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장. 스탠바이. 액션. 스타트! 2
대왕 호텔 비즈니스 룸.
천기득 회장의 연락을 받고 모여든 재계 회장들은 복잡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천 회장의 갑작스러운 연락은 며칠 전 통보를 하다시피 날아들었다.
아무리 천 회장이 재계 1위 대왕의 일인자라고 해도 이건 예의를 벗어난 행동이었다.
재계 순위에 차이가 있다고 해도 자신들 역시 대기업의 총수들이다.
거기다 천기득은 왕위 찬탈자가 아니던가. 족벌체제를 유지하는 기존 그룹들 입장에선 공공의 적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천기득이다.
마음 같아선 무시해 버리고 싶었지만, 소집 주제가 워낙 민감한 사안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내밀어야 했다.
‘신당의 최근 행동에 대한 대책 마련 긴급회의’
신당이 추진하고 있는 법안과 국민 여론, 시위를 무마시키기 위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이던 회장들이기에 천기득의 모임 제안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는 소리다.
그래도 재계 1위 대왕이니 뭔가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그런 방법이 있다면 힘을 합쳐 난관을 헤쳐나가야 한다.
누군가 총대를 메고 나서야 하기는 했는데, 대왕이 그런 역할을 맡아 준다면 불감청 고소원이다.
천기득은 회장들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아침들은 드셨습니까?”
“밥이 넘어가겠습니까. 세상 돌아가는 꼴이 엉망진창인데 말입니다.”
재계 5위 롯세 그룹 회장이 한숨 섞인 소리를 꺼냈다.
다른 회장들 역시 답답한 표정으로 같은 마음이라며 동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렇게 긴급 회동을 제안하신 걸 보면…… 대왕에서 뭔가 방법이 있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재계 9위 LS 그룹 회장이 넌지시 입을 열었다.
“방법이라.”
천기득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이자, 회장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이대로 있다가 진짜 법안이 통과되는 날엔 심각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좋은 방안이 있다면 알려주시죠.”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만, 회장님들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습니다.”
“살점 좀 떼어내는 한이 있더라고 이번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면 못할 일이 있겠습니까.”
재계 16위 대산 그룹 회장은 얼마간 손해가 있더라도 막아낼 수만 있다면 못할 게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말씀해 주시지요. 어떻게 하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지.”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두 가지나요?”
“네. 두 가지입니다.”
천기득은 회장들을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첫 번째 방법입니다.”
“네.”
“신당의 법안이 통과되기 전에 자신 납세 또는 자수를 하는 겁니다. 선처를 구하고 고개를 바짝 숙이는 겁니다.”
“네? 그게 지금 무슨 소립니까? 자신 납세라니요.”
“자수요? 우리가 범죄잡니까? 국가 경제를 위해 온 힘을 다해 살아왔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회장들의 반발에 천기득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우리는 국가 경제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해 왔죠. 하지만, 그 과정에 적잖은 문제들이 쌓였다는 것 역시 모두 알고 있을 겁니다.”
“그 정도 문제는 언제나 있었습니다.”
“막말로 법이 법 같아야죠. 현실을 무시한 법들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처럼 자기들 마음대로 가져다 붙인 법 아닙니까.”
“우리가 그동안 가져다 바친 자금만 해도 어마어마합니다. 그런데 돈 받아먹을 땐 좋다고 하더니 인제 와서 이러면 안 되는 거죠!”
따지고 보면 자신들도 할 말이 많다는 듯 회장들 목소리가 높아졌다.
천기득은 손을 들어 이들을 진정시키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두 번째 방법입니다.”
“말씀하시죠. 이번엔 납득할 만한 방법이기를 바랍니다.”
“Go 컴퍼니 산하로 들어가는 겁니다.”
“네?”
“어디요?”
“허허. 이것 보세요! 천 회장.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
“지금 우리보고 고주몽 그 어린놈 밑으로 들어가라고요?”
“대왕이 Go 컴퍼니 산하에 들어가더니 정신줄을 놔 버렸군.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회장들은 분통 터지는 얼굴로 악을 써댔다.
“신당도 고주몽 그놈이 판을 깔아서 이렇게 된 것 아닙니까. 그런데 고개를 숙이라고요? 고주몽 그놈을 잡아 죽여도 시원찮을 판에?”
“자자. 다들 진정 좀 합시다.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씀을 하신 건지 이유는 들어봐야 할 것 아닙니까.”
PG 그룹 회장 군본석이 회장들을 진정시켰다.
“흥. 들어보나 마나지. 내 그룹을 통으로 집어삼키겠다는 음흉한 심보 아닙니까!”
“이유가 뭐든. 나는 더는 여기 있고 싶지도 않습니다.”
재계 7위 현화 그룹 회장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때 선진 그룹 정진호 회장이 입을 열었다.
“따지고 보면 현화 때문에 이 사달이 난 거 아닙니까.”
진영그룹도 힘을 보탰다.
“그러게 말입니다. 현화에서 자식 관리를 엉망으로 한 탓에 이 난리가 났죠. 창피한 것은 둘째치고 국민 성화 때문에 현화맨이라고 말도 못 한다던데.”
정진호와 한중근의 말에 현화 회장 김홍석은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지금 나랑 한번 해 보자는 거야!”
현화 회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쯧.”
PG 그룹 군본석 회장이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차더니 테이블을 거칠게 내리쳤다.
쾅!
강 건너 불구경하듯 현화 그룹과 선진, 진영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회장들이 ‘크흠’하며 자세를 바로 했다.
재계 서열도 그렇고 회장 중 연배도 가장 높은 사람이 군본석이다.
평소 온화하고 학자적 인상이 강한 군본석이지만, 한 번 화가 나면 적이 누가 됐든 사생결단을 내 버리는 독종으로도 유명했다.
“연장자로서 한마디 합시다.”
군본석 회장이 입을 열자, 다들 조용히 경청했다.
“천 회장님의 방법이 맘에 들고 안 들고는 둘째 문제입니다.”
“네.”
“하지만 왜 그런 결론을 내렸는지 정도는 들어본 다음에 화를 내든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든지 합시다.”
군본석 회장의 말에 다들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천 회장님.”
“네. 군 회장님.”
“마저 이야기하시죠.”
“감사합니다.”
“감사할 일인지 아니면 사생결단을 낼 일인지는 들어보면 알겠죠.”
군본석 회장 역시 천기득의 제안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평생을 일궈온 회사를 남에게 넘기자는데 어느 누가 좋아하겠는가 말이다.
“다들 고주몽 회장의 납치, 살해 기도 건에 대해서 알고 있으실 겁니다.”
천기득 입에서 고주몽 납치 사건이 흘러나오자, 다들 ‘여기서 그 이야기 왜 나와?’ 하는 표정들이 됐다.
“그 사건으로 여론을 주도하던 언론 삼사가 단숨에 무너진 것도 모두 아시죠?”
“알고는 있습니다만, 지금 이 자리와 그 사건이 무슨 연관이 있는진 모르겠습니다.”
코스포 회장 현국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연관이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만…….”
천기득은 잠시 말끝을 흐렸다.
“그간 언론 삼사를 통해 로비를 해왔던 것까지 모르는 일이라곤 하지 않으실 겁니다.”
천기득 입에서 로비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곳곳에 불편한 감정이 흘러나왔다.
“그건 대왕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현화 그룹 김홍석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랬었죠.”
천기득은 김홍석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씨 일가가 무너지고 나선 그쪽과 연을 끊었습니다. 그건 진영과 선진 그룹도 마찬가지 일 겁니다.”
회장들의 시선이 한중근과 정진호 회장에게 향했다.
두 사람은 어깨를 으쓱이더니 천기득 회장의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요? 그게 이 일과 무슨 상관입니까?”
코스포 현국진 회장이 천기득을 바라봤다.
“당연히 상관이 있죠. 청와대와 관련된 일이니 말입니다.”
천기득 입에서 청와대란 단어가 흘러나오자 회장들 표정이 복잡해졌다.
“쉽게 설명하죠.”
“네. 부탁드립니다.”
“이명환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전쟁에 나설 것 같습니다.”
“전쟁이요?”
“우리와 말입니까?”
“정확히는 우리가 아니라 언론 삼사를 통해 로비를 하고 자신을 허수아비로 만들었던 모든 이들이 대상입니다.”
“그게 무슨…… 아니 다른 걸 다 떠나서 이명환 정부가 무슨 힘이 있다고 우리와 싸운단 말입니까?”
미래중공업 최필성이 ‘그게 되겠어?’ 하는 표정으로 회장들을 둘러봤다.
그와 눈이 마주친 회장 중 몇몇은 ‘그러게 말이야’하는 표정으로 동조하는 눈빛을 보였고 몇몇 회장들은 ‘그래도 청와대인데’하는 눈빛으로 불안감을 보였다.
“당연히 이명환 정부는 힘이 없습니다. 조만간 관에 못질까지 당할 판인데 무슨 수로 우리와 전쟁을 하겠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이명환 정부는 제 앞가림하기도 바쁩니다.”
천기득의 말에 회장 한 명이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일이 우습게 됐습니다.”
“우습게 되다니요.”
“갑자기 신당이 튀어나왔지 않습니까.”
“흠.”
“신당과 이명환이 손을 잡기라도 한다는 말입니까?”
최필성이 재차 질문을 던졌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명환 정부가 신당에 협조한다고 해야겠죠. 신당의 법안이 통과되면…… 이명환 대통령이 긴급조치를 발동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긴급조치요? 지금이 5공도 아니고. 말이 되는 소릴 하십시오.”
“독재정권도 쉽사리 못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시체나 다름없는 이명환이 무슨 수로 긴급조치를 발동한다는 말입니까.”
회장들 모두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PG 그룹 군본석 회장은 표정이 심각해졌다.
“천 회장님. 혹시 말입니다.”
“네. 군 회장님.”
“언론 삼사를 통해 로비 작업을 하고 이명환 정부를 궁지에 몰아넣었다는 ‘증거’가 나타난 겁니까?”
군본석 회장의 말에 소란스럽던 회의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천기득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성일보 방 회장이 장부를 가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장부 외에도 이런저런 영상과 녹음파일도 꽤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
“그 장부가 이명환 대통령 손에 들어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천기득 회장의 발언에 회의장이 쩍 얼어붙었다.
“아무리 허수아비 소리를 듣는 이명환 대통령이지만, 그가 국가통치권자임은 변함이 없습니다. 만약 뒤를 생각하지 않고 같이 죽자고 달려들면 여기 회장님 중 몸 성할 분이 몇 분이나 될지 모르겠군요.”
“…….”
회장들은 천기득의 말에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군본석 회장이 다시 질문했다.
“고 회장 밑으로 들어가자는 제안 말입니다.”
“네. 군 회장님.”
“이명환 대통령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다는 말씀 같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아, 미처 설명을 못 드린 부분이 있었네요.”
“?”
“그 장부 말입니다. 가장 먼저 손에 넣은 사람이 고주몽 회장입니다.”
“뭐…… 뭐요?”
“그게 무슨!”
“허!”
장부의 소유자가 이명환이 아니라 고주몽이라는 말에 회의실은 다시 한번 혼란에 휩싸였다.
“천 회장님. 지금 그 말은…….”
“장부에 적힌 이름을 수정할 수 있는 사람이 고주몽 회장이라는 말입니다.”
“이런…….”
“어처구니가 없네.”
회장들은 황당하다 못해 넋이 나간 표정이 됐다.
“그러니까. 그 어린놈 손에 우리 명줄이 잡혔다는 그런 말씀입니까?”
현화 김홍석 회장의 말에 천기득이 눈살을 찌푸렸다.
“김 회장. 아들 문제 때문에 마음이 불편하다는 건 이해 합니다만, 고 회장님은 대왕과 선진, 진영그룹은 물론이고 재계 22위 ST 미디어와 언론 삼사의 대주주입니다. 말씀을 삼가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천기득 회장의 경고 섞인 발언에 현화 김홍석은 뜨끔한 표정이 됐다.
운 좋게 돈벼락 맞은 어린놈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현재 고주몽이 지닌 힘을 생각하면 아무리 재계 7위 현화라 해도 몸을 사려야 했다.
“가뜩이나, 김 회장 아들 때문에 화가 난 고 회장입니다.”
“고 회장이 김 회장 아들에게 화가 났다는 건 무슨 말입니까?”
클럽 사건의 전모를 알지 못하는 회장들이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현화 케미컬 김영국 이사가 약물 강간을 시도한 사람이 Go 컴퍼니 직원입니다.”
“아…….”
“이거야 원. 하필이면 건드려도.”
회장들은 끌끌 혀를 차며 김홍석을 바라봤다. 김홍석 회장은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천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