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2장. 문제가 뭐죠?
사람들 눈을 피해 호텔을 나와 정처 없이 길을 걸었다. 딱히 목적지를 두지 않고 즉흥적으로 외출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정처 없이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돌아다니길 반복하자, 엘리스가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보스. 어디로 가는지 말씀해주셨으면 합니다.”
“응? 그런 거 없는데.”
“네?”
“그냥 내키는 대로 걷는 중이야.”
“아니 왜요?”
엘리스는 의아한 표정이 됐다.
“그냥.”
“네?”
“그냥이라고. 이유 같은 건 없어.”
엘리스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아. 보스. 봐야 할 서류가 산더미예요. 이렇게 시간을 낭비할 틈이 없습니다.”
엘리스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조용히 뒤따르고 있던 정은영이 엘리스의 옷깃을 슬쩍 잡아당겼다.
“저기 엘리스 대리님.”
“네. 정은영 씨.”
정은영은 걷는 속도를 살짝 늦추고 이번 외출에 대해서 설명을 했다.
“보스가 답답해한다고요?”
“네. 저도 이유는 잘 모르지만.”
엘리스는 더더욱 모르겠다는 표정이 됐다. 주몽이 답답할 일이 뭐가 있다는 건지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이다.
“하는 일마다 잘 풀리고 있는데 뭐가 답답하다는 걸까요?”
정은영은 도리도리 고개를 흔들었다. 그저 눈치가 있으니 그렇게 느꼈을 뿐이지 정확한 사정까지는 알지 못했다.
엘리스는 앞서가는 주몽을 바라보며 뭔가 말을 꺼내려다 말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정은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혹시 물어보면 답을 해줄까요?”
“굳이 물어볼 것까지 있을까요?”
정은영은 되레 반문했다.
“이유도 모르고 이 모양 이 꼴로 돌아다니란 말인가요?”
엘리스는 자신이 입고 있는 옷과 슬리퍼 모자를 툭 건드렸다. 평소 자신이 추구하는 패션과는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드레스 코드다.
“옷이 불편한가요?”
“아니. 내 말은…… 이유라도 알아야 대처를 할 수가 있다는 말이죠.”
“다른 건 모르겠지만, 대표님 얼굴이 편해 보이는 건 알겠어요.”
“보스 얼굴이 편해 보인다고?”
엘리스는 그런 부분까진 미처 생각지 못했는지 눈을 껌뻑였다.
엘리스는 다시 주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뒤따라 걸으면서 분위기를 살펴보니 정은영 말처럼 확실히 평소와 분위기가 달라 보였다.
내딛는 걸음도 그렇고 어딘지 모르게 가뿐한 느낌이다.
엘리스는 평소 주몽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러게. 날카로운 맛이 없네.”
“날카롭다고요?”
정은영은 엘리스가 평가하는 주몽의 모습에 관심을 보였다.
“당연한 거 아닌가? 하는 일이 소소한 것도 아니고. 판단 한 번에 수십억 달러가 오가는데.”
“아…….”
정은영은 엘리스의 말에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은영이 느끼는 주몽은 거부답지 않게 소탈하고 편안한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끈적거리지도 않았고 말 그대로 평범한 부하직원 대하듯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면서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드는 정도?
그래서 주몽의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그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에 얼마나 큰 돈이 움직이는지 실감하지 못했다.
이건 기존에 자신이 해 왔던 일이나 가늠할 수 있는 돈의 규모가 극히 한정적이었기에 벌어진 일이기도 했고, 잠재된 위험에서 벗어나 좋은 직장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 더 크게 와 닿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일방적으로 은혜를 입은 주제에 개인적으로 주몽을 판단하거나 평가할 위치가 아니라 생각한 점도 한몫을 했다.
아무튼, 그녀가 느끼는 주몽과 엘리스가 느끼는 주몽은 환경적으로 사고적으로 큰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정은영 씨는 어떻게 생각하죠?”
“저는 좋은 상사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상사?”
“네.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준 점도 그렇고 이렇게 좋은 직장을 얻게 된 것도 그렇고.”
“정은영 씨는 누군가 자신을 도와주면 아무런 의심 없이 그냥 좋은 사람으로 평가하는 건가요?”
“무슨 의미로 묻는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엘리스는 정은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보스도 남자고 남자는 아름다운 여자에게 도움을 주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대표님이 흑심을 품고 있어서 나에게 도움을 주었다는 말인가요?”
정은영은 엘리스의 말이 마음에 안 드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보스가 그랬다는 게 아니라. 남자는 믿을 수 없는 존재란 뜻이죠.”
“가끔 보면 대리님은 피해의식이 있는 것 같아요. 연애하다 크게 데인 적이라도 있는 것처럼.”
“연애? 훗. 그 딴걸 뭐 하려 하지?”
엘리스는 남녀 간의 만남에 대해 곧바로 부정적인 눈빛을 보였다.
“아, 하긴.”
정은영이 깜빡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엘리스가 무슨 뜻이냐는 듯 정은영을 바라봤다.
“엘리스 대리님이 레즈비언이라는 걸 깜빡했네요.”
“왓?”
정은영의 말에 엘리스가 눈을 키웠다.
“남자가 아닌 여자를 연애 대상으로 생각하시니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싶네요.”
엘리스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정은영을 노려봤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죠? 내가 레즈비언이라니.”
“에?”
“누가 그런 헛소리를 했냐고 묻고 있습니다.”
“누…… 누가 그런 게 아니라. 그때 일산에서도 그렇고.”
“일산?”
한국의 지명이 익숙지 않은 엘리스라 그게 어디냐는 듯 되물었다.
“호스티스 바에 갔던 날 말하는 겁니다.”
“아아.”
엘리스는 어딜 말하는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거기에 간 것과 내가 레즈비언인 것이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는 거죠?”
“그때 그랬지 않습니까. 남자 따위엔 관심이 없다고.”
“내가?”
“네.”
엘리스는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그래. 그런 말을 한 것도 같군요. 그러니까. 내가 남자를 혐오하거나 싫어한다고 생각해서 레즈비언으로 판단을 했다 이 말인가요?”
“오해했다면 미안합니다.”
정은영은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생각에 재빨리 사과했다.
“사과는 받겠습니다. 그리고 난 레즈비언이 아닙니다.”
“네…….”
정은영은 찔끔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뭐야. 레즈비언도 아닌데 왜 남자를 그렇게 꺼리는데? 아, 설마 그거였나.’
정은영을 바라보고 있던 엘리스가 입을 열었다.
“뭔가 다른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레즈비언이 아닌데 남자를 싫어하거나 혐오하는 사람들이 생각나서요.”
“극렬 페미니스트?”
“엘리스 대리님이 그렇다는 게 아니라…….”
“무능하고 욕심만 넘치는 것들에 나를 끼워 넣다니. 불쾌하군요.”
엘리스가 정색한 표정으로 이야기하자, 정은영은 이해가 되지 않는 표정으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왜 그러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엘리스 대리님이 보이는 반응을 보면 가끔 불안할 정도입니다. 저러다 대표님에게 실수를 하는 건 아닌지.”
“사적이고 충분히 실례되는 질문입니다만.”
“…….”
어쩌다 대화가 이렇게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사람 사이에 불편한 분위기가 흘렀다.
“아까 내가 했던 질문엔 아직 답을 하지 않았습니다.”
“네? 어떤…….”
“보스가 정은영 씨를 도와준 것 말입니다.”
“아, 흑심을 품고 그랬을 수도 있다는 거 말이죠?”
“네.”
“그게 기분 나쁠 일인가요?”
“남자가 음흉한 마음을 먹고 접근을 했다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다고요?”
“이상하네요. 그 부분은 저보다 엘리스 대리님이 더 잘 아시지 않나요?”
“뭘 말입니까.”
“대표님은 그런 눈빛으로 우릴 보지 않는다는 것 말입니다. 솔직히 가끔은 그렇게 봐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긴 하지만.”
“…….”
엘리스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자, 정은영이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 반응은 이미 알고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죠?”
“보스와 거리가 멀어졌군요. 속도를 높이죠.”
엘리스는 정은영의 질문에 답하지 않고 발걸음을 빠르게 했다. 하지만 그런 엘리스를 놓칠 정은영이 아니다.
“이제야 알겠군요.”
“…….”
“왜 그렇게 저에게 남녀 간 사이를 이야기하고 매번 경고하는지.”
“…….”
“대리님이 대표님에게 관심이 있어서 그런 거 아닌가요? 아니. 관심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겠군요.”
“그런 거 없습니다.”
엘리스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
“그렇다면 대표님에게 방금 나눈 이야기들을 전달해도 아무 문제가 없겠네요.”
“정은영 씨. 사적인 대화를 직장 상사에게 보고하는 건!”
“사적인 감정이 없다는 걸 정확히 전달해서 차후 문제가 생길 소지를 막는 것도 훌륭한 직장 생활이 될 것 같은데. 아닌가요?”
“지금 나와 싸우자는 건가요?”
“먼저 시비를 건 것은 대리님입니다.”
“사과하죠. 그러니 이 대화는 없었던 거로 하겠습니다.”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네?”
반문하는 엘리스를 두고 정은영은 앞서 걸었다.
엘리스는 정은영의 당돌한 태도에 눈을 찡그렸다.
“그 말은 좋은 상사 그 이상의 마음이 있다는 뜻 아닌가요?”
엘리스가 앞서가는 정은영의 뒤통수에 한 마디 날렸다.
정은영의 걷는 속도가 느려졌다. 그리고 뒤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why not?’하고 반문했다.
“하지만 주제 파악도 하고 있어요. 감히 올려다볼 수 없다는 것도. 나는 엘리스 대리님처럼 대단한 사람이 아니니까요.”
금발에 반짝이는 벽안(碧眼). 훤칠한 키에 변호사라는 명함까지. 평범한 삶을 살아온 정은영에겐 그야말로 넘기 힘든 벽이다.
꼭 엘리스가 아니더라도 어설프게 마음을 내비쳤다가 오히려 주몽과 어색해지거나 멀어지게 될까 봐 조심한다는 게 더 정확한 이유일 것이다.
“엘리스 대리님은 어떤가요?”
“무슨 말이죠?”
“나처럼 그저 바라만 보는 쪽? 아니면 마음을 드러내고 다가가는 쪽?”
“…….”
“대답 못 하는 걸 보니 어쩌면 나와 같은 마음인지도 모르겠네요. 사적인 감정이 없다고 강조하면서 자신을 감추는 것을 보면.”
정은영은 자신의 말이 틀렸냐는 듯 엘리스를 바라봤다.
앞서 걷고 있던 나는 티격태격하며 따라오는 두 사람을 보며 ‘쯧’ 혀를 찼다.
‘또 뭣 때문에 저러는지 모르겠지만, 이번 기회에 확실히 교통정리를 해 둬야겠네.’
나는 근처 카페로 발길을 옮겼다.
“두 사람 그만 싸우고 따라 들어와요.”
두 사람은 화들짝 놀란 표정이 됐다.
“네?”
“아…… 안 싸웠는데요.”
“됐고. 들어가서 이야기합시다.”
내가 앞서 카페로 들어가자 두 사람은 어정쩡한 자세로 따라 들어왔다.
“가서 앉아 있어요. 커피는 내가 살 테니까.”
“아닙니다. 제가.”
정은영이 앞으로 나섰지만, 나는 손을 휘휘 저었다.
“가서 기다려요.”
“….”
“어서.”
“네.”
주문을 마치고 두 사람이 앉은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지 않아도 몇 번 이야기할까 했는데, 말 나온 김에 교통정리 좀 합시다.”
“교통정리요?”
엘리스가 그게 무슨 뜻이냐는 듯 나를 바라봤다.
“두 사람이 자꾸 티격태격해대니 나까지 신경이 쓰여서 말입니다.”
“…….”
“…….”
“문제가 뭡니까?”
두 사람은 민망한 표정으로 내 시선을 피했다.
주몽이야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말들을 알지 못하니 아무렇지도 않게 질문을 던질 수 있지만, 정작 질문을 받은 두 사람은 어떤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성격 때문에 그러는 겁니까?”
“아닙니다.”
“아니요.”
두 사람은 전혀 그런 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문화적 차이?”
엘리스와 자신도 처음엔 이 부분에서 서로 간에 오해가 발생했었다. 정은영과 엘리스도 이런 부분에서 서로 어긋나는 점이 생겼을 수도 있다.
“아니요.”
“그런 거 없습니다.”
“그럼 혹시, 나 때문입니까?”
“그건…….”
“그렇다기보다는…….”
두 사람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들켰나? 들킨 거야?’ 하는 표정이 됐다.
“아무래도, 남자인 나와 지내는 것이 두 사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 같은데.”
“네?”
“그게 무슨 말씀인지.”
“두 사람 모두 알다시피, 지금 내 위치는 꾸준히 쌓아 올린 게 아닙니다. 말 그대로 어느 날 갑자기 이 자리에 올라선 거죠. 그래서 상사로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잘 알지도 못하고 익숙지도 않습니다.”
“…….”
“혹시라도 내가 두 사람에게 실수하거나 불편한 마음이 들게 한다면 언제든 좋으니 지적해도 됩니다. 직장 상사라는 이유로 불합리한 상황을 넘기지 말았으면 합니다. 무엇보다 나는 두 사람을 이성적으로 대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나 때문에 불편한 마음을 갖거나 불안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나는 부하직원에게 찝쩍대는 그런 파렴치한이 아니니까요.”
이진상이 얼마나 직원들에게 진상을 부렸던가, 거기다 정은영 같은 경우엔 아예 대놓고 관리 감독까지 했다. 나까지 그런 인간으로 비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대표님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보스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주몽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는 두 사람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무엇보다 이성적으로 대하지 않겠다는 말에 표정이 잠시 어두워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걸 파악할 정도로 세심한 성격의 주몽이 아니다. 그저 자기 할 말만 계속 말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