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글로벌 벼락부자, 역대급 깽판을 치다-73화 (74/224)

073장. 이건 좀 당황스러운데.

“우리는 사적인 만남으로 이어진 관계도 아니고 철저히 비즈니스적 관계로 시간을 공유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두 사람도 티격태격하기보다는 서로 돕고 지켜주는 동료로 지냈으면 합니다. 두 사람 관계가 불편해지면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나 역시 껄끄러워지지 않겠습니까.”

“네.”

“네…….”

“그리고 오늘 외출을 나온 것은 예전처럼 편안하게 길을 걷고, 먹고 싶은 것도 먹고. 그러려고 나온 겁니다. 일종의 휴식시간이라고 해 두죠. 그런데 두 사람이 그렇게 툭툭거리면 휴식이 되겠습니까?”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엘리스와 정은영은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사과했다.

“그러니까…….”

딩동.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차임벨이 신호음을 냈다.

“커피 가져와서 다시 이야기하죠.”

나는 차임벨을 챙겨서 잠시 테이블을 벗어났다.

남겨진 두 여자는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홍당무처럼 얼굴이 빨개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모자를 푹 눌러썼다.

당사자는 건드릴 생각도 없다는데 여자 둘이서 이러쿵저러쿵 말싸움을 벌인 꼴이다. 그런데 이게 또 화가 나는 게, 굳이 건드리지 않겠다고 이야기할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말이다.

속도 모르고 엉뚱한 소리나 지껄여 대는 주몽 때문에 오히려 반발심이 올라왔다.

입술을 삐죽이며 불만을 삭이고 있는 두 사람 앞에 아이스 커피 두 잔이 올려졌다.

“시원하게 들이키고 파이팅 합시다. 사이좋게 지내면 좋잖아요. 알았죠?”

“…….”

냉커피 마시고 속 차리라는 뜻인가?

엘리스와 정은영은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그렇다고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묵묵히 고개만 끄덕거렸다.

“오늘은 직장 상사니 뭐니 이런 분위기보다 그냥 평범하게 아는 사람들끼리 산책하는 기분으로 돌아다닐 겁니다.”

“평범하게 말입니까?”

정은영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에 들어와 하루도 쉬질 못했습니다. 처음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돌이켜 보니. 정작 내가 하고 싶은 일은 하나도 하지 못했더군요. 아니 그걸 떠나서 긴장의 연속이었다고나 할까.”

두 사람은 오늘 외출이 어떤 목적인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다 어딜 나가려면 경호원에 비서팀은 물론이고 업무 관련자까지 우르르 따라다니니 맘 편히 움직이지도 못했고.”

“그래서 이 옷을.”

엘리스는 왜 모두 이런 옷을 입어야 했는지 뒤늦게 알아차렸다.

나는 엘리스를 보며 씩 웃어줬다.

“지금도 보라고. 딱히 우릴 신경 쓰는 사람이 없잖아. 나는 자유의 시작이 남들의 시선에서 벗어나는 것부터라고 생각하거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의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아무래도 움직임이 불편할 수밖에 없으니.”

정은영은 내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늘은 그냥 동네 백수처럼 그렇게 돌아다니자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먹고 싶은 것 먹고. 하고 싶은 것 하면서.”

엘리스가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보스.”

“응?”

“그렇다면 이 외출이 끝나기 전까지 보스와 수행비서가 아니라. 그냥 지인처럼 움ㅇ직이면 된다는 말이죠? 말 그대로 산책을 나온 것처럼.”

“뭐. 대충 그렇게 이해하면 되겠네.”

“오케이.”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엘리스는 반가운 표정으로 오케이를 외쳤다.

“오케이?”

“보스가 아니라 친구처럼 하자고 하지 않았습니까. 내가 잘못 이해한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만.”

순식간에 돌변한 엘리스의 태도에 내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정은영도 재빨리 끼어들었다.

“네. 오빠. 그렇게 해요.”

“오…… 빠?”

“엘리스야 미국 사람이니 프렌드 운운하지만. 나는 한국 사람이잖아요. 나보다 연상의 남자는 선배 또는 오빠. 그렇게 불러도…… 되죠?”

정은영이 조심스럽게 나를 바라봤다. 대뜸 오빠 소리를 내뱉긴 했는데,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다.

“허허.”

내가 헛웃음을 흘리며 정은영을 보는데, 이번엔 엘리스가 끼어들었다.

“옵파? 그게 뭐지?”

엘리스가 호기심 섞인 표정으로 나와 정은영을 바라봤다.

“엘리스 대리…… 그냥 이름 불러도 되지?”

호칭을 뺀 정은영의 부름에 엘리스가 잠시 당황한 눈빛이 됐지만,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외출이 끝나기 전까지는. 오케이. 그렇게 하자. 옵파 뜻이나 설명해 봐.”

엘리스가 쿨하게 이름을 부르라고 하자, 정은영은 기다렸다는 듯 ‘옵파’란 단어를 설명했다.

“그러니까. 한국 남자들은 옵파라는 단어를 좋아한다는 거네.”

“아무래도 친근감을 표하는 단어니까.”

“그럼 나도 옵파라고 불러야겠네. 보스와 가장 가까이에서 지내는 사람. 아니 여자니까.”

조금 전까지 티격태격하던 여자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니 나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여자들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진 모르겠지만,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다.

“주몽 옵파? 이렇게 부르면 되나?”

엘리스는 자신이 제대로 발음했는지 검증까지 들어갔다.

“옵파보다는 오빠가 정확한 발음이지만, 알아듣는 덴 문제 없겠네.”

“옷파?”

“아니. 오~ 빠.”

“오파. 옷빠? 옵빠.”

“굿.”

정은영은 아주 잘했다는 듯 손뼉까지 쳤다.

‘이 여자들이 미쳤나…… 지금 뭐 하자는 거야?’

내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지만, 두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몽 옵빠. 그래서 하고 싶은 게 뭐야?”

“그래요. 오빠가 하고 싶은 거 뭐든 말해 봐요. 우리가 같이 해줄게요.”

“하긴 뭘 해. 소란 떨지 말고 조용히 따라다니기나 해.”

내가 원하는 분위길 맞춰주겠다고 일부러 저러는 건가.

“우리가 오빠라고 부르니까 이상해요?”

“옵빠라고 부르면 불편해?”

“아니. 딱히 그렇다기보다는. 좀 어색하네.”

“히히. 나는 오빠가 없어서 한 번도 오빠라고 불러 본 적이 없는데, 대표님 덕분에 오빠 소리를 해 보네요.”

정은영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하. 좀 간지럽네.”

“오빠.”

“옵빠.”

“노노. 하지 않는 게 좋겠다. 이건 아닌 것 같아.”

내가 질겁한 표정으로 ‘놉!’을 외치자 두 여자는 깔깔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것보다 친하게 지내는 게 좋긴 하지만,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광경이다.

내가 꺼리는 표정을 짓자, 두 여자는 오히려 재미를 붙였는지 평소 보여주지 않았던 행동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댔다.

“여자들은 알다가도 모르겠다.”

“여자도 여자를 모르는데, 오빠가 그걸 이해하면 더 이상한 일 아닌가요?”

정은영이 장난스럽게 말을 받았다.

“하아.”

깊은 한숨 소리를 내뱉고 숭늉 마시듯 커피를 원샷 해 버린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주 보고 앉아서 오빠 소리를 계속 듣고 있다간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오오’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따라쟁이처럼 원샷을 때리고 나를 따라나섰다.

엘리스가 슬리퍼를 찍찍 끄집고 다가오더니 나를 쓱 올려봤다.

언제나 반듯한 모습만 보이던 엘리스가 삐딱하게 나를 올려다보니 기분이 묘하네.

“왜?”

“주몽 옵빠. 버킷리스트를 알려줘.”

“버킷리스트?”

엘리스가 버킷리스트를 운운하자 과거 한때 이런저런 공상했던 것들이 하나둘 떠 올랐다.

“그래요. 누구나 미래에 해보고 싶은 것들을 생각해 보잖아요. 오빠도 그런 리스트가 있었을 것 같은데.”

정은영도 맞장구를 치며 버킷리스트를 요구했다.

“뭐 이것저것.”

로버트에게 말했다시피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은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 해 봤을 법한 그런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 중엔, 여자친구와 팔짱을 끼고 길을 걷거나, 여자친구를 잘난 척하던 친구들에게 소개하거나, 여자친구와 멋진 식당에 가서 저녁 식사를 하는 것도 있었고…….

과거 상상 속에 머물렀던 버킷리스트를 떠올리고 있는데, 양쪽 팔꿈치에 물컹한 느낌이 밀려들었다.

뭐지? 이 생경한 질감은? 어라? 이 여자들이 왜 팔짱을 끼고 있어? 아니 왜?

“뭐…… 하는 거야?”

“버킷리스트라면서요.”

“뭐?”

잠깐, 혼자 생각한 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던 거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대뜸 그렇게 팔짱을 끼면 어쩌자고!

“자, 이제 친구들을 불러요. 오늘 하루 여자친구가 되어드리죠.”

정은영의 말에 엘리스도 지지 않겠다는 듯, 한 마디 덧붙였다.

“한 명보다는 두 명. 친구들이 부러워하겠죠?”

세상에 여자친구를 두 명씩이나 끼고 친구들을 만나는 미친놈도 있나? 맞아 죽을 일 있어?

“떠…… 떨어져.”

“말했잖아요. 뭐든 이야기만 하라고.”

“오빠. 버킷리스트는 기회가 있을 때 해치우는 거라고 배웠습니다!”

엘리스와 정은영은 떨어지라는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실실 웃음을 지었다.

“아니야. 이건 아니라고. 이러면 직장 내 성희롱과 뭐가 달라.”

“이게 왜 직장 내 성희롱이라는 거죠?”

“성희롱이라고? 우리가 오빠를?”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두 여자가 나를 바라봤다.

“아니. 내 말은. 상사의 버킷리스트 때문에 직원들이 강제로 동원…….”

“오늘은 오빠 동생 사이라고 먼저 말씀해 놓고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주봉 옵빠. 오늘 친구처럼 지내자며.”

내가 언제 오빠 동생 하자고 했는데. 그냥 평범하게 직장 상사, 부하 이런 거 말고 편하게 돌아다니자고 했지!

“자…… 잠깐!”

나는 두 여자를 급히 털어냈다. 그리고 재빨리 거리를 벌렸다.

“못들은 걸로 해주라.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다.”

내가 떨떠름한 표정을 짓자, 두 여자도 조심스러운 눈빛이 됐다.

“우리가 실수라도…….”

“이건 실수나 뭐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적응을 못 하겠어. 두 사람 평소 이런 캐릭터가 아니잖아.”

“보스가 보기에 나는 어떤 캐릭터죠?”

엘리스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캐릭터를 물었다.

“엘리스? 그거야 당연히.”

“당연히 뭐죠?”

“엘리트 변호사에…… 업무적 마인드도 훌륭하고…….”

“…….”

“그리고…….”

“얼음 마녀?”

“크흠. 얼음 마녀는 무슨.”

예전에야 그렇게 생각했지만, 엘리스가 겪고 있는 트라우마를 알게 된 뒤론 딱히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머쓱한 표정을 짓자, 엘리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보스.”

“어.”

“나 보스가 좋아요.”

“왓? 느닷없이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보스를 좋아한다고 하니까 이상해요?”

“직장 상사로?”

“당연히 아니죠. 그때 말했잖아요. 이런 남자 처음이라고.”

“이건 좀…… 당황스럽네.”

길바닥에서 그것도 추리닝에 슬리퍼 신고 느닷없이 고백이라니. 이 무슨 뜬금없는 진행이냐고. 깜빡이도 켜지 않고 그냥 좌회전이네.

“보스가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도 알아요.”

“어…… 그건 말이지.”

관심이 없다기보다, 너무 잘나고 예쁜 여자라서 엄두를 안 내는 거지. 괜히 관심 가졌다가 까이면 치명상 입을 것 같으니까.

“그래도 뭐. 내가 좋으니까.”

뭐 이런 불도저 같은. 엘리스 너 이런 캐릭터 아니잖아. 진짜 당황스럽게 왜 이러냐.

그런데 나만 당황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정은영 역시 뒤통수라도 맞은 사람처럼 뜨악한 얼굴이다.

“대표님.”

“어. 정은영 씨도 당황했지. 갑자기 분위기가…….”

“저도 그래도 되나요?”

“에? 뭐요?”

“저도…….”

“잠깐. 잠깐만.”

나는 두 여자의 입을 틀어막았다.

“두 사람이 이러는 거. 혹시 버킷리스트 완성형인가? 이벤트로 이러는 거라면 그냥 이쯤 해 두자. 장난이 심하잖아.”

“아닌데요.”

“네. 저도 아닙니다.”

“진…… 짜?”

“네.”

“네. 대표님.”

추리닝 바람에 길바닥에서 이게 무슨 짓인가 싶은데, 진짜 뜬금없고 괴상한 상황이긴 한데…… 기분은 썩…… 나쁘진 않네. 그런데 두 여자가 동시에 이러면…… 뭘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하지? 이게 장난이라면 모르겠지만, 진짜라면…… 아우. 머리야! 갑자기 왜들 이러는데!

“저기…… 길에서 이러지 말고 일단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하자.”

“그럼, 저기는 어떤가요?”

정은영의 손짓에 고개를 돌렸다. 다양한 맥주를 즐길 수 있는 세계맥주 프랜차이즈 주점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두 여자가 먼저 앞장을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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