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장. 뒤통수는 사절입니다.
박산호가 밖으로 나가자, 주몽과 만남을 기다리고 있던 국방부 장관과 경제부총리가 머쓱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다 들으신 모양이군요.”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데, 문이 살짝 열려 있는 데다 목소리가 워낙 커서…….”
“일이 그렇게 됐습니다. 두 분 부탁도 있어서 나름 노력을 했습니다만. 미안하게 됐습니다.”
“아닙니다. 어쩌겠습니까. 고 회장님 생각이 그런 것을.”
국방부 장관은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아무래도 그게 좋겠군요.”
국방부 장관과 경제부총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발길을 돌렸다.
박산호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주몽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갔습니까?”
“네. 대표님.”
미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배웅했던 박산호는 언제 그랬냐는 듯 씩 웃음을 흘렸다.
“하여간 물에서 건져 놓으면 고마운 줄을 알아야 하는데, 대뜸 봇짐을 내놓으라고 하니.”
나는 못마땅한 표정으로 가볍게 혀를 찼다. 그리고 방 한쪽에 엉거주춤 자리를 잡은 누군가에게 고개를 돌렸다.
“안 그렇습니까. 비서실장님?”
내 질문에 대통령 비서실장 최정민이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면목 없습니다. 회장님.”
“불청객도 돌아갔고, 다시 이야기를 해 볼까요? 이쪽으로 오시죠.”
최정민 비서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소파로 다가와 궁둥이를 붙였다.
박산호 역시 자리를 잡더니 불만 섞인 목소리를 냈다.
“다 죽어가는 걸 살려줬는데, 고마워하기는커녕 그새 딴마음을 먹네요. 비서실장님이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기분이 썩 좋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눈치를 채신 건지.”
최정민이 나를 찾아온 것은 언제까지 청와대에 있을 거냐는 걸 묻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그걸 핑계 삼아 자신이 알아낸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번 일과 관련된 정보를 꺼내기도 전에 내가 먼저 선수를 쳐 버리니 어정쩡한 입장이 됐다.
“그렇잖아요. 대통령이 멀쩡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군대 문제를 왜 나에게 가지고 옵니까.”
“고 회장님 파워가 청와대보다 더 강력하다고 생각해서 그럴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최정민의 말에 나는 ‘하하’ 웃어버렸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대통령과 국방부 장관이 함정을 판 건 아니고요?”
“…….”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해요.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다르다더니. 그새를 못 참고 권력 싸움이라니. 쯧.”
나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대통령님 입장에선 불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을 겁니다.”
“비서실장으로서 대통령을 대신해 변명하는 겁니까. 아니면 권력 속성이 그런 것이니 인정해 달라는 겁니까.”
“…….”
“이명환 대통령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연극을 꾸몄는지 내가 한 번 맞춰 볼까요?”
“비서실장인 저도 깜빡 속았는데 회장님은 연극이란 걸 바로 알아차리셨던 모양이군요.”
“그림자처럼 자리만 지키고 있던 대통령입니다. 한 달 남짓한 사이에 국민 지지도가 90%에 육박하지 않습니까. 행정부 장악력은 그야말로 역대급이죠. 낙하산이 됐든 그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사람들이든. 모조리 쳐내고 자기 사람으로 주변을 채우고 있습니다.”
“아직 빈자리가 많기는 하지만. 네. 그러시는 중이죠.”
“처음엔 좋았을 겁니다. 답답한 마음도 풀리고 원하는 일도 추진할 수 있게 되었으니. 하지만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겠죠.”
최정민이 궁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고주몽이 또 다른 족쇄가 되지는 않을까.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사사건건 간섭을 하고 Go 컴퍼니 사람들이 청와대에 자리를 잡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내 말에 최정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놓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요 며칠 대통령이 보인 태도를 보면 은연중 그런 분위기를 풍겼으니까 말이다.
“대충 볼일 끝났으면 청와대에서 떠나줬으면 좋겠는데, 무슨 생각인지 한 달 넘도록 자리를 지키고 있으니 대놓고 표현은 못 해도 내심 신경이 쓰였을 겁니다.”
“네. 안 그래도 언제쯤 돌아가실지 물어보라고 했으니까요.”
하지만 정작 찾아와선 언제 방을 비워줄 거냐는 질문은 꺼내지도 못했다.
곧바로 군 문제를 걸고넘어지면서 장난도 정도껏 치라는 핀잔만 주워 먹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내가 청와대를 떠난다고 끝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겁니다. 그래서 고민을 했겠죠. 어떻게 하면 고주몽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을까. 뭘 던져줘야 딴생각을 할 틈도 없이 일에만 매달릴까. 청와대 쪽은 관심을 끊어줬으면 좋겠는데…… 뭐 이런 생각들.”
내 말에 박산호가 한 마디 덧붙였다.
“겸사겸사. 대표님 힘도 줄여놓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고 말입니다.”
“다른 한 편에선 이런 생각도 했을 겁니다. 그 와중에 군 개혁을 조금이라도 성공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대박이라고. 손도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으니 말입니다.”
“대표님과 Go 컴퍼니를 너무 우습게 봤습니다.”
박산호는 이명환 대통령의 행태에 생각할수록 화가 난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거기다 궁금했겠죠.”
“어떤 부분이 말입니까?”
“정계와 재계를 손에 넣고 돈도 넘치도록 많은 사람이니 혹시 군대도 탐을 내지 않을까 하는. 막말로 지금, 이 상황에서 군대까지 내 영향력이 미치게 된다면…….”
“대한민국은 고 회장님 소유나 마찬가지가 되겠죠.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무력(武力)은 전혀 다른 성격의 것이니 말입니다.”
최정민의 말에 슬쩍 웃음을 흘린 나는 이명환 대통령의 또 다른 내심을 이야기했다.
“이명환 대통령으로선 내가 어디까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을 겁니다. 뭐, 지금쯤이면 안도의 한숨을 내 쉬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대통령님이 안도한단 말입니까? 바로 전에까진 군과 고 회장님이 충돌하기를 바라고 있다지 않았습니까.”
최정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욕심을 부려서 군과 충돌을 해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하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내가 군까지 손에 넣겠다고 아귀처럼 달려들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았으니. 이쯤에서 멈출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겠죠.”
“대통령님의 생각이 어찌 됐든 회장님은 군과 엮일 생각이 없으시다는 거죠?”
“본래 관심이 없었는데 이번에 생겼습니다.”
내가 어깨를 으쓱이며 ‘군대 먹고 싶어졌어’하는 표정을 짓자 최정민이 움찔 놀라는 표정이 됐다.
“하지만 군은…… 기업과는 다릅니다.”
“다르죠. 기업들이야 돈과 주식으로 사거나 누를 수 있지만, 군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집단이니까요. 고인물이라는 말을 아십니까?”
“내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로 쓰이는지도?”
“의미를 따져 군을 비유한다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고인물 중 하나가 바로 군대 아니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추가로 말을 덧붙였다.
“그렇죠. 고이다 못해 썩어 문드러져서 악취가 넘쳐나는. 좀 거칠게 표현하자면 똥물이 고여서 늪이 됐다고 할 수 있겠네요.”
“지금까지 하신 말씀을 종합해 보면. 대통령님에겐 관심 없는 것처럼 행동해 놓고 결국 군을 건드리기로 하셨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비서실장님 생각은 어떠세요. 내가 군을 건드려서 재계처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보십니까?”
“솔직히 말씀드려도 됩니까?”
“얼마든지.”
“불가능합니다. 군은 절대 외부인의 간섭을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대한민국에 존재하지만, 대한민국과는 전혀 다른 세계니까요.”
최정민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감합니다. 그간 정치인들도 그렇고 정부에서도 그렇고. 말로는 군을 개혁하겠다고 떠들어대지만, 그저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거. 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걸 아시면서도 건드리겠다는 말입니까? 군에서 반발이라도 하는 날에는…….”
“대화가 삼천포로 빠지는 것 같군요.”
“네? 삼천포라뇨.”
“내가 군을 건드린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최정민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알고 싶으세요?”
“알고 싶다고 하면 알려 주실 겁니까?”
“그러면 박쥐 생활부터 청산하세요. 내 편도 네 편도 아닌 그런 모호한 태도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군요.”
“…….”
최정민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자신의 직책을 생각하면 당연히 대통령에게 보고해야 맞지만,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 일러바치자니 후환이 두려웠다.
한동안 자신의 발끝만 바라보고 있던 최정민이 느릿하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최정민의 질문에 나는 씩― 웃음을 보였다.
“그 질문 되돌려주죠. 내가 뭘 해 주면 되겠습니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최정민 실장은 박쥐 생활을 끝내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군 개혁’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얼굴빛이 핼쑥해졌다.
이야기를 마친 최 실장이 반쯤 넋 나간 표정으로 돌아가자 박산호는 흐뭇한 미소로 나를 바라봤다.
“그건 또 무슨 표정입니까?”
“그냥 뿌듯한 마음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마음이 뿌듯해요?”
“기조실 실장으로 살아갈 때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고양감이 차오릅니다. 재벌들 뒷수습이나 하고 살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내가 뭔가를 하고 있구나. 그런 마음이 든다고 할까요.”
“박 부장과는 위치가 다르긴 했지만, 나도 비슷한 일을 했던 터라. 어떤 마음인지 대충은 이해가 되네요.”
“그나저나. 국방부 장관과 대통령이 일을 꾸민 걸 어떻게 바로 알아차리신 겁니까?”
생각할수록 신통방통하다는 표정이다.
“깊이 들여다보며 이야기하자면 설명이 복잡합니다만, 간단히 생각하자면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사건을 보지 말고 상황을 보고 상황을 봤다면 현상을 봐라.
누군가는 득을 보거나 누군가는 손해를 본다.
질량 보존은 물리법칙이지만, 따지고 보면 사람의 시간, 재물, 관계 또한 누군가 더 얻어가면 누군가는 부족하기 마련이라는 로버트의 가르침 덕분이다.
로버트는 설명하는데 대부분 ‘사건’, ‘범죄’를 기반으로 예시를 들었기에 좀 더 과격하고 삭막한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막상 이런 조건을 대입해서 생각하니 평소엔 깨닫지 못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도 좀 알려주십시오.”
“국방부 장관이 처음 찾아왔을 때. 박 부장도 뭔가 이상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 정도야 다들 생각할 수 있는 부분 아닙니까. 멀쩡한 청와대, 대통령을 놔두고 대표님에게 그런 문제를 상의…… 아니 해결해 달라고 찾아온 것부터가.”
박산호의 말에 나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대놓고 군 개혁을 들고 찾아왔다면 좀 달랐을 겁니다. 그건 말 그대로 이명환 행정부가 직접 움직이겠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일 테고 나에게 협조 또는 도움을 구하는 형태니 말입니다. 솔직히 그렇게 나왔다면 머리가 아플 뻔했습니다. 연극이 됐든 뭐가 됐든 이명환 대통령과 나는 같이 움직이는 것으로 국민에 알려져 있으니까요.”
“그럴 수도 있었겠네요. 하지만, 아무리 이명환 대통령이라고 해도 군 개혁은 함부로 꺼내 들 문제가 아니었을 겁니다.”
박산호는 연이어 말을 뱉었다.
“국방부 장관이 됐든, 부총리가 됐든. 두 사람 중 한 명만 나서도 적당히 무마할 수 있는 일을 대표님께 들어온 것이 문제였군요.”
“HH 산업은 우리 리스트에 있지도 않았고 군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규모가 큰 기업도 아닙니다. 막말로 장관이 나서든 부총리가 나서든 적당히 중재만 했어도 마무리될 일이었죠.”
내 말에 박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 잡는 칼에 닭 대가리를 잡아 달라고 요청한 것이 오히려 의심을 산 것이군요.”
“하하하. 비유가 좀 그렇지만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네요. 배우까지 섭외해서 단막극을 꾸민 걸 보면.”
“대표님과 연극을 한판 즐기고 나니 나름대로 재미가 있었던 모양이죠. 그런데 대표님 시나리오에 비하면 완성도가 별로였습니다. 개연성을 좀 더 부각해서 촘촘히 짜왔으면 재미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하하하. 그것도 그렇네요. 뭐, 이야기는 이쯤하고 준비합시다. 나를 건드리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걸 가르쳐 줘야죠.”
다 죽어가는 걸 살려놨더니 은혜도 모르고 뒷공작을 벌였다.
한 번쯤 그냥 모른 척 넘어갈 수 있는 일 아니냐고 물을지도 모르겠지만,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습관 되는 법이다.
다시는 꼼수 부릴 생각을 못 하게 만들어 줄 생각이다.
“차량은 준비 끝났습니다. 바로 이동하시면 됩니다.”
박산호는 ‘흐흐’ 웃음을 보이며 잔뜩 기대 섞인 얼굴이 됐다.
은근슬쩍 주몽과 Go 컴퍼니를 장기 말로 이용하려 했던 이명환이 제 꾀에 넘어가 벌러덩 넘어지는 장면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나는 녹화 방송 싫어하는 거 아시죠?”
“물론입니다. 대표님 발표에 맞춰 긴급 속보로 전국에 쫙 깔릴 겁니다. 한성희 국장이 이쪽으론 전문가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