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장. 에피소드를 하나 준비했습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고 있는 약쟁이 육 형제와 억울해서 미치겠다는 RT를 경호원들에게 맡기고 잠시 룸을 나왔다.
“김인선 씨.”
“네. 대표님.”
“로건과 연락해서 룸에서 벌어지는 내용 다 기록해 두라고 하세요.”
“아, 룸에 설치된 몰카 말입니까?”
“네. 부탁합니다.”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김인선이 자리를 비우자, 나는 내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신세계 프로젝트를 두고 머리를 맞대고 있는 제이코와 김덕영, 회장단에게 ‘에피소드’ 하나가 시작될 거라고 이야기했다.
“에피소드라면 어떤?”
제이코가 궁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룸에 장착된 몰카를 알려줬다.
“몰카요?”
“허허. 이런!”
“어이가 없군.”
다른 장소보다 오히려 안전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이 기록되고 있다고 하자 다들 화들짝 놀란 표정이 됐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실시간 감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기록용이니까요. 로건이 싹 털어버려서 우리 쪽 이야기가 밖으로 새나갈 일은 없을 겁니다.”
“천만다행이군요. 에피소드는 몰카에 담긴 내용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덕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신당에서 징벌적 법안을 만든다고 해도 기존 세력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나는 감춰진 카메라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약쟁이들 보호자가 달려올 겁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들과 만나는 장면과 대화 내용이 모두 기록이 되겠죠.”
“몰카가 장착되어 있다는 걸 약쟁이들도 알고 있을 텐데 정상적인 대화를 나눌지 모르겠습니다.”
“그들 눈앞에 DVD와 외장 하드를 떼어다 보여줬습니다. 계속 녹화가 될 거라곤 생각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그럴 정신도 없을 겁니다.”
나는 준비하고 있는 에피소드를 짤막하게 설명했다.
언론과 방송을 이용해 국민 정서를 자극하고 시민단체를 이용해 판을 키운다.
그동안 말만 무성하고 번번이 좌초됐던 징벌적 법률과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해이에 비판을 가한다.
신당은 국민 정서를 발판삼아 본격적으로 법안 상정에 나서야 하며, 특별법을 제정하는 무리수를 띄우더라도 바로 법안이 적용되도록 밀어붙인다.
그 과정에서 대통령과 담판을 지을 것이다.
내가 준비한 에피소드를 들은 동반자들은 여지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하하하.”
“그렇게 되면 정말 볼만하겠습니다.”
“나라가 발칵 뒤집히는 것 아닙니까?”
“국민이 촛불을 들고나오면 우리 신당 입장에선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나는 설명을 이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재벌 아빠들이 아들을 구하고자 무리수를 띄울 겁니다. 우리는 그걸 전국적으로 방송에 내보내고 확보된 자료를 통해 자칭 VIP라는 자들이 저질렀던 약물 파티와 범죄행위를 최대한 부각하면 됩니다.”
“국민 정서에 반하는 범죄행위가 세상에 알려지면…….”
“분노의 물결이 광화문을 뒤덮겠죠.”
“신당은 그걸 장작 삼아 불길을 키우고 법안을 밀어붙이고…… 신당의 국회 데뷔전으론 더할 나위 없겠군요.”
“네. 이번 에피소드는 그렇게 진행이 될 겁니다. 그간 허수아비 소리를 들었던 대통령 역시 저들에게 내심 이를 갈고 있을 것이니 반대 의견을 내진 않을 겁니다. 그러니 한 국장님.”
“네. 대표님.”
“자료 빵빵하게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포장 좀 잘 부탁드립니다. 단순히 재벌 자식들의 범죄를 지적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무능한 정부를 그들과 한통속으로 묶어서 저격하는 논평도 양념 치듯 잘 버무려 주세요.”
한성희는 문제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징벌적 손해배상이든 법적 형평성이 됐든, 정권이 바뀌기 전엔 선거용으로 매번 떠들어대는 내용이죠. 하지만, 정권을 잡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상정은커녕 입도 뻥끗하지 않던 정치인들입니다. 그들까지 싹 묶어서 기존 정당이 얼마나 이중적이었는지도 알리겠습니다.”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서 가짜 뉴스를 만드는 것도 아니고 있는 사실을 증폭시키는 정도는 미디어 본연의 역할이다.
“그래서 말인데, 체포 장면을 생방송으로 진행해도 될까요? 검사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들었는데 말입니다.”
“지금 방송팀을 부르기엔 너무 늦지 않았습니까?”
내 말에 한성희가 스마트 폰을 흔들어 보였다.
“요즘엔 스마트 폰이 워낙 잘 나와서요.”
천기득 회장이 한성희의 스마트 폰을 확인하더니 ‘우리 대왕이 스마트 폰을 잘 만들긴 하지.’하면서 미소를 지었다.
“JTB 인터넷 방송을 이용하면 됩니다. 방송국 보도팀엔 영상 받아서 쓰라고 하면 되고요.”
“실시간으로 방송에 나가면 스펙터클하겠습니다.”
나는 안될 게 있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최대한 일을 크게 만드는 게 목적이니 받아쓰는 후속 보도보다는 실시간 현장 상황을 그대로 내보내는 게 더 효과가 클 것이다.
평소 같으면 재벌 3세, 후계자들의 일탈 정도로 마무리될 일이지만, 오늘 이후 다시는 그런 행운은 존재치 않을 것이다.
“김덕영 대표님.”
“네! 총회장님!”
김덕영은 아주 신이 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대통령 출마 나이를 나에게 맞출 필요 없습니다.”
“네? 아니 그건…….”
“나는 대통령이니 뭐니 하는 직책에 관심이 없습니다.”
“총회장님! 하지만!”
“대왕 그룹에 천 회장님이 있고, 선진과 진영 그룹에 정 회장님, 한 회장님이 있습니다. 그리고 신당 대표는 김덕영 씨가 자리하고 있죠.”
“…….”
“내가 다 해야 한다면, 여러분들이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뭐든 그 분야에 능력 있고 재능 넘치는 분들이 앞장을 서야 하는 겁니다.”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다. 다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곧바로 이해한 눈치니까.
“하고 싶은 사람이. 능력이 있는 사람이 그 자리에 올라가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내 사람인가, 아닌가. 이게 중요할 뿐이죠.”
“그래도…….”
김덕영은 아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대선 주자가 없는 신당 입장에선 나라는 카드를 꼭 포함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대선 후보 때문이라면 방법을 바꾸세요.”
“네? 방법이라면 어떤…….”
“굳이 총선에 대선까지 두 번씩 투표할 필요가 있습니까?”
“네?”
김덕영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한성희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의원 내각제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아!”
“의원 내각제. 대통령제가 아니라 수상제를 선택한다면…….”
“여소야대니 이런 말도 의미가 없어지겠군.”
“총선을 통해 정권을 잡은 집권당에서 수상을 배출하는 방식이라면, 대표님 말씀대로 두 번씩 투표할 이유가 없죠. 어떤 면에선 중임제와도 비슷한 구조이기도 하고.”
현 대통령제는 단임제다. 한 번 대통령을 하고 나면 자연스럽게 정계 은퇴가 당연시된다.
하지만 의원 내각제는 형태가 다르다. 정권을 잡았다고 해서 다음 총선 때 은퇴를 하는 게 아니란 뜻이다.
정부를 잘 이끌어간다면 국민의 지지를 얻게 될 것이고 그건 자연스럽게 정권 창출로 이어질 것이다.
“대선 주자 고민하지 말고, 신당 의석수를 지켜서 김덕영 씨가 수상 자리에 오르면 될 것 아닙니까.”
“수…… 수상!”
정치를 꿈꾸는 자 중에 대통령 자리를 탐내지 않은 이가 있겠는가만은, 김덕영 스스로 자신은 아직 그런 깜냥이 되지 못함을 잘 알고 있다.
노력하고 노력하다 보면 언젠가는 그 정도 위치에 오를 날도 있겠지만, 의원 내각제로 헌법을 바꾸게 된다면 대통령이나 다름없는 수상 자리까지 다이렉트로 올라갈 수가 있다.
“참고로 미 재무부 차관이었던 알렉스, 영국 대사였던 윌리엄. 러시아 책임자였던 니콜라스. 일본에서 날아온 고노 스즈키. 독일의 협상 대표였던 한스. 마지막으로 중국 측 담당자 리무첸까지. 모두 내 후원을 받기로 했습니다.”
미인계라는 얼토당토않은 작전을 실행에 옮긴 각국 담당자들이 내 후원을 받기로 했다는 말에 다들 적잖게 놀라는 표정이다.
“보스. 그 말씀은 이번에 우리가 획득한 자료들을 사용할 수 없다는 말입니까?”
각국 정부가 직접 나서서 내 재산을 강탈하려 했던 사건을 두고 단단히 벼르고 있던 제이코다.
“사용할 수 없는 게 아니라, 보험용으로 보관하게 될 겁니다.”
내 말에 천기득 회장이 호기심 섞인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단순 후원이 아닌 듯싶습니다만, 그들 모두 자신들 나라에선 나름의 입지가 있는 자들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지금은 잠시 한직으로 물러난 상태지만, 지원만 확실히 해주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사람들이죠.”
“그 말씀은 저기 김덕영 대표와 같은…….”
“그렇게 되기를 바라기는 합니다만, 한국에서처럼 단번에 자리를 잡기는 어렵지 않겠습니까? 꾸준히 지원을 해 볼 생각입니다.”
내 말에 잠시 흥분한 기색이었던 제이코가 눈을 반짝였다.
“보스. 그 말씀은…….”
“네. 가문 소속의 로비스트라고 보시면 됩니다. 물론 단순 중개인이 아니라 직접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런 존재들이 될 겁니다. 앞으로 서로 간에 신뢰를 쌓아야겠지만, 일단 그들도 봉신으로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그들의 봉지는 본인들이 활동하는 각 나라가 되겠죠.”
제이코는 언제 화를 냈냐는 듯 씩 웃음을 보였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다르죠. 그나저나 능력도 좋으십니다. 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 많은 일을 다 처리하고 오셨으니.”
“비상사태에 잔머리 굴리는 쪽은 나름 쓸만하잖아요.”
나는 내 머리를 톡톡 건드렸다.
그때 로건을 만나러 갔던 김인선이 돌아왔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다. 양하석 과장과 박산호 부장이 함께하고 있었다.
“왔군요.”
“주변 정보를 취득하느라, 조금 늦었습니다.”
양하석 과장은 뭔가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따로 보고할 내용이라도 있습니까?”
“대표님…… 이곳 헤드라인은 회사의 정보 수집처로 쓰이던 곳입니다.”
“회사의 정보 수집처? 지금 국정원을 말하는 겁니까?”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이다.
“전전(前前) 대 정권에서 만들어진 부서입니다.”
“이거 일이 재미있어집니다. 단순 범죄조직이 아니라 국정원에서 운영하는 외부 기관이었다는 말인데. 설마, 여기서 얻은 자료를 가지고…….”
양하석은 내가 예측한 내용이 맞을 거라며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까지 본인이 다니던 회사의 일이라 그런지 무척 조심하는 눈빛이다.
“하하. 고구마 줄기도 아니고. 뭐 이렇게 끊임없이 계속 튀어나온답니까.”
원나잇 한 번 하러 나왔다가 나라 전체를 싹 뒤집어엎게 생겼다.
국정원이 끼어 있다면 이건 단순히 재벌 후계들의 범죄만이 문제가 아니다.
불특정 다수. 또는 일명 VIP로 불리는 사회지도층을 함정에 몰아넣고 허수아비로 만들고 있었다는 게 아닌가.
“마약도 나왔습니다. 알고 있습니까?”
“네. 김인선에게 들었습니다.”
“약도 회사에서 관리하는 겁니까?”
양하석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눈치를 봤다.
“양 과장님!”
내가 언성을 높이자, 양하석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CIA에서 마약을 관리하는 것처럼, 국내에서도 그렇게 관리를 해 보자는 의견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직접 연관된 부서는 아니라 내부 사정까지는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CIA?”
나도 들어는 봤다. 관련 내용을 폭로하는 영화도 여러 편 나왔고 말이다.
하지만 이건 관리 차원이 아니라 아예 대놓고 장사를 하고 있었고, 그걸 이용해 사람들의 약점을 수집하고 있었다.
마약을 직접 관리하겠다는 발상은 그럴 수 있다고 쳐도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일들이다.
약은 그렇다 쳐도 스트레스 풀겠다고 찾아온 여자들을 놈들 먹잇감으로 제공하기까지 했다.
그저 남녀 간의 즉석 만남이라면 당사자 간의 문제겠지만, GHB까지 이용해 아무렇지도 않게 강간을 하는 놈들이다.
“허, 미치겠네. 짐승 사육하는 것도 아니고. 여기가 약쟁이 강간범 양성소야?”
내가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자, 다들 조용히 상황을 지켜봤다.
“혹시 말입니다.”
“네.”
“이곳 클럽이든 아니면 다른 곳이든. 회사 사람들이 파견을 나와 있습니까?”
“당연히 그럴 겁니다. 서류상으론 관계가 없는 것처럼 꾸미겠지만, 내부 관리자는 필수니 말입니다. 회사와 연결고리를 끊어놓기 위해 신분세탁도 마쳤을 겁니다.”
나와 양하석 과장의 대화에 김인선이 ‘설마……’ 하는 표정을 지었다.
“대표님. 혹시….”
“RT 말이죠?”
“네. 정황상 충분히 의심스럽습니다.”
만약, RT가 바로 그 파견 관리자라면…….
가이드를 자처하며 자신을 룸에 데리고 온 것도 따로 목적이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내가 고주몽이라는 것을 알고 그랬는지, 아니면 신종 호구를 발굴해 소처럼 뚜레를 박아 넣을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