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글로벌 벼락부자, 역대급 깽판을 치다-75화 (76/224)

075장. 일관성이 없어서 신뢰도 안 갑니다.

함 부총리와 나 사이에 침묵이 이어졌다.

나야 무슨 소리를 하는가 구경이나 해보자는 것이고, 함 부총리는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어떻게 잘 포장해서 떠들어 댈까 고민하느라 그럴 것이다.

탁자에 놓인 찻물이 차갑게 식어 갈 때쯤,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니고, 하염없이 앉아 있을 이유가 없다.

“할 말이 없다면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저도 나름 바쁜 사람입니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함 부총리는 다급한 표정이 됐다.

“스케줄 때문에 더는 시간을 비울 수가 없습니다. 할 말도 없으신 것 같은데. 그만 일어나시죠.”

“도와주십시오.”

함 부총리는 앞뒤 설명도 없이 대뜸 도와달라는 말부터 꺼냈다.

“뭘 말입니까.”

“나뿐만 아니라 법무부 장관과 외교부 장관도 곧 물러납니다. 모두 고 대표를 도왔던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법무부 장관과 외교부 장관이라면 함 부총리와 미국에 찾아왔던 사람들이다.

그 두 사람도 자리가 아슬아슬하다는 말은 미국에서의 일이 아니더라도 부총리와 함께 하는 사람이라는 뜻일 것이다.

“무작정 도와 달라고만 하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는데요.”

잠시 뜸을 들이던 함 부총리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도 그렇고 다른 두 사람도 이번 총선에 출마할 생각입니다.”

“아, 국회의원 선거 말이군요.”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난데없이 청문회장을 구경할 판이다.

“네. 그렇습니다.”

“정치 쪽은 아는 게 없습니다. 제가 돕고 말고 할 일이 아닌 것 같군요.”

정치판은 아수라장이란 말로 형용되는 세계다. 어설프게 기웃거렸다간 시궁창 냄새를 맡는 수가 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간접정치입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까?”

“고 대표도 한국에서 계속 일을 하려면 정계에 인맥을 만들어 두는 게 좋을 것 아닙니까.”

직접 참여가 아닌 대표자를 뽑아 간접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구조. 고대 시대 인구가 적은 도시국가라면 모를까. 요즘처럼 인구가 넘쳐나는 시절엔 당연한 정치 구조다.

함 부총리가 간접정치 운운한 것은 내 의지를 정치에 반영하겠다는. 그런 뜻일 것이다.

물론, 그러기 위해선 세 사람이 당선되어야 할 것이고. 당선될 때까지 내가 후원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기고 지고를 떠나, 선거에 나가기 위해선 최소한의 장치가 필요하다.

부총리는 물론이고 조만간 자리에서 물러날 예정이라는 두 사람도 현 정부 인사다.

장관까지 한 사람들이니 나름대로 인지도가 있겠지만, 그렇다고 그 인지도가 당선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공천해줄 당이 필요할 것이고 적절한 지역구도 배정을 받아야 한다.

“여당으로 출마를 하는 겁니까?”

“그게…….”

함 부총리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뭐야. 이 아저씨. 설마, 비빌 언덕도 없이 무작정 나를 찾아온 거야?

“무소속으로 나가겠다는. 그런 말은 아니겠죠?”

“…….”

와, 이 아저씨 봐라. 국민이 존경하는 재야인사도 아니고 현 정권에서 한자리해 먹은 양반이 무소속으로 나가겠다고?

그 말은 여당은 물론이고 정권(청와대)에서 쫓겨났다고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선거에 돌입함과 동시에 기성 정치인들에게 융단 폭격을 얻어맞을 것이다.

지역구 방어에 나선 여야 의원 모두에게 눈엣가시가 될 테니까.

“정당의 추천을 받아도 될까 말까 한데. 무소속이요?”

“…….”

“무소속으로 선거에 나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고는 계시죠?”

“물론입니다.”

“하하하. 이거야 원. 부총리님 혹시 운 좋게 당선이 된다고 해도 물론 세 사람 모두 당선이 되어야겠지만 그래봤자 무소속 세 명입니다.”

“무소속이라도 국회의원은 국민의 대표입니다.”

함 부총리의 말에 피식 웃어버렸다.

이 아저씨가 아까부터 계속 나를 바보 취급하네.

“의원 배지만 달았을 뿐이지 그저 허울뿐이지 않습니까. 정당 지원도 없이 여의도에서 힘이나 쓰겠습니까?”

“고 대표가 도움을 주면…….”

“제가 드릴 수 있는 도움이라 봐야 결국 돈 아닙니까. 선거 지원을 해 달라는.”

“그렇기도 합니다만…….”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나라의 부총리에 장관까지 한 사람들이 머리가 갑자기 굳어버린 건 아닐 것이다.

선거 자금만 있다고 여의도 입성이 된다면, 세상에 돈 많은 놈은 너나 할 것 없이 여의도에 자리를 깔았을 것이다.

그런데 찾아와서 기껏 한다는 소리가 선거에 나가니 돈 좀 빌려 달라고?

“안될 곳에 의미 없는 돈 쓰고 싶지 않습니다. 부총리께서 나를 찾아온 것만으로도 ‘적’들에게 나를 노출시킨 상태지 않습니까.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쁜데 되지도 않을 선거에 발까지 담그란 말입니까.”

“일단 당선이 되고 나면, 무소속 의원들을 모아서…….”

“신당을 만드시겠다? 더더욱 말도 안 되는 소릴 하시네요.”

내가 아무리 이쪽 바닥 지식이 부족하다고 해도 이 정도 말에 혹해서 넘어갈 정도는 아니다.

무소속으로 당선되는 것도 하늘의 별 따기지만, 그렇게 당선된 의원들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끽해야 두세 명이다.

함 부총리 사람들이 모두 당선이 된다고 해도 많아야 다섯 정도가 다일 것이고 막말로 그들이 병아리 신당에 참여한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내가 부정적인 답을 내놓자, 함 부총리가 곧바로 말을 이었다.

“한국은 정치 권력과 경제 권력 두 가지를 모두 손에 넣어야 진정한 권력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고 대표가 우리를 도와준다면…….”

“말씀 참 이상하게 하시네. 왜 내가 그 두 가지를 손에 넣고 이 나라의 권력자가 되어야 합니까?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그 자리를 원하는 사람들이 널렸을 텐데요.”

“그들은 이미 후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누누이 말했던 기득권이 바로 그들을 뜻하니까요. 그리고…….”

“잠시만요.”

그러니까. 여당에도 끼지 못하고, 정부에도 밉보인 데다, 기존 세력들의 후원도 받기 어려운 상태가 됐기 때문에 이 자리까지 찾아왔다는 소리다.

내가 고장 난 ATM이야? 툭, 건드리면 돈을 토해내게?

“이거야 원.”

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짓자, 함 부총리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내 표정이 뭘 의미하는지 정도는 알아차린 눈빛이다. 하긴 그 정도 눈치도 없으면 나가 죽어야지.

“아무래도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서 찾아오신 것 같은데. 헛걸음하신 듯합니다. 이만 일어나시죠.”

“맞습니다.”

“네?”

“더는 갈 곳이 없어서 결국 여기까지 왔습니다.”

읍소 작전이 안 되니까, 이젠 불쌍 모드로 전환인가?

“이쯤 해 두죠.”

나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며 손을 저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이야기를 들어주십시오.”

이 아저씨. 끈질기네.

“5분 드리죠. 그 이상은 없습니다.”

허락이 떨어지자, 함 부총리는 빠른 목소리로 자신들 상황을 설명했다.

“나는 물론이고 다른 두 장관 그리고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모두 이번 정권에 희망을 걸고 정부에 참여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요?”

“하지만 우리가 생각했던 정부는 그저 허수아비일 뿐이었죠.”

“같은 말 반복하시는 게 취미입니까? 저 같은 사람이 보기엔 여당이나 야당이나 거기서 거깁니다. 기득권층이 똘똘 뭉쳐서 입맛대로 해 먹은 것이 처음도 아니고.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네요.”

내 말투에서 정치 혐오의 기운이 느껴져서일까. 함 부총리의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이해합니다. 저 역시 같은 마음이었고, 그래서 뭐라도 해보겠다고 정부에 협조했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제가 한 일이 국가와 국민이 아니라 특정 소수의 이득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된 뒤로 괴로움에 잠을 설쳤습니다.”

“3분 남았습니다.”

“고 대표님은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으신 분이고, 딱히 나서서 국정을 농단하지 않아도 이미 부의 정점에 오른 분 아닙니까.”

이건 또 뭔 소리야.

그러니까. 나는 돈만 토해내고 뒷방 늙은이처럼 구경이나 하라는 건가?

이건 이것대로 기분이 나쁘네.

“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군요.”

“네?”

함 부총리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 그 말씀은 이미 다른 이들과 손을 잡았다는…….”

“그럴 리가요. 다른 이들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부총리님 말씀대로 딱히 나서서 뭔가를 해야 할 정도로 가난하거나 권력에 욕심이 있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방금 하신 말씀은.”

나는 눈에 힘을 주고 함 부총리를 바라봤다.

“나는 말입니다. ‘나’에게 속해 있습니다. 그 누구도 어떤 세력도 아닌!”

나는 ‘나’를 하나의 세력으로 ‘나’를 하나의 기득권으로 당당히 선언했다.

함 부총리는 알지 못하겠지만, 돈은 물론이고 대한민국 거대 기업까지 홀라당 집어삼킨 상태다.

대왕 그룹만으로도 정·재계를 흔들 수 있는데, 그 이상의 힘을 손에 넣었으니 다른데 속할 이유도 없고, 비빌 언덕을 찾아 돈을 가져다 바칠 이유도 없다.

한 마디로 아쉬울 게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

함 부총리는 상상해 본 적도 없고,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한동안 멍한 표정이 됐다.

“그래서 남의 집 싸움에 끼고 싶지도 않고, 이래라저래라 간섭할 마음도 없습니다.”

“독야청청하시겠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함 부총리는 살짝 실망한 표정이 됐다.

“왜요. 그렇게 살면 안 됩니까?”

“…….”

부총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진 모르겠지만, 그건 부총리 사정이다. 내 인생에 끼어들거나 강요할 권리는 어디에도 없다.

“나라를 바꾸겠다? 정치를 개혁하겠다? 서민들을 위해서 정책을 개발하겠다? 지겹도록 들었습니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그 말이 증명된 적이 있습니까?”

“…….”

“법을 만들라고 국회에 보내놓았더니, 있는 법도 날려버리더군요. 그것뿐입니까. 지키지도 않을 국회법은 뭐하러 그렇게 만든답니까? 툭하면 국회 파행에, 반대를 위한 반대에 미친 놈처럼 목을 맵니다. 입으로는 민생이니 어쩌니 떠들어 대면서 국회에 계류 중인 법안이 도대체 몇 갭니까? 아, 선거법이나 의석수 자리 불릴 땐 너나 할 것 없이 손을 잡더군요. 그럴 땐 왜 파행을 안 하는지 모르겠네요.”

“그건…….”

“부총리님과 함께한다는 사람들이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국회의원이 되든 더 나아가 정권을 창출한다고 해도 이 나라는 안 바뀝니다.”

“왜 그렇게 비판적으로 보는 겁니까. 비록 이 나라 정치사가 숱한 얼룩에 더럽혀졌다고 해도 지나온 역사를 돌이켜 보면 끊임없이 발전하고 있지 않습니까!”

“일관성이 없잖아요. 일관성이!”

“일관성이요?”

“정권 잡으면 뭐합니까. 정권 초창기 일이 년 반짝하고 야당에 발목 잡혀서 허우적대다가 결국엔 레임덕. 정책이든 뭐든 여야가 바뀌는 순간 호떡 뒤집듯 반대로 진행되고 또 그것도 정권 바뀌면 또다시 반대로 진행하지 않습니까. 내 말이 틀렸어요?”

“그…… 건.”

“우왕좌왕하면서 헛되이 쏟아부은 세금만 아꼈어도 헬조선이니 탈조선이니 하는 말은 탄생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소속도 없고, 힘도 없는. 거기다 기득권 세력에 단단히 찍힌 사람들을 내가 왜 돕습니까? 도와 줘봐야 언 발에 오줌 누기고 어찌어찌 정권을 잡는다고 해도 같은 짓을 반복할 텐데. 진짜 돈 쓰고 혈압 오를 일입니다. 그러니 이쯤하고 돌아가세요.”

와, 말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존나게 흥분해 버렸다.

예전 같으면 이런 양반들 앞에서 찍소리도 못했을 텐데.

그래도 평소 생각만 했던 것들을 입 밖으로 토해내자 속이 다 시원해졌다.

내가 가진 돈이 발언권까지 보장해 준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는 시간이었다.

“그 말은, 일관성 있게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면 도움을 주시겠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되겠습니까?”

이 아저씨가. 지금까지 뭔 소릴 들은 거야. 그런 게 한국에서 가능할 리 없잖아.

“될 소리를 하세요. 한국은 단임제 대통령제고 대통령이 됐다고 해도 여의도에서 개판을 치면 어차피 도루묵입니다.”

“일단 알겠습니다. 비록 원하는 것은 얻어가지 못하지만, 고 대표님의 정치적 시각과 생각을 들은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 것 같습니다.”

굳이 떠들지 않아도 세상 사람 다 아는 이야기라고. 굳이 새삼스럽게 깨닫고 말고 할 것도 아닌데, 거참, 별스럽게 받아들이네.

함 부총리가 지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나름으로 열심히 해보겠다고 노력하는 아저씬데, 내가 말이 좀 심했나?’

이유야 어찌 됐든 암살 위협을 알려준 것도 있고…… 이대로 악만 쓰다가 쫓아내는 것도 없어 보이는 행동이란 생각이 들었다.

“부총리님.”

“네. 대표님.”

“정치 쪽은 모르겠고. 혹시 일자리 필요하시면 연락해주세요.”

“하하하. 그 정도로 쪼들리지는 않습니다. 말씀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럼.”

이야기하는 내내 씁쓸한 표정이었던 함 부총리는 나갈 땐 다시 웃는 얼굴을 하고 걸음을 옮겼다. 물론, 그 속에 담긴 복잡한 속내까지는 지워내지 못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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