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장. 그 사람들이 왜?
관사를 나선 이명환 대통령은 상쾌한 얼굴로 집무실에 들어섰다.
주몽의 대국민 사기극에 숟가락을 얹은 뒤, 하루하루가 즐겁고 힘이 넘쳤다.
하릴없이 임기만 채우고 있던 과거의 이명환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국무회의를 시작한 이명환은 구멍이 숭숭 뚫린 자리를 바라봤다.
“민정수석.”
“네. 대통령님.”
“저렇게 계속 빈자리로 둘 수는 없는 일인데.”
이번 사건을 전후로 잘려나간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국정원장은 물론이고 장관들, 비서진 스텝들까지. 그들과 얽히고설켜 있던 이들은 한 사람도 빼지 않고 모두 잘려나갔다.
긴급체제로 임시 운영을 하고 있지만, 문제가 생기기 전에 적당한 사람을 찾아 임명해야 했다.
국무총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언제 그런 계획을 세우셨는지.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대통령과 고주몽의 연계 작전.
라디오 방송을 통해 대담 형식으로 알려진 이 내용은 이명환 대통령의 고뇌와 애환 그리고 와신상담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정작 수시로 얼굴을 마주하고 의견을 주고받았던 자신들은 이와 관련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 보니 여기저기서 질문을 해 와도 답을 할 수가 없었다.
“그간 로비스트들 때문에 얼마나 골머리를 썩였나.”
이명환은 회의 참석자들을 쭉 둘러봤다.
“여기 있는 사람들 가운데, 그들의 시선을 피해 일을 진행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이 있다면 손들어보게.”
“…….”
“나도 그럴진대, 자네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 이런 상황인데 입을 함부로 놀렸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 것 같나. 별것도 아닌 이유로 탄핵을 꺼내 들고 곧바로 압박해 왔겠지.”
참석자들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며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야. 아직 일이 마무리되지도 않았고, 여전히 진행 중이니 그와 관련해선 질문도 답변도 하지 않는 것으로 하겠네.”
“네. 대통령님.”
다들 궁금한 눈빛이지만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재차 묻는 이는 없었다.
총리는 곧바로 대화 주제를 바꿨다.
“그런데 고주몽 회장은 언제까지 청와대에 두실 건지…….”
총리의 질문에 이명환은 ‘흠’ 하고 잠시 고민하는 눈빛이 됐다.
이번 일의 일등 공신을 논하자면 고주몽을 빼놓을 수 없지만, 그렇다고 외부인과 다를 바 없는 고주몽과 그의 사람들을 계속 청와대에 머물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비서실장.”
“네. 대통령님.”
“슬쩍 물어보게.”
“제가요?”
비서실장은 살짝 부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대통령이 ‘그럼 내가 합니까?’ 하는 눈빛을 보이자 최정민은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확인해 보겠습니다.”
“고 회장도 언제까지나 청와대에 머물지는 않을 테니, 그 부분은 신경 쓰지 말고 다들 업무에 집중합시다.”
“네. 대통령님.”
빈자리는 많았지만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평소 이것저것 누군가의 요청, 요구를 전달받는 자리였다면 이젠 온전히 자신의 생각과 지시에 따라 국정이 움직이고 있었다.
“외국의 반응이 어떻습니까?”
“중국은 별다른 반응이 없습니다. 우리 쪽 사건을 보도하거나 논평을 내기엔 공산당에 부담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겠죠. 한국에서 일어난 ‘부정부패 일소’는 그들로선 전염병 같아 보일 테니. 괜히 건드렸다가 그쪽 국민 귀에 들어가게 되면 엉뚱한 곳에서 불길이 일 수도 있다고 그리 생각할 겁니다.”
중국 공산당은 급격한 경제 성장과 함께 일대일로를 외치며 대국굴기에 여념이 없다.
거기다 진핑 주석이 종신집권을 선언하고 황제나 다름없는 자리에 올라섰다.
부정부패 척결을 외치며 공산당을 이끌어 왔는데, 그 명분이 인민들에게 넘어갔다간 궁지에 몰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일본 쪽 반응이 심상치 않습니다. 정권을 빼앗기고 한동안 조용했는데, 극우 인사들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진짜 변함이 없군요.”
“이번 한국 사태를 놓고 후진국에서나 있을 일이라며 연일 비난을 내놓고 있습니다. 제 입으로 말하기 민망합니다만, 일본은 1등 국가라서 아무런 문제가 없고 한국은 3등 국가라서 툭하면 시위가 일어난다고…….”
“쯧쯧쯧.”
이명환은 일본의 행태가 한심스럽다는 듯 혀를 찼다.
“무엇보다 민자당 지지도가 급격히 올라가고 있습니다. 분위기가 이대로 이어진다면 다음 달 선거는…….”
“민자당이 다시 정권을 가져가겠군요. 야베의 재집권이 이뤄질 수도 있고.”
“네.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어떤가요? 뭔가 말이 나올 것도 같은데. 너무 조용한 거 아닙니까?”
“미국도 대선 가도에 들어갔습니다. 외부에 관심을 보이기보다 선거에 집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알겠습니다. 일단 계속 지켜보세요.”
“네. 대통령님.”
각 부처의 보고로 시작된 국무회의는 무난하게 진행이 됐다.
회의가 마무리될 때쯤. 국방부 장관이 입을 열었다.
“대통령님. 장성들의 불만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장성들이 불만이라니.”
“기업 회장들이 구속되고 강도 높은 세무조사가 이어지면서 군납 부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계속 이야기해 보세요.”
“기업들이 제대로 돌아가질 않으니…….”
“기업들이 돌아가질 않는다고 했습니까?”
“네. 대통령님. 납품되어야 할 물건들도 들어오지를 않고 있고, 무엇보다 담당자들이 모두 조사를 받고 있다 보니 군의 요구도 제때 전달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건 문제군요.”
군은 대한민국 최대 소비단체다. 60만이 넘는 인원을 먹이고 재우고 관리하려면 신경 써야 할 것들이 한둘이 아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이 뭡니까?”
“소비재도 문제지만, 군수품 쪽도 문제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경제부총리가 신경 좀 써 주세요.”
대통령의 지시에 부총리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지금도 최대한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만, 기업의 운영 주체가 바뀌는 과정에서 혼란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시를 내려야 할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조사를 받거나 구속이 된 상태라…….”
경제부총리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겠습니까. 그렇다고 겨우 잡아넣은 그들을 다시 풀어 줄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납품 문제가 생겼다고 놈들을 풀어준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식으로 하나씩 고삐를 놔 버리면 곧바로 반격이 들어올 것이다.
전격적으로 체포 작전이 진행된 이유가 무엇이던가. 그들이 대응할 틈도 주지 않기 위해서다.
지금은 고삐를 더욱 당길 시간이지, 느슨하게 풀어줄 때가 아니다.
“시간이 필요한 일이니 불만은 일단 다독여 봅시다. 그들도 나라가 어떤 상황인지 모르진 않을 것 아닙니까.”
대통령의 말에 국방부 장관이 다시 나섰다.
“제가 고 회장을 만나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국방부 장관이 말입니까?”
이명환 대통령은 ‘당신이 뭐하러 고주몽을 만나?’ 하는 눈빛이 됐다.
대한민국에서 고주몽의 위치는 굉장히 특이한 신분이 됐다.
돈은 물론이고 기업과 국회. 행정부까지 손에 넣은 막후 실세라고나 할까.
말인즉, 고주몽과 직접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자들은 누가 되었든 간에 큰 힘을 얻을 수가 있다.
그런 혜택을 받는 자들은 Go 컴퍼니 사람들을 제외하고 극소수에 불과했다. 무엇보다 이명환 본인이 ‘극소수’에 들어간다.
문제점이나 현안에 대해 직접 대화를 나누고 의견을 주고받는 것만으로 대통령 자리가 반석이 됐다.
이는 지금껏 없었던 또 다른 형태의 권력이고 황금 동아줄이다.
국방부 장관은 대통령의 싸늘한 눈빛에 움찔한 표정이 됐다. 그래도 기회가 있을 때 말을 해야만 했다.
다른 분야는 모르겠지만 ‘군’이 불만을 느낀다는 건 또 다른 특이점을 발생시킬 수 있었다.
지금 당장 벌어진 일만으로도 나라가 삐걱거리는데, 여기에 군까지 끼어들게 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말이다.
“대통령님 말씀대로 기업 관련해서는 우리가 손을 대기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을 본래 자리로 되돌릴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요?”
“어찌 보면 이번 사태를 일으킨 사람이 고주몽 회장 아니겠습니까. 문제를 만든 사람이니 해결책도 제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를 만든 사람이 해결해야 한다라…….”
고주몽이 문제를 만든 것은 맞다. 하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고주몽을 공격한 저들에게 있었다.
반격이 과함을 넘어 역대급이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고주몽에게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따질 수는 없는 일이다.
대통령이 마뜩잖은 표정을 짓자, 국방부 장관은 재빨리 말을 이었다.
“대통령님. 다른 곳도 아니고. 군입니다.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되겠지만 만에 하나 군이 소요사태라도 일으키는 날엔…….”
“이것 보세요!”
“네. 대통령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납품 좀 밀렸다고 군이 소요사태를 일으켜요? 군이 쿠데타라도 일으킨다는 겁니까. 요즘 세상에 그런 일이 가당키나 합니까!”
국방부 장관은 대통령의 호통에 잠시 움찔했지만, 이대로 물러설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계속 문제를 제기했다.
“물론 그럴 일은 없습니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국민이 가만있지도 않을 것이고 말입니다.”
국방부 장관의 대답에 이명환은 당연한 소리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대통령님. 군의 특수성을 고려해 주십시오. 납품 문제만 처리하면 될 일 아니겠습니까.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이 부분은 우리가 직접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
“흠. 고 회장을 만난다고 해서 해결이 되겠습니까?”
“현재 대한민국 기업 중에 고 회장의 말을 거역할 이들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건 그렇죠.”
“네. 그러니 고 회장을 만나 지금 상황을 설명하고 도움을 받았으면 하는 겁니다.”
국방부 장관의 말에 다른 장관들이나 부총리까지 지원 사격에 나섰다.
“국방부 장관의 말이 맞습니다. 사실 군 납품 문제를 제외하고도 기업 관련된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닙니다. 혼란이 지속할수록 그 여파는 국민에게 영향을 줄 겁니다. 이는 국정운영에 심대한 타격이 될 것입니다.”
국정운영에 타격이 된다는 말에 이명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기업 내부 문제를 하루라도 빨리 봉합하고 정상화 되기를 바랐다.
“다들 의견이 그렇다고 하니. 좋습니다. 도움을 청해 봅시다.”
대통령의 허락이 떨어지자, 그제야 다들 안도하는 표정이 됐다.
국방부 장관이 총대를 매줘서 망정이지 다른 부처 장관들도 툭툭 튀어나오는 문제들 때문에 하나 같이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폐촌 매입과 저택 공사로 자유로를 오가고 있던 박산호가 간만에 제이코 대신 자리를 지켰다.
제이코가 미국발 요청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태평양을 건너갔기 때문이다.
“대표님. 박 부장입니다.”
“네. 들어오세요.”
안으로 들어온 박산호가 방문객이 있음을 이야기했다.
“누가 찾아와요?”
“국방부 장관과 경제부총리입니다.”
“그 사람들이 왜?”
“군 관련 문제라고 하더군요.”
군? 군대? 군대가 왜. 설마 혼란한 와중을 틈타 소요라도 일으킨 건가? 설마 아니겠지.
과거 못 먹고 못 살 때는 총구를 안으로 돌릴 때도 있었다. 하지만, 21세기 대한민국에선 있을 수도 없는 일이고 만에 하나 누군가 그런 일을 벌이려 해도 병사들이 절대 동조를 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 그런 짓을 벌였던 자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했는지 뻔히 알고 배웠는데 어떤 미친놈이 그 짓에 동참하겠는가 말이다.
“군대 관련이라…… 만나도록 하죠.”
밖으로 나간 박산호는 잠시 뒤, 국방부 장관과 경제부총리를 데리고 들어왔다.
“반갑습니다. 고주몽입니다.”
“국방부 장관 민병석입니다.”
“경제부총리 김만해입니다.”
두 사람은 조심스러운 태도로 나에게 인사를 해 왔다.
두 사람 표정을 보니 딱히 소요사태나 그에 준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은 아닌 듯싶다.
“군 관련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시다고요.”
“네.”
국방부 장관이 곧바로 대답했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런 문제는 내가 아니라 청와대에서 다뤄야 할 문제 아닙니까?”
“그게…… 군 문제인 것은 맞습니다만, 정확히는 군납 문제라고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군납이요?”
나는 더더욱 모르겠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군 문제든 군납 문제든 그걸 왜 날 찾아와서 이야기한단 말인가.
내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자 경제부총리가 나섰다.
“회장님.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
“편하게 말씀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기업 관계자들이 체포되거나 조사를 받고 있다 보니, 기업 운영에 문제가 생기고 있습니다.”
“그래서요?”
“군수업체들도 이번 사태에서 빗겨나지 못했고…….”
경제부총리는 말을 하면서도 계속 내 눈치를 봤다.
무슨 말을 하려고 저렇게 눈치까지 봐가며 질질 끄는지 모르겠다.
“요점만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업체 관계자들에게 선처를…… 해 주시면 어떨까…….”
경제부총리가 더듬더듬 입을 열자, 국방부 장관이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60만입니다. 그들이 하루에 소비하는 물품만 해도…….”
뭐야. 그러니까. 지금 군대가 먹고 쓰고 소비할 물품이 없다고 그러는 건가? 군대가 원룸 자취방도 아니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저기요.”
“네. 회장님.”
“네. 고 회장님.”
“저 군필잡니다. 병장 만기 전역했죠.”
“네?”
“아…….”
뭐야. 군대 갔다 왔다는 말이 이렇게 놀랄 일이야? 눈까지 동그랗게 뜨고 그러실까.
“상식선에서 이야기하죠.”
“네. 회장님.”
“외부 보급 없이 자체 비축만으로 한동안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게 군대 아닙니까.”
“그건 그렇습니다만…….”
“무기도 그렇고 식량도 그렇고. 군 작전에 맞춰 운용할 수 있도록 보급창이 존재하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
“대한민국 군대가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 사는 일용직도 아니고. 한 달도 안 돼서 먹고 마실 게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그게…… 관리체계가…….”
“보급창 잔여 물품이란 게…….”
지금 뭐라는 거야.
“회장님이 사병으로 전역을 하셔서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사병으로 전역해서 잘 몰라?
이 인간들이 미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