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장. 방법을 알려주시던가요!
주몽이 청와대 방문을 하면서 Go 컴퍼니 주력을 모두 이끌고 나타난 것은 신변 안전에 대한 이유도 있었지만, 이번 신세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가장 안전하고 즉각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장소라 판단한 점이 컸다.
대통령 섭외와 함께 프로젝트가 곧바로 발동되도록 설계를 했기 때문에 이곳저곳 이동하는 시간마저 아끼려는 것도 있었고 누군가 반격을 하고 싶어도 ‘청와대’란 장소 자체가 건드리기 굉장히 부담스러운 곳이기 때문이다.
호텔을 공격하는 건 말 그대로 공격의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청와대를 건드리는 것은 국가 반역이라는 무시무시한 죄를 뒤집어쓸 수도 있었다.
거기다 천기득 회장의 위치를 이용해 그룹 회장들을 한 곳에 모아 놓은 것도 회심의 한 수가 됐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기업 총수들을 일시에 확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대통령에게 청와대가 방파제라면 그룹 총수들에겐 회장실이 자리 잡은 기업 본사가 그와 같은 장소다.
아무리 검찰과 경찰이 치고 들어간다고 해도 긴급체포는 말 그대로 신병이 확보되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영장도 없이 본사로 쳐들어가 봐라.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은가. 그야말로 난장판이 벌어질 것이고 이들의 진입을 막는 동안 그룹 차원에서 대응책을 마련하거나 총수를 안전한 장소로 피신시켜 본격적으로 전쟁에 들어갔을 것이다.
이익현 차장이 준비한 검사 하나가 말했듯이 이번 긴급 체포 작전은 ‘금적금왕’이 핵심인 것이다.
“총수 확보 완료! 다음은 그룹의 전략기획실이다!”
지휘부가 붕괴한 군대는 명령체계가 무너지기 마련이다.
그룹 총수가 긴급체포되고 참모부라 할 수 있는 본사 비서실을 털어버리자 계열사 사장들은 총 한번 쏴 볼 기회도 얻지 못하고 줄줄이 무너졌다.
“명령체계 무너졌다. 이제 계열사 사장들 확보해!”
검찰이 금적금왕을 성공시킴과 동시에 경찰이 하부 조직을 털어버렸다.
“용역들 잡아들여!”
“국세청 조사팀 들어간다! 파쇄된 문서 쪼가리도 싹싹 긁어모아!”
대공 방어가 무너지자 국세청 조사팀이 공수부대 침투하듯 본사로 투하됐고 이번엔 사람이 아니라 서류를 탈탈 털어버렸다.
“영장은? 빨리 영장 가져와!”
영장을 발부하기 위해 판사 방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후방부대는 대통령 시국선언이 발표되고 방송을 통해 그들의 비리와 범죄 자료가 쏟아지자 망설임 없이 판사 공략에 들어갔다.
“판사님. 도장 찍어 주세요.”
“이게 다 뭔가? 무슨 영장을 수백 장씩이나 들고와? 뭐? 지금 당장 영장을 내 주라고? 장난해? 이거 읽어보는 데만 한 세월이겠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희도 이거 만드느라 죽는지 알았습니다. 일단 죄명부터 보시죠.”
“이게 뭐야. 국가전복기도? 쿠데타 모의?”
판사는 영장에 적힌 죄목을 보더니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이 됐다.
“이건 아직 대외비입니다만, 한 번 읽어보시죠.”
영장을 받으러 온 검사는 일급보안이란 스템프가 찍힌 파일 하나를 건넸다.
“그…… 그러지.”
판사는 심각한 표정으로 내용을 살피더니 식은땀을 흘렸다.
국가전복, 쿠데타라는 죄명과 연관된 인사들이 거미줄처럼 엮여 있었다.
법원은 물론이고 검찰청, 경찰청, 고위 공무원까지 모두 망라가 되어 있었다. 거기다 이름만 대면 알법한 법무법인도 낚싯바늘에 꿰인 물고기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누군가 내부고발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이런 문서가 만들어진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 이게 무슨!”
“영장 발행 거부인가요?”
영장을 산더미처럼 들고 판사실에 찾아간 검사는 의미심장한, 그리고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마치 ‘같이 털리실래요?’라고 묻는 표정이다.
“이것들이 나를 뭐로 보고! 나 눈치 있는 판사야!”
다른 때 같으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거나 경제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영장 치기를 거부했겠지만, 이번엔 버틸 재간이 없었다.
나라가 발칵 뒤집히고 긴급체포 작전이 펼쳐짐과 동시에 그들의 범죄 행위가 방송에 공개됐는데 영장을 주지 않는다?
판사란 지위가 아무리 철밥통, 안하무인이라고 해도 그런 짓을 했다간 쓰나미에 쓸려버릴 것이다.
“역시 판사님. 언제나처럼 대세를 아시는군요. 역시 현명하십니다.”
“크흠.”
판사가 어색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했다.
“뭐 하세요. 시간 없습니다. 어서 찍으세요. 도장!”
판사들은 책상에 놓인 체포영장과 수색영장에 기계처럼 도장을 찍어댔다.
워낙 발행 영장이 많다 보니 도장만 찍는 대로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
“영장 나왔다! 뛰어!”
판사실 앞에 대기 중이던 검사와 수사관들은 영장이 발행될 때마다 법원을 뛰쳐나갔고 법원의 다른 부서로 달려 들어가기도 했다.
준비한 영장은 체포와 수색만 있는 게 아니라 자산 동결에 대한 영장도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작전에서 총수와 그룹 참모부 다음으로 중요시한 자들이 있는데, 바로 사주 일가의 측근 또는 비서들이다.
가까운거리에서 이들을 보좌하고 또 이들이 친 사고를 수습하는 대가로 월급을 받는 자들. 평소 같으면 이들까지 손을 뻗칠 일이 없었겠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주몽이 직접 ‘지정’한 타깃들이다보니 누구도 소홀히 생각지 않았다.
“범죄은닉 혐의로 체포합니다.”
사주 일가 측근 포섭 작전은 생각보다 큰 힘을 발휘했다.
다른 때 같으면 감옥에 가면 갔지 절대 입을 열지 않을 자들이다. 입을 꾹 다물고 콩밥 좀 먹고 나오면 충분할 만큼 ‘보수’가 지급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태가 심각하게 돌아가고 신당의 법안 통과가 확실히 되자 다들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여기서 삐끗 발을 잘못 디뎠다가는 감옥에 가서도 사주 일가를 모시게 생긴 것이다.
물론 그렇게 해서라도 일확천금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도전해 볼 법도 했지만, 이번엔 상황이 달랐다.
“범죄은닉죄라고 해 봤자, 끽해야 3년이야. 다들 입 다물어!”
경력 좀 있다는 측근들이 입단속에 나섰지만, 검사들은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그들을 바라봤다.
“아저씨들 바보야? 범죄은닉만 따지면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한 번도 아니고 반복적으로 은닉을 저질렀어. 이게 그냥 넘어갈 일처럼 보여? 뭘 알고서 떠드시는 건가?”
“에?”
“그것뿐인지 알아? 처음 한두 번은 명령에 따라서 움직였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게 반복되면 뭐다? 이건 단순히 범죄은닉이 아니라 협조, 공모를 넘어 공범으로 취급받는다고.”
“에에?”
“이 검사야. 국회 방송 좀 틀어줘라. 아저씨들이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르시는 모양이다.”
국회방송? 측근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바라봤다.
“자, 지금 보고 계시는 장면이 오늘 국회에서 통과된 내용이에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드리자면 우리나라에서도 드디어 징벌적 손해 배상이 가능해졌고 사회 지도층의 윤리 범죄에 대한 처벌이 강화가 됐어요.”
“…….”
“그리고 헤드라인 클럽 사건들 다들 아시죠? 하긴 모를 수가 없겠다. VIP 명단 보니까. 그쪽 도련님들도 만만치 않게 드나들었던데.”
“…….”
“그동안 성범죄 관련해서 좀 뜨뜻미지근했었잖아요. 거기다 술 마시고 사고 치면 심신미약이니 뭐니 해서 잡은 것도 다 풀어주고 그랬단 말이죠.”
“…….”
“이제 그런 거 없습니다. 음주, 약물 복용에 의한 범죄 행위는 가중처벌 받도록 이번에 법이 바뀌거든요. 말인즉. 술 먹어서 기억이 안 난다고 할 경우엔 1년 받을 것 3년. 3년 받을 것 5년. 뭐 이런 식으로 뻥튀기 형량이 들어간다고 보면 돼요.”
“우…… 우리는 술 먹고 그런 적 없는데요.”
“그래요? 자, 그럼 따져봅시다. 어우. 뭐가 이렇게 많아. 당신들 완전히 포주네.”
“에에에?”
“술은 안 마셨지만, 술 먹은 애들 뒤치다꺼리를 너무 험하게 하셨네.”
“그…… 그게 무슨.”
“그렇잖아. 대한민국 처녀들을 수시로 강간하고 임신시키고 불법 낙태까지.”
“내…… 내가 그런 게 아니라.”
“알지. 당신이 모시는 분들이 그런 거.”
“그러니까요.”
“그런데 그걸 알고도 방치하고 협조하고 여자들을 찾아가 협박까지 하셨네? 쯧쯧쯧. 보니까 학교도 좋은데 나오셨던데, 이러려고 대기업에 들어가셨나?”
“…….”
“아까 말했죠. 은닉도 반복이 되면 뭐다? 공모다! 아, 아저씨들은 강간 공모 외에도 협박 등의 추가 범죄 행위가 있으니…….”
“젠장, 나라고 그러고 싶었겠냐고!”
“내 말이! 그러니까. 같이 똥 되지 말고 빠져나오라고. 왜 그렇게 미련하게 구셔?”
“아이씨! 그럼 방법을 알려주시던가요!”
“네네. 고갱님. 지금부터 그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검사들의 집요한 압박과 회유 작전, 거기다 양심선언에 따른 감형 협상(플리바게닝)이 미끼처럼 주어졌다.
물론 대한민국 형법상 플리바게닝은 불법이지만 말만 그럴 뿐 이미 오래전부터 사용해오던 협상 방식의 하나다.
불법이니 합법이니를 떠나 기소권을 가진 검사는 구형을 결정하는데 결정적 권한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말만 불법이지 거의 사문화된 법이나 다름없다고 보면 될 것이다.
무엇보다 검사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측근을 잡아 넣는 게 아니라 측근만 알고 있는 은밀한 범죄 또는 장소 등이다.
측근들이 입을 열기 시작하자, 주몽과 검찰이 확보했던 로비 관련, 클럽 관련 자료 이상의 대박이 터지기 시작했다.
추가로 수색영장이 떨어지고 그룹 총수와 사주 일가의 은밀한 취미 생활이 세상이 까발려졌다.
“JTB 한성희가 알려드립니다. 지금 제가 나와 있는 곳은 경기도 야산의 자리 잡은 별장 건물입니다. 현화 그룹 김홍석 회장 일가 소유로 알려진 이곳 별장에서 엄청난 양의 도자기와 그림이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하나같이 국보급 유물들이고 이 중엔 도난신고가 되어 있거나 거래 불가 물품도 포함이 되어 있다고 합니다. 검찰과 국세청은 불법 비자금의 일부로 보고 즉각 압수 작업에 들어갔으며…….”
“채널 TV에서 속보로 알려드립니다. 건설회사 소유로 알려진 이 별장은 성 접대에 이용된 것으로 보이며…….”
“분식회계 장부가 마룻바닥에서 발견이 됐으며…… 이는 주가 조작에 사용된…….”
하나둘, 측근들이 배신하거나 양심선언을 시작하자 또 다른 범죄 행위가 튀어나오며 검찰의 2차전이 시작됐다.
영장 판사들은 밀려드는 영장에 파묻혀 도장 찍기 야근에 돌입했음은 당연한 일이다.
“판사님. 피곤하시죠? 어깨 주물러 드릴까요? 괜찮다고요? 자자, 그럼 바까스 한 병 쭉 들이키시고.”
“뭔 놈의 영장이 이렇게 끝이 없냐고!”
밤새 도장을 찍어대며 야근하는 판사 덕분에 판밀레라는 신조어가 새롭게 탄생했다.
* * *
“무디스와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에서 이번 사건에 연루된 기업의 신용점수를 대폭 떨어트렸습니다!”
“오케이!”
“주가 더 내려갑니다!”
“쓸어 담아!”
“CT 그룹. 32% 확보!”
“미래중공업 4.5%!”
“연기금에선 연락 없어?”
팀장의 외침에 곧바로 답이 튀어나왔다.
“매각 금액을 높여 달라고 합니다.”
“웃기고 있네. 닥치라고 해. 버티면 버틸수록 자기들만 손해지.”
팀장은 재고할 가치도 없다는 듯 날카롭게 선을 그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대화에 끼어들었다.
“연기금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은 손해 보지 않는 선에서 모두 구매해.”
“네? 1% 차이만 나도 수백억 차이가 발생합니다.”
“시장에서 주워 올리는 것으론 필요한 지분을 모두 확보할 수 없어. 어중간하게 간만 보다가 연기금이 홀딩에 들어가면 오히려 골치가 아플 수 있으니. 그쪽에서 판다고 할 때 모두 받아와. 이번 전쟁은 돈이 아니라 시간 싸움이니까.”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정체가 불분명했던 외국계 자본 확인 됐습니다.”
대왕 증권에서 파견 나온 직원이 나를 바라봤다.
“환차익 노린다는 자금 말인가요?”
“아닙니다. 그쪽은 정체가 확실합니다. 이쪽은 움직이는 성격이 전혀 다릅니다. 아무래도…… 검은 머리 외국인 같습니다.”
“검은 머리 외국인? 신뢰도는 얼마나 됩니까?”
“미국에서 넘어온 자료입니다. 신뢰도는 78%입니다.”
미국에서 넘어온 자료라면 알렉스가 보내온 자료다.
지금이야 변방으로 물러났지만, 한때 재무부 차관 자리에 있었으니 내밀한 자료까지는 확보가 어렵겠지만, 자금의 성격 정도는 인맥을 통해서 확인한 모양이다.
“재미있네.”
검은 머리 외국인으로 통칭하는 이들은 말 그대로 외국계 자금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국내 자금을 뜻한다.
한때 돈을 사랑하는 각하가 등장하면서 꽤 유행했던 용어이기도 하다.
“그래서 놈들의 움직임은?”
“우리처럼 국내 기업의 주식 확보에 나섰습니다.”
한 마디로 Go 컴퍼니와 경쟁자라는 소리다. 그런데 이게 백기사를 자처한 것인지 아니면 이 틈에 한몫 단단히 챙겨보겠다는 것인지 감 잡기가 힘들다.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연락해. 금감원이 출동할 때라고. 그리고 로버트에게도 자료 넘겨. 전주 확인하고 만약 기업 총수나 그쪽 관련 자금일 경우. 불법 자금으로 신고해서 막아. 미국 쪽에도 범죄 행위와 관련된 자금임을 알리고 협조 요청하고. 알렉스의 도움을 받으면 될 거야.”
“네. 보스!”
일단 지시는 내렸지만, 이런 자금의 경우 출처를 확인하기 쉽지 않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주식 확보 전쟁은 길어야 일주일이다. 그 안에 검은 머리 외국인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뒷일이 복잡해질 수도 있었다.
“방법이…… 이런 쪽에 전문가가 있다면 좋겠는데.”
내 중얼거림에 제이코가 한마디 거들었다.
“천 회장님에게 연락을 해 보시면 어떻겠습니까?”
“아! 있군요. 전문가가.”
천기득은 대왕 일가의 비자금은 물론이고 불법 자금 관리까지 수십 년 넘게 들여다본 사람이다. 금감원이든 뭐든 천기득의 노하우를 쫓아 올 수 없을 것이다.
“도움 요청하세요.”
“안 그래도 통화 버튼 눌렀습니다.”
제이코가 씩 웃음을 흘리며 스마트폰을 흔들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