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장. 정신들 차리세요.
문서만 나눠주고 한동안 말이 없던 김덕영이 마이크를 툭툭 건드렸다.
의원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김덕영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의원 여러분에게 나눠드린 문서는 앞으로 우리 당이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 우리가 가져야 할 정체성은 무엇인지를 결정하기 위함입니다.”
김덕영의 말에 의원들도 공감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보안 문건 1번 항목을 봐 주시기 바랍니다.”
● 대통령제 변경에 대한 고찰.
“자유 토론을 거쳐. 5년 단임제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연임, 중임제로 개헌을 할 것인지를 투표하겠습니다.”
“발언권 요청합니다.”
“네. 신 의원님. 말씀하세요.”
“현재 신당의 의석수는 절반을 훌쩍 넘어 의사당을 장악하다시피 한 상황입니다.”
신 의원은 동료 의원들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말인즉. 이곳에서 결정된 사항이 결국 최종 사항이라는 뜻이 됩니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바꿀 수 있는 건 모두 바꿔버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 의원의 말에 몇몇 의원이 문제를 제기했다.
“신 의원. 너무 멀리 나가지는 말자고. 자칫하면 독재 소리를 들을 수가 있어.”
“독재요? 그럴 리가요. 그게 싫다면 다음 선거에서 의석수를 확보하면 될 일입니다. 우리는 헌법이 보장하는 민주주의에 따라 다수결의 힘을 가졌을 뿐입니다. 만약 우리 선택이 잘못됐거나 문제가 있다면 다음 선거에서 판결이 날 겁니다.”
“허허. 그것참. 좋습니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1급 문건에 항목 하나를 추가했으면 합니다.”
신 의원의 말에 김덕영과 지도부는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준비된 안건만 해도 머리가 부서질 지경인데 여기서 또 추가하자니. 김덕영은 마이크를 잡고 반대 의견을 냈다.
“신 의원. 문건에 담긴 사항만 추진한다 해도 임기를 모두 소진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딱! 한 가지입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의견을 내는 것이니 동료 의원분들이 반대한다면 저 역시 다수결 원칙에 따라 포기를 하겠습니다.”
신 의원의 말에 의원들 모두 ‘들어나 봅시다.’, ‘듣고 아니면 반대하면 될 일 아닙니까?’ 하는 등의 말이 흘러나왔다.
“좋습니다. 그래서 무슨 항목을 추가하고 싶다는 겁니까?”
“대통령 출마 나이를 지금보다 낮추는 겁니다.”
“네?”
“대통령 나이 제한을?”
“몇 살로 말입니까?”
“서른다섯!”
현행법상 마흔이 넘어야 대통령 출마가 가능하다. 그런데 그 나이를 무려 다섯 살이나 더 낮추자는 의견이 튀어나오자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넘쳐났다.
“무리입니다.”
“너무 어려요.”
“그 나이에 대통령을 한다고요?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기저기 반대 목소리가 튀어나오자, 신 의원이 한 마디 덧붙였다.
“현 대통령 임기가 끝나고 다음 대통령 임기가 끝나면…… 고 대표님 나이가 서른 중반입니다.”
“…….”
“…….”
느닷없이 고 대표 나이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시끄럽던 회의실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신 의원. 지금 그 말은…….”
“우리 솔직해집시다. 우리 신당이 만들어지고 지금의 의석수를 장악하는데 여러분들이 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막말로 이번 선거도 고 대표님의 살신성인이 아니었다면. 글쎄요. 많아 봐야 스무석? 그 외엔 전부 백수가 됐을 것 같은데. 내 말이 틀렸습니까?”
“…….”
신 의원의 말에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다음 총선에도 이 자리에 앉아 있을 거라고 장담하시는 분 있으면 손 한 번 들어보세요.”
“…….”
“하하. 네. 이게 정상입니다. 우린 그 만큼 인지도도 없고 해 놓은 일들도 없습니다.”
“…….”
“자, 이런 상황에 다음 총선이 닥쳤다고 해 봅시다. 고 대표님이 우릴 계속 후원해야 할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그거야…… 우리가 국회에서 대표님을 도와드릴 수도 있고…….”
의원 한 명이 궁색한 표정으로 의견을 내놓았다.
“세계 최고의 부자를 우리가 도와요? 대왕을 비롯해 대기업 네 곳을 소유한 대재벌을 어떻게 돕는단 말입니까?”
“뭐든 있지 않겠습니까.”
“뭐든 이라…… 여러분 다들 큰 착각을 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고 대표님은 대한민국 시민권만 가지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걸 아시는 분들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도 생각을 못 하고 있지 않습니까.”
신 의원의 말에 몇몇 의원들이 불쾌한 표정이 됐다.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겁니까!”
“정신 차리시라고요! 대한민국에서 벌인 일은 다른 나라에서 못할 리 없지 않습니까. 만약 G20 국가 중 우리보다 밑에 있는 나라가 고 대표님을 국가통치권자로 끌어들이려 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지금처럼 신당 뜨내기들이나 후원하시며 유유자적하실까요? 이번 총선의 성공을 우리 자신의 성공으로 착각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아 한 말씀 드립니다. 신당은 아직 ‘허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건…….”
“아무리 그래도…… 한국을 떠나지는…….”
“아니야. 어느 정도 일리가 있어.”
의원들 사이에 의견이 나뉘었다.
“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고 대표님의 재산은 각국에 100억 달러씩 투자금으로 유치가 되어 있고. 나머지 재산은 이곳 한국의 기업과 미국 쪽 은행에 들어있다고 합니다.”
“그래서요?”
“그래서라는 질문이 지금도 나오는군요. 고 대표님의 재산은 지금도 쉼 없이 불어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현물 재산이 아니라 현금 자산이 수백조예요. 이자만 해도 천문학적인! 이 돈을 가지고 다른 나라로 가 버린다면 우리는 물론이고 대한민국에도 엄청난 손실임을 진정 모르시는 겁니까?”
신 의원의 열변에 평의원들은 물론이고 김덕영과 지도부들까지 ‘어……’하는 표정이 됐다.
“소소하게 당을 유지하고 크게는 이 나라 대한민국을 위해서 고 대표님을 이곳에 잡아놓을 명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신 의원 말은 고 대표님을…….”
“네. 중임제! 최연소 대통령으로 만드는 겁니다. 막말로 우리가 의석수만 많지 대통령에 출마할만한 인물이 있기는 합니까?”
독설이나 다름없는 발언이었지만, 누구 한 명 반론을 내지 못했다.
맞다. 그의 말대로 의석수만 넘쳐나지 대권을 잡을 수 있는 결정적인 인재가 신당엔 존재치를 않았다.
그나마 고주몽의 후광과 후원이 있어서 이 정도라도 유지를 하는 거다.
만에 하나 고주몽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거나 밖으로 나돌게 된다면…… 다들 얼굴빛이 칙칙해졌다.
듣고 보니 보통 심각한 사항이 아니다.
“여기 적힌 안건들. 네.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고 대표님이 한국을 떠나지 않게 꽉 잡아둘 결정적 한 수가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신 의원이 발언을 끝내고 자리에 앉자 회의실은 순식간에 도떼기시장으로 변해버렸다.
방금 그의 발언을 두고 옳다 그르다는 의견을 주고받는 게 아니라, 신 의원이 말한 결정적 한 수를 찾기 위해 무제한 토론에 들어간 것이다.
* * *
오후까지 이어진 정보팀 관련 대화가 마무리되자 오늘 일정이 마무리됐다.
외출이라도 할까 했는데 생각해 보니 자신은 칼 맞은 환자에 휠체어 없이는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다.
“이거 언제까지 타야 한다고 했죠?”
“답답하신 모양이군요. 앞으로 이주는 더 있어야 합니다.”
“연극이 클라이맥스에 올랐을 땐 재미있었는데, 막상 끝나고 나니 애물단지입니다.”
입맛을 다시며 아쉬운 표정을 짓는데, 박산호가 슬쩍 의견을 냈다.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하십니까.”
“네?”
“세상 사람들 모두 대표님이 외출 가능한 상태임을 모르지 않습니까.”
“아!”
“민얼굴로 돌아다니셔도 ‘닮은 사람인가?’ 정도로 생각하지 대표님이라곤 생각지 못할 겁니다.”
“쿠하하. 그것도 그렇네요.”
나는 휠체어를 한쪽으로 치워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답답해서 안 되겠어요. 폐촌에 갇혀 있다가 병원에 갇혀 있다가 이젠 호텔 방구석조차 떠나지 못하는 신세라니.”
돈이 많으면 뭐하나. 죄수만도 못한 생활을 이어가야 하니 속에서 병이 날 지경이다.
“박 부장님.”
“네. 대표님.”
“카렌 좀 불러줘요.”
“바로 호출하겠습니다.”
잠시 뒤, 호텔에 머물고 있던 카렌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스. 부르셨다고요.”
“네. 카렌. 도움이 필요합니다.”
“박 부장에게 들었어요. 외출하시려는 거죠?”
“네. 마스크나 안경을 쓰는 것보단, 인상을 살짝 바꿔버리는 게 더 편할 것 같아서요.”
내 말에 카렌은 곧바로 분장 케이스를 펼쳤다.
“사람 얼굴은 작은 부분만 바꿔도 인상이 달라지죠. 대단한 분장까지 필요한 일도 아니네요.”
카렌은 분장 도구를 꺼내 내 얼굴을 손보기 시작했다.
실리콘과 화장 도구를 이용해 뚝딱거리는가 싶더니 ‘됐습니다. 거울 보세요.’라고 말을 했다.
“벌써요?”
“인상을 바꾸는 건 특수분장까지 갈 필요도 없어요. 화장만으로도 충분히 바꿀 수 있죠.”
손거울을 건네받은 나는 얼굴을 확인했다.
“광대를 도톰하게 강조했고 눈 끝은 살짝 처지게 했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라 코는 볼 부분을 살짝 확장했습니다.”
“호…… 신기하네.”
거울 속 얼굴은 나인 것 같으면서도 나라고 볼 수 없는 전혀 다른 사람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카렌.”
“네. 보스.”
“돌아가지 말고. 나와 함께 일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로건도 이곳에 있고.”
“말씀은 고맙지만, 가족들과 떨어져 지낼 수는 없죠.”
“아. 가족…… 미안해요. 내가 그 부분은 생각을 못 했네요.”
“사람을 소개해드리면 어떨까요?”
“사람이요?”
“네. 우리 쪽 일이란 게 들쑥날쑥해서 안정적이지 못하거든요. 영화촬영을 위한 복잡한 특수효과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처럼 인상을 바꾸거나 상처를 만드는 정도는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아요.”
카렌의 말에 그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처럼 자유로운 외출이 필요할 땐 분장이 필수가 될 것 같기 때문이다.
“부탁할게요.”
“부탁까지야. 능력 있는 친구로 소개해드릴게요.”
카렌은 케이스를 챙겨 밖으로 나가자 나는 곧바로 옷부터 갈아입었다.
“후우. 복권에 당첨되고 이렇게 바깥바람을 쐬는 건 진짜 처음이네.”
“박 부장님.”
“네. 보스.”
“양 과장 좀 불러줄래요?”
“양 과장이라면. 그 국정원 사람 말씀입니까?”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로버트와 국내 정보팀 구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양 과장은 내 호출을 받고 곧바로 얼굴을 비췄다.
“부르셨습니까? 어? 얼굴이…….”
“외출 좀 하려고 살짝 손 좀 봤습니다.”
“경호 관련 때문에 부르셨군요.”
“혼자 나가는 건 로버트가 절대 용납하지 않으니까요. 그렇다고 얼굴까지 바꾸고 외출을 하는데 외국인 경호원들과 다니는 건 오히려 언밸런스 해서요.”
“동행인이 필요하신 거군요.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네. 부탁드립니다.”
양 과장이 붙여준 사람은 같은 부서에서 근무했던 부하 직원 김인선이다.
707에서 근무를 하다 국정원으로 특채되어 3년 넘게 요원 생활을 했다고 하는데, 이번 사건으로 인해 양 과장과 함께 사표를 제출했다고 했다.
“잘 부탁합니다.”
“네. 대표님!”
군 출신이라서 그런지 어딘지 딱딱한 냄새가 났다.
롤스로이스가 부서지고 임시로 구입한 차들이 몇 대 있는데, 용도에 맞춰 쓰기 위해 차종을 구분해 놓았다. 오늘 탈 차량은 포르쉐 911이다.
“이런 차량은 몰아본 적이 없어서…….”
김인선은 차량을 확인하자 적잖게 당황한 표정이 됐다.
“그럼 오늘 연습 삼아서 몰아보시면 되겠네.”
차 키를 건네받은 김인선은 조심스럽게 운전석에 착석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인선 씨. 클럽 좋아합니까?”
“죄송합니다. 그쪽과는 별로 인연이 없어서.”
“차도 그렇고 클럽도 그렇고. 연습 삼아서 가 보시면 되겠네요. 자, 출발합시다.”
“네. 대표님.”
그냥 남들처럼 술도 좀 마시고 몸도 좀 흔들고. 오늘은 그렇게 놀기로 했다.
겸사겸사 좋은 일 있으면…… 험험. 외박도 고려해 볼 일이다.
일도 좋고 미래를 선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러다 대마법사로 진화해서 마법을 쏘며 마왕으로 진화할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