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8장. 투자의 시작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주몽 납치살해 시도도 어느덧 한물간 뉴스가 됐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사람들의 관심은 일상으로 돌아갔다.
주몽 역시 연구개발에 본격적으로 돈을 투자하기 시작했다.
“대표님. 투자집행서입니다.”
“두툼하네요.”
총 4,038건의 투자 서류가 회의 테이블에 놓였다.
“국내 시설 투자는 아직 검토 중이고 지금 올라온 서류는 각국에서 선정된 연구 관련입니다.”
“4천 건이 넘는 연구 주제라. 시간이 필요한 일이지만 미래가 기대되네요. 분류하고 선정하느라 고생이 많았습니다.”
“하하. 연구 주제를 선정하는 것보다 각 나라마다 GO 컴퍼니 지사를 설립하는 게 더 힘들었습니다.”
연구 선정보다 직원을 뽑고 업무 컨트롤 하는 게 더 힘들었다며 박산호가 너스레를 떨었다.
“총사업비가 13조라. 투자 준비금에 비하면 15%도 안 되네요.”
“대표님. 1차 연구 지원금만 13조입니다. 이 정도 규모의 연구비 투자를 일시에 운용할 수 있는 G20 국가에서도 상위 클래스 몇 곳만 가능합니다.”
내 말에 박산호가 한숨을 내 쉬었다.
“하하. 그런가요?”
“네. 그런 겁니다. 남은 투자금은 둘째 치더라도 이미 천문학적인 연구비입니다.”
“박 부장님.”
“네. 대표님.”
“돈의 규모에 집중하지 마세요.”
“네?”
“현재 보유하고 있는 현금 자산만 해도 이미 국가 단위 예산입니다. 내가 미쳐서 길거리에 뿌리거나 불을 지르려 해도 힘들어서 포기할 정도죠.”
나는 투자 집행서에 사인을 하며 말을 이었다.
“지금도 돈은 불어나고 있어요. 딱히 뭔가를 하지 않아도 계속해서 불어나고 있습니다.”
“…….”
“내가 생각하는 미래는 돈이 목적이 아닙니다. 가치를 선점하는 것.”
“가치 선점…….”
“네. 복권에 당첨됐을 땐 갑자기 돈벼락을 맞은 졸부였지만, 지금은 어느덧 대기업을 휘하에 둔 투자가가 됐죠.”
“네.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기업을 경영하거나 일반인들 직장 생활하듯 출퇴근을 하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내 말에 박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천 회장님이나 다른 기업인들과 나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삶의 전부를 회사에서 보냈고 또 기업을 이끌어가는 게 목적인 분들입니다.”
사인을 마친 나는 박산호를 바라봤다.
“진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사시더군요.”
“네. 기업을 경영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죠. 특히나 대기업 같은 경우엔.”
“난 그렇게 살 자신도 없고 살고 싶지도 않아요. 그렇다고 돈을 벌기 위해 아등바등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말입니다.”
“그건 그렇습니다.”
“그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
“흥청망청 돈이나 쓰면서?”
“하하. 그러시기야 하겠습니까.”
“문제는 그렇게 펑펑 쓰면서 살아도 아마, 쓰는 돈보다 늘어나는 돈이 더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자와 투자수익금만 해도 수십, 수백억 단위의 돈이 늘어나는데 그걸 어떻게든 다 써보겠다고 머리를 굴리는 것도 웃기는 일이잖아요.”
박산호는 ‘아……’하는 소리를 냈다.
“그렇다고 멍청하게 시간만 보낼 수도 없는 일이죠. 그래서 택한 게 가치 선점입니다. 돈이 아니라 미래를 손에 넣고…… 아니 돈으로 훔치는 중이죠.”
“전부는 아니지만,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진지한 표정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때그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자는 것뿐이니. 좀 재수 없게 들리려나요?”
“하하.”
박산호는 머쓱한 표정으로 웃음을 보였다. 주몽의 입장과 상황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눈엔 당연히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제 와서 남 눈치 보며 살 것도 아니고. 마이 웨이 하렵니다. 다음 안건 주세요.”
“네. 특허를 전담으로 관리 획득하는 부서 말입니다.”
“네. 그게 왜요? 문제라도 있나요?”
“그게. 부서 책임자를 누구로 하실 것인지.”
“아아. 부서 책임자. 박 부장님이 겸하세요.”
투자팀이 미래의 가치 선점을 목적으로 한다면, 특허 관리 획득을 목표로 하는 부서는 말 그대로 현재의 가치를 선점하는 데 목적이 있다.
투자팀이 G20 각국에 하나씩 만들어졌다면, 특허 관리팀은 모두 21개가 만들어졌다.
20개는 나라별 특허에 접근하는 부서고 남은 하나는 국제 특허와 관련해 획득할 수 있는 것들을 선별하는 임무를 지녔다.
“제가 말입니까. 대표님 저 여기서 업무가 더 늘어났다간 과로사할 수도 있습니다.”
박산호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누구 추천할 만한 사람 있나요?”
“특허관리부 총 책임자입니다. 대표님이 선정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기업들과 달리 GO 컴퍼니 조직 체계는 그야말로 심플 그 자체다.
금융팀, 법무팀, 경호팀, 비서팀으로 구성돼 있으며 서열로 따진다면 제이코와 로버트의 법무팀과 경호팀이 동격. 금융팀과 비서팀이 그 밑을 차지하고 있다.
박산호는 한국지부장 겸 비서실장을 맡았다. 거기다 각 지부의 총괄팀장도 겸하고 있어서 종종 업무 과다를 호소하는 중이다.
추가로 특허 관리팀이 신설됐으니 여기에 앉힐 인재가 필요한 상황인 것이다.
“문제네요. 사람이 없어요.”
“소수 정예도 좋지만, 필요한 인력을 충원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네. 그 부분은 전체 회의 때 이야기하도록 하죠. 일단 각 지부의 특허 관리팀은 업무를 시작하라고 하세요. 보고서 정도는 작성해서 올릴 수 있는 구조는 마련됐으니.”
“일단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 깜빡할 뻔했네.”
“말씀하십시오.”
“그 폐촌 있지 않습니까.”
“폐촌이라면 일전의 그 사건이 벌어졌던…….”
“네. 그쪽 땅을 매입했으면 합니다.”
내 말에 박산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따로 생각하시는 부분이 있으십니까?”
“집을 지을까 합니다.”
“아…….”
호텔 생활을 정리하려고 김덕영에게 집을 알아봐 두라고 했지만, 이젠 정치 쪽으로 자리를 옮긴 상태라 따로 신경을 쓰는 사람이 없었다.
“집을 직접 지으실 계획이라면 한동안은 계속 호텔 생활을 이어가셔야겠군요.”
“그건 좀 더 고민해 봅시다. 아무래도 사람들이 들락거리는 곳이라.”
“네. 알겠습니다. 결정되면 말씀해 주십시오. 폐촌 부분은 비서실에서 정리해 놓도록 하겠습니다.”
보고를 마치고 서류를 챙겨 나갔던 박산호가 잠시 뒤 다시 얼굴을 내밀었다.
“대표님. 로버트 팀장님이 로비에 도착했다는 전갈입니다.”
“그거 희소식이군요.”
정보팀 조직을 만들기 위해 미국에 나가 있던 로버트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납치, 살해 사건이 일어나자 자책까지 하며 끙끙 앓았지만, 준비 중인 계획을 알려주며 정보팀 작업에 집중하라고 했었다.
잠시 뒤, 문이 열리며 로버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로버트!”
“보스!”
“하하하. 정말 보고 싶었습니다.”
“저야말로 소식을 듣고 간이 콩알만 해졌습니다.”
“자자, 이쪽으로 앉으세요.”
로버트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더니 밖에서 누군가를 데리고 들어왔다.
“보스. 소개해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로버트와 함께 들어선 사람을 바라봤다.
갈색 머리에 평범한 인상의 백인 남자 한 명과 짧은 스포츠머리를 한 흑인 남자 한 명이 나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칼 로이건입니다.”
“셈 해밀턴입니다.”
“네. 고주몽입니다.”
“보스. 칼은 NSA에서 정보 분석관으로 뼈가 굵은 친굽니다. 이쪽 셈은 CIA에서 요원 교육을 맡다가 얼마 전 은퇴를 했는데 시골에서 소나 키우고 싶다는걸. 겨우겨우 설득해서 데리고 왔습니다.”
“아!”
NSA 일명 국가안전보장국. CIA가 국외정보를 총괄한다면 NSA는 국내 정보를 총괄하는 정보조직이다.
미국에 많은 정보단체가 있지만, 대표가 될 만한 조직을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이 NSA와 CIA, 군정보국이다.
그중 두 곳의 인재를 스카우트해 온 것이다.
“환영합니다. 미스터 로이건. 미스터 해밀턴.”
나는 재차 인사를 건네며 환영의 뜻을 밝혔다.
자리를 함께한 우리는 가볍게 담소를 나누며 GO 컴퍼니 정보팀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보스. 정보팀은 모두 세 파트로 나눌 생각입니다.”
“설명해 주세요.”
“여기, 칼은 NSA에서 활동했던 것처럼 수집된 정보를 분석하고 결과를 도출해 내는 분석팀을 책임질 겁니다. 그리고 셈은 요원들의 스카우트와 관리, 지원을 책임질 겁니다.”
“남은 한 파트는 뭔가요?”
“현장 요원 아니겠습니까.”
“007 같은?”
내가 장난스럽게 영화 007을 들먹이자, 세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007 또는 제이슨 본 같은.”
“그런데 그 정도로 능력 있는 요원들을 우리 쪽으로 섭외할 수 있을까요?”
경찰 조직과 달리 이쪽은 은퇴해도 계속 감시를 받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섣불리 사람을 데려왔다간 CIA나 NSA에서 화를 낼 수도 있는 일 아닌가 말이다.
“보스 말씀처럼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럼 어떻게 인원을 충당할 생각입니까?”
“키워야죠.”
“에?”
“보스. 정보조직은 사람만 모아놓는다고 해서 돌아가는 곳이 아닙니다.”
“그거야 그렇겠지만…… 시간상으로 가능한 일입니까?”
내가 딱히 CIA나 NSA 같은 대단한 조직을 갖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몇 년씩 시간을 투자할 생각은 없다.
당장 정보팀을 돌려야 할 상황인데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될 때까지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말이다.
“예비 인력은 이곳에도 충분합니다. 물론, 국가별 인종별 요원도 따로 뽑고 관리를 해야겠지만, 지금 당장 필요한 인력은 한국에서 수급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로버트가 씩 웃음을 보였다.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오. 아직 올 사람이 더 있으니 말입니다.”
로버트의 말이 끝나고 몇 분 지나지도 않았는데 노크 소리가 흘러들었다.
“왔나 봅니다.”
로버트가 직접 문을 열었는데 익숙한 얼굴 하나가 안으로 들어섰다.
“어?”
내가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짓자, 로버트가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양하석 씨?”
JTB 방송국 사태 이후, 한동안 경호 임무를 수행했던 국정원 요원이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간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네. 대표님. 그랬었습니다.”
양하석은 어색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국정원을 그만두고 우리 쪽으로 오신 겁니까?”
“그렇게 되었습니다.”
양하석이 멋쩍은 얼굴로 대답을 하는데, 로버트가 그에게 자리를 내줬다.
“보스.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네. 그래요.”
“보스 납치 사건이 있었지 않습니까.”
“네. 설마…….”
“아, 그 일과는 무관합니다.”
로버트는 오해는 하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일과는 무관하지만 2차장인가 하는 사람이 잡혀가면서 관련 부서에 구조조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구조조정이라는 말에 양하석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