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1장. 바람이나 쐬자.
“보스. 잠시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멍하니 앉아 있던 나는 로버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로버트가 얼굴을 내밀었다. 슬쩍 방안을 둘러보더니 맞은 편에 자리를 잡았다.
“외출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아…….”
내가 선뜻 답을 못하고 망설이자, 로버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평범한 일상이 그립습니까?”
“그냥. 모르겠습니다.”
“이해합니다.”
“이해한다고요?”
“그럼요.”
로버트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만약에 말입니다.”
“네.”
“내가 그 많은 돈의 주인이 되었다면 지금 어떤 모습일까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로버트가 생각한 모습은 어떤 모습이었나요.”
“신경쇠약에 걸려서 약을 먹고 있을 겁니다.”
“푸하하하. 로버트가요?”
“네. 도무지 감당을 못할 것 같거든요.”
“에이. 그래도 살아온 연륜이 있고…….”
“연륜이 모든 걸 책임지진 않습니다. 오히려 그 때문에 더욱 힘든 시간을 보내게 됐을 겁니다.”
로버트는 가볍게 웃음 지었다.
“가끔은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마음 편하고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오랜 세월 쌓아온 연륜 때문에 오히려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돈도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로버트는 지갑을 꺼내 들었다.
“얼추 100달러 정도 되는군요.”
“…….”
로버트는 지갑을 펼쳐 안에 든 돈을 보여줬다.
“오늘 하루가 지나고 나면 돈이란 개념이 사라지고 더는 사용할 수 없는 세상이 될 겁니다.”
“……?”
“보스라면 이 돈으로 오늘 하루 무엇을 하겠습니까.”
“100달러. 식사 몇 번이면 사라질 정도네요.”
“맞습니다. 밥 몇 번 사 먹으면 금세 사라질 돈이죠. 문제는 이 돈이 내가 쓸 수 있는 인생의 마지막 돈이라는 겁니다.”
로버트는 탁자 위에 지갑을 올려놨다.
“보스의 전 재산이 100달러라면 그걸로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어…… 이거 생각보다 어렵네요. 그냥 오늘 하루 쓰는 돈이 아니라 인생의 마지막 돈이라니. 로버트는 그 돈으로 뭘 하고 싶죠?”
반대로 질문을 하자, 로버트가 하하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저라면 말입니다.”
“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겁니다.”
“네? 아니 왜요?”
“그걸 고민하느니 돈이 없는 내일부터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그걸 고민할 것 같거든요. 100달러를 어떻게든 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리는 것보다 돈이 의미가 없는 세상을 어떻게 맞이해야 할지, 돈이라는 수단이 없어진 세상에서 나와 내 가족들이 살아남으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어…….”
내가 모호한 표정을 짓자, 로버트가 이번엔 나에게 질문을 했다.
“보스는 어떻게 할 겁니까. 100달러로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
내가 묵묵부답으로 생각에 잠겨있자, 이번엔 다른 질문을 던졌다.
“보스에게 1만 달러가 있습니다. 그 돈을 하루 동안 써야 한다면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이번에도 다음날부터 돈의 가치가 사라지나요?”
“물론입니다.”
100달러면 한국 돈으로 10만 원 정도다. 식사 몇 번 하면 사라질 돈이라고 말했듯이 그리 큰돈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1만 달러는 크기가 다르다. 우리 돈 1천만 원 정도의 돈이니 뭔가를 하려 한다면 100달러보다는 선택의 폭이 넓어질 것이다.
“돈이 없는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 그걸 고민해야겠군요.”
내 말에 로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부터 돈은 사라진다. 그러니 오늘이 아니면 이 돈은 쓸 수가 없다. 보통 이렇게 말하면 하나같이 자신이 가진 돈에 집착합니다. 마지막이라고 하니 어떻게든 이 돈을 써버리고 싶어 하죠.”
“네. 그럴 겁니다.”
“그 때문에 이 이야기의 핵심을 놓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아~! 나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오늘 하루가 지나면 돈이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겠군요.”
“네. 돈을 쓰고 싶어도 받아줄 사람이 없습니다. 뻔히 사라질지 아는데 그 돈을 받고 물건을 팔거나 일을 해줄 이유가 없으니까요. 다시 말해서 이 지갑에 있는 돈은 이미 가치가 없는 상태인 겁니다. 굳이 내일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이.”
“네. 이해했습니다. 가치 상실이 예정된 순간부터 굳이 그 시간이 오지 않더라도 그것은 이미 의미를 잃는 것과 다름이 없다. 이런 뜻이죠?”
“네. 맞습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지도 아시겠습니까?”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이것 때문이다’라고 생각할 만한 답이 떠오르질 않았다.
“모르겠습니다.”
“돈이 많다는 것은 돈이 없다는 것과 비슷한 말입니다.”
“네?”
“돈이 많은 사람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을 씁니다. 그렇다면 돈이 없는 사람은?”
“조금이라도 더 벌기 위해 시간을 쓰겠죠.”
내 대답에 로버트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더 돈을 벌지 않아도 되는 사람의 삶이나, 가진 것에 만족하는 사람의 삶은 어떨까요?”
“돈 때문에 끙끙대며 살 이유가 없겠죠.”
“네. 당연합니다. 돈 버는데 목을 매고 거기에 인생을 낭비하느니 다른 것에 시선을 돌리고 행복을 찾는 데 집중하겠죠.”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요?”
“지금 이 자리에 두 명이나 있지 않습니까.”
로버트는 나와 자신을 가리켰다.
“나와 로버트가요?”
“보스는 돈을 더 벌어야 할 정도로 급급합니까?”
“하하. 그 정도는 아니죠.”
“맞습니다. 저 역시 보스 덕분에 풍족한 삶을 얻었고 덕분에 제 가족들도 모두 만족하고 있습니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가족의 건강과 보스의 안전만이 나의 관심사입니다.”
“…….”
“보스는 어떻습니까. 지금의 삶에 만족하고 있습니까?”
“나는…….”
이런, 선뜻 만족이란 말이 나오질 않는다.
“돈이 많으면 좋죠. 자본주의 시대에 그보다 더 안정적인 자산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묻는 겁니다. 보스의 꿈은 돈이 많은 사람이었습니까?”
“아…….”
“보스. 자신을 돌아보고 조금이라도 행복할 일을 찾아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지금과 달리 과거엔 하고 싶었던 게 많았을 것 아닙니까.”
“하하. 네. 그렇네요. 정말 하고 싶은 게 엄청 많았는데. 돈만 있다면 말이죠.”
“돈은 이미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스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요. 지금처럼 돈에 눌리는 삶이 반복되면 누구라도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겁니다.”
로버트는 탁자 위에 올려놓았던 지갑을 챙겨 넣었다.
“보스. 복권에 당첨된 뒤로 보스 자신을 위해 돈을 써 본 적이 있습니까? 아, 여기 호텔이나 여타의 것들은 보스가 원해서 소비를 한 게 아닙니다. 어쩔 수 없이 이곳에 돈을 쓰고 있는 거죠.”
로버트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돈 걱정 없이 최고급 한우를 실컷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습니다. 쪽방 같은 원룸을 벗어나는 게 꿈이었고. 예쁘고 멋진 여자친구와 함께 여행도 가 보고. 중고차라도 좋으니 내 명의로 된 차도 몰아보고 싶었죠. 크크. 지금 가진 돈에 비하면 정말 소소하다 못해 마이크로급의 소원들이긴 한데. 막상 그 작은 것들도 해보지 못하고 있군요.”
“하세요. 고민하지 말고. 돈만 많으면 뭘 합니까. 인생을 즐기지 못한다면 모두 짐 덩이일 뿐입니다. 솔직히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고 전력으로 뛰고 있는 보스를 보면 내심 신기하기도 하고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
“걱정될 정도였나요?”
내 말에 로버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은영 씨가 그러더군요. 평범하게 다른 청년들처럼 외출하고 싶어 한다고.”
“정은영 씨가 그런 말을 했군요.”
“보기보다 눈치가 빠른 사람입니다.”
“그럴 겁니다. 정은영 씨도 만만치 않게 힘들게 살아왔다고 하니. 주변 눈치를 보는 게 빠를 수밖에 없죠.”
“하지만 알고 계시죠? 경호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
“크크. 네. 가족의 건강과 내 안전이 로버트의 관심사라면서요.”
“네. 제 관심사를 외면하지 말아 주십시오. 보스의 안전이 제 가족의 행복을 지키는 수단이니까요.”
“네네. 알겠습니다. 대신 너무 가까이 붙지는 말아줘요.”
“보스. 우리는 전문가입니다. 그 정도 능력은 기본으로 탑재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한국 정보국에서 나온 친구들이 근거리에서 경호하고 우리 팀은 조금 더 떨어진 거리에서 움직일 겁니다. 대신에 보스도 협조해줄 부분이 있습니다.”
“네.”
“엘리스, 정은영 씨와 동행을 부탁드립니다.”
“에?”
“근접 경호가 어려우니, 최소한의 방패는 세워야겠습니다.”
“여자 두 명이 내 방패를 한다고요? 푸하하하. 에이. 아무리 그래도.”
내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보이자, 로버트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마추어로 활동을 했지만, 엘리스는 정식으로 복싱을 수련했습니다. 정은영 씨도 한 몸 지킬 정도의 호신술은 익혔고, 말입니다.”
“두 사람이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두 사람에게 훈련을 시키려 했는데, 이미 기본기는 잡혀 있더군요. 덕분에 교육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여자라고 우습게 봤다간 보스라 해도 한 방에 가는 수가 있습니다.”
“아……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네.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도 여자에게…….”
“그게 싫다면 보스가 직접 훈련을 받으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저로선 경호대상이 조금이라도 튼튼했으면 하니까요.”
“하하. 그건…… 생각은 해볼게요.”
“좋습니다. 강요할 정도는 아니니. 마음이 결정되시면 말씀해주십시오.”
로버트는 내 어깨를 짚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밖으로 나갔다.
답답하기만 했던 가슴이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다.
조언이랍시고 횡설수설 떠들어 대는 것보다 로버트의 이런 대화 방식이 나를 진정시키고 성숙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다.
“고맙습니다. 로버트.”
자리에서 일어나 뻑뻑한 관절을 푸는데, 조심스럽게 문이 열렸다.
“대표님. 말씀하신 옷들을 준비해 왔습니다.”
“귀찮았을 텐데. 고마워요.”
“아닙니다. 당연히 제 일인데요. 그런데…….”
“네.”
“오천 원짜리 캡 모자는 구하지를 못해서. 나름 깎는다고 노력을 했는데 8천 원에 구입을 했습니다.”
“하하하. 그 정도까지 딱 지켜야 할 일은 아닌데. 수고했습니다.”
“넵. 대표님.”
정은영이 종이 가방을 내려놓고 나가자, 나는 곧바로 셔츠와 추리닝을 챙겨입었다. 삼디다스 슬리퍼에 팔천 원짜리 캡 모자를 쓰고 거울 앞에 섰다.
“크크크. 예비군복 입은 느낌이네.”
옷장 안의 옷은 아무리 좋고 편해도 어딘지 모르게 사람을 긴장시키는 느낌이다.
언젠가는 이것도 숨 쉬는 것처럼 익숙해지겠지만 오늘 하루는 다 잊어버리고 맘 편히 돌아다니고 싶어졌다.
물론 엘리스와 정은영이 따라다니긴 하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밖으로 나오니 로버트가 내 복장을 확인했다.
“편안해 보입니다.”
“네. 동네 백수 패션이죠.”
“하하하. 백수들이 그렇게 입고 다니나 봅니다.”
“저렴하고 편안하거든요. 엘리스와 정은영 씨는?”
“아, 환복 중입니다. 저기 나오는군요.”
로버트의 말에 고개를 돌려 두 사람을 바라보는데…….
“어?”
엘리스와 정은영 역시 추리닝에 캡 모자. 슬리퍼 패션이다.
“함께 움직여야 하는데, 오피스 룩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크크크. 네. 로버트 말이 맞습니다. 추리닝 백수에 오피스 룩은 언밸런스죠.”
정은영은 평소에도 즐겨 입는 패션인지 익숙한 표정이었지만, 엘리스는 불만 섞인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옷을 가져다 입혔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자, 그럼 나가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