내 로비스트 역할을 맡고 있는 알렉스다.
전날까지 제이코와 함께 백악관을 들락거렸기에 근처에 대기 중인 상태였다.
“부르셨습니까.”
“그래. 알렉스. 그쪽으로 좀 앉아봐.”
알렉스는 방 분위기를 살피더니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소식 들었나?”
“네? 어떤 소식 말입니까.”
“고주몽이 죽었다는군.”
“네에?”
알렉스는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많이 놀랐나 보군.”
“그게 지금…… 무슨.”
“방금 한국에서 소식이 들어왔네. 고주몽이 헬기 사고로 사망을 했다는군.”
“…….”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알렉스는 끈 떨어진 연처럼 흐느적 주저앉았다.
주몽과 함께하기로 마음먹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이 무슨 황당한 소식이란 말인가.
“알렉스.”
“네…….”
“그래서 말인데. 방금 고주몽과 맺었던 협의를 모두 무효화시켰네.”
“네?”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 트롤프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트롤프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지시를 내렸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미국 내 자산을…….”
“드러난 자산은 법대로 해야지. 하지만 페이퍼 컴퍼니로 빠져나간 자금은 이제 주인 없는 돈이지 않나.”
‘미친. 지금 대놓고 돈을 빼앗겠다는 건가?’
“우리 중에 고주몽의 재산에 대해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 누군가. 바로 알렉스 자네지.”
“…….”
알렉스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협조하게.”
“고 회장이 죽었다고 해도 제이코가 있습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제이코? 하긴 제이코가 문제로 삼으면 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겠군.”
트롤프는 볼살을 쓱쓱 긁으며 CIA 국장 쪽을 바라봤다.
‘뭐야, 암살이라도 하려는 건가?’
CIA 국장은 난감한 표정이 됐다.
적국 스파이를 잡아 죽이는 것도 아니고, 멀쩡한 미국 시민을 제거하라니.
‘임기 내내 미친 짓을 반복하더니 이젠 노망까지 들어버린 것인가?’
CIA 국장은 작게 고개를 저었다. 불가하다는 표시다.
“이런 오해가 있었나 보군.”
트롤프는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제이코는 훌륭한 미국 시민이지 않나. 그가 위험에 처했다면 당장 구해서 미국으로 데려오라는 뜻이었네.”
트롤프 입에서 구출 지시가 떨어지자, 그제야 CIA 국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드린 것처럼 지시는 내려놨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트롤프가 알렉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알렉스.”
“네. 대통령님.”
“제이코가 돌아오면 둘이서 협조를 잘 해 보라고. 말했다시피 드러난 재산은 나도 건드릴 생각이 없어. 하지만, 주인을 잃고 떠돌게 된 돈까지 모른척할 수는 없는 일이야.”
“무슨 말씀인지 이해했습니다.”
마음 같아선 버럭 화를 내버리고 싶었지만, 적진에 들어와 적들에 둘러싸인 곳에서 알렉스가 할 수 있는 말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좋아. 어서 움직여.”
트롤프는 할 말이 끝났다며 알렉스에게 나가보라고 했다.
차에 올라탄 알렉스는 곧바로 제이코에게 전화를 걸었다.
“젠장. 왜 통화가 안 되는 거야!”
알렉스는 난감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바라봤다.
그때 ‘제이코 고문’이라는 발신인 표시가 뜨며 벨이 울렸다.
“제이코!”
―소식을 들은 모양이군.
“어떻게 된 겁니까? 헬기 사고라뇨. 정말 회장님이 돌아가신 겁니까?”
―다행히도 무사하시네.
“후우…… 천만다행…이 아니라. 백악관에서 사고를 쳤습니다.”
―사고? 무슨 사고?
“회장님의 시민권을 무효로 하고 협의를 파기했습니다.”
―뭐? 아니 어떻게…… 미국에 소식이 들어갔다고 해도 얼마 되지 않았을 텐데?
제이코는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소식이 전해지자 기다렸다는 듯 움직인 것 같습니다. 국무위원들 표정이 떨떠름한 것을 보면 트롤프가 단독으로 일을 지시한 모양입니다.”
―미쳤군. 늙어서 노망이라도 난 건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후우. 자네를 통해 주한미군과 대사관의 도움을 받으려 했는데 이렇게 되면…….
“돌아가서 회장님이 살아있다고 다시 이야기할까요?”
―아니. 그대로 있게. 지금 당장 반대편 선거 캠프로 달려가게.
“이 사실을 알리라는 겁니까?”
―도덕적으로 해서는 안 될 짓을 벌였네. 협의에 따른 시민권이라고 해도 보스는 미국 시민이야! 시민의 안전을 위해 움직이지는 못할망정, 그 틈을 노리고 사유재산을 강탈하려 들다니. 절대 용서할 수 없네.
“일단 알았습니다. 그런데 진짜 회장님은 무사하신 거 맞죠? 헬기가 추락했다고 들었습니다만.”
알렉스는 불안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추락했지. 하지만 구사일생으로 손가락 하나 다치지 않고 살아나셨네.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선거 캠프로 달려가.
“네.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제이코가 표정을 구기자 로버트가 궁금한 눈빛을 보였다.
“백악관에도 보스의 사망 소식이 알려진 모양이군.”
“헬기 추락사고와 사망 보도는 접했지만, 보스가 구사일생했다는 것까지는 모르는 모양이야.”
“그래서? 문제가 뭐지?”
“보스의 사망 소식을 듣자, 보스와 맺었던 협약을 파기하고 시민권을 박탈했어.”
“뭐?”
로버트는 황당한 표정으로 제이코를 바라봤다.
“미국 내 보스의 자산에 손을 대겠다는 뜻이지.”
“미쳤군. 그건 범죄야.”
“그래. 범죄지. 그래서 알렉스에게 반대 진영으로 가라고 했다.”
“선거가 코 앞인데 악수를 뒀군. 트롤프가 끝까지 트롤프했어. 잠깐, 만약 그 소식이 알려진다면…… 다른 나라들도!”
“충분히 가능성 있지.”
“대처방법은 있나?”
“대처하지 않을 생각이야.”
“아니 왜!”
“이런 상황에 뒤통수를 날리는 놈들이라면 함께 할 수 없지.”
제이코가 매서운 눈길로 ‘용서하지 않겠다는’ 표정을 짓자, 로버트 역시 그에 동조했다.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보스는 한국을 완전히 손에 넣게 된다. 다른 나라 시민권은 오히려 발목을 잡게 될 거야. 그들이 알아서 처리를 해주겠다는데 거부할 이유가 없지.”
“일리가 있군. 자국 시민임을 이유로 이것저것 간섭하려 들 수도 있으니까. 각국 관리팀에 연락을 넣어봐. 미국 외에도 비슷한 움직임을 보이는 곳이 있을 수 있잖아.”
“있겠지. 하지만 트롤프처럼 소식을 듣자마자 움직인 곳은 없을 거야.”
제이코가 히죽 웃음을 보였다.
“그 웃음은 뭔가?”
“다른 나라들에도 미국이 움직였다는 소식을 알려주려고.”
“미국이 다 먹어치우기 전에 움직여라?”
“둘 중 하나겠지. 트롤프처럼 뒤통수를 날리거나, 아니면 의리를 지키거나.”
제이코는 각국 관리팀장에게 연락을 넣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호텔을 나갈 수가 없으니 답답해 미치겠군.”
주몽의 연락을 받고 곧바로 출발하려 했지만, 호텔을 둘러싼 군인들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다행히 무력진입은 시도하지 않고 있어서 당장 목숨에 위협을 받고 있지는 않지만, 만에 하나 계엄령이 선포된다면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었다.
“보스의 위치는 아직인가?”
로버트의 외침에 보안팀 팀원들이 고개를 흔들었다.
제이코의 연락과 지시를 받은 각국 관리팀장은 곧바로 각국 행정부에 첩보를 전했다.
<고주몽 회장 헬기 추락 사망. 백악관 시민권 박탈 및 협의 무효 – 자산 강탈 움직임>
고주몽이 사망하고 미국이 그의 재산을 강탈하려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G20 국가들 역시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때 같으면 심사숙고하고 최대한 사태 파악에 나섰을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먼저 치고 나갔다는 첩보가 전해지자, 넋 놓고 구경만 할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이대로 있다간 자신들 나라에 투입된 자금마저 미국 손에 들어갈 수 있다는 위기감에 하나둘 ‘악수(惡手)’를 두기 시작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통합시민권자 고주몽의 신분이 차례로 박탈을 당했고 순식간에 한국을 제외한 모든 국가에서 ‘사망 처리’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