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장. 아무튼, 당신은 X맨이 될 겁니다.
여자들이 이제 어떻게 하면 좋냐는 듯 김한올 회장을 바라봤다.
“크흠. 모두 나가들 있게. 고 대표와 따로 이야기를 나눠야 할 듯하니.”
김한올의 말에 두 여자가 조심조심 경호원들을 피해 방 밖으로 나갔다.
나 역시 이쯤 했으면 됐다는 듯 경호원들에게 고개를 끄덕이자, 고개를 숙여 보이곤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방안엔 나와 김 사장. 그리고 김한올 회장만 남겨졌다.
“크흠. 앉으시게.”
“거기 앉아서 이야기하실 겁니까?”
나는 방 중앙에 왕처럼 앉아 있는 김한올 회장을 띠껍게 바라봤다.
“그래. 대화는 마주 보면서 하는 게 좋겠지.”
김 회장은 상석에서 물러나 맞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제야 나도 자리를 잡고 김 회장을 바라봤다.
김만석 사장이 슬그머니 소파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걸치려 하자 내가 고개를 저었다.
김만석 사장은 움직이던 자세 그대로 멈춰서 김 회장을 바라봤다.
“자네는 서 있게나.”
“네. 회장님.”
“크흠. 나도 모르는 일이었네.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테이블 위에 널브러진 도청 장치와 영상장치를 툭툭 건드렸다.
“뭐. 그렇다고 해 두죠. 어차피 내 경호원들 시큐리티 영상저장장치에 다 찍혔으니까.”
“뭐?”
김 회장은 방금 방안에서 일어난 일이 모두 촬영됐다는 말에 표정이 굳어졌다.
“회장님이 설치한 게 아니라면서요. 그러면 문제없는 것 아닌가요?”
“크흠.”
김 회장이 불편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서로 친한 사이도 아닌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처음부터 친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일단 술이라도 한잔하시게.”
딱 봐도 엄청 비싸 보이는 술병을 집어 들더니 또도독 소리 나게 뚜껑을 땄고 나에게 잔을 내밀었다.
내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잔을 받자, 김 회장은 안도하는 눈빛으로 술을 따랐다.
“고 대표.”
“네. 회장님.”
“우리끼리 싸울 이유가 없지 않은가.”
“우리끼리라. 그건 회장님 생각이시겠죠. 멀쩡히 방송하다 말고 쫓겨날 뻔한 내 기분은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거기다 다음 날 방송을 보니 아주 막 가자는 것 같던데.”
“그건 내가 시킨 게 아닐세. 직원들이 맘대로…….”
“직원들이 위에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를 망상론자, 미치광이, 돈에 눈이 돌아 똥인지 된장인지도 모르는 인간으로 묘사를 했군요. 히야. 이거 믿어야 해. 말아야 해.”
김 회장이 변명이라도 늘어놓으려는지, 입을 여는데 내가 먼저 치고 들어갔다.
“그동안 사과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만, 제가 전염병 환자라도 되는 것처럼 계속 피하기만 하시더군요. 오늘 이 자리도 억지로 나오신 것 아닙니까.”
잔뜩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짜증을 늘어놓자, 김 회장의 시선이 김만석 사장 쪽으로 향했다.
“저 친구가…… 하아. 미안하네. 뭐라고 사과를 해야 할지 모르겠군.”
나는 김한올 회장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자신이 지시해놓고도 저러는 건지. 아니면 김만석이 과한 충성을 보이려다 이 사달을 낸 건진 모르겠지만, 일단 대화할 분위기는 만들어진 것 같다.
“듣자 하니. 대왕 천기득 씨가 이것저것 요청을 한 것 같던데. 맞습니까?”
“그래. 대왕 그룹의 천기득 실장의 요청이었네. 내가 그룹이니 뭐니 하면서 기업을 이끌고 있지만, 솔직히 대왕 앞에선 그냥 초가집이나 마찬가지야. 고 대표도 대왕에 다녔었으니 잘 알 것 아닌가.”
“좋습니다. 시작은 그랬다 치죠.”
나는 술잔을 들어 좌우로 흔들며 말을 이었다.
“내가 대왕과 소송 중이라는 거 알고 계시죠? 전 국민이 아는 일이니 모른다거나 잘 몰랐다거나 뭐 이런 답은 하지 않길 바랍니다.”
“물론이네.”
“그런데 왜 계속 그랬을까요. 언론이란 게 어느 한쪽 편만 들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김 사장! 어서 사과를 드리게!”
김 회장은 대뜸 김만석을 끌어들였다.
“아아, 김 사장님 사과는 복도에서 질리게 들었습니다.”
“그러셨나.”
“네. 그랬습니다.”
호박빛으로 찰랑이는 술잔을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마치 보석감정이라도 하듯 불빛에 비춰보던 나는 흥미를 잃었다는 듯 잔을 내려놨다.
“선택의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선택?”
“나와 계속 싸울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 친하게 지낼지 말입니다.”
“당연히 친하게 지내야지.”
김 회장은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심이시죠?”
“진심이네.”
“그럼 자잘한 부탁 몇 가지 드려도 문제가 없겠네요.”
“부탁?”
“네. 친하게 지내기로 했으니. 뭔가 기념이 될 만한 이벤트가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내 입에서 이벤트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김 회장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대왕을 공격하는 건…… 미안하네.”
김한올 회장은 솔직히 역부족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대왕을 공격해요?”
그런 짓을 뭐하러 하냐는 듯 되묻자 김 회장은 알쏭달쏭한 표정이 됐다.
“그럼 어떤 이벤트를 말하는 건지.”
“3일 뒤.”
“3일 뒤?”
“네. 정확히 3일 뒤에 대한민국에 떠들썩해질 역사적 이벤트를 준비 중입니다.”
“아! 고 대표가 새로운 사업이라도 발표를 하는 건가?”
“하하. 뭐 그 정도는 아니고.”
“그래. 그런 거라면 내가 도움을 줄 수 있겠지. 말씀해 보시게.”
“그래서 말인데, 대기발령 상태에 있는 한 국장을 복귀시켜주셨으면 합니다.”
“한 국장을?”
“솔직히 한 국장이 잘못한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날 두꺼비집 사건만 아니었다면 JTB 보도국은 최고의 시청률과 특종을 얻었을 겁니다. 일이 이렇게 된 건 다 회장님 때문입니다.”
“그건 말했다시피…… 대왕 그룹에서…….”
“이쪽엔 일방적인 거래는 없다고 들었습니다. 회장님도 뭔가 챙길 것이 있다 생각하니 대왕의 요청에 응했겠죠.”
“…….”
김 회장은 그와 관련해선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나중에 도움을 주겠다는 말만 들었지, 따로 받아먹거나 챙긴 것도 없다.
오히려 그날 사건 때문에 JTB 보도 신뢰도가 바닥에 떨어졌고, 방송국 프로그램에 보이콧 선언을 하는 연예인들까지 늘어나면서 보통 골치 아픈 게 아니다.
이런 상황에 고주몽과 싸움을 벌인다?
그 대단한 대왕 그룹도 전면전을 피하려고 수를 쓰는 것 같은데. 자신의 ST 미디어는 피똥을 싸고 그 위에 덜퍽! 주저앉아야 할지도 모른다.
“복귀시켜주시는 겁니까?”
“그… 그래. 그래야지. 솔직히 한 국장 잘못은 아니니까.”
“네. 그러셔야죠. 그래서 JTB의 신뢰도를 다시 쌓아 올려야 할 것 아닙니까.”
“허허. 그게 되겠나. 방송국 얼굴에 먹칠을 하다못해 똥칠을 한 상황인데. 거기다 외국 언론에서 수시로 나팔을 불어대니. 이러다 종합편성에서 제외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태산이네.”
김 회장은 연신 한숨을 쏟아냈다.
“그러게 말입니다. 회사 살리려면 발에 땀 나게 뛰어다녀야 하실 분이, 이런 거나 설치하고 계시니.”
나는 도청 장치와 영상장치를 다시 한번 툭툭 건드렸다.
“오, 오해라니까.”
김 회장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인정할 수 없다는 듯 끝까지 오해란 말만 반복했다.
여기서 삐끗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선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따지고 보면 저 때문에 일어난 일이기도 하고.”
“응?”
“그래서 그 이미지 내가 다시 살려줄 생각입니다. 한 국장 복귀시키시면 3일 뒤 이벤트. JTB에 독점으로 몰아드리죠.”
김 회장은 긴가 민가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자신이 고주몽 입장이라면 방송국에 불을 질러버려도 시원찮을 것 같은데. 오히려 이미지 쇄신에 도움을 주겠다니. 이걸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 표정이다.
“그런데 어떤 이벤트이기에 독점 방송을 원하는 건가?”
나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 김 회장을 노려봤다.
“진짜 알고 싶으세요?”
“?”
“오늘 들어야 한다면 목을 걸어야 하는데.”
“…….”
“이야기해 드려요?”
“아닐세. 한 국장 복귀를 요청하는 걸 보면 보도국 쪽 이벤트 같은데. 듣지 않는 게 좋겠네.”
“역시 그렇죠?”
김 회장은 목이 타는지 양주를 한 컵이나 들이켰다. 그런데 나에게 따라준 술이 아니라 먼저 마시고 있던 술이다.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입술을 훔치고 장난스럽게 입을 털었다.
“3일 내내 똥줄이 타느니. 그냥 그날 하루 뒤집어지고 말지.”
“하하하. 기획사로 회사를 일으키셔서 그런지 말씀을 참 재미있게 하시네요.”
나는 김 회장이 따라 주었던 술을 다시 불빛에 비춰봤다.
“술빛이 참 좋습니다.”
“그렇지. 그 술이 보통 술이 아니라네. 여기서도 아무나 마실 수 있는 술이 아니거든.”
“그러니까요. 아무나 마시면 안 되는 술이죠.”
나는 술잔을 내려놓고 지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리트머스 용지처럼 생긴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요즘엔 기술이 참 좋아요.”
내가 종이를 흔들자, 김 회장의 눈빛도 그에 맞춰 같이 흔들렸다.
“GHB 데이트 강간 약물. 일명 물뽕이라고 부른다죠? 보통은 남자가 여자에게 쓰는 거라고 들었는데, 요즘엔 여자가 남자에게도 쓴다고 하더라고요. 남자야 강간이 목적일 테고. 여자는 뭐하러 그런 짓을 하는 걸까요?”
“고, 고 대표. 오해네.”
“그럼요. 당연히 오해겠죠.”
“오해라니까.”
“알고 있다니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술잔 속으로 종이를 움직였다.
“고 대표! 원하는 게 뭔가. 그냥 말씀을 하시게!”
김 회장의 간절한 외침에 종이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생각 좀 해 봐도 될까요?”
“그럼. 얼마든지 하시게.”
“흠. 생각해 보니까 말입니다.”
나는 김 회장과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내가 힘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쳐 맞고도 조용히 있으면 다들 병신으로 보지 않을까요?”
“무슨! 감히 어떤 놈이 고 대표를.”
김 회장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거야 모르죠. 가진 건 돈밖에 없는 졸부새끼가 세상 무서운지 모르고 까불다가 ST 미디어에 존나게 얻어터졌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놈이 있다면 내가 요절을 내 놈세!”
“그러니까요. 그런데 왜 그러실까요.”
“내가? 뭘.”
“카메라에. 약물에. 여자까지. 너무 전형적이어서 심심할 정도긴 한데…….”
“오해라니까!”
“누가 뭐라고 합니까. 그냥 그렇다는 거죠.”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종이를 다시 잔 안으로 이동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회장님도 오해를 받고 사시느니. 결백을 증명하시는 게 좋을 것도 같고.”
“바… 방송국인가? 그걸 원하는 건가?”
김 회장은 지친 표정으로 ‘방송국’을 입에 담았다.
“에이. 누가 보면 제가 회장님을 협박이라도 하는지 알겠습니다.”
“…….”
김 회장은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내 입에 술을 쳐 넣고 부서져 널브러진 카메라를 되살려내고 싶다는 표정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걸 주워 담으려면 귀찮을 뻔했는데. 회장님이 발 빠르게 주식을 사 모으셨더라구요.”
“…….”
“뭐, 저야 귀찮은 일을 피해서 좋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대뜸 집어 가기엔 눈치도 좀 보이고. 그렇잖아요. 몇 대 맞았다고 덜컥 방송국을 가져가 버리면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겠어요. 안 그래도 JTB에서 아주 개새끼를 만들어주셨는데.”
“고 대표…….”
김 회장은 잔뜩 지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네. 회장님.”
“이쯤 하시게. 늙어서 힘이 드는군.”
“그럴까요?”
“그래.”
“좋습니다. 연장자께서 그렇게 원하시는데 억지를 부릴 수도 없고. 굳이 이런 거 확인해서 회장님 망신 드릴 수도 없는 일이고.”
나는 지갑 속으로 종이를 챙겨 넣었다.
“회장님.”
“말씀하시게.”
“이번뿐입니다.”
내 입에서 의외의 말이 흘러나왔다고 생각했는지 김 회장은 잠시 멍한 표정이 됐다.
“그 말은…….”
“앞으로 잘하세요. 괜히 여기저기 눈치 보지 마시고. 언론이 언론 같아야 언론이지 않습니까.”
“그, 그렇지.”
“또 삐끗하시면.”
나는 손가락으로 목을 그었다.
“방송국이 문제가 아닐 겁니다. 그룹 이름을 통째로 바꿔 달아야 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 말입니다.”
간판을 바꿔 달아야 한다는 말에 김 회장은 낯빛이 시커멓게 죽었다.
“3일 뒤. 한성희 국장. 생방송이어야 하고. 두꺼비집 근처엔 아무도 못 가게 잘 관리하세요.”
“그래. 그렇게 하겠네.”
김 회장은 진이 빠진 얼굴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믿겠습니다.”
내가 술잔을 툭 밀어버리자, 김 회장은 진이 빠진 상태에서도 ‘오해라니까’를 중얼거렸다.
“네. 오해였겠죠.”
앞으론 김 회장이 아니라 오해 생산기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살롱 밖으로 나온 나는 곧바로 박산호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대표님.
“덕분에 재미있는 시간 보냈습니다.”
― 김 회장이 예상을 벗어나지 못했나 보군요.
“네. 하지만 박 실장님 코치가 없었다면 포르노에 출현할 뻔했습니다.”
― 기획사 할 때부터 양아치처럼 굴더니, 나이를 먹고도 변하지 않는군요. 아무튼 재미있는 시간이셨다니 다행입니다.
“한 국장 복귀시키기로 했으니. 자료 잘 준비해주세요.”
― 물론입니다. 그런데 방송국은 그대로 두시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아직은 가격에 거품이 껴 있더라고요. 이벤트 끝나고 다시 흥정을 해볼 생각입니다.”
― 네. 대표님.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통화를 끝내고 차 쪽으로 이동을 하자, 어느새 연락을 받았는지 엘리스와 정은영이 대기를 하고 있다.
“일은 잘 마치셨어요.”
“그럼요. X맨 지령을 내리는 것뿐이라. 어려울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뭐라도 먹었습니까? 시간이 늦어서 배들 고플 텐데.”
“네. 간단히 요기했습니다.”
“잘했습니다. 가죠. 시간이 늦었는데 다들 퇴근해야죠.”
준비는 모두 끝났다.
3일 뒤, D데이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