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장. 스탠바이. 액션. 스타트! 3
“그게 끝이 아닙니다.”
“끝이 아니다뇨?”
천기득의 말에 회장들은 물론이고 김홍석 역시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고 회장이 G20 통합시민권자라는 건 모두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천기득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고 회장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각국 정부는 아, 여기서 한국 정부는 빼겠습니다.”
천기득은 계속 말을 이었다.
“김 회장 아들이 건드린 그 직원들은 단순한 직원이 아닙니다. 각 정부에서 파견된 ‘공무원’들이죠.”
“그러니까. 지금 그 말씀은…….”
“클럽 사건은 단순히 약물과 강간미수만 얽혀있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외교부 소식통에 의하면 각국에서 엄청난 항의가 밀려들고 있다고 합니다.”
현화 김홍석은 전혀 모르고 있었던 일이라는 듯 당혹감 섞인 표정이 됐다.
“그…… 그런 말은 전해 들은 바가 없습니다!”
김홍석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언성을 높였다.
“이명환 대통령이 외부로 말이 퍼지지 않게 막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게 알려졌다간 그야말로 현화 그룹뿐 아니라 대한민국에 망신살이 뻗치는 일이니 말입니다.”
“…….”
천기득은 재차 말을 이었다.
“앞서 말했다시피 고 회장은 통합시민권자이고 그는 어디서든 소송을 걸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천기들의 말에 김홍석 회장은 낯빛이 칙칙해졌고 다른 회장들은 측은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군본석 회장이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고 회장 밑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대왕이나 선진, 진영처럼 Go 컴퍼니를 지주회사로 두라는 그런 의미겠죠?”
“네. 군 회장님.”
“Go 컴퍼니와 한 식구가 되면 서로 싸울 일도 없고 말입니다.”
“굳이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서 제 살 깎을 이유가 없어지는 거죠. 시간이 없습니다. 내가 가진 정보에 의하면 이명환 대통령의 공격은 늦어도 내일. 빠르면 오늘입니다. 여러 회장님들에게 긴급히 만남을 요청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고 말입니다.”
“그…… 그게 정말입니까?”
“아니. 어떻게. 우리 쪽 정보에 의하면 두문불출하며 자리만 지키고 있다고…….”
“불가능합니다. 이명환이 공격에 나서려면 검찰이든 국세청이든 움직여야 할 텐데 아무런 낌새도 없지 않습니까.”
“내 말을 믿든 믿지 않든 그건 회장님들 선택입니다. 나는 단지 이 위기를 빠져나갈 방법을 알려드리려 모임을 소집한 거니 말입니다.”
천기득은 지금부터 벌어지는 모든 일은 회장들 선택에 달려있다며 한 걸음 물러섰다.
천기득 회장의 말에 군 회장은 물론이고 다른 회장들 역시 표정이 복잡해졌다.
천기득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꺼냈는지는 알겠지만 그렇다고 회사 지분을 고주몽에 넘기기엔 어딘지 꺼림칙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불편한 기분이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얼마 되지 않아 다들 알아차렸다.
‘대왕 일가가…….’
‘순식간에 사라졌지.’
‘경영에 대한 간섭은 없지만…….’
‘증명되지 못한 자가 피붙이라는 이유로 회사에 붙어 있는 건 용납되지 않을 것이다.’
‘자칫. 회사는 물론이고 일가 전체가 그룹에서 쫓겨나는…….’
점차 회장들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명환과 신당의 공세를 피해 고주몽이라는 우산을 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겠지만, 그러다 대왕 일가처럼 땡전 한 푼 없이 쫓겨나게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휩싸인 것이다.
회장들은 검찰과 국세청을 등에 업은 이명환과 싸울 것인지. 아니면 위험을 무릅쓰고 고주몽 밑으로 들어갈 것인지 가부간에 결정을 내려야 했다.
회장들은 삼삼오오 끼리끼리 모여 의견을 주고받았다.
홀로 자리에 앉아 고민을 거듭하고 있던 군본석 회장이 천기득에게 다가갔다.
“천 회장님.”
“네. 군 회장님.”
“그 선택…… 지금 해야 합니까?”
“군 회장님. 조언 하나 드려도 되겠습니까?”
“기쁘게 듣겠습니다.”
“고 회장은 소유할 뿐 지배하지 않습니다.”
“흠.”
“단, 한가지 규칙이 있습니다.”
“규칙이라면…… 어떤.”
“딱히 규칙이라기도 뭐합니다만, 능력 없는 자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회사 망치는 짓은 절대 두고 보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은…….”
“네. 아무리 회장님 핏줄이라고 해도 능력이 없는 자는 절대 회장 자리에 오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저 지분을 가진 대주주로써만 존재하게 되겠죠. 아, 잠시만요. 전화가 와서.”
“네. 받으시죠.”
군본석이 잠시 뒤로 물러나자, 천기득은 전화기를 귀에 가져다 댔다.
“호, 역시 그렇게 되었습니까? 알겠습니다. 이쪽도 마무리하도록 하죠.”
천기들은 통화를 끝내더니 정진호와 한중근에게 손짓했다.
“연락이 왔군요.”
“그래. 왔다.”
“어떻게 되었다고 합니까?”
천기득은 두 사람 질문에 씩― 웃음을 보였다.
정진호와 한중근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자리에 앉아라. 마무리 지을 시간이다.”
“네. 형님.”
“네. 숙부님.”
주몽의 봉신 가(家)로 자리를 잡기로 한 세 사람은 언제부터인가 형님, 조카, 숙부로 서로를 호칭했다.
천기득이 다시 자리에 앉자, 회장들도 분분히 자리를 찾아갔다.
“지금 결정을 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말입니까?”
“네. 청와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급하게…….”
회장들은 고민할 시간조차 너무 촉박한 것 아니냐며 천기들을 바라봤다.
“Go 컴퍼니를 지주회사로 하겠다는 분들은 이곳에 머물러 주시고. 이명환 정부와 전쟁을 치르겠다는 분들은 나가주시면 되겠습니다.”
천기들은 시간을 확인하더니 다시 말을 뱉었다.
“5분 드리죠.”
50분도 아니고 5시간도 아니고! 달랑 5분?
회장들 표정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최후통첩도 아니고 너무 하는 것 아니냔 표정들이다.
“3분 남았습니다.”
천기득이 결정을 촉구하자,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는 이들이 생겼다.
“독재자 밑에서도 살아남은 내가 급도 안되는 이명환에게 고개를 숙인다? 어디서 튀어나온 지도 모르는 벼락부자 놈과 손을 잡아?”
미래 자동차 회장 최형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력은 유한하지만 금력은 무한하다는 말이 있소. 이명환 정부가 아무리 난리를 쳐도 2년 남짓이요. 그까짓 전쟁 못 할 것도 없지.”
최형석 회장이 금력무한이라는 명언과 함께 자리를 비웠다.
재계 2위 미래 자동차가 전쟁을 선포하자 그에 기다렸다는 듯 그에 동조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5분이라는 시간이 채 흐르기도 전에 회의실 내부엔 소수의 사람만 남겨졌다.
“군 회장님은 왜 가지 않으신 겁니까?”
천기득 회장의 질문에 군본석이 대답했다.
“내 예상이 맞다면 말이요.”
“네. 회장님.”
군본석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JJ 그룹 이옥선 회장과 대산 그룹 류덕철 회장을 바라봤다.
“여기 남은 회사들을 제외하곤 주식이 곤두박질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시오?”
군본석 회장의 말에 이옥선 회장과 류덕철 회장이 천기득에게 시선을 돌렸다.
“역시 군 회장님입니다.”
천기득이 고개를 끄덕이자 군 회장은 ‘역시’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눈치를 채신 겁니까?”
“처음엔 나도 아리송했습니다. 아무리 천 회장님이 대왕을 이끌고 있다고 해도 오늘 이곳에 모인 이들은 하나 같이 대기업 총수들 아닙니까. 자존심도 그렇고 자신들이 가진 힘을 절대 내려놓을 사람들이 아니죠.”
“하지만 군 회장님은 남으셨지 않습니까.”
“나도 나가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문득 대왕과 진영, 선진의 예가 떠오르더군요.”
JJ의 이옥선 회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요?”
“네. 대왕도 그렇고 다른 두 그룹이 지주회사 설립과정에 있었던 일 말입니다.”
군본석은 천기득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Go 컴퍼니는 소리소문없이 대한민국 재계 1위 그룹과 8위 그리고 13위 그룹을 동시에 집어삼켰죠.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뿐더러 사주 일가가 모두 감옥에 가지 않았습니까.”
군본석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이명환 대통령의 공격이라…….”
군본석은 천기득을 바라보며 웃음을 흘렸다.
“겉보기에만 그렇지 이건 고주몽 회장의 공격 선언입니다. 천 회장님. 내 말이 틀렸습니까?”
천기득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런 생각도 들더군요. 고 회장이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대한민국 기업들을 모조리 휘하에 집어넣을 정도는 아니거든요. 그게 쉽사리 될 리도 없고.”
대산의 류 회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하지만, 기업을 이끌고 있는 회장과 그 일가의 비리가 전면에 터져 나오고 국민의 원성이 하늘을 찌른다면 어떻게 될까요.”
“…….”
“이명환 대통령의 공격도 고 회장이 그린 그림 속에 포함되어 있는 건 아닌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왜 이렇게까지 일을 키우는 것인지는 의문입니다만.”
군 회장의 말에 천기득이 입을 열었다.
“잠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의문을 풀어주시는 겁니까?”
“의문을 풀어드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그 전에 선행되어야 할 작업이 있지 않습니까.”
“흠. 오늘 바로 지분문제를 건드리는 겁니까?”
“PG 그룹이 구멍가게도 아니고 하루 사이에 그게 가능할 리 없죠. 하지만, 그에 따르는 작업 정도는 해 둬야. 저도 그렇고 회장님도 맘 편히 이야기를 나누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겸사겸사 재미있는 장면도 준비해 두었으니 같이 보시면 좋을 겁니다.”
회의실에 남았던 세 사람은 천기득과 정진호, 한중근을 따라 옆방으로 이동했다.
“앉으시죠.”
군 회장과 이옥선, 류덕철 회장이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자, 한중근 회장이 TV 화면을 켰다. 그런데 정규 방송이 아니라 호텔 로비가 고화질 영상으로 나타났다.
“이게 뭡니까?”
“선택의 결과입니다.”
“선택의 결과?”
잠시 뒤, 회의실을 나갔던 회장들이 삼삼오오 모습을 드러냈는데, 그들 앞으로 시커먼 양복을 입은 자들이 나타났다.
“설마, 회장들에게 폭력…….”
“그럴 리가 있습니까. 로비에 저 사람들. 모두 검찰에서 온 겁니다.”
“검찰!”
“그 말은…….”
“네. 이명환 대통령의 재가가 떨어졌습니다. 이곳에 남으신 군 회장님과 이 회장님 그리고 류 회장님을 제외하곤 모두 현장에서 체포가 될 겁니다.”
“그룹 회장을 현장 체포한단 말인가요?”
이옥선 회장은 그게 가능하겠냔 표정이다.
“말했지 않습니까. 조성일보 홍 회장이 엄청난 증거자료를 남겨놨다고.”
천기들 입에서 조성일보 홍 회장 이야기가 흘러나오자, 떠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세 사람도 뜨끔한 표정이 됐다.
“약속드린 것처럼 세 분은 장부에서 이름이 지워질 겁니다. 하지만, 고주몽 총회장님의 제안을 거부한 저들은…… 법대로 처벌을 받겠죠.”
천기득의 말에 류덕철 회장이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법대로라면…….”
“신당에서 발의한 법안은 오늘 즉시 통과가 될 것이고, 대통령 시국선언과 긴급조차 명령에 따라 통과된 법은 곧바로 발동될 겁니다.”
보통은 법이 통과돼도 예외 기간을 둔다.
이러이러한 법이 만들어졌다는 홍보도 겸하고 미처 알지 못한 사람들에겐 ‘예비 경고’가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 긴급조치가 발동되고 국회가 이를 승인하면 예외 기간 없이 곧바로 법령에 적용을 받게 된다.
“지옥이 펼쳐지겠군요.”
군본석 회장은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만에 하나 저들과 함께 회의실을 벗어났다면 자신도 같은 처지가 됐을 것이다. 스스로 존경받는 경제인이 되고도 노력해왔지만, 세상을 어찌 마음먹은 대로 살 수 있겠는가.
“군 회장님과 이옥선 회장님. 그리고 류덕철 회장님.”
“네. 천 회장님.”
“오늘 세 분이 보유하신 주식은 오늘 장이 마감되는 금액에 맞춰 매입할 겁니다. 아, 당연히 지주회사 체제입니다.”
“오늘 장이 마치는 액수에 맞춰서 말입니까?”
“다른 그룹들은 주가가 내려가겠지만, 세 분 그룹은 오히려 올라갈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천기득의 말에 군본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 회장이 주는 선물이로군요.”
다른 그룹들은 폭락한 주가로 인해 혼란을 거듭하겠지만, PG와 JJ 그리고 대산 그룹은 고주몽이란 우산 밑에서 소나기를 피하게 된 것이다.
“허허. 이거야 원. 청문회장에서 봤을 때도 평범치 않다는 건 느끼고 있었지만, 그저 놀라울 따름입니다.”
지금 고주몽이 벌이고 있는 일은 기존 기득권층을 일소시키는 작업과 그들이 지니고 있던 권력과 부까지 한꺼번에 쓸어버리는 작업이라고 봐야 했다.
이미 국회를 장악하고 거대 그룹을 소유한 상태에 천문학적인 현금까지 쥐고 있다. 여기에 재계 30위권 기업들까지 손에 넣게 된다면…….
“대왕 공화국이란 말은 이제 옛말이 되겠구나.”
군본석은 그야말로 기존에 없던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음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