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장. 경고
한성희와 제이코 사이에 잠시 침묵이 돌았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어색한 그런 침묵이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취조를 하는 형사와 범인 사이에 이뤄지는 그런 침묵이다.
제이코는 서늘한 눈빛으로 한성희를 바라봤고, 한성희는 약점을 잡히지 않으려 머리를 굴리는 느낌이다.
“한성희 씨.”
“네.”
“술이 약하십니까?”
“네?”
“술에 의지하는 알코올 중독자냐고 물었습니다.”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습니다.”
“술이 약해서든, 아니면 알코올에 의지하는 성격이든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이코의 질문에 한성희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보스는 한성희 씨를 방송국 책임자로 생각을 하고 계십니다. 알고 계십니까?”
“…….”
한성희는 물론이고 자리에 모인 사람들 모두 제이코의 질문 의도를 알아차렸다. 특히 이익현 차장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둘 중 어떤 대답을 하든, 문제가 되겠습니다.”
“둘 중 하나가 아니라, 다른 대답을 해도 문제가 될 것 같군.”
천기득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술이 약하다고 하면, 방송국 책임자로서 술에 대한 제제가 발생할 것이고, 술기운에 의지해 발언하는 타입이라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될 것이다.
만약 술에 영향을 받을 정도로 약한 타입이 아니라고 말을 한다면, 지금까지 한 모든 행위가 계획된 것이 되니 이 역시 문제로 지적이 될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한성희는 제이코의 질문에 어떤 답도 내놓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한성희 씨. 답변하시죠.”
“…….”
“말씀드렸다시피, 나는 고용계약서 작성을 책임지는 사람입니다. 단순 업무에 의한 외주계약이라면 이런 질문이 필요 없을 겁니다. 술로 인해 문제를 일으킨다고 해도 외주계약을 파기하고 그와 관련된 피해보상을 요구하면 그만이니까요.”
제이코는 나른한 눈빛으로 다리를 꼬았다. 마치 ‘난 네가 왜 이러는지 다 알고 있어. 그러니까. 까불지 말자.’ 이런 눈빛이다.
“하지만 고용계약서는 다릅니다. 그것도 일반직이 아니라 기업의 수장 자리를 정하는 것은 여러 가지 요소를 고민할 수밖에 없죠. 이건 보스의 약속이 있었다고 해도, 아니 약속이 있었기에 더더욱 체크하고 확인해야 하는 사항입니다. 제 말을 이해하십니까?”
묵묵부답으로 입을 다물고 있던 한성희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묵비권을 행사하려 든다면, 불온 적 의사와 의도적 계획을 세우고 접근한 것으로 생각하겠습니다. 그러니 잘 생각하고 대답하시길 바랍니다.”
제이코의 싸늘한 말투에 한성희는 당혹스러운 표정이 됐다.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자꾸만 자신이 불리한 위치로 이동을 하고 있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은 술을 좋아합니까?”
“싫어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술 때문에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자제력이 없지도 않습니다.”
한성희의 대답에 제이코는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수첩을 꺼내 방금 내용을 기록했다.
“저거, 완전히 형사 수첩입니다.”
“그러게. 분위기 묘하다.”
제이코가 하는 말은 누가 봐도 당연한 질문들이다.
방송국 책임자로서 문제가 될 요소가 있다면 확인을 해야 한다는데 누가 문제로 삼겠는가. 하지만 그에 답해야 하는 한성희는 ‘갑자기 왜 이런 분위기가 되었지?’라는 표정이다.
한성희로선 밥 잘 먹고 퍼질러 자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들어와 ‘당신은 누군데 남의 집에서 놀고먹는 겁니까?’ 하는 뜬금없는 소릴 듣는 표정이다.
“술은 좋아하지만, 자제력은 있다.”
제이코는 한성희 들으라는 듯 소리 내서 기록한 내용을 읽어 내렸다.
“좋습니다. 다시 묻겠습니다.”
“…….”
“술을 마셔도 자제력을 잃지 않는다는 분이 왜 그렇게 오버했습니까.”
“오버라니요?”
한성희는 눈살을 찌푸리며 제이코를 바라봤다.
“그럼 취했던 겁니까? 자제력을 잃고?”
“내가 자제력을 잃었다는 근거가 뭐죠?”
“자제력을 잃었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 그런 적이 있냐고 물었을 뿐이죠. 이미 말했다시피 나는 인터뷰 중입니다.”
“네?”
한성희가 재차 반문하자, 제이코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 묻는 겁니까. 아니면 인터뷰를 거부하겠다는 의미입니까.”
한국에선 면접, 미국에선 인터뷰라는 단어로 표현되는 고용인과 피고용인 사이의 사전 미팅.
제이코는 당연한 업무를 처리한다고 했고, 한성희는 지금 이 자리에서 하필이면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반응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제이코의 명분이 앞섰다.
“다시 묻겠습니다. 답변하지 않겠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이 일하는 분야 사람들을 적지 않게 만나왔고 또 법률적으로 처리해 왔죠. 일명 저널리스트라 불리는 사람들은 몇 가지 특이한 점이 있는데, 너나 할 것 없이 공통적 성향을 보이더군요.”
“…….”
“정의의 사도.”
“정의 사회 구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저널리스트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그럼 저널리스트가 아닌 사람은 정의 사회 구현에 반한다는 뜻입니까?”
“그런 의미가 아니지 않습니까. 변호사라더니 말을 심하게 왜곡하시는군요.”
“왜곡이 아니라, 일반오류입니다. 마치 당신들 외엔 모두가 사회 정의를 뒤틀고 무너트리는 존재처럼 생각하는. 그래서 말끝마다 가시를 달고 손끝에선 온갖 의심을 쏟아내죠. 그것이 증명되지 않은 말 그대로 의심뿐인 일이라고 해도.”
“말씀이 심하시군요.”
“내 말이 그렇게 느껴집니까?”
“그…….”
한성희는 습관적으로 말을 하려다 말고 급히 입을 다물었다.
뒤늦게 지금 이 자리가 인터뷰 현장임을 인식한 것이다.
객관적으로 봐도 상대는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고 있다. 고주몽이 결정을 했다고 해도 서류상 처리가 완료되지 않았다면 언제든 마음을 되돌릴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 말은 뭐가 됐든 꼬투리를 잡아서 자신을 쫓아버리겠다는 의미다.
‘그리고 보니 처음부터 그렇게 하겠다고 선전포고를 당한 상태구나.’
한성희는 뒤늦게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한성희가 답을 하려다 말고 멈추자, 제이코는 담담한 어투로 수첩을 적어 내렸다.
“증거가 없는 의심, 정황뿐인 일이라도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명분 아래.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저널리스트 한성희.”
제이코의 중얼거림에 한성희는 물론이고 식당 내 사람들 모두 ‘살벌하게 짜버리네.’ 하는 표정들이 됐다.
“그렇지 않습니다.”
한성희는 재빨리 반격에 나섰다.
“뭐가 말입니까?”
“정황과 의심.”
“말이 짧군요. 해명하려는 겁니까. 아니면 나에게 단어 공부를 시키려는 겁니까?”
“그것만으로 글을 쓰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그렇군요.”
제이코는 수첩에 추가 기록을 하더니, 다시 질문을 던졌다.
“처음으로 돌아가죠.”
“네?”
“당신은 술을 좋아합니까?”
“…….”
한성희는 ‘허.’ 하는 소리를 내며 입술을 말아 올렸다. 처음엔 왜 이런 질문을 끊임없이 하나 싶었는데, 이제 보니 다른 건 다 핑계고 이게 진짜 목적이구나 싶었다.
“좋아합니다.”
“당신은 술 때문에 문제를 일으키거나, 업무적 손해가 발생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아, 그렇군요. 그렇다면 오늘이 그 첫 번째 기록이 될 겁니다.”
“뭐라고요?”
“술 때문에 문제가 일어났고, 그 때문에 한성희 씨 당신에게 업무적 손해가 발생한 날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무슨 문제를 일으켰다는 것인지 도무지 모르겠군요. 고 대표에게 말을 함부로 한 것? 아니면 여기 모인 사람들이 모의하는 중에 나를 이용했다는 걸 깨닫고 화를 냈다는 것?”
“아,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몰랐던 사실이군요.”
제이코는 정보제공에 감사한다는 듯 입술을 움직여 ‘땡큐’라는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이…!”
한성희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한마디 하려는데, 제이코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보스.”
“네. 제이코.”
“혹시, 한성희 씨가 욕을 하거나 보스의 체면을 손상하는 발언을 한 적이 있습니까?”
“아…… 그거요.”
예상치 못한 질문이 흘러나오자, 한성희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건 한성희 국장 인터뷰가 끝난 다음에 개인적으로 이야기하죠.”
“알겠습니다. 보스.”
제이코는 반듯하고 정중하게 나의 말에 따랐다. 다시 한성희 쪽으로 고개를 돌린 제이코가 수첩을 만지작거리더니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어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송국을 책임질 재목은 아닌 듯한데.”
“겨우 술 때문에 그런 결정을 내린 건가요?”
“그럴 리가요.”
“그럼 뭐죠? 술을 먹느니 마느니 하면서 계속 질문을 던지더니. 이제는 담당할 재목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한성희 씨는 경영에 대해서 얼마나 잘 알고 있습니까. 한성희 씨는 저널리스트 활동을 제외한 경제 활동을 해본 적이 있습니까? 재무제표나 회계는, 영업 관리 또는 인사에 대한 적절한 지식은 갖추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저널리스트 입장이 아니라 기업에 속한 모든 이들의 이익과 안전을 위해 당신의 사적 명분 또는 기자의 사명감 따위를 집어 던질 각오가 돼 있는 겁니까?”
“그…… 그건.”
“작든 크든. 기업을 운영한다는 것은 수많은 판단과 결정을 요구로 합니다. 그리고 그게 어떤 결정이었든 간에 누군가는 손해를 입고 누군가는 이득을 봅니다. 현대경제는 무한히 확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한정된 재원을 놓고 아귀처럼 물고 뜯는 형상입니다. 온통 빚(debt)으로 이뤄진 세상이죠. 당신은 이런 전쟁에 나서겠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
제이코의 살벌한 지적에 한성희는 벙어리처럼 입이 딱 붙어버렸다. 하지만,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머지 사람들은 당연한 소릴 들었다는 듯 하나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코의 말대로 자신들은 하루하루가 전쟁이고 피가 마를 날이 없기 때문이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까?”
“….”
자신이 방송국을 운영하게 된다면 외적 압박이나 사주의 요청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정론에 입각한 방송을 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아니 그렇게 방송국을 운영할 거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자기 생각과 명분 때문에 누군가는 일자리를 잃어야 하고 또 누군가는 또 다른 압박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건 왜 망각했던 걸까.
저널리스트를 벗어 던지고 방송국을 위해서 자신의 의지와 명분이 아닌 모두를 위한 희생을 할 수 있냐는 질문에 한성희는 한 마디도 답할 수가 없었다.
“다시 묻겠습니다. 당신은 각오가 되어있습니까?”
“나는…… 죄송합니다.”
“네. 당연히 당신은 미안해해야 합니다. 능력도 없는 자가 공을 탐하는 것만큼 무서운 일도 없으니 말입니다.”
제이코의 단호한 외침이 식당 안을 무겁게 휘감았다.
본래부터 술에 취하지도 않았지만, 그나마 남아 있던 알코올 기운마저 그대로 날아가 버렸다.
“방송국은 저널리즘뿐 아니라 그 외의 다양한 정보와 콘텐츠를 다루는 공간입니다. 그걸 감당할 자신이 없다면, 자신이 잘할 수 있는 책임질 수 있는 영역만 욕심을 내세요.”
“네…….”
“그럼 다시 인터뷰를 시작하죠.”
“네?”
한성희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제이코를 올려봤다.
본인이 제이코 입장이라면 당장이라도 탈락을 외치고 밖으로 나가는 길을 가리켰을 것이다.
“말했지 않습니까. 저널리스트의 길을 포기하지 못한다고. 그렇다면 방송국 전체가 아니라 보도국을 놓고 다시 이야기해야죠. 그렇지 않나요?”
“아!”
한성희의 얼굴이 밝아졌다.
“인터뷰를 이어가기 전에 한 가지 경고하겠습니다.”
한성희는 ‘경고’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자세부터 바로 했다. 제이코가 이 자리에 나타나서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가 바로 ‘경고’임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저널리스트라는 이름은 프리패스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
“술이 됐든, 또는 여자를 무기로 하든. 뭐가 됐든 말입니다.”
“무슨 말씀인지.”
“다시 한번 보스 앞에서 장난을 치려 들거나, 무례를 범한다면!”
“…….”
“내 인생을 걸고 당신을 파멸시키겠습니다. 당신과 관련된 사람은 물론이고 당신의 주변 환경과 당신이 디뎠던 땅까지 모조리 파헤쳐 인생이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는지 제대로 보여드리죠.”
“마…… 말씀이 심하신 것…….”
“거꾸로 물어보죠. 이 나라 운영권을 가진 대통령에게 누군가 장난을 치려 했습니다. 그릇된 판단 또는 사적 이득을 위해 연기까지 하고 있죠. 그렇다면 그 대통령의 호위무사는 어떤 결정을 내릴 것 같습니까.”
“…….”
“당연히 죽여버려야죠. 누구도 그런 못된 생각을 가지지 못하도록 ‘경고’ 차원에서라도.”
변호사 입에서 살인을 예고하는 말이 서슴없이 터져 나왔지만, 한성희는 한마디도 대꾸할 수 없었다.
제이코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술에 취했는지, 술에 의지하는지 등의 질문이 왜 첫 질문이었는지도 이제야 모두 이해가 됐기 때문이다.
“제 말을 이해했습니까?”
“네…….”
“그러니 언행에 실수가 없길 바랍니다. 내 눈에 벗어나지 않도록.”
잠시 앞쪽으로 몸을 당기고 있던 제이코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의자에 등을 기대고 느긋한 자세가 됐다. 하지만 여유로운 자세와 달리 한성희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여전히 살벌 그 자체였다.
한성희는 제이코의 이글거리는 눈빛을 마주할 자신이 없는지 눈 끝을 내리고 시선은 테이블 위에 고정했다.
박력이 넘치다 못해 순식간에 상대를 압살해 버리는 제이코의 모습에 다들 입이 쩍 벌어졌다.
자신들도 못지않은 카리스마와 지도력으로 직원들을 이끄는 자리에 있지만, 제이코의 지금 모습엔 어설피 가져다 붙일 것이 아니란 생각까지 들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던 천기득이 히죽 웃음을 흘리며 한산 곡주를 쭉 들이켰다.
“남자의 로망이라…… 나쁘지 않지. 이런 식의 경고도 한 번쯤 필요할 때고.”
천기득의 말에 정진호, 한중군, 이익현까지 ‘아…… 그렇군요. 모두에게 하는 경고였군요.’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딱히 기분이 상했다거나 불만을 가진 표정들이 아니다.
오히려 이번 일 때문에 안정감이 생겼다면 이상하게 생각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