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7장. 어디까지나 선택에 맡길 뿐입니다.
“청문회. 묻고 답한다. 맞죠?”
“네. 뜻은 그렇습니다만…….”
“뜻에 어울리는 그런 청문회 좀 만들어봐요. 죄인 불러다 놓고 취조하는 장소도 아니고 예스. 노만 강요하려면 뭐하러 청문회를 합니까?”
내 말에 김덕영은 물론이고 다른 의원들 역시 ‘당신은 그냥 다 떠들었잖아!’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보는 국민 짜증 나지 않게 잘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노…… 노력해 보겠습니다.”
“그리고…….”
“또요?”
“이왕 말 나온 김에 다 해 버립시다.”
“하하. 네. 그렇죠. 말이 나온 김에.”
김덕영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지성명 정도나 받아가려도 찾아왔는데 완전히 똥을 밟아버렸다.
그렇게 한 시간 넘게 이어진, 지침 사항을 가장한 미친 듯이 굴려버리기 작전이 마무리될 때쯤 당 지도부는 순식간에 10년은 늙은 얼굴들이 되어버렸다.
“뭐. 이 정도면 임기 동안 의정 활동하는데 충분하겠죠?”
충분? 일하다 과로사나 안 하면 다행이겠습니다! 하는 눈빛들이다.
두어 개 지침 사항만 받아다 그걸로 당론도 관리하고 외로운 늑대 흉내 내는 신인 정치인들도 교육 좀 할 생각이었는데, 완전히 일 폭탄을 얻어맞았다.
“그리고…….”
내 입에서 또다시 ‘그리고’가 흘러나오자, 김덕영은 물론이고 지도부 전체가 뜨악한 표정이 됐다.
대표 자리를 맡은 김덕영은 의원들 눈살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이쯤에서 마무리 지어보라는 무언의 압박이다.
“에에? 방금 끝났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네. 지침 상황은 끝났습니다.”
“그런데…… 왜.”
“당규와 계약서를 방패 삼아 계파정치를 하려 든다면서요.”
“에…… 뭐.”
“그것도 정리해 놔야죠.”
“…….”
“하지 말까요? 그것 때문에 찾아오신 거 아니었습니까?”
김덕영은 불안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찾아온 이유가 그것 때문이기는 하니 이제 와서 자신들에게 맡겨 달라고 하기도 민망했기 때문이다.
“하하. 네. 당연히 해야죠. 그것 때문에 찾아왔는데.”
김덕영이 지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법안 발의 부분입니다.”
“네. 대표님.”
“당내에 만들어진 무리가 몇 개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전하세요. 과거 잘못된 법안을 찾아내 수정하는 쪽과 새로운 법을 신설하는 쪽으로 택일해서 활동하라고.”
내 말에 김덕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것과 계파정치를 단속하는 것이 무슨 상관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모두 한쪽만 택하면 어떻게 됩니까?”
“상관없습니다. 본인들 선택이니.”
“그런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김덕영의 말에 다들 궁금한 표정이 됐다.
과거의 법이든 새로운 법이든 어차피 입법 활동이다. 그걸 굳이 나눠서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표정들이다.
“새로운 법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과거의 잘못된 법을 수정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의원들도 이것저것 건드는 것보다 주 종목을 잡고 매진하는 것이 더 나은 효과를 보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계파가 됐든 소모임이 됐든 선택한 분야에 맞춰 헤쳐 모이라고 하세요.”
친분에 의한 모임이 아니라 목적에 맞춰 활동할 수 있는 일종의 스터디클럽 형태로 정리하라는 뜻이다.
내가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했는지 찰떡같이 알아먹은 김덕영이 조금은 밝아진 얼굴이 됐다.
“아아!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그 부분도 참고하겠습니다.”
“신당이 의석수는 많이 차지했지만 아무래도 인지도는 낮은 편이지 않습니까.”
“네. 아무래도 그런 점이 없지 않습니다. 사실 그 부분 때문에 고민도 많이 하는 중입니다.”
신당이 이번에 얻은 결과들은 모두 나를 중심으로 한 이벤트, 컨벤션 효과일 뿐이다.
당보다 당 후원자에게 더 관심이 많다는 것은 당의 입지를 다지는데 오히려 마이너스로 작용했다.
“그래서 말인데, 신당 웹사이트에 ‘청원게시판’을 만들죠. 청와대 있는 것과 비슷한.”
“오. 그거 좋은 생각이군요.”
청원게시판을 만든다는 말에 다들 표정이 밝아졌다.
이는 유권자의 지지와 관심으로 이어질 수 있게 때문이다.
“그곳에 글을 쓰려면 가입을 해야 할 겁니다.”
“아무래도 그렇겠죠. 익명성은 문제가 될 수 있으니.”
“가입하는 과정에 자신의 지역구 의원과 지역구는 아니더라도 관심을 가지는 의원 두 사람을 선택할 수 있게 항목을 만들 겁니다. 가입이 완료되면 관심 의원 삼 인의 의정활동이 고스란히 메일로 발송이 되게 만들겠습니다.”
“어차피 분기별로 의정활동 보고서를 지역구 주민들에게 발송하는데 그럴 필요까지 있을까요?”
철새 정치인 한 명이 의견을 냈다.
“그건 여러분들이 알아서 할 일이죠. 내가 말하는 것은 당 차원에서 주기적으로 활동내용을 정리, 발송하겠다는 말입니다. 그와 관련한 인원, 자금은 당연히 지원할 겁니다.”
“에? 뭐 그렇게까지…….”
의원들은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무용론’을 들고 나왔다.
보내봤자 읽어보지도 않고 스팸 처리될 수도 있다는 말까지 나왔다.
“무용할지, 유용할지는 해 봐야 아는 겁니다.”
“…….”
“솔직히 그렇잖습니까. 국회의원들 선거 때나 열심히 돌아다니지 막상 국회에 들어가면 무슨 일 하는지 누가 얼마나 압니까. 솔직히 말해 나도 잘 모릅니다.”
나는 잠시 목을 축이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이번 기회에 국회의원이 얼마나 힘든 직업인지. 또 얼마나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인지 국민께 알려드립시다. 여러분들도 정보 공개 항목을 나누어서 제공할 수 있습니다. 사생활을 제외한 모든 정보를 공개하는 분도 계실 것이고 한정적 활동만 공개하는 분들도 계시겠죠. 그건 선택에 맡기겠습니다.”
“정보 공개요?”
정보 공개를 꺼리는 이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초짜 정치인들이 그런 걸 고민할까? 결혼하지 않은 처녀, 총각 의원들도 존재하니 이들은 ‘나 혼자 살아요.’를 찍을 생각으로 아예 사생활까지 공개하는 이들도 생겨날 것이다.
미디어 정치가 일상화된 요즘 자신을 알리고 홍보할 방법이 있다면 거부할 리가 없다.
한 마디로 누군가 총대를 메고 나서게 되면 남은 이들도 울며 겨자 먹기로 동참을 해야 한다는 소리다.
정보 공개를 최소화할수록 ‘의정활동에 대한 의심’을 살 것이고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는 의심을 사는 순간 표가 갈려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김덕영과 지도부가 썩은 표정이 되든 말든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 의정활동은 물론이고 지역구 활동. 그 외 봉사활동 등도 모두 정리를 해서 발송하겠습니다. 다들 좋아하시잖아요. 보육원이나 양로원가서 사진 찍는 거. 그거 당에서 전격적으로 지원하겠습니다. 봉사활동 많이 부탁드리겠습니다. 당의 인지도나 지지도를 높이는 일인데 소속 의원들이 불참하거나 협조에 응하지 않겠다 뭐 이런 건 아닐 거라 믿겠습니다.”
“…….”
“대답들이 없으시네.”
“아닙니다. 당연히 그래야죠. 국민에 봉사하기 위해 국회의원이 됐는데. 당연히 해야죠.”
“그리고…….”
“아직도 남으셨습니까?”
“하하. 그러게요. 말을 하다 보니까. 아이디어가 막 쏟아지네요. 이런 이야기를 또 언제 나누겠습니까. 이왕 자리한 김에 끝까지 가 보죠.”
의원들은 어색한 표정으로 ‘하하’ 웃음을 보였다.
“어디까지나 본인의 선택사항이겠지만, 24시간 개인 생방송도 지원하겠습니다.”
“새…… 생방송이요?”
김덕영은 물론이고 지도부 전체가 눈이 동그래졌다.
“선택사항이라고 했습니다. 원치 않는 분들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연히 자신들은 원치 않았다. 하지만, 이 소식이 신인들에게 알려지면 옳거니 하는 심정으로 번쩍 손을 드는 놈들이 분명히 나타날 것이다.
“하지만…… 24시간 생방송을 한다는 것은…… 사생활 문제도 있고.”
“그거야 본인들 선택 여부에 따라 방송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의원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방송이란 거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카메라도 필요할 것이고 이걸 찍어서 올리는 사람도 필요할 것이고…… 보좌관들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 것은 인적낭비가 되지 않겠습니까.”
“당연하죠. 이런 일을 보좌관들에게 시키면 되겠습니까. 청년 취업 문제에 도움도 줄 겸. 국회의원 실시간 방송팀을 따로 꾸리겠습니다. 방송을 신청하는 의원들에게 3인으로 구성된 팀을 붙여드리죠. 아무 걱정하지 말고 의정활동에 임하시면 될 겁니다.”
“그런 부분까지 대표님에게 의지를 해서야 되겠습니까. 이 부분은 저희가 알아서….”
“돈이 부족해서 사람이 없어서 못 한다면 모르겠지만, 다들 아시잖아요. 저 부잡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그 정도 지원은 내 재산에서 먼지 만큼도 티가 나지 않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
“아, 청원게시판은 국민청원게시판과 지역구 게시판을 나눠서 만들 겁니다. 각 지역구 소식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니. 여러분의 의정활동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떻습니까?”
“다… 당연히 도움이 될 겁니다. 하지만 청와대 청원 게시판도 요즘 시들시들한데…… 당에서 운영하는 게시판이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신당 웹사이트는 앱으로도 만들어 배포하고 광고까지 무한대로 때릴 것이니 참여율이 저조하다던가 할 일은 없을 겁니다. 신당의 의정활동은 전 국민 모르는 사람이 없도록 제가 확실하게 지원을 해 드리죠.”
“…….”
처음엔 밝은 표정으로 환호하던 의원들이 하나, 둘 침울한 표정이 됐다.
“그리고 당에 돌아가 의원들에게 전하세요. 당규와 계약서를 준수하는 정치 활동은 문제로 삼지 않겠다고.”
“네?”
“계약서란 양측이 서로 간에 지켜야 할 약속입니다. 이제 와서 약속한 바를 물릴 수는 없는 일이죠.”
“…….”
“하지만. 당내 갈등을 조장하거나 계파 간 얼굴 붉히는 일이 벌어진다면 정치 활동지원금은 동결될 거라고 전하세요.”
“아…….”
돈으로 만든 당이니 돈으로 제재를 가하겠다? 김덕영과 지도부는 그거야말로 좋은 방법이라며 표정이 밝아졌다.
“그리고…….”
“네. 대표님. 말씀하십시오.”
그리고만 튀어나오면 식겁한 표정이었던 김덕영이 반가운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이번엔 자신들 유리한 내용이 흘러나와서 그런가 본데,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지.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연대책임을 묻겠습니다. 대표는 물론이고 지도부와 다른 의원들까지 모두 지원금 동결입니다. 역적 취급받고 싶다면 얼마든지 날뛰어도 된다고 그렇게 전하면 될 겁니다.”
“네에?”
“대표님. 그건 좀…….”
“연대책임이라뇨.”
다들 불합리한 처사라 생각했는지 반발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신당은 하나가 될 겁니다. 좋으면 같이 좋고. 나쁘면 같이 나쁘고. 멍청한 짓을 하면 같이 망하겠죠.”
“…….”
“오늘 만남은 여기까지.”
신당 주도권을 확답받으러 찾아왔던 김덕영과 지도부는 온갖 일거리만 끌어안고 회의실을 나섰다.
“대표님. 우리 목적은 이게 아니었지 않습니까.”
“후. 누가 그걸 모릅니까?”
“오늘 내용을 그대로 따랐다간, 숨소리도 함부로 못 내게 될 겁니다. 언제 어디서 누가 어떻게 지켜볼지도 모르니…….”
“그렇게 답답하면 의원님이 들어가서 다시 이야기를 해 보시던가요.”
“…….”
“일단 돌아가서 대책이라도 세워 봅시다.”
“네. 그래야죠.”
“후우. 지침 사항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잠은 다 잤습니다. 이걸 하나의 당론으로 정리하려면…….”
의석수를 많이 확보한 것까지는 너나 할 것 없이 좋았는데, 막상 입을 하나로 모으는 일은 더욱 힘들어졌다. 오늘 지침 사항을 당에 내놓는 순간 당은 도떼기시장으로 변해 버릴 것이다.
* * *
한국에서 벌어진 이번의 사태는 각국 정부와 권력자들에게 경각심을 심어줬다.
자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고주몽이다. 만에 하나, 고주몽이 한국에서 그런 것처럼 신당을 만들고 투자금을 미끼로 정치인들을 끌어모은다면? 기존 권력자들에겐 지옥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특히, 이번 고주몽 실종 또는 사망과 관련해 한국과 알음알음 공조 작업에 들어갔던 국가들은 그야말로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주몽의 복수전이 한국에 그치지 않고 범위를 넓히게 된다면 자신들 역시 무사하지 못할 것을 깨달은 것이다.
주몽이 벌인 복수전을 바라보며 이들 국가가 선택한 길은 세 가지다.
이번 일에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거나 동조한 자들을 발본색원해 주몽이 엉뚱한 짓을 벌이기 전에 알아서 항복을 선언한 국가와 자신들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으며, 주몽의 재산과 관련해 어떤 꼼수도 부린 적이 없다며 오리발을 내민 국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몽에게 주어졌던 시민권을 박탈, 회수하려는 국가로 나뉘었다.
내국에 간섭할 수 있는 시민으로 두기보다 관계없는 외국인으로 만들어 불확실성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 안전하다고 판단을 한 것이다.
시민권 박탈, 회수를 고민한 국가는 가깝고도 먼 나라. 바로 일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