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장. 기다리면 온다니까요.
헤드라인의 연락을 받은 일명 VIP들이 속속 클럽에 도착했다.
“뭐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연락까지 하고 그런 거지?”
대일 물산 2세 함수용이 히죽거리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함께 연락을 받고 온 연일 건설 넷째 연정열이 대답했다.
“미스 유니버스라고 떠들어 대던데.”
“미스 유니버스?”
“그래. 아무튼, 끝내주는 애들이 단체로 왔다더라.”
클럽에 들어서자 대기 중이던 이 부장이 부리나케 인사를 나왔다.
“오셨습니까.”
“어. 이 부장.”
함수용이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클럽 내부를 쓱 둘러봤다.
“누구야?”
“하하. 저~쪽에 보이십니까?”
이 부장의 눈짓에 함수용과 연정열의 눈이 자동으로 돌아갔다.
클럽 한쪽에 옹기종기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이 부장 말대로 미스 유니버스가 따로 없다.
“호…….”
“오…….”
두 사람 입에서 동시에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끝내주는 애들이지 않습니까?”
이 부장의 말에 두 사람이 끄덕끄덕 고개를 흔들었다.
“일단 들어가시죠. 한잔하시고 계시면 제가 알아서 데리고 들어가겠습니다.”
“그래. 오늘 이 부장 실력 좀 보자.”
“어련히 알아서 준비했겠습니까.”
이 부장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손가락으로 물방울 떨어트리는 모션을 취했다.
필요하다면 물뽕도 언제든 동원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 말고 또 누구 불렀어?”
“맴버분들에게 다 연락 돌렸습니다.”
“다 불렀다고?”
평소 함께 몰려다니며 술깨나 나눠마시는 사이들이지만, 그렇다고 저런 미녀들까지 나눠 가지고 싶진 않은 표정이다.
“다국적 미스 유니버스 숫자가 서른입니다. 형님들 다 오셔도 인당 둘, 셋은 돌아가고도 남는 숫자 아닙니까. 취향대로 골라 앉히셔도 충분합니다.”
“크크. 그런가?”
이 부장의 말에 함수용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함수용과 연정열을 시작으로 일약 바이오의 이일산과 현화 케미컬의 김영국. 미래유통의 정중부와 대신운수의 박전진까지 룸에 모여들었다.
하나같이 재벌 2세 또는 3세들로 이뤄진 이십 대 중반에서 삼십 대 초반의 재벌 후계자들.
“오늘은 왜 저 방이 아니냐?”
일약 바이오 이일산이 맞은 편 VIP룸을 가리켰다.
“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이런 일이 있을지 모르고 예약을 받았지 뭡니까.”
“쯧.”
이일산이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으로 이 부장을 바라봤다.
“오늘은 방보다 밖에 있는 여자들이 메인 메뉴 아닙니까.”
“봐줬다.”
“하하. 네네.”
이 부장은 허리를 굽실거리며 이일산을 룸 문을 열었다.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함수용과 연정열이 이일산을 보고 손을 들었다.
“형 왔네.”
“오셨습니까.”
“그래. 주말도 아닌데 다들 모이게 됐네.”
세 사람이 술잔을 나누며 뻔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데, 뒤이어 미래유통 정중부와 대신운수 박전진이 차례로 들어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이는 세 번째 순이지만, 모임의 대장이라 할 수 있는 현화 케미컬 김영국 이사가 모습을 나타냈다.
다른 이들이 재계 100위권 순위인 것에 비해 현화는 말 그대로 재벌 중의 재벌이라 불리는 재계 10위권 후계자다.
“김 이사님 오셨습니까.”
“내가 제일 늦었나?”
“하하. 우리도 방금 도착했습니다. 이쪽으로 앉으시죠.”
일약 바이오 이일산 대표가 김영국에게 상석을 내주었다.
* * *
VIP 룸을 차지하고 앉은 주몽과 인선 그리고 RT는 가볍게 술잔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여기 있으면 굳이 춤 같은 거 추러 나가지 않아도 담당들이 알아서 애들을 데리고 올 겁니다.”
RT가 새끼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웃음을 보였다.
“나이트랑 별다를 게 없네.”
클럽이라고 특별할 게 있겠는가만은 룸 잡고 웨이터들이 여자들 데리고 와서 인사시키고 하는 건 도긴개긴이다.
“유흥이란 게 구조적으론 거기서 거기죠.”
RT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확실히 다릅니다. 진입장벽이 지하까지 뚫고 내려가는 나이트와는 비교할 수가 없으니 말입니다.”
“크흠. 뭐. 그렇게까지 이야기를 하니. 조금은 기대도 되네.”
엘리스와 정은영 사건 이후. 연애는 반쯤 포기한 상태다.
1년 전엔 누구든 만나기만 하면 좋겠다였지만, 지금은 사람 잘못 만나면 깨 박살 날 수도 있다는 쪽으로 인식이 달라진 것이다.
그렇다고 수도승처럼 호텔 방만 지키고 있을 수도 없는 게, 돈 많고 지위가 높으면 뭘 하겠는가. 사람 사는 재미가 하나도 없는데.
꺾어진 쉰 줄도 아니고 이제 각 서른이다. 연애는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노는 것까지 포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뒤 끝없이 깔끔하고 놀고 만날 수 있는 이런 자리라도 한 번씩 챙겨 먹어야 숨통이 트일 것 같았다.
“자자, 애들 수준은 여기 방 이름에 맞춰서 들어올 거니까. 걱정하지 마시고 한잔합시다.”
RT는 주몽과 일선의 잔에 곧바로 술을 채웠다.
“저는 잔만 받겠습니다.”
김인선은 주몽의 밀착 경호를 위해 동행을 한 상태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술을 홀짝거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주몽은 그냥 편하게 마셔도 된다고 말을 하려다 생각을 바꿨다.
자신은 놀러 나온 거지만, 김인선은 말 그대로 일을 하는 중이다. 편하게 먹고 마시고 하라고 해도 그게 될 리가 없다.
‘만에 하나 문제가 생긴다면 비빌 언덕이기도 하고.’
주몽은 그렇게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RT가 묘한 눈빛으로 나와 인선을 바라봤다.
평범한 직원이 아니라 경호원 자격으로 함께 왔다는 걸 눈치챈 것이다.
꼭 주몽이 아니더라도 이런 경우가 적지 않았기에 더 이상 술을 권하지는 않았다.
“언제쯤 오려나…….”
주몽의 중얼거림에 RT가 히히 웃으며 ‘금방입니다’, ‘기대하세요’라는 말로 답변을 했다.
* * *
현란한 조명과 고막을 흔들어대는 음악에 수많은 이들이 연신 몸을 흔들어댔다.
너나 할 것 없이 몸을 흔들고 비비며 클럽 문화를 즐겼지만, 주몽 꾀기 작전에 투입된 요원들은 이제나저제나 하는 표정으로 룸 쪽을 바라볼 뿐이다.
대놓고 주몽이 있는 방으로 쳐들어갈 수는 없으니 주몽이 밖으로 나와야 춤을 추든 부비부비를 하든 접근을 할 텐데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머리 아프네.”
레이나는 예상치 못한 일이라며 미간을 찌푸렸다.
“클럽에 왔으면 춤을 춰야지. 룸에 박혀서 도대체 뭐 하는 건지.”
오라는 주몽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고 엄한 놈들만 연신 찝쩍댔다. 일행이 있다며 쳐내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제 지겨울 정도다.
로즈는 어쩌면 좋냐는 듯 서지은을 바라봤다.
“기다려봐. 조금 있으면 여기 웨이터들이 우리에게 접근을 할 테니까.”
“클러버들이 아니라 웨이터가?”
“응. 저기 룸 입구 보이지?”
“어.”
“그 앞에 서 있는 남자 보여?”
“그래.”
“아까부터 계속 우리 쪽을 살피고 있어.”
“뭐?”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말에 로즈가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아니, 그런 의미의 감시가 아니라. 우리를 저쪽으로 데리고 가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고.”
“그게 무슨 뜻이야?”
“클럽에 춤추러 오는 놈들도 있지만, 룸에 틀어박혀서 여자를 사냥하는 놈들도 있거든.”
서지은은 클럽의 만남 문화에 대해 잠시 설명을 해 줬다.
* * *
“흠.”
주몽은 기다리기 지루하다는 듯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기다리면 된다니까요. 뭘 그리 급합니까.”
“지루해서 그렇죠.”
“그럼 나가서 춤이라도 한 판?”
“그건 아니고.”
스테이지 쪽으로 자리를 잡았다면 모를까, 춤추러 나간 사이에 여자가 들어오면 그건 그것대로 아쉬울 일이다.
‘밖에 앉았으면 사람 구경이라도 실컷 했겠네.’
술잔 받아놓고 물만 홀짝거리던 김인선이 슬쩍 한 마디 꺼냈다.
“밖에 분위기라도 보고 올까요?”
주몽은 김인선의 의견에 잠시 솔깃한 표정이 됐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냥 있죠. 곧 있으면 온다는데 자리 비워서 좋을게 있겠습니까.”
내 말에 김인선은 살짝 아쉬운 표정이 됐다.
표정을 보아하니 김인선도 나름대로 기대하고 들어왔다가 남자 셋이서 마주 앉아 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으니 내심 실망한 것 같았다.
* * *
“흐음. 그러니까. 적당히 기다리고 있으면 고주몽이 있는 룸으로 우리를 데리고 갈 거다?”
“그래.”
서지은의 설명을 훔쳐 듣고 있던 다른 나라 요원들 역시 ‘그런 거였군’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온다.”
레이나가 웨이터들의 움직임이 자신들 쪽에 맞춰졌음을 확인했다.
엘리자베스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누가 들어가든. 남은 사람들은 친구 찾아 움직이는 것처럼 곧바로 뒤 따를 거야. 단독 플레이해서 문제 일으키지 마.”
엘리자베스의 말에 요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룸에 들어갈 때까지는 공조한다는 암묵적 협의가 이뤄진 상태기에 누구 한 명 반대하는 사람이 없다.
사방이 트인 공간이 아니다 보니 단독플레이를 하고 싶어도 불가능했고 말이다.
이 부장은 활짝 웃는 얼굴로 나타나 영국 측 요원 엘리자베스를 잡았고 그를 따로 나선 웨이터들도 올가와 레이나, 클로이 그리고 장신위안과 브라질 미녀 산드라를 잡아챘다.
이럴 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서지은에게 설명을 들은 상태였기에 다섯 여자는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미약하게 반항을 했다.
그리고 ‘어어.’ 하는 소리를 내며 못 이기는 척 그들을 따라 움직였다.
* * *
“흠. 진짜 오기는 오는 건가? 이거 아무래도…….”
내가 실망스러운 눈빛을 보이자 RT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위기 한 번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그래요?”
“잘 아는 웨이터들에게 눈치 좀 주고 올 테니 기다려보세요.”
“뭐. 가이드가 그렇게 해주겠다는데.”
나는 반가운 표정으로 웃음을 지었다.
분위기를 보고 오겠다며 나갔던 RT가 히히거리는 얼굴로 룸에 돌아왔다.
“지금 옵니다.”
“그래요?”
“쫙~ 스캔해 봤는데. 애들이 아주 죽여줍니다. 그런데 외국 애들 같던데 괜찮겠죠?”
RT의 말에 나는 손을 흔들었다.
“웰컴!”
신분이 들킬 확률이 높은 한국 여자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물만 들이켜고 있던 김인선도 내심 기대하는 눈빛으로 문 쪽을 바라봤다.
* * *
일본 요원 미사키가 주몽 1차 원정대의 뒤를 쫓으며 룸 위치를 확인했고 다른 요원들에게 알렸다.
“다 못 들어가.”
룸을 확인하고 돌아온 미사키가 요원들에게 고개를 흔들었다.
“지나치면서 확인한 거지만, 네 명? 최대 다섯 명 정도가 더 들어가면 꽉 찰 거야.”
미사키의 말에 요원들 표정이 굳어졌다.
콩나물시루가 되더라도 요원들 모두 룸에 들어가는 게 일차 목표였는데 시작부터 어그러진 것이다.
추가 인원은 다섯. 그렇게 되면 남은 이십 명은 손가락을 빨아야 한다.
“어떻게 할까?”
러시아 요원 플로라가 요원들을 바라봤다.
“로테이션.”
로즈가 곧바로 답을 내놨다.
“회전 초밥도 아니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서지은이 한숨을 쉬었다.
“싫으면 빠지던가.”
플로라는 강요할 생각 없다는 듯 서지은을 바라봤다.
“그건 안될 일이지.”
요원들은 네 명, 다섯 명씩 무리를 짓고 곧바로 순서를 정했다.
먼저 들어간 여섯 명은 어쩔 수 없지만, 남은 이들은 공평하게 기회를 얻기로 협의했다.
당장 오늘 이 자리에서 고주몽을 치마폭에 감싸야 하는 것도 아니고 일단 연락을 주고받을 기회만 만들어내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플로라와 로즈. 미사키와 캐나다 출신의 올슨이 1차 진입팀으로 결정이 됐다.
“그럼 우리가 먼저 움직이지.”
“로테이션 시간은?”
“1시간?”
“장난해?”
플로라의 대답에 서지은이 발끈했다.
“그럼?”
“15분.”
“너무 짧아.”
“실력이 없으면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나 같으면 5분만 줘도 충분할 것 같은데.”
서지은이 도발적으로 나오자, 플로라의 표정이 굳어졌다.
“5분? 나는 1분이면 충분해.”
“그럼 1분 뒤에 나와.”
서지은이 피식 웃는 얼굴을 보이자, 플로라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나는 그렇다 쳐도 다른 이들 입장도 생각해야지. 20분.”
“15분!”
“쳇. 좋아. 15분.”
플로라와 서지은이 로테이션 시간을 정하자 다른 이들도 그 정도면 적당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15분 뒤에 2팀이 들어갈 거야. 우리가 들어가면 처음 들어간 애들이 빠져나온다.”
“오호. 그러면 지금 들어가 있는 애들을 제외하곤 30분 정도 여유가 있는 셈이네.”
서지은의 말에 대응각을 세웠던 플로라가 씩 웃는 표정이 됐다.
“출발해.”
“오케이.”
플로라 팀이 룸쪽으로 움직이자 서지은과 남은 요원들은 곧바로 시간을 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