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6장. 지침을 내리겠습니다.
“너무 열심히 해서 탈이라니. 살다 살다 별소리를 다 듣는군요.”
내 말에 김덕영이 하하 웃음을 보였다.
“열심히 하는 게 무슨 문제겠습니까마는 이러다 경쟁이 과열되면 당내에서 분란이 일까 걱정스럽습니다. 당선자 수가 워낙 많다 보니 지역구도 다닥다닥 붙어 있는 형국인데, 자신의 지역구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면 이웃한 지역구보다 지원금을 더 받아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감정싸움이 일어날 수도 있겠군요.”
“네. 대표님.”
“그런데 왜 그걸 나에게 이야기하는 겁니까?”
“네?”
“이미 말했을 텐데요. 나는 정치적 후원자일 뿐 신당의 일엔 간섭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 말에 김덕영은 물론이고 지도부 인사들 모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주기만 하고 받지 않는다면 정치 포퓰리즘이 되고 말 겁니다.”
“뭐가 됐든지 상관없습니다. 정치색이 옅은 신당에 있어선 대표님의 노선 지침이 필수적입니다.”
“당규와 계약서만 믿고 날뛰는 망아지들을 제어하려면 대표님의 힘이 필요합니다. 이대로 두었다간 당내에서 여·야가 새로 만들어질 판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워워. 이 인간들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당내에서 여·야가 만들어질 판이라니?
김영덕 대표와 지도부의 아우성에 나는 급히 손을 들어 올렸다.
“잠깐!”
“…….”
“그러니까. 지금. 규율부장이 필요하다는. 그런 말입니까?”
내가 회의실을 쓱 둘러보자 다들 ‘굳이 가져다 붙이자면 그것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하는 표정들이다.
“엄연히 당 대표가 있고 지도부가 있는데 내가 그걸 왜 합니까?”
내 질문에 하나 같이 한숨을 쉬었다.
“뭡니까. 그 땅 꺼지는 소리는.”
“당 대표, 지도부. 네. 힘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런데요?”
“문제는 계약서입니다.”
“흠.”
“계약서 때문에 대외적으로 문제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무슨 짓을 해도 되는 상황이 돼버렸습니다. 말 그대로 자신의 정치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그런 판이 깔린 셈이죠.”
비리나 범죄를 저지르지 말라고 만들어 놓은 계약서가 오히려 그들에게 자유를 허락한 셈이 됐다는 뜻인가?
“철새 소리를 들었던 의원들은 가족은 물론이고 사돈의 팔촌까지 관리에 들어갔습니다. 많은 정치인이 자신보다 주변의 문제 때문에 물러난 경우도 적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건 좋은 일 아닌가?
내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함상호가 입을 열었다.
“물론 그게 문제라는 건 아닙니다. 그만큼 독하게 단속을 한다는 말은 자신들이 생각한 정치를 밀어붙이겠다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동안 그렇지 못했다는 말인가요?”
“그간 당에 매몰돼 자신의 발언은 묻어 버린 정치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젠 눈치를 보고 말고 할 것도 없고, 의정활동만 잘 마무리하면 명예는 물론이고 먹고 사는 문제까지 해결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당만 존재할 뿐, 당론이란 게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아, 그 부분은 제가 부연 설명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전 법무부 장관 나관형 의원이 입을 열었다.
“네. 말씀하세요.”
“당론이 없다기보단, 각각 무리를 지어 자체적으로 당론을 만들기 시작했다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당내 여·야가 만들어지고 있다는 게 그 말이군요.”
“네. 일종의 계파정치가 시작된 건데, 당규와 계약서 사항만 준수하면 문제 될 게 없으니…….”
“의견이 나누어져서 관리가 안 된다는 말이군요.”
“면목 없습니다.”
“아니요. 듣고 보니 확실히 문제가 될 수도 있겠네요.”
비리와 범죄를 저지르지 않게 목걸이를 채워두면 그걸로 되겠다 싶었는데, 이건 전혀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튀어나왔다.
이 상태로 시간이 흐른다면 여·야가 멱살 잡고 싸우던 장면이 신당 내에서 벌어질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잠시 생각 좀 하겠습니다.”
“네. 대표님.”
내가 생각에 잠기자, 김덕영과 신당 지도부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기다리는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말입니다.”
“네. 대표님.”
“내가 이야기한다고 이 문제가 해결되겠습니까?”
“당연히 됩니다. 신당은 대표님의 힘으로 운영되고 유지되는 당입니다. 말도 안 되는 불합리한 지시가 내려진다면 모를까. 누구나 공감하고 인정할 수 있는 지침이 내려진다면 당연히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김덕영 대표는 ‘내 생각과 말’이 당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늘어놨다.
제이코가 심심치 않게 이야기했던 '내 말의 힘'과 같은 맥락이다.
“그렇군요.”
나라고 이걸 몰라서 물었겠는가. 알면서도 슬쩍 잽을 던진 것뿐이다.
당의 운영에 간섭하지 않겠다고까지 말을 해 놨는데, 이제 와서 코치하는 것도 은근히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작지만 나 나름의 명분 쌓기다. 너희들이 그렇게 요구를 해서 내가 어쩔 수 없이 말을 할 수밖에 없다는.
‘당론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지침 사항과 계파정치로 인해 당이 분열되는 상황을 막을 방법이라고? 훗. 그걸 핑계 삼아 자신들의 지도력과 당내 영향력을 높이겠다는 생각이시겠지.’
뭔가 대단한 답을 구하고자 찾아왔다기보다, 나를 통해 명분을 얻고자 찾아왔다고 보는 게 맞을 듯싶다.
당 대표의 발언과 지도부의 결정에 ‘힘’이 실릴 수 있도록. 이는 다음 대권을 향한 욕심도 적잖게 포함돼 있을 것이다.
‘일종의 지지 선언을 해 달라는 뜻 같은데……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될 것 같은데.’
자칫하면 지도부와 의원들 사이에 더 큰 싸움이 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특정 인물들에게 힘을 실어줬다간 신당 내에 고주몽 계파라는 엉뚱한 모임이 탄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럴 땐 딴 생각할 틈이 없도록 미친 듯이 굴리는 게 답일 것도 같고.’
효율을 따지자면 좋다 나쁘다 말하기 그렇지만, 군대에서 이런 방법을 자주 썼다. 몸을 고달프게 만들어서 머리를 비우게 한다고 할까.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내가 고개를 들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이렇게 하도록 하죠.”
“네. 대표님.”
“일단 지침 사항. 그러니까 당론으로 밀고 가야 할 부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총선 전에 함 의원님이 찾아왔을 때 잠시 했던 말입니다만.”
내 말에 의원들 시선이 함상호에게 잠시 집중됐다.
함상호는 ‘크흠’하고 짧게 헛기침을 하더니 ‘연속성’이라고 한 마디 힌트를 줬다.
“연속성?”
의원들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김덕영이 ‘집중합시다. 집중. 대표님 말씀 중입니다’라고 한마디 했다.
다시 나에게 시선이 모였고 말을 이어갔다.
“대통령 단임제. 이것부터 고쳐보죠.”
“아! 연속성…….”
“그렇지. 이미 몇 차례 시도가 됐지만, 정권이 바뀔 때마다 찬성과 반대를 오가 다 보니…….”
정권을 잡은 쪽에선 계정을 반대편에선 반대를, 반대했던 이들이 정권을 잡으면 계정을 정권을 놓친 쪽에선 다시 반대를. 한 마디로 코미디가 따로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의석수를 장악한 이번 기회에 이런 문제들을 손볼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
“4년 연임제를 생각하시는 겁니까?”
“연임제도 좋고 중임제도 좋습니다. 이 부분은 당내 의견을 수렴해서 진행해 보세요.”
내 입에서 중임제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다들 살짝 놀라는 표정이 됐다.
연임제는 잘해도 두 번이 끝이지만, 중임제는 제한이 없다.
국민의 지지만 받는다면 죽을 때까지 대통령을 해 먹을 수도 있는 것이다.
대통령제 수정 지침이 내려지자 의원들 사이에 곧바로 말들이 오갔다.
“그리고…….”
내가 다시 입을 열자, 곧바로 소란이 잦아들었다.
“선거 연령제 관련입니다.”
“18세 하향조정을 말씀하시는군요.”
“그렇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중학생만 되도 알만한 것은 다 압니다. 그런데 신분증까지 발급된 나이에 선거권이 없다는 건 그들을 너무 무시하는 행태가 아닐까 싶습니다. 막말로 18세에 경제 활동을 하면 세금은 온전히 다 내고 있지 않습니까. 돈은 받아가면서 권리 행사는 막겠다니. 불온전한 처사라고 생각합니다.”
“후. 대통령제와 선거 연령제라.”
그럴듯한 지침 정도만 받아갈 생각으로 찾아왔던 지도부는 마치 폭탄을 끌어안은 표정이 됐다.
“그리고…….”
“또…… 있으십니까?”
“왜요. 그만할까요?”
“아닙니다. 말씀하시죠.”
“교육감 선거도 이번 기회에 건들려 보죠.”
“교육감 말입니까?”
“네. 학생들을 위한 관리자를 뽑는 건데, 학생들 의견은 1도 참고가 안 되잖습니까.”
내 말에 의원들 모두 난감한 표정이 됐다.
“표정들이 왜 그럽니까? 지침을 달라고 해서 그저 말을 했을 뿐인데.”
“아닙니다. 워낙 민감한 사안들이라 머리가 잠시 복잡해져서.”
의원 하나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변명을 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김덕영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그 세 가지 지침을 중심으로 당론을…….”
“아직 더 있습니다.”
“……당론을…… 네. 말씀하신 김에 다 말씀을 하셔야죠.”
김덕영은 끙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방송언론법 좀 개정합시다.”
“방송언론법이라면 어떤…….”
“가짜 뉴스 또는 오보로 인해 누군가 피해를 받았을 경우!”
내가 힘을 주어 이야기하자, 의원들 모두 마른침을 집어삼켰다.
방금 내가 말한 내용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번에 내가 당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정당한 피해 보상이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과거 쓰레기 만두 파동만 해도 그렇습니다. 무책임한 기사 때문에 멀쩡히 잘 돌아가는 공장까지 싹 다 망해버렸지 않습니까.”
내 말에 다들 익히 아는 일이라는 듯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잘못된 것을 파헤쳐 사회정의를 구현하는 건 옳은 일이지만, 잘못된 정보로 엉뚱한 사람이 피해를 보거나 인생이 망가진다면 그건 범죄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야죠. 그들이라고 법질서 위에 있는 것도 아닌데. 당연히 그래야죠.”
“오보는 1면 전체를 할애해 사과문 내라고 하세요. 지방 정보지도 아니고 신문 귀퉁이 보이지도 않는 곳에 몇 자 적어서 내지 말고. 앞에선 정론이니 언론이니 하면서 자신들 실수는 좀생이처럼 감추려 드는 행태야말로 적폐라 생각합니다.”
“네. 그래야죠. 당연한 일입니다.”
“아니면 말고 식으로 온갖 헛소리를 써재끼는데, 그런 짓을 했다간 기사를 쓴 기자는 물론이고 언론사 역시 철퇴를 맞게 만들어야 할 겁니다.”
“자칫, 언론 통제니 압박이니 하는 말들이 나올 수도…….”
“그래서 그걸 빌미로 계속 소설을 써도 된다 이 말입니까?”
“그거야 당연히 아니지만…….”
“기사를 쓰지 말라는 게 아니라, 팩트 체크 후, 명확한 오보 또는 의도적으로 작성된 가짜 뉴스였을 경우 응징을 하자는 말입니다. 말이 언론 자유지 그게 진짜 자유였습니까? 사주 일가와 정치권의 야합이었지.”
“최대한 노력을 해 보겠습니다.”
“책임 언론법 어떻습니까?”
“책임 언론법이라…… 당에 돌아가면 의견을 모아보겠습니다.”
“하는 데까지 해 보세요. 안되면 어쩔 수 없죠. 어디까지나 지침일 뿐이니까.”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겠습니다.”
김덕영이 대표로 대답을 했다.
언론 삼사의 주도권도 내 쪽으로 거의 넘어온 상태다. 대왕은 물론이고 대왕과 연관된 다른 기업들까지 공조해 광고를 모두 멈춘 상태다.
이대로 시간이 흐른다면 제아무리 3대 언론사니 뭐니 해도 결국 고꾸라지게 되어 있다.
제대로 된 기사를 작성하는 이들은 상을 내리겠지만, 못된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꼼지락거리는 놈들은 인생을 실전으로 겪게 될 것이다.
“그리고 청문회 그거 말입니다.”
“청문회요?”
“네. 청문회.”
“청문회가 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