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장. 습격 2
대통령 긴급 조치 (21일째)
체포 명단에서 빠졌거나, 그룹 전략실 하위 부서 또는 번외 팀들은 주인 잃은 개처럼 갈피를 잡지 못했다.
대외 비상팀이 해외 계좌와 협력자들의 자금을 이용해 반격을 가했지만, 이들까지 모두 잡혀 들어간 상황이니 이들은 거의 붕괴 직전에 다다랐다.
이번 일과 관련된 이들은 혼란 그 자체였다.
언제 자신들까지 체포의 손길이 이어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혼란을 틈타 부산에 몰래 숨어든 이가 있었다.
언론 삼사 칼부림 사건 때 모습을 감췄던 안보수석 안태완.
주몽과 청와대의 시선이 다른 쪽으로 시선이 쏠린 틈을 타 웅크리고 있던 그가 다시 움직인 것이다.
안태완은 감춰뒀던 자신의 비선 조직을 움직여 구치소에 수감 중인 재벌 총수들과 연락을 취했다.
면회나 변호사를 통해 만남을 추진했다간 주몽과 청와대의 감시망에 걸려들 수 있었기에 구치소에 수감된 다른 범죄자들을 이용했다.
범죄자들은 자신이 어떤 일에 이용당하는지도 모른 채 안태완의 메신저 임무를 수행했고 재벌 총수들에게 긍정적 답변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안태완이 재벌 총수들에게 제안한 사항은 단순했다.
이대로 죽을 것인가. 아니면 마지막 발악이라도 해 볼 것인가였다.
다른 때 같으면 안태완의 제안을 무시해 버렸을 총수들이지만, 흘러가는 분위기나 국회에서 만들어진 법안이 본격적으로 발의되자 도저히 빠져나갈 방법이 없음을 깨달았다.
이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선 이번 일의 원흉이나 다름없는 주몽을 치워버리는 수밖에 없음을 인정한 것이다.
안태완은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자금이 필요했고 계획에 응한 재벌 총수들은 밖에 있는 가족들에게 안태완을 도우라고 지시를 내렸다.
“미래 자동차 장하성입니다.”
“CK 정혜선이에요.”
“롯세 양상군입니다.”
“코스포…….”
체포 명단에서 제외된 자식들 또는 방계 혈손들이 하나둘 자신을 소개했다.
서른 중반쯤 보이는 장하성을 제외하곤 다들 이십 대 초중반의 남녀다.
“안태완일세. 한때 이 나라 안보수석이었지.”
안태완의 말에 장하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의 시발점이기도 하시죠.”
장하성의 반응은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
안태완이 벌인 일 때문에 주몽의 반격이 시작됐고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 말은 정정하고 싶군. 일을 벌인 것은 내가 아니라 언론 삼사의 총수들이었네. 나는 오히려 반대하는 입장이었지.”
“그런가요? 내가 전해 들은 말은 그게 아니던데.”
미래 자동차 장문구 회장의 혼외 자식. 족보에 오르지 못한 관계로 후계자 명단에선 제외됐지만, 그 덕분에 이번 사태에서 체포되지 않고 살아남은 장하성이다.
다른 이들도 장하성과 비슷하거나 방계에 속하는 자들이기에 운 좋게 살아남았다.
서로 얼굴을 아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오늘 처음 본 거나 마찬가지라 장하성과 안태완의 대화를 지켜볼 뿐 딱히 입을 여는 이들이 없다.
“오해가 깊은 듯하군.”
“오해든 아니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죠. 고주몽을 막을 방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안태완이 고개를 끄덕이자,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이들이 눈을 반짝였다.
“고주몽을 막을 방법이 있다는 말입니까?”
“어떻게요?”
“그다지 신용이 가지 않는군요. 고주몽을 막아요? 뭘 어떻게 막는다는 거죠?”
대왕 그룹 이씨 일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존재. 이연아가 부정적 반응을 보였다.
안태완은 이연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막는다고 표현했지만,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그를 죽이는 방법이라고 해야겠군.”
안태완 입에서 고주몽을 죽인다는 말이 흘러나오자, 다들 표정이 굳어졌다.
“고주몽을 죽인다고 이 일이 해결될 것 같습니까? 그가 죽는 순간 재단이 만들어질 것이고 우리는 영원히 도망자 신세가 될 겁니다.”
“물론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
안태완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일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태완의 반응에 장하성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고주몽을 죽인 다라…… 화풀이는 될 수 있다고 치죠.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죠? 고주몽이 죽으면 아버님이 풀려나기라도 합니까?”
장하성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청와대와 국회가 버티고 있는 한 도저히 빠져나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청와대와 국회가 저렇게 날뛸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뭔가.”
안태완의 질문에 다들 입을 다물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이유기 때문이다.
“고주몽은 저들에게 비빌 언덕이지. 호가호위나 마찬가지고.”
“고주몽이란 구심점이 사라지면 저들의 결속력이 약해진다는 말이군요.”
이연아의 질문에 안태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속력이 약해진다는 말은 저들 중 선을 갈아타는 이들이 생겨날 수도 있다는 뜻이지.”
“국회의원 몇 명 돌아선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닐 텐데요.”
“물론이지. 하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산을 옮기는 것도 작은 한 걸음에서 출발하는 거네.”
“더 들어보죠. 그다음에는요?”
이야기를 하다 보니 장하성은 한 걸음 물러나고 이연아가 대화를 이끄는 구조가 됐다.
“이명환 대통령은 약점이 많은 사람이다. 로비스트에 휘둘렸다고 자신을 변명했지만, 그 과정에 적잖은 돈이 그의 계좌에 흘러들었지. 그래도 명색이 대통령인데 공짜로 부려 먹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비리를 까 발리겠다고 그를 협박한다는 말이군요. 하지만 내가 듣기로 이명환 대통령은 행정부를 완전히 장악했다고 하던데. 그게 통할까요?”
“그 계좌를 관리한 사람이 바로 나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 말을 무시할 수는 없지.”
“…….”
“내가 그동안 잡히지 않고 도망 다닐 수 있었던 이유가 뭐였을 것 같나?”
“당신이 잡히면 오히려 약점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무시했다는 뜻이군요.”
이연아의 말에 안태완은 히죽 웃음을 보였다.
“맞네. 이명환에게 나는 잡아 죽이고 싶은 존재이면서 절대 드러나지 않았으면 하는 턱 밑의 비수이기도 하지. 하지만 내 협박이 먹히기 위해선 보호막처럼 가로막고 있는…….”
“고주몽이 없어져야 하는군요.”
장하성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맞네. 고주몽만 없어진다면 할 수 있는 일이 아주 많아지지.”
“복수 재단에 대응하는 방법도 있나요?”
롯세 양상군이 불안한 눈빛으로 질문을 했다.
계획대로 진행이 된다고 해도 고주몽 사후 발촉될 리벤지 재단이 문제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죽여야 할 사람이 하나 더 있지.”
“그게 누구죠?”
“고주몽의 금고지기.”
“제이코란 미국인을 말하는 거군요.”
“그래. 재단을 만드는 것도 운영하는 것도 그의 역할이니까.”
“제이코란 미국인이 죽는다고 해서 고주몽의 재산과 사람이 모두 사라지는 건 아닙니다만. 그저 시간을 버는 정도가 될 것 같군요.”
장하성의 반론에 안태완이 고개를 흔들었다.
“Go 컴퍼니의 머리와 어깨를 동시에 날려버리면 나머지는 그저 손발에 지나지 않네. 고주몽의 Go 컴퍼니는 뿌리가 아주 옅거든.”
“대응 방법이 따로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요.”
“이 일이 성공한다면 고주몽의 재산은 갈가리 찢겨 나갈걸세. 재단 창설? 그것도 복수를 위한 재단? 제이코가 살아 있다면 모를까. 그마저 죽고 나면 Go 컴퍼니는 주인 없는 돈 자루 신세지.”
안태완의 설명에 다들 긴가민가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말대로 되자면 국가급 권력이 동원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다들 의심스러운 눈초리군. 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네.”
안태완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고주몽과 제이코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면 그다음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약속하지. 언론 삼사가 움직였던 것도 이걸 염두에 둔 작전이었네. 조건은 같네. 성공한다면 모든 걸 가지게 될 것이고…….”
“계획이 실패하면 우리까지 싹 쓸려나간다는 말이겠군요. 언론 삼사는 물론이고 그들과 이어진 재계까지 모두 엉망진창이 되었으니 말입니다.”
“리스크 없는 일은 없으니까. 하지만 이대로 멍청하게 시간을 보냈다간…….”
“이걸로 끝이겠죠.”
이연아가 한 마디 덧붙였다.
“아가씨 말이 맞네. 이걸로 끝이지. 고주몽이 굳건히 뿌리를 내리게 되면 더는 건드릴 수 없는 위치에 올라가게 될 테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총칼을 움직일 수 있는 자금이 필요하네.”
안태완의 요청에 장하성이 잠시 시간을 달라고 했다.
자신들끼리 의견을 수렴하고 안태완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아니면 이대로 조용히 살아갈지 결정을 하겠다고 했다.
“부디 현명한 결단 부탁하네.”
회의는 짧게 끝났다. 사실 복잡할 것도 없는 사안이다.
‘복수냐. 아니면 순응이냐.’
지금 이대로 조용히 살아간다고 해도 이들로선 솔직히 문제 될 게 없다.
재벌이라는 수식어는 더는 쓰기 어렵겠지만 그들이 가진 재산만으로도 부자 소리를 들으며 편히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 의견이 나뉘기도 했지만, 결국엔 모두가 동참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물론, 복수보다는 조용히 사는 쪽을 택한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 이 계획이 성공하게 되면 잡혀 들어갔던 이들이 하나둘 풀려나게 될 것이고 뒤로 물러나 안위를 도모하려 했던 이들은 혈족에게 응징을 당할 것이 분명했다.
마음 같아선 당신들끼리 알아서 하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돈만 있으면 되는 겁니까?”
장하성의 질문에 안태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또 뭐가 필요합니까?”
안태완은 파일 하나를 넘겨줬다.
“이게 뭡니까?”
“연락을 넣어 볼 수 있는 단체들이네.”
“연락을 넣을 수 있는 단체요?”
“킬러 연락처네.”
“왜 이걸 우리에게 주는 거죠?”
“자네들이 직접 움직여야 하니까.”
“…….”
안태완의 말에 장하성은 물론이고 다른 이들도 어이없는 표정이 됐다.
“그러니까. 돈도 우리가 내고 일도 우리가 해야 한다 이 말입니까?”
“안타깝지만 그렇다네.”
“어이가 없군요. 그럼 당신은 뭐하러 이 자리에 온 겁니까?”
장하성의 목소리가 살짝 거칠어졌다.
“메신저네.”
“메신저?”
“본래 내 역할이지. 양측의 의견을 전달하는.”
“…….”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온 것은 총수들의 결단과 지시 사항을 알려주기 위해서네.”
“지금 그러니까. 아버지가 복수를 천명하셨다 이 말입니까?”
장하성의 질문에 안태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 나는 그들의 의견을 받아다 자네들에게 전달한 것에 불과하지.”
“우리는 이런 쪽으로 아는 바가 없습니다.”
장하성은 받아들었던 파일을 안태완에게 넘겼다. 안태완은 파일을 밀어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각자 역할이란 게 있는 법이네. 자네들이 그동안 누려왔던 부와 권력이 어디서 나왔나? 자네들 가문 또는 기업에서 나온 것들이네. 누릴 때는 원 없이 누리고 불리할 때는 등을 돌리겠다? 그런 짓을 했다간 고주몽보다 먼저 죽게 될 거네. 자유를 잃고 감옥에 들어가 있다고 해도 그분들의 수족은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으니까.”
“그럼 그 수족들에게 시키면 될 일 아닙니까!”
“아쉽게도 수족들은 돈이 없네. 움직이고 싶어도 방법이 없지.”
“그 수족들이 누굽니까. 돈은 우리가 댈 테니 그들이라도 연결을 시켜주시죠.”
안태완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군. 나도 알지 못하네. 말 그대로 자네들 집안 어른들의 비선이니까.”
“의견을 묻느니 마느니 했지만, 결국 처음부터 우리가 움직일 수밖에 없는 그런 일이었다는 말이군요.”
“자네들이 이 일을 거부한다면…… 수족들이 움직여서 돈을 빼앗으려 들겠지. 그들로선 뭐라도 해야 하는 상황이니까.”
안태완의 말에 다들 어이없는 표정이 됐다.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은 파일에 모두 담겨 있으니 참고들 하시게.”
장하성은 손에 든 파일이 구겨지도록 꾹 움켜잡았다.
“조언이라도 해 주시죠.”
장하성은 그조차 거부한다면 자신들도 가만있지 않겠다고 했다.
감춰진 수족이 어디서 어떻게 쫓아 올지는 모르겠지만, 막말로 돈을 챙겨서 한국을 떠 버리면 그들도 막막해지는 것이다.
“당연히. 나는 메신저이기도 하지만 조언자이자 협력자이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