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9장. 잡생각에 고민할 때가 아니다.
― 에, 그러니까. 어…… 와, 미치겠네.
― 설명을 해 봐.
― 로버트 팀장님. 그러니까. 정은영 이 여자는 말입니다. 와, 나이도 어린 게 뭐 이런 게 다 있지? 걸레가 따로 없네.
― Duster? 그게 무슨 말이지?
― 말 그대로 더러운 여자란 뜻입니다.
김덕영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정은영의 녹음파일을 설명했다.
― 이 남자, 저 남자 가리지 않고…… 설명하지 않아도 아시죠?
― prostitute?
― 창녀요? 네. 뭐. 일반적인 개념의 창녀는 아니지만, 아무튼 몸을 막 굴렸다는 건 사실입니다. 지금 통화하는 남자는 대왕 전자 인사부장이고 그 앞의 파일은…… 아 더러워서 못 듣겠네. 아무튼, 남자들을 정리하고 있습니다. 아주 단호하군요. 협박도 서슴지 않습니다. 남자들이 벌벌 떨며 애원할 정도로. 대표님에게 접근하기 전에 주변을 정리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보가 단편적이라 백 퍼센트 장담할 수는 없지만, 이건 정상적인 갑을 관계가 아닙니다.
― 갑을?
― 갑이 상급자, 을이 하급자라고 보면 됩니다. 남자가 갑의 위치에서 일방적으로 정은영을 괴롭혔거나, 건드린 게 아니라, 정은영이 갑의 위치에서 남자들을 관리했다는 말입니다. 이제 이십 대 중반이라고 들었는데, 무섭군요.
로버트는 녹음파일을 중지했다.
“이게 지금…… 뭐야? 아니, 녹음파일은 어디서 구한 거지?”
“당연히 내가 직접 녹취했지.”
“그러니까 지금 직원들을 도청했다는 소리냐?”
“당연한 것 아닌가?”
“젠장. 그러다 문제가 생기면…….”
“이미 문제는 생겼다. 그것도 아주 위험하지.”
“로버트 너. 설마 엘리스도.”
“놉.”
로버트는 고개를 흔들었다.
“말했다시피. 엘리스는 제이코, 네 보증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정은영 이 여자에 대해선 우리가 아는 게 없잖아. 그저 이진상이 노리고 있던 여자였다는 것 말고는.”
“…….”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엘리스가 왜 보스에겐 마음을 열었는진 모르겠지만, 정은영은 신분 세탁을 위해 연기를 하는 중이다.”
로버트의 이 말은 정은영의 스마트 폰을 이용해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모두 체크하고 있다는 소리다.
“거기다 엘리스의 돌발적인 행동 역시, 정은영 때문으로 보인다.”
“정은영 때문에?”
“경쟁자의 등장에 위기감을 느꼈다고 할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한두 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이 부분은 설명이 어렵군.”
“…….”
“다행스러운 점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숙맥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여자 두 명이 달려들어도 보스는 꿈쩍도 하지 않더군. 정확히는 부담스러워했다는 말이 맞으려나.”
“…….”
“로버트 네가 허락도 없이 도청을 했다는 게 알려지면.”
“놉.”
“?”
“보스에겐 이미 보고를 마쳤다.”
로버트는 이게 숨길 일이냐며 오히려 당당하게 제이코를 바라봤다.
“뭐라고?”
“보스에게 다 설명하고 이야기했다고.”
“지금 그 말은…… 보스가 저러고 있는 게.”
“아아. 엘리스와 정은영 이야기도 일부 영향이 있겠지만, 앞서 말했듯이 환경적 요인이 크다고 본다. 굳이 두 사람 문제가 아니더라도 알게 모르게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그 전부터니까.”
로버트는 단순히 여자 한둘의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미치겠네.”
제이코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엘리스를 보스 옆에 붙여둔 이유가 뭐였든 간에 그간 쌓아온 자신의 신뢰도가 바닥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로버트 네 말대로 보스의 상태가 심각하다면, 더 조심했어야 했어!”
“그 말도 일리는 있다.”
“그걸 아는 놈이!”
“하지만, 언제까지나 묻어 둘 수도 없는 일이지. 감춘다고 감춰지는 일도 아니고. 내 경험에 의하면 이런 일은 감추는 것보다, 기회가 있을 때 한 번에 터트리는 게 맞다.”
“그러다 보스에게 문제가 생기면!”
“보스를 믿어야지.”
“무책임한 소리!”
제이코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로버트는 과연 그럴까? 하는 표정으로 피식 웃음을 보일 뿐이다.
“어차피 한 번쯤은 넘어야 할 산이다. 아니, 한 번뿐일까? 앞으로도 수많은 고비가 기다릴 게 분명하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전전긍긍 보스를 어린애 취급을 하겠다는 건가?”
“로버트 이런 문제는 나와 먼저 상의를 했어야지!”
“네가 보스인가? 왜 그런 소리를 하지?”
“왓?”
“내 보스는 네가 아니라 주몽이고 나는 습득한 정보를 누락시키거나 오염시키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달할 의무가 있다. 두 유 언더스텐?”
“…….”
“거기다 제이코 너도 선을 넘었어. 엘리스와 정은영만 낙제가 아니란 말이다.”
“뻑! 난 보스를 해치려 한 적이 없어!”
“그건 너와 내가 아니라. 보스가 판단할 일이다. 그러니 자리에 앉아서 보스의 부름을 기다려라.”
“…….”
* * *
엘리스와 제이코의 관계. 정은영의 녹음파일을 내밀며 로버트가 한 말이 떠올렸다.
― 보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더 많습니다.
― 한국에 들어온 뒤로 자꾸 염세적으로 변하시는 것 같습니다.
― 과거는 과거일 뿐입니다.
― 불안 요소가 있다면, 치우면 그만입니다. 피해 갈 이유가 없습니다.
― 보스. 긍정적이던 본래 모습으로 돌아오십시오.
“내가 염세적이라고?”
한때 비참한 직장 생활에 자괴감을 느낀 적은 있지만, 염세적이란 말은 나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일이 힘들고 버거워도, 수 없이 입사시험에 떨어졌어도 나는 언제나 긍정적이었고 내일을 꿈꿨다.
“그런 내가 염세적이라…….”
나는 최근 내 행동과 생각을 떠올렸다.
“음.”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나 생각이 긍정적인 면보다 그렇지 않은 면에 더 시선이 갔다.
이유가 뭘까. 뭐하나 부족할 게 없는 지금, 왜 그런 성격이 드러난 걸까.
“현상…… 변화.”
문득 나에게 벌어졌던 기현상이 떠올랐다.
“설마, 성격에 영향이 미친 건가.”
첫 현상이 벌어졌을 땐, 그것이 시간 이동이든 아니면 전이 비슷한 현상이든 간에 내 삶과 다른 점이 없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현상을 겪었지만, 나는 나였다는 소리다. 하지만 두 번째 현상이 벌어졌을 땐 확실히 첫 번째 현상과는 달랐다.
기억이 온전치 않았고, 마치 인물 사전을 손에 든 것처럼 정보 취득하는 것도 형태가 달랐다.
덕분에 천기득과 손을 잡고 대왕 일가를 날려버릴 수 있었지만, 그마저도 며칠 지나지 않아 사라져버렸다.
지금은 아무리 사람 얼굴을 노려봐도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마치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처음의 나는 지금의 나와 다를 바 없이. 이진상의 수행비서였다. 굳이 달라질 이유도 영향을 받을 이유도 없었어. 하지만 두 번째 나는 도대체 뭐하던 놈이었을까.”
기억이라기보단 단편적인 기록. 마치 포털 멘트에 떠 있는 단신 뉴스를 클릭해 확인하는 것처럼 정보 확인이 이뤄졌다.
“기자?”
다른 사람이 들으면 뜬금없는 소리라 할지 모르겠지만, 사회를 염세적으로 바라보고 텍스트처럼 정보를 관리하는 사람이라면 ‘기자’ 또는 ‘정보’ 쪽에 있던 사람이지 않을까 싶다.
부총리가 찾아왔을 때 내가 보인 행동도 그랬다. 당시엔 그저 속에 있는 말을 내뱉는다는 정도로 생각했지만, 평소 정치에 관심이 없던 나를 떠올려보면 확실히 과한 반응이었다. 정치 혐오증보다는 정치 무관심이 본래 내 모습이라는 소리다.
“하아…… 미치겠네.”
내가 나 같지 않은 부분은 둘째 치더라도 엘리스와 제이코의 관계 그리고 정은영의 이중적 행태는 또 다른 충격을 줬다.
특히, 정은영이 보였던 말과 행동 그리고 표정을 생각하면 꿋꿋하게 억척빼기처럼 인생을 살아가는 전형적인 소녀 가장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뒷구멍으론 몸 팔이나 다름없는 행동을 하고 다녔다니.
이진상의 손에서 그녀를 구했다고 믿었는데, 이렇게 되면 구한 게 아니라 내 쪽으로 대상을 갈아탔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녀가 외국에서 주검으로 발견된 것도 어쩌면 자신의 욕망을 위해 뭔가를 시도하려다 역으로 당한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든다.
만약 내가 수행비서 고주몽으로 그녀를 도우려 했다면…….
“주제도 모르고 비서 따위가 함부로 나섰다며, 이진상에게 당장 말이 들어갔겠군. 정은영 처지에선 돈 많은 남자 하나가 공으로 날아갈 판이었으니. 허허.”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다. 그저 웃음만 나왔다.
“빌어먹을.”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성격에 문제가 생기질 않나, 믿었던 제이코는 자신의 조카를 내 옆에 붙여 놓지를 않나. 자신이 구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던 여자는 여왕벌처럼 남자를 갈아치우질 않나.
아무리 내 주변 환경이 급격하게 바뀌고 새로운 인연들로 채워졌다고 해도….
“답답하네.”
자리에서 일어나던 나는 찡! 하는 이명과 함께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스치듯 지나가는 영상에 눈을 부릅떴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것처럼 정신없이 뛰는 장면이 떠올랐다.
우당탕하는 소리와 함께 뭔가에 걸려 넘어졌고, 잠시 암막이 드리웠다가 창고로 장소가 바뀌었다.
심하게 구타를 당했는지, 핏물이 뚝뚝 떨어졌다.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 사이로 누군가 들어오더니 쯧쯧 혀를 찼다.
“고 기자. 그러게 적당히 했어야지.”
정체불명의 남자는 담배 두 개를 꺼내 물더니 불을 붙였다. 그중에 하나를 내 입에 물렸다.
끈적한 피 맛과 씁쓸한 담배 맛이 입안을 맴돌았다.
“남들처럼 적당히 살지 그랬어.”
“…….”
“기자 정신? 말은 좋지.”
남자는 킥킥대며 웃음을 흘리다가 내 턱을 잡아 오른쪽으로 돌렸다.
“!”
“그래. 네 사수다. 너보다 먼저 잡혀 왔지. 전쟁터도 무서워하지 않는 여자였다지?”
남자는 ‘후우~’ 담배 연기를 뿜어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애들아. 끝내라.”
“네!”
남자가 창고 밖으로 모습을 감추자, 둘러싸고 있던 사내들 손에 사시미가 들렸다.
푹! 날카로운 쇠붙이가 심장을 찌르고 들어오자 격통과 함께 의식이 희미해졌다.
“크윽!”
나는 머리를 쥐어 잡고 연신 헛바람을 토해냈다.
스치듯 바라본 영상이지만, 심장을 찌르고 들어오는 칼끝의 섬찟한 느낌은 도저히 지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알몸에 피투성이로 누워있던 여자.
“한성희 국장이…… 내 사수였다고?”
전혀 예상치 못한 등장인물에 머리가 멍해졌다.
“미치겠네…….”
뻐근함이 느껴지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동안 숨을 골랐다.
왜 이제야 기억이 떠올랐는진 모르겠지만, 점점 내 가설이 맞아 들어가고 있다.
나는 시간 이동을 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본래 살고 있던 고주몽이고 다른 시간 또는 세상에 살고 있는 나의 기억이 죽음과 함께 전이가 이뤄지고 있다.
“윽! 또?”
끝났나 싶었는데, 또 다른 영상이 머리를 휘젓고 지나갔다.
“크윽.”
짧지만, 매서운 기억이 뇌리에 남겨졌다.
이번엔 칼이 아니라 총에 맞아 죽었다. 엄청난 격투 끝에 적을 제압해 나갔지만, 쏟아지는 총탄에 결국 쓰러진 것이다.
고문을 당하거나 조폭들에게 붙잡혀 구타를 당한 게 아니라 총알 한 방에 캑! 죽어버려서인지 다른 때와 달리 고통이 크진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제기랄. 이번엔 군인? 아니 경찰? 그것도 아닌가?”
내가 나를 볼 수 없으니, 정확한 신분은 확인이 어려웠지만, 기자의 삶이 창고에서 칼에 찔려 죽은 것으로 끝났다면 방금 스쳐 간 인생은 그보다 더 험했고 거칠었다.
거기다 주변 환경이 아무리 봐도 한국이 아니다.
연달아 기억이 재생되며 진이 빠졌다. 그러나 머리는 그 언제 때보다 명석하고 냉철하게 돌아갔다.
“한창나이에 다들 죽어가고 있다.”
기억 전이가 일어나고 몸에 변화가 생기고, 성격이 흔들리는 건 둘째 문제다.
다른 세상에 사는 내가 얼마 살지도 못하고 죽고 있다는 게 문제다. 운명론 따위 믿지 않는다고 해도…… 반복되는 내 죽음은 도저히 무시할 수가 없다.
“내가 복권에 당첨되지 않았다면, 나 역시 죽음을 피하지 못했다.”
죽음에 항상성이 존재하는진 모르겠지만, 전이되는 기억들만 놓고 본다면 이 세상의 나도 언제 어떻게 위험이 찾아올지 알 수 없다.
“잡생각에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는 건가.”
문득, 조지 버나드 쇼의 무덤 비석에 적힌 말이 생각났다.
“우물쭈물하다가 개죽음당할 수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