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장. 나 그냥 가면 안 될까?
“너 뭐야. 얘랑 알아?”
“그럴 리가요. 처음 봅니다.”
“그런데 왜 눈빛을 주고받고 지랄이야. 기분 나쁘게.”
“오해하게 했다면 미안합니다. 가봐도 되겠습니까?”
내 딴에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그러니까. 나 그냥 가게 해주라. 코털을 건들고 뽑기까지 했어도 내가 다 참아줬잖아.
“이 새끼가. 뭐가 이렇게 당당해?”
뭔 개소리야. 네가 물었고. 나는 그냥 대답한 것뿐인데.
“고개 안 숙이냐?”
“…….”
내가 입을 다물고 묵묵히 서 있자, 놈은 나와 눈이 마주쳤던 여자를 잡아끌었다. 그리고 목 언저리를 만지작거리며 나를 바라봤다.
“너 얘 알지?”
“처음 보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 그럼 내가 얘 목을 졸라도 너는 상관없겠네.”
“상관있고 없고를 떠나, 남자가 할 짓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내 말에 망나니 육 형제가 킬킬대며 웃음을 흘렸다.
“남자가. 할. 짓. 아.닌.것. 같습니다.라고 지껄이고 자빠졌네.”
“…….”
“애가 내 파트너거든. 그런데 듣보잡 새끼랑 눈빛을 주고받네. 그러면 내가 기분이 어떨 것 같아?”
“오해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오.해.라.고. 이러고 있다.”
망나니를 가장한 미친놈들인가? 뭐야. 이 새끼들.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녀석을 바라봤다.
그때 옆에서 김인선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코끝에 가루가 묻었습니다. 아무래도…….’
가루약? 코카인?
내 눈빛에 김인선이 ‘의심이 됩니다’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가 미국 한복판도 아니고 무슨 놈의 코카인이 돌아다니냐. 나에게 시비를 걸고 있는 놈과 그 옆에 있는 놈들을 돌아보니 하나 같이 눈빛이 이상하다.
싸움 때문에 흥분해서 그러려니 했는데 이제 보니 그사이에 약까지 한 모양이다.
거기다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 클럽 관계자는 한 놈도 보이질 않고, 룸으로 향하는 복도는 여전히 놈들 경호원에게 장악된 상태다.
“야!”
코끝에 가루 묻힌 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약까지 한 미친놈이 진짜 미쳐서 날뛰면 그건 그것대로 난감한 일이다. 어떻게든 놈을 달래고 이곳을 빠져나가는 게 급선무였다.
“진짜 애 몰라?”
“네. 진짜 모릅니다. 알았다면 그 전에 나섰지 않겠습니까.”
“무서워서 벌벌 떨던 놈이 나서기는 무슨. 켈켈켈켈.”
나보고 어쩌라고?
“꿇어.”
“네?”
“꿇고. 내 여자와 눈 마주친 것 사과해. 그러면 보내 줄게.”
“…….”
와 미치겠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답답한 상황이 이런 걸 두고 말하는 건가? 성질대로 하자니 입장이 난감하고 그렇다고 무릎을 꿇자니…….
“나 그냥 가면 안 될까?”
“나.그.냥.가.면. 이러고 있다. 히엑케켁.”
망나니 육 형제가 단체로 킬킬대며 웃음을 터트린다. 마치 재미난 장난감이 새로 생겼다는 듯.
붙잡혀 있는 여자들도 표정이 묘해졌다. 마치 왜 그리고 있냐는 듯 이해를 못 하겠다는. 그런 표정들이다.
“부탁한다. 그냥 가게 해주라. 계속 이러면…….”
“왜. 아빠한테 이르게?”
“아니.”
“그럼 경찰에게 이르게?”
“그것도 아니다.”
“그럼 뭐? 그냥 존나 처맞고 싶어서?”
“하아…….”
인생 진짜. 이러려고 복권에 당첨된 게 아닌데. 이젠 약쟁이들까지 달랑거리네.
“어디서 한숨 질이야. 그냥 꿇으라고. 이 새꺄!”
“아 진짜. 미치겠네!”
내가 버럭 소리를 지르자, 코끝에 가루 묻힌 놈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놈들에게 잡혀 있던 여자 한 명이 ‘고! 조심해요!’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까 나에게 미스터 고라고 했던 여자가 아니라 다른 여자가 말이다.
‘뭐야. 지금 이 여자들…… 나를 다 알고 있는 거야?’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김인선이 곧바로 앞을 막아섰다.
“넌 뭐냐.”
코끝에 가루 묻힌 놈이 경호원들에게 눈짓하는데 그보다 내 손이 더 빨랐다.
턱.
놈의 옷깃을 움켜잡고 거침없이 엎어치기에 들어갔다. 허공을 한 바퀴 휘~ 돈 코끝에 약 묻은 새끼가 ‘어?’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쿵! 떨어졌다.
“크엑. 카악. 하악하악.”
앗 하는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누구 한 명 끼어들 틈도 없이 벌어진 일이다.
놈들은 물론이고 놈들이 부리는 덩치들과 김인선까지 다들 ‘어!’하는 표정이 됐다.
특히 다른 사람보다 김인선이 더 많이 놀랐는데, 나의 업어치기가 더할 나위 없이 깔끔했고 재빨랐기 때문이다.
그가 경호 임무에 투입되면서 들었던 이야기 중 하나가 고주몽 대표는 딱히 호신술이나 운동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술로 단련된 자신이 봐도 깜짝 놀랄 정도의 퍼포먼스가 터져 나왔으니 어리둥절할 수밖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냐고 묻는다면…… 내 안에 나 비스무리한 놈들이 많다고 해야 하나?
“뭐야!”
“이사님!”
여기저기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미친놈아. 너 지금 누굴 건드린 지 알고는 있냐!”
“약쟁이들아. 그러는 너희들은 지금 누굴 건드리고 있는지 알고는 있는 거냐?”
“뭐?”
“뭐라는 거야?”
나는 손목시계의 용두를 누르고 신경질적으로 명령을 내렸다.
“로건. 이 일대 신호 차단해. 그리고 클럽은 물론이고 주변 일대까지 통제 들어가!”
― 네. 보스!
손목시계에서 작지만 확실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가까이 있던 경호원들 표정이 싹 달라졌다.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어떻게든 조용히 자리를 떠나고 싶었지만, 결국 로건을 호출하고 말았다.
여자를 붙잡고 있던 놈들은 내가 손목시계를 통해 누군가와 대화를 하자 적잖게 당황한 모습들이다.
물론 이 와중에도 개념 없이 씩씩대는 오 형제가 남아있긴 했다. 약을 얼마나 들이마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제정신들이 아니다.
“거기 경호원들.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으세요.”
“…….”
“내가 지금 사람을 불렀는데, 못해도 오십 명은 몰려올 겁니다.”
내 말에 경호원들이 흠칫한 표정이 됐다.
“야. 지금 저 말을 믿는 거야?”
“당장 잡아서 꿇려!”
약쟁이들은 헛소리하지 말라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내 할 말만 했다.
“약쟁이들 말을 듣는 건 자유입니다만, 그 전에 내 말을 끝까지 듣고 움직이길 바랍니다.”
“…….”
“지금 달려오고 있는 오십 명은 모두 경찰 출신들이고 앞을 막아서는 건 그게 뭐가 됐든 간에 다 박살을 내는 사람들입니다.”
경호원들은 긴가민가한 표정이고 약쟁이들은 헛소리 작작 하라며 고성방가를 멈추지 않았다.
“여러분들이라고 이렇게 여자들까지 핍박하면서 힘들게 살고 싶지는 않았을 겁니다. 기회를 드리죠. 지금 이대로 물러나면 모두 용서하겠습니다.”
경호원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고민스러운 눈빛을 보였다.
마음 같아선 물러나는 게 맞지만, 자신들이 모시고 있는 이들은 하나 같이 재력과 권력이 만만치 않은 이들이다.
차후 오늘 일을 문제 삼아 해코지라도 하는 날엔 모두 몸 성히 살아갈 자신이 없다.
“아, 저기 약쟁이들이 해코지할 것 때문에 고민하는 거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들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이후로 평범한 인생을 살게 될 테니까요.”
“그게 무슨 말씀인지…….”
“나는 GO 컴퍼니 사람입니다.”
“GO 컴퍼니!”
“고…… 고주몽?”
“네. 맞습니다. 내 이름은 고주선. 컴퍼니 대표 고주몽이 제 육촌 형입니다.”
“아!”
“이런…….”
경호원들은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제야 오십 명이 넘는 숫자와 그들 모두가 경찰 출신이라는 말이 이해가 됐다.
고주몽의 경호팀이 대부분이 미국에서 건너왔고 그들이 샌프란시스코 경찰국 출신이라는 것은 이 바닥에 꽤 유명한 이야기다.
거기다 대한민국에서 고주몽과 적대시했다가 탈탈 털린 인간들 이야기도 모르는 이가 없다.
정치권은 물론이고 언론과 대기업까지 싹 털어먹은 인간이 바로 고주몽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그 고주몽의 육촌 동생을 건드렸다? 이 일이 어떻게 끝을 맺을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뻔했다.
악악대며 소리를 지르던 약쟁이들도 GO 컴퍼니와 고주몽에 대한 이름은 위협적으로 다가왔나 보다.
‘뭐? 누구?’ 하는 표정을 짓더니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약쟁이들과 동반 몰락입니까. 아니면 기회를 잡겠습니까.”
“정말 이대로 보내 주시는 겁니까?”
“우리 형이 한때 대기업 비서로 일했다는 거 다 아시잖아요. 망나니 같은 윗사람을 얼마나 싫어하는지도. 방송 보셨으면 알 텐데.”
“그건 그렇습니다만…….”
경호원들은 불안한 눈빛으로 약쟁이들을 바라봤다.
“믿으세요. 저들이 가진 게 돈이 됐든 뭐가 됐든 간에 오늘 이후론 의미가 없어질 테니까.”
내가 단호한 음성으로 저들의 최후를 이야기하자 경호원들은 하나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중에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네.”
“한 대만 때리고 가면 안 되겠습니까?”
“때려요? 누굴…….”
경호원은 약쟁이 중에 나에게 방을 빼라고 했던 녀석을 가리켰다.
“쌓인 게 많나 봅니다.”
“후우. 말로 설명이 되겠습니까.”
“허락합니다.”
내 입에서 패도 된다는 말이 흘러나오자, 어이없는 표정으로 대화를 듣고 있던 약쟁이들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뭔 개소리야! 야! 박 대리. 너 미쳤어?”
“후우. 미친 건 내가 아니라 너잖아!”
박 대리라 불린 경호원은 냅다 놈의 얼굴을 후려쳐버렸다.
뻑!
“캑!”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경호원에게 얻어맞은 ‘방 빼’ 놈은 휘청휘청 흔들리더니 룸 소파에 덜푸덕 주저앉았다.
“또 때리실 분 있습니까?”
다른 이들도 쌓인 게 많은지 고민하는 눈빛이었지만, 박 대리처럼 대차게 나선 인간은 없었다.
“그럼 가보세요.”
내가 손짓을 하자 경호원들은 하나둘 자리를 뜨기 시작했다.
“아, 거기 경호원 아저씨.”
시원하게 주먹을 날렸던 경호원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네…….”
“명함 한 장 받아가세요.”
“네?”
“먹고 살아야죠. 이유야 어찌 됐든 나 때문에 직장에서 잘리게 생겼는데.”
“아…….”
김인선에게 눈짓하자, 급히 경호팀 명함을 넘겨줬다.
“다른 경호원들이랑 이쪽으로 오는 길목을 잠시 막고 있어 줘요. 우리 쪽 사람 오면 상황 설명도 해줬으면 좋겠고. 해주실 수 있죠?”
“물론입니다!”
“네. 부탁드릴게요.”
경호원들이 모두 사라지자, 복도엔 김인선과 여자들 그리고 약쟁이들만 남겨졌다.
“인선 씨.”
“네. 대…… 커흠.”
습관적으로 대표라고 호칭을 부르려다 급히 입을 다무는 김인선이다.
“약쟁이들 저쪽 룸으로 데리고 들어가세요.”
나는 약쟁이들이 본래 있던 방을 가리켰다.
“네.”
김인선은 주춤거리며 눈치를 보고 있는 약쟁이들에게 손짓했다.
“도망치려는 분은 그렇게 해도 됩니다. 하지만 클럽 밖에서 대기 중인 경호팀에게 붙잡혔다간 뼈도 못 추릴 겁니다.”
놈들은 쭈뼛거리는 걸음으로 순순히 룸으로 자리를 옮겼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약쟁이는 김인선이 잡아끌고 들어갔고 복도는 나와 여자들만 남겨졌다.
“우리 할 말이 있을 것 같은데.”
나는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여자들을 바라봤다. 내 말에 여자들 모두 복잡미묘한 표정이 됐다.
“들어와요.”
나는 잠시 빼앗겼던 내 룸으로 여자들을 이끌었다. 여자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주춤주춤 룸 안으로 들어왔다.
“앉읍시다.”
“…….”
술잔을 채워 한 모금 들이킨 나는 소파에 앉은 여자들을 쭉 둘러봤다.
어떻게 이런 여자들만 모아놨는진 모르겠지만 하나 같이 매력 넘치는 미녀들이다.
거기다 국적이 연상 될 만큼 특색 넘치는 여자도 포함된 걸 보니…… 쯧. 이런 상황이 아니라 좀 더 좋은 분위기에 만났다면 좋았을 것 같은데 말이다.
보아하니 미인계 비스름한 걸 나에게 실행하려다 일이 꼬인 것 같은데, 내가 홀라당 넘어갔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로버트가 다 잡아냈을 것이다.
‘쯧. 그때까지는 적어도 즐겁게 지낼 수 있었을 텐데.’
모르는 척, 절대 안들 킨 척해가며…… 눈치껏 유혹에도 넘어가주고 그러면서… 적당히 기회를 봐서 내쪽으로 회유를 하고…… 겸사겸사 하… 하렘을.
크흠. 너무 멀리나갔나.
잠시 뇌내 망상을 즐기던 나는 한 숨소리와 함께 현실로 돌아왔다.
“아가씨들. 나 알지?”
“…….”
“지금이라도 솔직히 자수하면 정상참작을 하겠지만, 오리발을 내밀거나, 묵비권을 행사한다거나…… 기타 등등을 선택할 경우. 저쪽 방의 약쟁이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불행히 여러분들을 찾아갈 거야.”
여자들은 주저하는 표정으로 서로 눈치를 봤다. 분위길 보아하니 이들 관계가 협조적이라기보단 어딘지 경계 또는 경쟁하는 분위기다.
“생각할 시간이 얼마 없어. 로건이나 로버트가 들이닥치면 없는 먼지도 만들어서 털려고 할 테니까.”
그때 금발 머리 여자 한 명이 자신의 왼쪽 귀를 가리켰다.
“귀에 수신기라도 꽂고 있는 건가?”
내가 대놓고 이야기를 하자, 여자가 깜짝 놀란 표정이 됐다. 제깐엔 들키지 않게 정보를 건네려 한 것 같은데…….
“클럽을 중심으로 이 일대는 모든 신호가 차단됐다. 전화기든 무전기든 그게 뭐든 간에. 그리고 불온한 움직임이나 수상스러운 대상이 있다면 그것도 지금쯤 제압이 끝났을 거야.”
“아…….”
“그러니까. 누가 듣고 말고 할 것도 없고. 여기서 나눈 말은 우리밖에는 몰라.”
요원들은 일이 여러모로 고약하게 돼버렸다고 생각했다.
여기저기서 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여자들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며 조용히 술잔을 비웠다. 그런데 소파 귀퉁이 뒤편에 어디서 많이 본 얼굴 하나가 슬그머니 머리를 내밀었다.
RT 이 인간. 복도에서 보이질 않아 어디 갔나 했더니, 밖에서 투덕거리는 동안 룸 안으로 숨어들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