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7장. 정글의 법칙. - 1
“그럼 묻죠.”
“네. 회장님.”
“그 별개의 신분을 가졌다는 사람과 나를 비교해봐요.”
“네?”
“내가 그 사람에게 고개를 숙여야 맞습니까. 아니면 그 사람이 아마존 오지로 도망가는 걸 고민해야 맞습니까?”
“……!”
“무엇보다도. 그 사람이 아마존을 택할지. 아니면 나를 택할지에 대해서 왜 박만천 씨가 고민합니까?”
“그…… 그렇죠. 제가 고민할 문제는 아니죠.”
“박만천 씨는 본인 인생을 걱정하고 고민하시면 되는 겁니다. 그 외의 것들은 관심 가질 필요가 없어요.”
“죄송합니다.”
박만천은 자신이 주제넘은 짓을 했다는 듯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전화 걸 사람이 누군가요?”
“장수철 지검장입니다.”
박만천의 말에 박산호 부장이 곧바로 검색기를 돌렸다.
“인천지검장입니다.”
“인천지검장이라. 밀항시키려 했다더니.”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박만천 씨?”
“네? 네. 회장님.”
“해 떨어지기 전에 마무리하고 퇴근해야죠.”
“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박만천은 재빨리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스피커 폰으로 바꾸고.”
“이게 구형 휴대전화기라…….”
“아아. 대포폰.”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연결되면 나에게 줘요.”
“네. 회장님.”
박만천은 곧바로 장수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 박 사장 아니신가.
“네. 지검장님. 박만천입니다.”
― 그래. 일은 잘 끝났고?
“그게…….”
박만천이 내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내가 손짓을 하자 휴대폰을 넘겨줬다.
“장수철 지검장님?”
― 누구신가?
박만천이 아니라 내 목소리가 흘러들자, 장수철이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고주몽입니다.”
― …….
“전화 끊으시면 아시죠? 아주 곤란해 질 겁니다.”
― 고 회장님이 왜…….
“몰라서 물으시는 겁니까. 여기 박만천 사장을 시켜서 나를 토막 내버리려고 하셨던데.”
― 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장수철 지검장은 뜨악한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정말 몰라서 그러는 거라면, 다행이고. 알면서도 그러시는 거라면…… 지검장님 인생도 여기까지인 겁니다.”
― …….
장수철 지검장은 한동안 말이 없어졌다.
“여기 박만천 사장님이 재미있는 자료를 많이 챙겨 놓으셨던데. 이게 밝혀지면 굳이 내가 손을 쓰지 않더라도 인생 팍팍해지실 것 같습니다만.”
내 말에 박만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이 언제 그런 자료를 들먹였냐는 표정이다.
―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진짜 모르겠습니다.
장수철 지검장은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뭐, 이해가 되든 되지 않든. 그건 중요치 않죠. 당신과 박만천 사장이 손을 잡고 칼잡이 사십 명을 나에게 보냈다는 게 핵심이니까.”
― 고…… 고 회장님. 지금 그게 무슨 말씀…….
“선택권을 드리겠습니다.”
― …….
“지금 당장 이곳에 달려와 이실직고하고 선처를 받으시거나, 아니면 이대로 인천공항으로 달려가 브라질행 티켓을 끊으세요.”
― …….
“그리고 아마존 오지로 들어가서 꽁꽁 숨어 사시는 겁니다. 머리카락 한 올이라도 보였다간 목이 날아갈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아, 여기서 목은 지검장님의 지위, 신분 뭐 이런 게 아닙니다. 순수하게 사전적 의미의 ‘목’을 말하는 겁니다.”
― 지금 현직검사를 협박….
“협박은 무슨. 선언하는 겁니다. 나를 건드렸을 땐, 이 정도 각오는 했을 것 아닙니까.”
― …….
“그리고 현직검사 운운하는데, 청부살인이나 하는 주제에 입에 담을 이야기는 아니죠. 아, 혹시 검사 운운한 게 나를 협박하는 거였습니까? 만약 그런 거라면 미처 몰라봐서 미안하군요.”
― 워…… 원하시는 게 뭡니까.
“먼저 답하세요. 아마존입니까. 아니면 내 쪽에 서는 겁니까.”
― 회장님…….
“내 질문이 복잡한가요?”
― …….
“나보다 저쪽 사람들이 더 무서운가 본데. 그럼 그렇게 하세요. 끊겠습니다. 지검장님 자료는 JTB 한성희 국장에게 넘기도록 하죠.”
― 고 회장님!
“네.”
― 지…… 지켜주실 수 있으십니까.
“그거야 지검장님 하시기 나름 아니겠습니까.”
― 하아…….
장수철 지검장은 답답해 미치겠는지 한숨을 쏟아냈다.
―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이번 일이 고 회장님과 관련됐다는 걸 몰랐습니다. 형상진 국장의 부탁을 받고 박 사장을 잠시 움직였던 것뿐입니다.
“형상진 국장이라면…….”
― 법무부 검찰국장 형상진입니다.
“지검장님.”
― 네 회장님.
“형상진 국장을 데리고 이곳으로 오세요.”
― 네?
장수철 지검장이 당황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 저기, 회장님. 형 국장은 제가 임의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지검장님. 지금 뭔가 착각을 하시는 것 같은데요.”
― …….
“지검장님이 알고 그랬든 모르고 그랬던, 나에게 칼잡이를 보낸 건 그냥 팩트입니다. 그리고 죽을 뻔했죠.”
― …….
“내가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아야 하는 약자도 아니고. 병신같이 가만히 있을 것 같습니까?”
― 회장님…….
“과(過)를 상쇄하려면 공(公)이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지검장님에게 기회를 주는 겁니다. 이대로 꼬리가 되어 죽어 나갈지. 아니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수렁에서 빠져나올지는 온전히 지검장님 몫입니다. 아시겠습니까?”
― …….
“한 시간 드리죠. 형상진 국장을 잘 포장해서 내 앞에 데려다 놓으세요. 그래야 지검장님이 사는 겁니까. 아시겠습니까?”
― 하…… 한 시간은 너무 촉박합니다. 최소 두세 시간은…….
“그건 안 되겠습니다. 일과시간 넘어서 잔업 하는 걸 끔찍하게 싫어하는 성격이라서 말이죠. 퇴근까지 두 시간 남았습니다. 주소 보내드릴 테니. 조용히, 아무 일 없다는 듯 형 국장과 함께 이곳에 도착하시기 바랍니다.”
― 아…… 알겠습니다.
“참고로, 계속 저쪽에 붙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됩니다. 기회를 줘도 기회인지 모르는 사람은 저도 더 챙길 생각이 없으니 말입니다.”
― 아닙니다. 지금 당장 움직이겠습니다.
“좋은 판단입니다.”
나는 종료 버튼을 누르고 휴대폰을 박산호에게 넘겼다. 옆에서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박만천은 옷이 축축해질 정도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회…… 회장님. 제가 무슨 자료를 가지고 있다고…….”
박만천은 억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진짜 없어요?”
“그런 거 잘못 만들었다가는…….”
“들키면 그렇겠죠.”
“…….”
“구명줄 하나 없이 칼잡이들을 데리고 다녔다니. 이거 실망인데요.”
“회장님…….”
박만천은 정말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박 사장님.”
“네.”
“나는 나에게 실수를 한 자보다 더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
“무능력한데 욕심만 많은 자죠. 그런데 박 사장님이 그런 분이었다니. 안타깝게 됐습니다.”
“네?”
“방금 통화 들었지 않습니까.”
“…….”
“장수철 지검장은 과를 상쇄하기 위해 공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윗선을 잡아끌고 오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중이죠.”
“…….”
“그런데 박 사장님은 딱히 그런 게 없지 않습니까.”
“자…… 장수철 지검장 연락…….”
나는 박만천 사장에게 손가락을 흔들었다.
“내가 그 정도도 알아내지 못할 사람으로 보입니까?”
“…….”
“장수철 지검장에게 전화를 건 것만으로 사시미 마흔 자루가 없던 일이 된다니. 역시 능력은 없고 욕심은 넘치는 분이시군요. 로건.”
“네! 보스.”
“적당히 치워버리세요.”
“네!”
로건이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들자, 박만천은 기겁한 얼굴이 됐다.
“자…… 잠깐만!”
“뭡니까?”
“있습니다. 당연히 있습니다.”
박만천은 마른침을 집어삼키며 연신 자료의 존재를 외쳐댔다.
“무능력하고 욕심 많은 자보다 더 싫어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누…… 누굽니까.”
“눈치 없이 꼼수 부리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박 사장님이 그렇게 행동을 하시네요. 나를 얼마나 우습게 봤으면.”
내가 고개를 젓자, 로건의 총구가 박만천 이마에 맞닿았다.
“아닙니다! 절대 그런 의도가 아닙니다. 회장님. 살려 주십시오!”
내가 손끝을 까딱이자, 로건이 뒤로 물러났다.
“나는 말입니다.”
“네. 회장님.”
“생각보다 관대한 사람입니다.”
“네네. 회장님.”
박만천은 납작 엎드린 채로 연신 ‘네네’만 반복했다.
“하지만, 뭔가 공을 세워야 저도 박 사장님을 도와드릴 것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공을 세울 수 있게 기회를 주십시오.”
“시간을 얼마나 드리면 되겠습니까?”
“하…… 한 시간. 한 시간만 주십시오.”
박만천 사장의 외침에 나는 이 부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부장님.”
“네…… 넷!”
“박 사장님이 알려준 곳에 가서 물건 좀 챙겨와 주셨으면 하는데.”
“그…… 그럼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박 사장님. 마지막 기회입니다. 이번에도 장난을 치려다 걸리면 아시죠?”
“물론입니다. 추……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충성은 무슨. 서로 간에 깔끔하게 주고받고, 각자 갈 길 가는 겁니다.”
“네네.”
“좋습니다. 거래가 만족스럽게 끝난다면, 저기 쓰러져 있는 부하들과 함께 집에 돌아갈 수 있게 선처해 드리죠. 박 부장님. 여기 박 사장님에게 물건이 어디 있는지 확인 좀 부탁드릴게요. 그리고 로건.”
“네. 보스.”
“여기 이 부장님 문제 생기지 않게 사람 좀 붙여드리고.”
“물론입니다. 보스.”
박만천이 숨겨 놓은 자료를 찾기 위해 이 부장과 경호원 두 명이 떠났다. 그리고 10여 분 정도 지났을 때쯤. 수십 대의 차량이 외길을 타고 마을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대왕 그룹에서 운영 중인 의료재단과 제이코가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보스!”
제이코가 다급한 눈빛으로 나를 찾았다.
“여기 있습니다.”
“다…… 다치신 곳은?”
“보다시피 멀쩡합니다. 그러니까 마음 좀 가라앉혀요.”
“후우. 제 불찰입니다. 설마 일국의 안보수석이 이런 미친 짓을 벌일 거라고는…….”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말 그대로 그자의 위치와 신분 때문에 방심을 한 거죠. 덕분에 수업료를 톡톡히 치르는 중입니다.”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박 부장은 공권력과 싸우는 건 절대 반대라고 하더군요.”
“그건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국가는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니까요.”
“국가는 말이 통하는 상대가 아니다?”
“네. 개인이나 기업 또는 단체 따위와 비교하시면 안 됩니다. 평소엔 상식의 테두리 안에서 움직이지만, 위협을 당했다고 느끼는 순간 국가는 괴물보다 더 흉악스럽게 변해버립니다.”
“안보수석이나 그쪽 사람들을 국가와 대등한 존재로 이야기하는 것 같아 기분이 찝찝하네요.”
내가 인상을 구기자, 제이코가 재차 말을 이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제가 드린 말씀은…….”
“네네. 무슨 뜻으로 그렇게 말한 것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국가와 맞설 생각은 없습니다.”
“혹, 따로 생각하시는 부분이라도 있는 겁니까?”
“국가니 뭐니 그렇게 크게 볼 필요가 있겠습니까.”
“?”
“놈들의 정체가 파악되면, 사보타지(sabotage) 할 생각입니다.”
“사보타지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제이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보수석은 메신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그 말은 안보수석이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자들이 핵심이라는 말이죠.”
“그거야…… 아!”
제이코는 내가 무슨 뜻으로 사보타지를 언급했는지 뒤늦게 이해한 표정이다.
“공권력이나 체계화된 조직과는 싸울 생각도 없고, 싸워봤자 남는 것도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돈이 많고 소유한 기업이 크다고 해도 전면전은 어불성설이죠.”
“그쪽 라인에 집어넣을 사람을 찾아내셨군요.”
“찾아냈다기보단, 그냥 고구마 줄기 잡아채듯 슬쩍 당겨봤을 뿐입니다. 빠르면 한 시간, 늦어도 두 시간 안에 이곳에 도착할 예정이니 그때 같이 이야기하죠.”
“네. 보스.”
“그리고 이번 선거 말입니다.”
“네.”
“좀 더 집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이코 말대로 국가와 싸울 수는 없지만, 국가의 행정력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그만한 힘을 갖춰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