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장. 리스펙트! 리얼리?
“정은영 씨.”
“네. 대리님.”
“그러니까. 여자가 운영하는 바가 아니라, 스트립쇼를 하는 바라는 뜻이었네요.”
룸살롱을 스트립 바라고 할 수는 없지만, 대충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비슷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왜 이런 곳에서 미팅을 가지는 거죠? 미디어 그룹의 회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엘리스는 이해가 되지 않는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충 예상이 되는 게 있기는 한데.”
“그게 뭐죠?”
“당연히 미인계죠.”
“마타하리?”
“네. 마타하리.”
여자를 이용해 보스의 관심을 끌려 한다는 말에 엘리스의 표정이 차갑게 변했다.
“비즈니스맨이 아니라 협잡꾼이었단 말이군요.”
“저기 엘리스 대리님.”
“네. 정은영 씨.”
“대표님에게 관심 있으신가요?”
“네?”
엘리스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이 커졌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엘리스의 격한 반응에 정은영도 눈이 커졌다.
“그런다고 소리를 지르십니까.”
“아니라니까.”
“그냥 아니라고 하면 되는 거지. 흥분을 하니까 더 이상하잖아요.”
“아닌데, 맞다고 하니까 그러는 거죠.”
“맞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만.”
“…….”
“정말 아닌 거죠?”
“아니라고요!”
“다행이다.”
“네?”
엘리스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정은영을 바라봤다.
“엘리스 대리님이 너무 아름다워서 그동안 기가 죽었었거든요.”
“네?”
엘리스는 더더욱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정은영을 바라봤다.
“저는 대표님을 오래 모시고 싶은데, 엘리스 대리님과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되면 옆에 있기가 어렵잖아요.”
“왓?”
“그래서 다행이라는 거죠. 헤헤.”
정은영은 해 맑은 미소로 엘리스를 바라봤다.
“저스트 모 먼트!”
“네. 대리님.”
“지금 정은영 씨가 보스를 좋아한다 뭐 그런 이야기?”
“당연하죠. 저에겐 생명의 은인이니까요.”
엘리스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다시 질문했다.
“남자, 여자.”
“네?”
“이성적으로 좋아하냐는 말입니다.”
“에이. 언감생심이죠.”
“언캉쌩씸?”
엘리스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정은영을 바라봤다.
“아. 사자성어로 말해버렸네요. 잠시만요.”
재빨리 스마트 폰을 꺼내 방금 한 말의 뜻을 보여줬다.
“오르지 못할 나무.”
의역된 내용이지만 뜻은 일맥상통이다.
“그 말은 오를 수 있을 것 같으면 남자로서 좋아하겠다는 말?”
엘리스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저기 엘리스 대리님.”
“네. 정은영 씨.”
“그게 왜 궁금하신 거죠?”
“비서실 수행 책임자로서…….”
“네. 무슨 말씀인지는 대충 알겠는데요. Please respect my privacy. 오케이?”
“와… 왓?”
당당하게 사생활 존중을 요구하는 정은영의 모습에 엘리스는 잠시 당황스러운 표정이 됐다.
“정은영 씨.”
“네. 대리님.”
“회사는 연애하는 곳이 아닙니다. 당신의 사적인 감정 역시 함부로 내색하지 말았으면 좋겠군요.”
엘리스의 말에 정은영은 잠시 눈을 껌뻑였다.
“아…….”
“아아?”
“내 말은 대표님을 남자로 좋아한다는 게 아니라, 멋지고 은혜롭고 그래서 존경하고 잘해드리고 싶다는 뜻입니다.”
“리스펙트?”
“네. 존경.”
정은영은 자신이 왜 그런 오해를 받았는지 모르겠다며 정색한 표정을 했고 되레 엘리스가 당황한 얼굴이 됐다.
“제가 볼 때는 엘리스 대리님이 더 조심을 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안 그런가요?”
“…….”
“업무에 사적인 감정을 섞는 것. 비서로서 실격이라고 배웠습니다.”
“내가 그럴 리 없잖아.”
“리얼리?”
“업무적 관계가 아니라면 남자와 함께 있는 것 자체를 싫어해. 알고나 그런 소리를 했으면 좋겠군.”
“에?”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듯. 정은영은 다시 한번 어리둥절한 표정이 됐다.
‘잠깐. 그럼 레즈비언이란 소린가?’
엘리스의 반응에 정은영은 또 다른 오해를 생산했다.
‘그러니까. 대표님이 아니라 나에게 관심이 있어서…….’
평범하고 정상적인 성 취향을 가진 정은영이다. 그런데 남자도 아니고 여자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 줄이야.
엘리스가 인형처럼 예쁘고 변호사에다가 능력 넘치는 커리우먼이라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외적인 관심사다.
그 이상은 아무리 씩씩하고 긍정적 성격의 정은영이라고 해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동성애라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정은영은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정은영은 엘리스와 적당히 거리를 벌렸다.
“아무튼 리스펙트라니까. 다행입니다. 서로 간에 얼굴 붉히는 일이 없도록 노력하죠.”
“네. 대리님. 저 역시 부탁드립니다. 서로 간에 사적인 감정이나 사생활은 건드리지 않기로 하죠.”
* * *
고급 룸살롱 ‘몽유(夢遊)’
지금은 찾기 어려운 과거 요정과 오늘날의 룸살롱의 장점만 따서 만들었다는 유흥 세계의 천상천.
과거 한때 이진상을 따라 입구까지는 와 봤지만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돌아가는 세상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던 곳.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젊고 아름다운 여인 두 명이 다소곳이 허리를 숙였다.
“환영합니다.”
경호원을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마치 내가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안내를 시작했다.
긴 복도를 따라 이동하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특별할 것도 없는 그저 그런 인테리어다.
“별 것 없네.”
얼마나 대단하게 꾸며놨기에 재벌 4세가 방앗간처럼 들락거리나 싶었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잘 꾸며놓은 호텔 정도?
밖에서 상상만 할 때는 뭔가 대단한 것처럼 느껴졌는데 내심 실망감이 들 정도다.
환몽(幻夢)이라 적힌 문 앞에 도착하자, 두 여자는 인사를 하고 뒤로 물러났다.
“안에서 기다리십니다.”
경호원이 문을 열려고 하자,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급히 손을 들어 막았다.
“경호원은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그래? 그럼 그냥 돌아가지.”
내가 망설임 없이 발길을 돌리자, 앞을 막아섰던 여자가 당황한 눈빛이 됐다.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싫습니다. 고생들 하세요.”
나는 머리 위로 손을 휘휘 내젓고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경호원들도 더 이상 볼일이 없다는 듯 곧바로 날 따라붙었다.
허둥지둥 어찌할 바를 모르던 여자가 급히 환몽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서 몇 마디 주고받는가 싶더니, 허겁지겁 나를 쫓아왔다.
“저희가 실례를 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을 열었다.
“당신이 여기 주인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그런데 왜 당신이 사과를 하죠? 당신은 이 가게의 매뉴얼 또는 저 방 안에 있는 사람의 지시를 따랐을 뿐인데.”
“…….”
“나는 당신에게 사과를 받을 이유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됩니다. 그러니 비켜주셨으면 좋겠는데.”
여자는 이런 경우가 처음인지 어떻게 반응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나는 길을 막고 있는 여자를 피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때 뒤쪽에서 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으악!’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바닥을 뒹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 보니, 처음 보는 남자 한 명이 개구리처럼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갑자기 달려들어서.”
흑인 경호원 한 명이 머쓱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아니요. 잘했어요. 경호원이 경호를 한 것뿐인데, 그걸 문제 삼으면 정작 필요할 땐 눈치 보느라 실수할 수도 있잖아요.”
“네. 보스.”
내가 다시 걸음을 옮기자, 바닥에 쓰러져 끙끙거리던 남자가 허겁지겁 몸을 일으켰다.
“대표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누구…… 신지?”
“JTB 사장 김만석입니다.”
“아, 두꺼비집 사장님.”
“아. 뭐. 네…….”
생방송 당시 두꺼비집을 내리겠다고 직접 행동에 나섰던 분이다.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직원들에게 제지당해 망신을 샀던 건 알고 있다.
“그런데 무슨 일이십니까?”
“회장님께서 기다리십니다.”
“그래서요?”
“네?”
“당신 쪽 회장이 기다리면 내가 아이쿠 실례했습니다 하면서 달려가야 합니까?”
“그… 그런 게 아니라. 경호원 문제라면 회장님께서 허락을 하신다고.”
김만석 사장은 난감한 얼굴로 연신 변명을 해댔다.
“이것 보세요. 김 사장님.”
“아. 네. 대표님.”
“내가 그쪽 회장 부하직원입니까?”
“네? 아니요. 그게 아니라…….”
“그런데 무슨 허락을 받아요. 됐다고 그러세요. ST인지 뭔지. 얼마나 단단한지 한 번 확인해 보겠다고 그렇게 전달하시면 됩니다.”
내가 언성을 높여 이야기하자 다른 방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김만석 사장은 더욱 당황한 표정이 됐다.
“부탁드립니다. 여기서 이러실 게 아니라… 일단 들어가셔서.”
“들어가면 뭐 있습니까?”
“그럼요. 회장님께서 대표님을 모시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확인해 보시면 알 겁니다.”
“김 사장님이 너무 애절하게 부탁을 하시니…….”
“네네. 부탁드립니다.”
김만석은 쓸개라도 내줄 듯 연신 허리를 구부렸다.
“연장자가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데, 무시하는 것도 그렇고. 좋습니다. 하지만 이게 마지막입니다.”
“물론입니다. 대표님 원하시는 대로 다 맞추겠습니다.”
내가 발길을 돌리자, 김만석 사장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마의 땀을 연신 훔쳐내면서 직접 방으로 안내를 했다.
내가 환몽 앞에 도착하자, 경호원들은 곧바로 도청 또는 몰카 등의 못된 짓이 준비돼 있진 않은지 확인에 나섰다.
― 삐삑!
― 삐삐삐!
― 삐디디디딕!
“도청 장치 두 개 확인.”
“영상 송출기 제거.”
“내시경 카메라 발견했습니다. 제거 완료.”
경호원들은 물 만난 물고기처럼 방안 구석구석을 신나게 훑고 다녔다.
어딜 가나 하는 짓이지만 이렇게 대놓고 도청 장치와 녹화장치, 송출장치가 발견된 곳은 없었기에 아주 신이 난 표정이다. 월척을 낚은 낚시꾼의 얼굴로 경호원들은 방안 구석구석까지 샅샅이 훑어버렸다.
물론 그와 반대로 경고음이 터져 나올 때마다 방안에 앉아 있던 사람은 똥 씹은 표정이 됐다. 고주몽 주연의 새끈하고 후끈한 야구 동영상 하나 건지나 싶었는데, 말짱 도루묵이 됐기 때문이다.
“확인 완료했습니다.”
“수고했어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산만 한 덩치의 외국인들이 우르르 방을 빠져나왔다.
“김 사장님?”
“에? 에…….”
순식간에 도청 장치와 영상장치가 쏟아져 나오자, 김만석 사장은 반쯤 넋이 나가버렸다.
“아까 나에게 뭐라고 하셨죠? 더는 문제가 없을 거라고. 나도 한 번만 더 속아 준다고 했죠.”
“저,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정말입니다.”
김만석 사장은 방안으로 달려 들어가더니 ST 미디어 김한올 회장을 향해 하소연하듯 입을 열었다.
“회장님. 저는 진짜 모르는 일입니다. 믿어 주십시오!”
나는 김만석 사장의 행동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바본가? 당연히 회장이 설치를 한 거잖아.”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환몽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을 쓱 둘러보는데, 딱 봐도 회장처럼 보이는 노인네가 중앙에 있고, 그 옆으로 인물값 하게 생긴 여자들 두 명이 앉아 있다.
회장은 물론이고 옆에 있는 여자들까지 모두 핏기가 쫙 빠져나간 사람처럼 창백하기 그지없다. 험악하게 생긴 외국인들이 우르르 달려 들어와 사방을 헤집고 다니니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다.
“김한올 회장님?”
“고 대표…… 이건…….”
“됐습니다. 들어보나 마나.”
김한올 회장은 옆에 있는 여자들에게 뭐 하고 있냐는 듯 거칠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놀라서 핏기 가신 얼굴로 얼떨떨하게 앉아 있던 두 여자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다. 당연히 내 경호원들이 그걸 두고 볼 리 없다.
김만석을 한 방에 내 던져버렸던 흑인 경호원과 갱스터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험악하게 생긴 아이리쉬 혈통의 백인 경호원이 앞을 가로막았다.
“꺅!”
“아악!”
두 여자는 얼음이라도 된 양 움직이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참고로 말씀드리죠. 누가 됐든 제 허락 없이는 가까이 다가설 수 없습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또는 호기심에 모험을 해보고 싶다면 딱히 말리진 않겠습니다만, 유경험자이신 김 사장님의 조언을 챙겨 듣기 바랍니다.”
내가 경고 아닌 경고를 날리자, 김만석 사장이 목이 부러져라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