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글로벌 벼락부자, 역대급 깽판을 치다-69화 (70/224)

069장. 낙하산이지만 괜찮아 - 1

“으…….”

신음이 절로 나왔다. 속은 울렁거리고 입안은 텁텁함이 가득했다.

나도 모르게 분위기에 휩쓸려 미친 듯이 술을 들이켠 결과다.

꾸역꾸역 지렁이처럼 기어서 침대를 내려왔다.

“아으. 미친 인간들.”

술이 약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어제부로 그 생각을 시궁창에 박아 버렸다.

주량을 기준으로 레벨을 나눈다면, 천기득은 마왕급. 정진호와 한중근은 영웅급이다.

의사와 검사들이 술을 잘 마신다는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익현 차장 역시 전사급 술꾼이었고 제이코가 등장한 뒤 찔끔거리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한성희 역시 마녀라 불러도 이상할 게 없었다.

무엇보다 제이코가 의외의 복병이었다.

슈트 모델처럼 차려입고 앉아서 느긋하게 술을 즐기는 것 같더니, 어영부영 양주 두세 병은 거뜬히 먹어 치웠다.

안주를 만든다고 주방을 오가지 않았다면, 식당도 기어서 나와야 했을지도.

가뭄 진 논두렁처럼 쩍 갈라진 목 때문에 통증이 올라왔다.

꾸물럭꾸물럭 바닥을 기어 물을 찾아 움직이는데, 익숙해 보이는 발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으…… 으?”

“대표님!”

가슴 한가득 서류뭉치를 들고 들어왔던 정은영이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내려다봤다.

“무…… 물 좀.”

“아! 잠시만요.”

정은영은 서류뭉치를 내던지다시피 내려놓고 재빨리 물컵을 챙겨왔다.

“아우.”

벌컥. 벌컥.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다. 평소에 먹던 물과 다를 바 없음에도 마치 꿀물을 마시는 기분이 들었다.

“더 줘.”

“네. 여기.”

물병을 들고 대기 중이던 정은영이 재빨리 잔을 채웠다. 그렇게 석 잔을 더 마시고야 겨우 정신을 차렸다.

“젠장. 내가 그 인간들과 다시 술을 마시면 개다!”

의자에 주저앉아 헉헉대던 나는 정은영이 들고 있던 서류에 시선을 줬다.

“아침부터 무슨 서류가 그렇게 많습니까?”

“투자 신청서들입니다.”

정은영은 풋 하고 웃음을 보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아침이라기엔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오후 5시가 넘었거든요.”

“몇 시?”

“오후 5시…… 27분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재빨리 스마트 폰을 꺼내 정확한 시간을 다시 한번 알려줬다.

“하루가 그냥 지나간 거야?”

“네.”

“아주 완벽히 기절했네.”

나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해장 준비할게요.”

“그래 주겠어요?”

“당연하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정은영이 서류 뭉치를 챙겨 들고 자리를 비운 사이, 이번엔 엘리스가 모습을 나타냈다.

그녀 역시 정은영만큼 서류 더미를 안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햄버거?’라고 중얼거렸다.

“응?”

“술 마신 다음엔 햄버거가 좋습니다. 아, 피자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

미국인들은 해장으로 햄버거, 피자를 먹는 사람도 있다고 듣긴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쪽으론 손이 가질 않았다.

“아니. 정은영 씨가 따로 준비를 해줄 거야.”

“정은영 씨가요?”

엘리스는 말꼬리가 살짝 올라가는 목소리로 반문했다.

“응. 그러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알겠습니다. 그럼.”

엘리스는 평소처럼 시크한 표정을 하고 나를 지나쳤다. 그렇게 한동안 멍 때리는 시간을 보내는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삐걱거리는 몸을 이끌고 사람들이 있는 쪽으로 이동을 했다.

“무슨 일…… 응?”

“보스. 숙취 해소용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대표님…… 저도.”

두 여자가 각각 트롤리를 밀며 나타났다. 그리고 두 여자 뒤로 컴퍼니 직원들이 힐끔거리며 ‘구경’을 하고 있다.

정은영이 해장을 준비한 것은 이해가 됐다. 내가 지시를 내렸으니까. 하지만, 엘리스는 예상 밖의 등장이다.

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두 여자는 각각 준비한 음식을 테이블 위에 세팅하기 시작했다.

정은영은 얼큰한 육개장을 엘리스는 치즈 향 가득한 피자를 올려놨다.

“뭐 하자는 거지?”

당연히 이 질문은 엘리스를 향한 질문이다.

“보스. 숙취 해소엔 스파이시한 음식보다 치즈가 효과적입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했잖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그래도 책임 비서로서 구경만 할 수는 없었습니다. 정은영 씨가 준비한 음식은 알코올로 약해진 위벽을 더욱 손상시킬 게 분명합니다. 데인저러스한 푸드입니다.”

엘리스는 냄새만 맡아도 땀이 난다는 듯 코끝을 찡그렸다.

“하지만 육개장은 전통적인 해장 음식 중 하나입니다.”

정은영은 절대 그런 의도로 준비한 음식이 아니라며 항변했다.

“과학적인가요?”

엘리스가 ‘전통적 해장식’의 과학적 근거를 지적했다.

“네?”

정은영은 눈이 동그래져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머뭇거렸다. 그저 어려서부터 봐 왔던 대로 음식을 준비했을 뿐이다. 과학적 근거나 이론적 해석이 가능할 리 없다.

“치즈가 해장에 좋다는 근거는요!”

정은영이 살짝 발끈한 표정이다.

“당연히 있죠. 치즈는…….”

엘리스가 치즈의 효과를 설명하려는데, 정은영이 살짝 빠르게 한 마디 덧붙였다.

“한국인과 서양인의 체질적 문제는 고려한 답변이시겠죠?”

“어?”

정은영의 지적에 이번엔 엘리스가 선뜻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렸다.

“저기 두 사람.”

“네. 보스.”

“네. 대표님.”

“됐으니까. 놔두고 나가.”

“…….”

두 사람은 선뜻 발이 떨어지지 않는지 미련 가득한 눈빛으로 테이블을 내려다봤다. 마치 자신이 가져온 음식이 해장에 최적화된 음식이라는 듯.

한 사람은 전형적인 한국인. 다른 한 사람은 전형적인 미국인이다 보니 생각하는 방식도 일 처리하는 스타일도 다르다. 이젠 먹는 것까지 문화적 차이를 보인다.

거기다 엘리스는 법률적 업무는 아예 에이스 로펌 팀과 제일 법무법인으로 넘겨 버리고 비서직 수행에 더 집중하는 모습이다.

본인 말로는 한국법은 아는 게 없어서 그쪽으론 딱히 할 일이 없다고 하는데, 그게 또 틀린 말은 아닌지라 일단 지켜보는 중이다.

“나가라고.”

“네. 보스.”

엘리스가 먼저 등을 보였고, 정은영이 뒤따라 움직였다.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신경전이야. 쯧.”

안 그래도 속이 울렁거려 죽겠는데, 여기서 뭘 먹을지 고민까지 해야 하는 거냐고.

일전에 일산에 다녀온 다음부터인 듯싶다. 둘 사이에 묘한 경쟁 구도가 만들어진 것이.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해서 그러려니 하고 말았는데, 이젠 숙취 해장까지 경쟁한다.

아름다운 여자 두 명이 고심하고 노력하는 데 뭐가 불만이냐고 할지 모르겠지만, 바로 이게 불만이다.

경쟁해도 둘이 알아서 하고 승부를 결정 지은 다음에 일을 가져와야지. 매번 ‘내가 더 잘했죠?’ 하는 표정으로 선택을 강요하니 슬슬 질리기 시작했다.

둘 사이에 감정싸움이라도 생기면 나만 고달플 테니 그 전에 교통정리를 해 둬야 할 것 같다.

두 여자의 행동에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젓고선 조용히 숙취 해소에 들어갔다.

처음엔 육개장에 먼저 손이 갔는데 먹다 보니 묘하게 치즈 향이 끌린다.

과학적이니 어찌하니 하면서 나름대로 근거를 대긴 했지만, 한국 사람에겐 익숙지 않은 해장 음식이다.

“그래도 가져온 사람 공이 있는데.”

나는 해장국과 치즈피자 모두를 씩씩하게 먹어치웠다.

육개장과 치즈피자는 태어나 처음 겪어보는 조합이지만, 이게 먹다 보니 묘하게 궁합이 맞는다.

육개장이 매콤하면서 시원하게 속을 다스리는 느낌이라면 치즈피자는 고소하고 부드럽게 감싸는 느낌을 줬다.

“나쁘지 않은데?”

육개장과 치즈피자를 오가며 든든하게 속을 채우고 나니 조금은 눈이 맑아진 느낌이다.

“거참. 수행비서가 두 명이니 해장도 별스럽게 하게 되네.”

욕실로 가 몸을 씻고 나오니, 그새 테이블은 깔끔하게 치워져 있다.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가니 여느 때처럼 다들 업무에 열심이다.

“아무래도 조만간 거처를 옮겨야 할 것 같네.”

아무리 호텔 시설이 좋다고 해도 주거와 업무를 동시에 보기엔 껄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서로 간에 사생활 보호가 빈약한 점도 신경이 쓰였다.

“누가 땄습니까?”

내 질문에 직원들 동작이 딱 멈춰 섰다.

“보스. 갑자기 무슨 말씀인지.”

“모른 척하기는. 정은영과 엘리스를 두고 누구 음식이 초이스 될지 내기를 했잖아요.”

“하하…….”

직원들이 어색한 표정으로 웃음을 보였다.

“내기 한 것 가지고 뭐라 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 소소한 이벤트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로버트 팀장님이 땄습니다.”

“로버트가?”

“네. 우리는 정은영 씨와 엘리스로 나누어서 돈을 걸었는데, 로버트 팀장님은 두 개를 다 비우는 쪽에 돈을 걸었거든요.”

“역시 로버트가 현명하네.”

“그런가요?”

“당연하지. 로버트는 엘리스가 됐든 정은영 씨가 됐든 누구 편도 들지 않았지만…….”

“아아!”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눈치챈 직원들이 그제야 로버트의 현명함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이해했다.

“에이. 그냥 장난으로 내기를 한 것뿐인데. 별일 있겠습니까?”

“그거야 나도 모르지.”

“…….”

“내가 음식 두 개를 다 비운 거 보면 모르겠어? 현명함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고.”

사실은 먹다 보니 궁합이 잘 맞아서 두 개 다 먹어치운 거지만.

“아…… 그래서 음식이 모두.”

“자자. 그 이야기는 이쯤 하고. 제이코는?”

“회의실에서 미팅 중입니다.”

“미팅?”

“네. ST 미디어 관련입니다.”

고개를 끄덕인 나는 회의실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제이코가 아는 척을 했다.

“속은 좀 괜찮으십니까?”

“죽다 살았습니다. 무슨 술들을 그리 잘 마시는지.”

“하하하. 숙취는 좀 어떻습니까.”

“엘리스와 정은영 씨가 챙겨줘서 조금은 나아졌습니다.”

“두 사람이요?”

제이코가 묘한 웃음을 짓는다.

“뭡니까. 그 웃음은?”

“그냥 부러워서 그렇습니다.”

“내가 부러워요?”

“동서양 두 미인이 그렇게 살뜰하게 생겨주는데 누군들 부럽지 않겠습니까.”

제이코는 장난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렇게 부러우면 제이코도 비서를 둬요. 제이코가 손을 내밀면 동서양이 문제겠습니까. 각국 미녀들이 너나 할 것 없이 달려들 겁니다.”

이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제이코는 누가 봐도 슈트빨 죽이는 미중년이다. 왜 저런 얼굴을 가지고 여태껏 혼자 사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다.

“사양하겠습니다. 보스 표정을 보니 그다지 내키지 않는군요.”

“그런데, 미팅 중이라고 하던데. 왜 혼자 있습니까.”

“아, 잠시 화장실에 갔습니다. 금방 돌아올 겁니다.”

“앉아도 되죠?”

“물론이죠.”

뭘 그런 걸 물어보냐는 듯 곧바로 자리를 내주었다.

“ST 미디어 관련이라고요?”

“네. 김 회장이 미국으로 떠나지 않습니까.”

제이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ST 미디어 그룹의 지분구조를 우리 쪽으로 돌려놓고 부족한 부분은 시장에서 추가로 거둬들이고 있습니다만, 이쪽 분야는 제가 전문가도 아니고 계속 붙들고 있을 수 없는 일이라서요.”

“적당한 사람이 있는 겁니까?”

“네. 보스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내가 아는 사람?”

연예계나 미디어 쪽과는 전혀 인연이 없다.

‘아, 몇 사람 있기는 하구나.’

이진상의 금요 멤버가 문득 떠올랐다. 하지만 그들은 침대 업무가 능숙할 뿐, 이런 쪽으론 전혀 쓸모가 없는 인재들이다. 그런데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 하니 더더욱 누군지 모르겠다.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회의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

내가 의외성 섞인 소리를 흘리자, 제이코가 곧바로 소개했다.

“일전에 만나신 적 있죠?”

“안면은 있습니다. 그런데 김 사장님이 왜 여길.”

JTB 사장 김만석. 한성희 국장의 말에 따르면 회장의 딸랑이이자 낙하산 인사의 전형이라고 했던 인물. 회의실로 들어온 그가 나를 발견하자 재빨리 허리를 숙였다.

“아. 네. 여기서 보네요.”

“네. 대표님!”

김만석은 잔뜩 기합이 들어간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제이코는 김만석에게 앉으라 손짓을 하더니 그가 이곳에 있는 이유를 이야기했다.

“ST 미디어를 맡겨 볼까 합니다.”

“네에?”

내 반응에 제이코가 크크 웃음을 보였다.

“제이코. 저 사람은…….”

“네. 한성희 씨에게 들었습니다. 김 회장의 내부 메신저이자 낙하산을 타고 들어온 외부 인사라고 하더군요.”

“그러니까요.”

“이걸 한 번 보시겠습니까.”

제이코는 서류철 하나를 내게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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