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장. 낙하산이지만 괜찮아 - 2
김한올 회장의 딸랑이 낙하산을 왜 적임자로 추천하는진 모르겠지만, 제이코가 바보도 아니고 나름대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일단 제이코가 건네준 파일을 열어 서류를 확인했다.
김만석 사장의 개인 정보와 이력, 경력 증명서가 담겨 있다.
“흐음.”
나는 서류와 김만석 사장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이번에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나 같은 놈은 감히 비벼보지도 못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학력과 경력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관계>
이름 : 김만석(52)
가족 : 캐리 킴(부인) / 애니 킴(딸) ― 유타주 거주 중
<학력사항>
대치초등학교(졸) 대치중학교(졸) 서울고등학교(졸)
브리검 영(Brigham Young) 대학 Fine Arts and Communications (예체능 및 커뮤니케이션대학 학사)
메리어트 경영대학(조직 행동 및 인적자원관리 석사 ― OBHR, Organizational Behavior & Human Resources)
메리어트 경영대학 (경영학 박사 ― MBA, Master of Business Administration)
<경력 사항>
CNN : Cable News Network 방송관리부
CBS : Columbia Broadcasting System 광고운영부
NBC : National Broadcasting Company 경영지원부
유니버설 스튜디오 : 제작지원부
위에화 엔터테인먼트 : 매니지먼트 재정관리부
ST 미디어 그룹 : 관리이사
ST 미디어 그룹 : JTB 방송 사장
내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류와 김만석을 번갈아 보자, 제이코가 크크 웃음을 보였다.
학력은 둘째치고 그가 쌓아온 커리어가 어마어마했다.
여기저기 눈치를 보며 어깨를 움츠리던 김만석이 이런 과거를 가지고 있을 거라곤 도무지 상상되질 않았다.
서류만 놓고 본다면 제이코의 말처럼 ST 미디어를 맡겨볼 만한 인재가 틀림없다.
하지만…….
“이게 뭡니까?”
“김만석 씨 파일입니다.”
“아니, 이런 사람이 왜 딸랑이…… 크흠.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대표님.”
김만석은 그런 소릴 들어도 할 말이 없다는 듯,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돼서 그렇습니다.”
내 질문에 제이코가 대신 설명을 했다.
“위에화 엔터테인먼트와 한국 ST 미디어 사이에 합작회사 설립 건이 있었답니다.”
“그런데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계획은 파기가 됐고 위에화 엔터에선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죠.”
“희생양으로 김만석 사장님이 당첨됐다는 말인가요?”
“그간의 사정까지는 모르겠지만, 결론만 놓고 보자면 그렇게 된 거죠.”
“그런데 왜 ST 미디어로 들어간 거죠? 말 그대로 결론만 놓고 본다면 원수나 다름없는데 말입니다.”
내 의문에 김만석 본인이 직접 입을 열었다.
“합작회사를 유리한 방향으로 설립하기 위해 제가 타겟이 됐습니다.”
“네? 그건 또 무슨 말입니까.”
“합작회사 설립 건으로 만남이 이루어졌는데, 저도 모르는 사이…….”
김만석이 선뜻 입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김만석 라벨이 붙은 포르노 테이프라도 만들어졌나 보군요.”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겠다.
나도 박산호 지부장의 정보가 없었다면 짤 없이 물뽕에 취해 사고를 쳤을 테니까.
“이상함을 느낀 위에화 쪽에서 계획을 중단시켰고 합작 건도 그렇게 없었던 일이 됐습니다.”
“김한올의 협박 때문에 내부 자료라도 넘긴 건가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가족들에게 그 테이프가 넘어가기라도 하는 날엔…….”
김만석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김한올 이 사람 진짜 막장이었네.”
멀쩡한 사람을 데려다 대놓고 노예로 부려 먹은 것이다. 그것도 가족을 인질 삼아서.
“금고에서 테이프가 많이 나왔다던가요?”
“못해도 수백 장은 넘는다고 하더군요. 박 부장에겐 모두 파기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잘했어요. 그런 건 가지고 있어봤자 구린 냄새만 풍길 테니까.”
아차 했으면 내 테이프도 김 회장 금고에 고이 모셔졌을 것이다.
김만석처럼 딸랑이까지는 아니더라도 난감한 일이 계속해서 발생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멀쩡한 분을 데려다 왜 그렇게 부렸답니까? 어찌 됐든 데려왔으면 제대로 일을 시킬 것이지.”
내 말에 김만석이 설명을 했다.
“일종의 교육 기간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말을 착실히 잘 따르는지 확인하는.”
“미쳤네요.”
과거 한때는 연예인들 데뷔전에 이상한 장면 찍어놓고 계약 내내 노예처럼 부린다는 말은 들어봤어도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다. 막말로 요즘에 이런 일을 벌였다가 발각이 되는 날엔 규모에 상관없이 기획사가 통째로 분해될 일이다.
“김한올 회장 영주권을 받아주기로 했다고요?”
“네. 보스.”
“고민되네.”
김한올 같은 양아치를 이대로 떠나보내야 한다는 게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보스.”
“네. 제이코.”
“말 그대로 영주권입니다.”
“네?”
“영주권과 시민권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만 알고 계시면 됩니다.”
“무슨 뜻입니까?”
“미국에 머물 수 있는 권리는 있어도 보호받을 권리는 아주 부실한 게 영주권이죠. 아차 하는 순간 추방을 당할 수도 있고. 그러니 따로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와, 이 사악한 인간을 봐라. 먹고 살 만큼 챙겨서 영주권까지 만들어 보내준다기에 그런가 보다 했는데, 이제 보니 딴생각이 있었구나.
“제이코. 변호사가 그렇게 이상한 꼼수를 쓰고 그러면 됩니까?”
“꼼수라니요. 그가 바라는 대로 약속을 지켜줬을 뿐입니다.”
아무리 제이코가 뒤끝 넘치는 인간이라고 해도 불법적인 일에 손을 대진 않았을 것이다. 넘치는 게 힘인데 딱히 그럴 이유도 없고 말이다.
“꿍꿍이가 뭡니까?”
“여기 김만석 씨도 그렇지만, 피해자가 한둘이 아니더군요. 소각 처리를 맡은 박산호 부장의 말에 따르면 자살로 생을 마무리 한 사람도 적지 않다고 합니다. 세상엔 우울증이나 기타 등등으로 알려졌지만, 실상은 협박에 못 이겨 스스로 생을 마감한 거였다고 하더군요.”
“…….”
“그래서 이번 일에 꼭 필요한 테이프 두어 편은 남겨 달라고 했습니다.”
“모두 소각한 게 아니라고요? 그러다 다른 피해자가 나오면 어쩌려고.”
내가 걱정 섞인 표정이 되자, 김만석이 대신 나섰다.
“대표님. 제이코 고문님이 남겨 두었다는 테이프는 종류가 다릅니다.”
“종류가 달라요?”
“네. 정치인들의 난잡한 사생활이 담긴 테이프입니다.”
김만석의 말에 나는 부정적 견해를 보였다.
“정치권을 건드릴 생각이라면 그만두는 게 좋습니다. 그쪽은 파내면 팔수록 냄새만 독해져요.”
내 반응에 제이코가 웃음을 보였다.
“제가 그 정도 생각도 없겠습니까. 그 테이프는 김한올 본인이 주연으로 출연을 한 겁니다.”
“네? 자기 자신을 테이프에 담았단 말입니까?”
이건 또 무슨 미친 소린가 싶다. 스스로 약점을 만들어 보관하고 있었다니.
“물론 혼자서 출연하는 건 아닙니다. 김만석 씨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금도 현직에 있는 공무원이나 정치인들이 동반 출연을 했다고 합니다. 그들 말로는 뭐라더라…….”
제이코가 기억을 더듬자, 김만석이 냉큼 대신 이야기했다.
“영웅호색입니다.”
“네. 영웅은 여자를 좋아하니 그걸로 영웅임을 증명한다? 뭐 그런 말도 안 되는 모임이라더군요.”
“헐!”
이젠 별 거지 같은 모임까지 다 등장을 한다.
이진상의 금요멤버는 명함도 못 내밀겠네.
내가 황당한 표정을 짓자, 제이코가 또 다른 테이프의 존재를 이야기했다.
“그 테이프는 어디까지나, 김한올이 엉뚱한 짓을 할 것에 대비한 보험일 뿐입니다. 진짜는 따로 있습니다.”
“진짜요?”
“네. 하지만 보스는 모르시는 게 좋겠습니다.”
“아니 왜요.”
“알아봐야 도움이 안 되는 것들도 있으니까요.”
저러니까 더 궁금해진다. 아예 안 들었으면 모를까. 다 이야기해 놓고 알려줄 수 없다니!
“궁금하신 표정입니다만, 못들은 걸로 넘어가시죠.”
“쩝. 무슨 일을 꾸미는진 모르겠지만, 일 터트리기 전에 귀띔은 해 줘요.”
“물론입니다. 보스 허락도 없이 일을 저지르겠습니까.”
제이코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아무튼, 이번 일을 처리하면서 김만석 씨의 약점이 사라졌고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해진 상태입니다.”
제이코의 말에 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외부 인사를 데려와 앉히는 것보다 그나마 내부 사정을 아는 사람이 일을 이어받는 게 나을 것도 같다.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이 정도 스펙이면 어디 가서 꿇릴 일도 없다.
“김만석 씨에게 기회를 한 번 줘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한 국장님이 문제 삼지 않을까요? 그간의 사정이야 어찌 됐든 간에 김 사장님이 무척이나 괴롭혔다고 하던데.”
“그 부분은 제가 설득하겠습니다. 어차피 보도국과는 별개로 진행될 부분이니까요.”
“일단 알았습니다. 지켜보도록 하죠.”
나는 확답을 내리기보다, 시간을 들여 평가하겠다고 했다. 제이코도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는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더 들을 이야기가 있나요?”
“이공계 투자 지원서 부분이 남아 있긴 합니다만, 좀 더 정리가 되면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오케이. 그럼 수고들 하세요.”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김만석도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김한올 회장 밑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오토매틱이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는 각자 맡은 일에 충실하면 그걸로 만족하니까요.”
“열심히 최선을 다해 보좌하겠습니다.”
김만석은 넙죽 허리를 숙였다.
그동안 자존감이 많이 무너졌는지 너무 저자세다. 과거 내 모습이 떠오르는 것 같아 잠시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이렇다저렇다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적절치 않았기에 간단히 인사를 나누고 회의실을 벗어났다.
하루라도 빨리 본래 자리를 되찾고 무너졌던 마음도 되세우기를 바랄 뿐이다.
방으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답답한 마음이 올라왔다.
“한국에 들어온 뒤론 계속 일만 했네. 바람이라도 쐴까.”
예전의 나라면 밖엘 나가든 바람을 쐬든 거칠 게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어딜 움직이든 경호원들이 따라붙고 보조 인력이 함께 움직인다.
처음엔 우쭐한 마음도 들고 성공한 기분도 들었지만, 오늘따라 모든 게 귀찮게 느껴졌다.
“에이, 괜히 기분만 꿀꿀해지네.”
나는 옷장을 열어 가지런히 걸러진 옷들을 바라봤다.
“왜 추리닝은 없는 거야.”
걸려 있는 옷들은 모두가 고급지고 핏이 살아 있다.
멋짐을 표현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방구석을 뒹굴기엔 한없이 부족한 옷들이다.
물론, 저 옷들을 입고 방구석을 굴러다닌다고 해도 누가 뭐라 하겠는가만은 옷을 입고 있는 내가 불편하면 모든 게 불편한 거다.
나는 습관적으로 엘리스를 부르려다, 정은영을 호출했다.
“네. 대표님.”
“옷 몇 벌만 사다 주겠어요.”
“옷이요?”
정은영이 의아한 눈빛으로 옷장을 바라봤다. 종류별로 구할 수 있는 옷들은 모두 구해서 갖춰 놨는데, 무슨 옷을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대충 챙겨 입을 추리닝이랑 삼디다스 슬리퍼. 그리고 오천 원짜리 캡 모자. 검정 티도 두어 벌 부탁합니다.”
“네?”
정은영은 내가 지시한 사항을 받아 적다가 오류라도 일으킨 듯 어정쩡한 모습이 됐다.
“바람 좀 쐴 생각입니다. 평범하게.”
“아…… 네. 일단 알겠습니다.”
정은영은 준비해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로버트 팀장님.”
“정은영 씨.”
“대표님이…… 외출을 하실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로버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직원들을 모으려 했다.
“저기 잠시만요.”
“?”
“그런데 평소처럼 움직이는 게 아니라…… 이걸 뭐라고 설명하지.”
“평소처럼 움직이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움직인다는 말이죠?”
“제가 분위기를 제대로 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홀가분한 기분을 느끼고 싶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홀가분?”
“네.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복장을 하고 평범한 청년처럼 그렇게 움직이고 싶은?”
“알겠습니다. 가서 일 보세요. 보스와 직접 이야기하죠.”
“네. 로버트 팀장님.”
정은영은 꾸뻑 인사를 하더니 곧바로 옷을 구하러 달려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