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1장. 대왕 그룹 상륙작전! - 3
“다들 알다시피. 고 대표가 우리 쪽에 소송을 걸었다. 소송 금액은 1억 달러. 그것도 20개국에서 각각.”
천기득 실장의 말에 다들 황당한 표정을 지었지만, 일단 조용히 이야기를 경청했다.
“법무팀 분석 결과. 이 소송은 우리가 불리하다.”
“한국에서 우리가 불리한 소송도 있습니까?”
이광수가 어이없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20개국이라고 했다. 한국이야 그렇다 쳐도 다른 나라에선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거다. 특히 중국에서는 이미 결과가 나오다시피 했고.”
천기득의 설명에 다들 눈살을 찌푸렸다.
“말이 일억 달러지. 그걸 20개국에서 모두 처리해야 한다면 거의 2조에 가까운 돈이 된다. 그것뿐 아니라 재판이 길어질수록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될 게 뻔하다. 그룹의 이미지 실추는 뻔한 일이지.”
“그래서요?”
이광수가 뭘 어쩌자는 거냐며 천기득을 바라봤다.
“3억 달러의 보상금과 이진상 상무의 사과가 함께 한다면. 소송을 멈추기로 했다.”
“3억 달러가 뉘 집 개 이름도 아니고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병원 재단장 이순영이 와락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20억 달러에 그룹 이미지 실추를 받아들이자는 거냐?”
“재판에서 이기면 되잖아요.”
“쯧쯧. 지금까지 내 말을 어디로 들은 거냐. 한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어려운 재판이라지 않았느냐.”
“어렵다는 말이 꼭 재판에 진다는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건 지고 이기고를 떠나, 대왕의 자존심 문제입니다.”
이광수 역시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라며 고개를 흔들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나는 충분히 알아들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기는 했지만, 기대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직접 확인을 하고 나니 속은 후련하군요.”
내 말에 이진형 이사가 입을 열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래도 한때 몸담았던 회사라 미련이 남았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정을 떼는 것도 나쁘지 않겠죠. 지금, 이 시각부터 대왕 그룹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겠습니다. 소송이야 어차피 지금 이대로 진행하면 될 것이고…… 제이코.”
“네. 보스!”
“공매도부터 때려요. 물량 잡아 놓은 것 다 풀고.”
“네. 알겠습니다.”
“주가 내려가면 이삭줍기하는 것도 잊지 마시고.”
“물론입니다. 투자팀에 바로 지시를 하겠습니다.”
제이코가 전화기를 꺼내 들자, 이광수 사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뭐 하자는 짓이야!”
“뭐 하자는 짓이요? 보다시피 대왕 그룹에 엿 먹이는 중입니다만.”
정말 몰라서 묻냐는 듯 시큰둥한 표정으로 이광수를 바라봤다.
“아, 공매도는 전자만 때리는 게 아닙니다. 대왕 그룹 계열사 전체에 때릴 거니까. 알아서들 방어해 보세요. 나름 챙겨 놓은 돈들 있을 테니. 이번 기회에 지분을 높이는 것도 다들 나쁘지 않으시겠네.”
대왕 전자뿐 아니라 모든 계열사에 공매도 공격을 하겠다는 말에 이광수뿐 아니라 다른 이들도 얼굴빛이 칙칙해졌다.
평소라면 방어에 나서서 주가도 지키고 겸사겸사 지분율도 높이는 작업에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아니 한동안은 그 누구도 그럴 여력이 없다. 있는 돈 없는 돈 모조리 끌어다 지주회사 작업에 꼴아박았기 때문이다.
“잠깐!”
이광수가 다급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뭡니까?”
“협상…….”
이광수는 가족들을 쭉 둘러봤다. 바로 전에까지 콧방귀를 날리고 있던 이들이 하나같이 고개를 끄덕인다.
“진행하지.”
“뭘 어떻게 한다고요?”
“협상. 진행하자고 했다.”
이광수의 말에 내가 손을 들어 올리자, 키패드 번호를 누르고 있던 제이코가 동작을 멈추고 뒤로 물러났다.
“진상이가 사과하고 3억 달러를 지급한다면…… 되는 건가?”
이광수 사장의 말에 이진상이 끼어들려고 하는데, 다른 가족들이 눈을 부라렸다.
지금 이게 누구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눈치도 없이 나서냐는 표정들이다.
“뭐. 일단은.”
“일단은? 여지를 남겨 둘 수는 없다. 그쪽도 확실하게 약속을 해야 협상이 이뤄질 것이다.”
이광수 사장의 말에 잠시 고민한척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돈은 일주일 안에 지급하고. 이진상 상무의 사과는 일간지 세 곳에 하단 광고를 잡아서.”
“좋아. 그렇게 하지. 하지만 일주일은 너무 촉박하군. 한 달 정도면 될 것 같은데.”
“한 달이면 너무 긴 것 같은데.”
내가 망설이는 표정이 되자, 천기득이 나섰다.
“고 대표. 원화도 아니고 달러를 움직이려면 시간이 필요하네. 그 정도는 양보 해줘도 될 것 같은데.”
“흠. 한 달이라. 만약 한 달 뒤에 돈이 들어오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땐, 협상이 깨졌다고 봐야겠지.”
“이거 괜히 시간벌기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럴 이유가 없네.”
“뭐. 좋습니다. 그럼 이 자리에서 계약서를 만들죠.”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천기득이 이광수 사장을 바라봤다. 어떻게 할 거냐는 눈빛이다.
“그럽시다. 깔끔하게 끝내는 게 좋겠지.”
이광수 사장이 동의하자 양자 간 협정이 곧바로 문서로 만들어졌다.
“이건 뭡니까. 한 달 뒤, 매달 1억 달러씩?”
내가 항목 하나를 문제 삼고 나서자, 이광수 사장이 설명했다.
“여유가 있다면 한 달 뒤 바로 지급을 할 것이네. 하지만 돈이란 게 어떻게 움직일지 모르니. 다달이 1억 달러씩 지급을 하겠다는 거네.”
“이거야 원. 기간을 늘려줬더니. 이젠 그걸 또 쪼개서 주겠다고 하네. 이런 조건을 내가 받아들일 것 같습니까?”
“고 대표는 회사를 운영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개인 돈이 아니라 회삿돈을 움직일 때는 여러모로 번거로운 작업이 필요해서 그런 거네.”
이광수 사장은 그 정도는 이해해 줄 수 있지 않냐며 업무적 이유를 들어 이야기했다.
“그건 또 무슨 소립니까. 그 돈을 왜 회사에서 줘요?”
지금부터 대왕 그룹은 다 내 건데. 내가 나에게 돈을 준다고?
대가리에 총 맞은 것도 아니고. 그럴 수는 없지.
“뭐?”
“당연히 이진상이 줘야죠.”
“…….”
내 말이 의외였던 걸까? 이광수 사장의 얼굴에 짧게나마 미소가 머금어졌다.
“그렇군. 내가 착각을 했네. 이 일의 책임자는 대왕이 아니라 진상이었지.”
이광수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진상 얼굴에 경악이 드리웠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왜 그 돈을 내가 줘요?”
“시끄럽다. 이게 다 누구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너 하나 희생하면 그룹 전체가 좋은 일이다.”
“미쳤어요? 내가 왜!”
이진상은 당장 난동이라도 부릴 것처럼 성질을 냈다.
나는 이진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광수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단,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이진상이 돈 떼먹고 날라버리면 나만 바보 되는 거 아닙니까.”
“…….”
“그러니, 연대 보증이 들어가야겠습니다.”
“지금 그 말은…….”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일가 전체가 이 자리에 다 모이신 것 같은데. 가족들끼리 보증 좀 서시죠.”
난데없이 보증을 서라는 말이 나오자, 고소한 표정으로 이진상을 바라보고 있던 가족들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싫으면 말던가요. 그냥 대왕 그룹에 소송해서 20억 달러 챙기면 그만이니까. 그룹 이미지 추락하면 그거 다시 끌어올리는데 또 돈이 들어갈 겁니다. 하지만 내가 그 꼴은 또 못 보죠. 내가 죽든 대왕이 죽든 둘 중의 하나는 망할 때까지 물고 뜯어 줄 테니까.”
으르릉거리는 목소리로 개싸움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비치자 이광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잠시 이야기 좀 하고 다시 진행하지.”
“오래는 못 기다립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광수 사장은 가족들을 한쪽으로 모았다.
“우리가 보증을 왜 서요? 나는 못 해요.”
이순희가 대뜸 고개를 내 저었다.
“나도 안됩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보증을.”
다들 절대 허락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다들 조용히 좀 해.”
이광수 사장은 땍땍거리는 가족들을 조용히 시키더니 천기득 실장을 불렀다.
“실장님.”
“말하게.”
“진상이 지분. 그거 담보로 잡을 수 있죠?”
“불가능은 아니지.”
이광수 사장의 입에서 진상이의 지분 이야기가 나오자, 가족들 모두 눈이 초롱초롱해졌다.
“다들 잘 들어. 이번 기회에 저 녀석 쳐낼 생각이다. 저 녀석이 집안에 들어온 뒤론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는걸. 모두 알고 있지?”
이광수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연대 보증 서자. 그리고 진상이 지분 우리가 먹는다. 싫으면 빠져도 좋다.”
“할게요.”
“누가 싫다고 했나.”
“공평하게 나누어야 합니다.”
이진상의 지주회사 지분을 털어먹자는 말이 나오자, 언제 반대를 했냐는 듯 다들 찬성으로 돌아섰다.
당연히 이진상은 인정할 수 없다고 발광을 했지만, 혼자서 아무리 떠들어봐야 귀담아듣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이진상.”
“네.”
“결정해라. 네가 거부한다면 나도 억지로 이 협상을 진행하지 않겠다. 하지만 너로 인해 그룹에 피해가 발생한다면 피해 금액을 기필코 받아낼 것이다. 그게 20억 달러가 됐든 아니면 그 이상이 됐든.”
“정말 이럴 겁니까?”
“너야말로 정신 차려. 너 하나 때문에 그룹 전체가 욕을 먹고 있어.”
“하!”
이진상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어떻게?”
“지분을 담보로 잡는 짓은 할 수 없습니다. 지분의 절반을 내놓죠.”
담보로 잡혔다가 문제가 생기면 지분 전체가 날아갈 수도 있다. 그걸 뻔히 아는데 담보 설정에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는 일이다.
“절반을?”
“네. 그러니. 3억 달러도 함께 나눠서 냅시다. 그러면 협조를 하죠.”
이진상의 제안에 이광수 사장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막말로 이진상이 배 째라고 나오면 이광수도 당장 방법이 없다.
지주회사가 막 만들어진 시점에 주가에 타격을 받으면 여러모로 골치 아픈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진상 앞으로 된 지분은 0.5%. 그중에 절반이라면 3억 달러 정도는 충분히 지급하고도 남는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낸 이광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그 정도는 해주마.”
이광수가 다시 협상 자리에 앉았다.
“연대 보증 받아들이지.”
“보증은 가족 간에도 서지 말라고 배웠는데, 대왕 그룹은 형제, 가족 간에 우애가 정말 깊군요.”
“고 대표에게 들을 소리는 아니군. 마저 진행하지.”
“그렇게 하죠. 아, 그리고 돈이 제때 들어오지 않는다면 이자를 받아야겠습니다.”
“이자?”
“한 달이든 석 달이든 날짜만 그렇다뿐이지. 어차피 내 돈 아닙니까.”
“…….”
“또 무슨 핑계를 대서 날짜를 미룰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럴 일 없을 거네.”
“그러니까요. 그럴 일 없으니까. 이자를 지급하겠다고 해도 문제없는 것 아닙니까.”
“좋아. 그건 우리가 양보하지.”
“10% 복리입니다.”
“뭐 얏?”
“주면 되잖아요. 약속 지킨다면서요.”
“그래도 그렇지! 10%에 복리라니. 사채를 써도…….”
“그러니까. 줄 생각이 없다 이 말이군요.”
“준다니까!”
“그럼 이자가 얼마가 됐든 간에 상관없지 않습니까. 나는 약속을 지키라고 강제사항을 둔 것뿐입니다.”
“이……!”
“욕이라도 하실 것 같은 얼굴입니다?”
“…….”
“그게 싫으시면 한 달 뒤에 일시금으로 입금한다고 약속을 하시던가요.”
이광수는 이를 악물었다.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 돈을 줘버리고 내쫓아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주머니 사정이 빈약하니 속으로 성질을 삭일 뿐이다.
“좋아. 대신 나도 조건이 있다.”
“네. 말씀하시죠. 협상은 주고받는 거라고 했으니.”
“모든 게 마무리되면 어떤 일이 있어도 대왕 그룹을 건드리지 마라.”
“어떤 일이 있어도? 뭡니까? 그 말도 안 되는 소리는. 때리면 조용히 처맞고 있어라. 그런 소립니까?”
“그런 의미가 아니라!”
“건드리지 않으면 나도 조용히 있죠. 그거면 됩니까?”
“끙. 그래!”
“좋습니다. 그럼 계약서와 차용증을 작성해 볼까요?”
나와 이광수 사이에 협의가 마무리되자, 곧바로 대왕 법무팀이 움직였다.
변호사 입회하에 공증까지 마무리되자 나는 악수를 청했다.
“앞으론 좋은 일로만 봤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일이든 뭐든. 다시는 보지 않았으면 좋겠군.”
“뭐. 그것도 나쁘지 않죠.”
나는 웃는 얼굴로 계약서와 차용증을 챙겼다.
그리고 바로 그때. 회의실 밖에 소란스러워졌다.
“무슨 일이야!”
안 그래도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 있던 이광수가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며 우르르 사람들이 밀려드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검찰청에서 나왔습니다.”
회의실 안에 있던 이씨 일가는 이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