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글로벌 벼락부자, 역대급 깽판을 치다-56화 (57/224)

056장. I know.

뒷문을 이용해 식당을 나서자, 주변을 감시하고 있던 경호팀이 곧바로 차량을 준비했다.

차에 올라타자, 곧바로 다음 목적지로 이동을 시작했다.

“응? 운전을 왜…….”

조수석에 엘리스가 앉아 있는 거야 일상이니 그러려니 했지만, 운전대를 잡은 사람이 정은영인 것은 생각지 못한 일이다.

“우리 쪽 사람은 이쪽 지리에 익숙지가 않아서 잠시 그렇게 됐습니다.”

엘리스의 말에 정은영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엘리스 대리님. 우리 쪽 사람이란 게 무슨 뜻이죠?”

정은영이 더듬거리는 영어로 질문을 던졌다.

“아.”

엘리스는 자신의 말실수를 곧바로 알아차렸다.

나는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엘리스야 습관처럼 ‘미국’ 팀을 이야기 한 것이지만 이미 ‘우리’ 사람이 된 정은영 입장에선 굉장히 불쾌한 말로 들릴 법했다.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사과하죠.”

엘리스가 곧바로 사과했다.

정은영은 마지못해 사과를 받아들였지만, 운전하는 내내 말이 없어졌다.

내 쪽에 합류한 지 한 달이 채 되지 않았지만, 정은영은 그야말로 ‘열심히’가 뭔지를 증명해 내는 중이다.

물론 그렇다고 엘리스가 대충대충 한다는 뜻은 아니다.

엘리스 역시 노력한다고 스스로 약속한 만큼 ‘노력’을 하고 있지만, 정은영에 비하면 한 수 딸리는 느낌이랄까.

둘 사이에 차이를 굳이 이야기해야 한다면 언어를 들 수 있다.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이 다 미국에서 온 탓에 거의 모든 대화가 영어로 진행이 된다.

나에게 합류한 정은영이 가장 먼저 느낀 괴리감 또는 소외감은 바로 영어였다.

정은영 역시 한국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은 만큼 오랜 세월 영어에 시달려왔지만, 다들 알지 않은가.

오래 공부했다고 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정은영도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최소한의 소통을 이뤄낸 것이다. 아직 못 알아듣는 말도 많고 발음도 어설프지만 말이다.

그런 점에 있어서 엘리스는 한국어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내가 한국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고 한국에서 할 일도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데 적극적이지 않다고 해야 할까.

물론 한국어를 강요할 생각은 없다. 어느 날 갑자기 다른 나라 말을 배운다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 말이다.

그저 두 사람 사이에 ‘열심히’와 ‘노력’의 정도를 나누어 생각하다 보니 그저 눈에 띄었을 뿐이랄까.

“은영 씨.”

“네. 대표님.”

“언어 때문에 힘들죠.”

“아닙니다.”

정은영은 영어 때문에 문제를 만들지 않겠다는 듯 강하게 부정을 했다.

“천천히 해요. 언어라는 게 단숨에 느는 것도 아니고.”

“하지만 대표님은 능숙하게 사용하지 않으십니까.”

“나야 뭐.”

언젠가는 쓸 일이 있겠지 싶어서 영어는 미친놈처럼 공부한 탓이다.

“대표님이 이진상 상무에게 어떤 일을 당했는지 모두 들었습니다.”

응? 갑자기 그 이야기가 왜 나와.

“하지만 그 고된 시간을 보내면서도…… 영어를 능숙하게 사용할 정도로 공부를 하셨지 않습니까.”

어? 아니. 그건 아니고.

“반성했습니다.”

어라? 그게 반성할 일은 아니잖아. 천천히 해. 천천히. 누가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한 달! 지켜봐 주십시오.”

“어. 그래요.”

은근히 박력 넘치는 정은영의 말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여버렸다.

내가 정은영과 대화를 나누자 엘리스가 궁금한 표정으로 힐끗거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엘리스.”

“네. 보스.”

“궁금해?”

“아닙니다. 그저 알아둬야 할 내용이 있나 싶어서.”

“그런 거 없었어. 그냥 정은영 씨랑 일상적인 대화를 나눈 것뿐이야.”

“아. 네. 일상적인…….”

엘리스는 대충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정면을 바라봤다.

“은영 씨.”

“네.”

“동생들은 어때요?”

“아! 너무 잘 지내고 있습니다. 모든 게 다 대표님 덕분입니다.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반지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정은영 가족은 회사에서 지원해 준 아파트로 이사를 한 상태다.

“뭐든 좋으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고민하지 말고 이야기해요.”

“지금도 충분합니다.”

정은영은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며 연신 웃음을 지었다.

잠시 둘 사이에 대화가 끊어지자 엘리스가 끼어들었다.

“보스.”

“어. 엘리스.”

“도착까지 20분 남았습니다.”

“아, 그래?”

“네. 미팅 전에 간단히 브리핑이라도 해 드릴까요?”

“별로.”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며 고개를 흔들자, 엘리스가 다시 말을 걸었다.

“보스.”

“어.”

“18분 남았습니다.”

“엘리스.”

“네.”

“말 안 해도 내비게이션에서 이야기 해주고 있다.”

“아. 네…….”

엘리스는 내비게이션을 힐끔 쳐다보더니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런 엘리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엘리스.”

“네. 보스!”

“살살 이야기해도 된다.”

“아. 네.”

“브리핑할 것 있으면 해 줘. 멍청이 있는 것보단 뭐라도 듣다 보면 도움이 될 것도 같고.”

“물론입니다.”

엘리스는 재빨리 태블릿을 켜더니 준비한 파일을 뒷좌석 화면에 연동시켰다.

“TS 미디어 그룹은 24년 전 연예기획사를 시작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응. 알아.”

“네?”

“아니야. 계속해.”

“네. 작곡가 그룹을 만들어 시장에 진출. 3년 만에 한국 음악 시장을 장악했습니다.”

“그것도 알아.”

“…….”

“왜?”

“아닙니다. 외주 스튜디오를 만들어 드라마 제작에 진출을 했고…….”

엘리스는 자신이 조사한 TS 미디어의 자료를 쉼 없이 설명했다.

그런데 내 입장에선 아니, 한국 사람이라면 다 알만한 내용들이다.

뻔한 내용을 듣고 있다 보니 나도 모르게 졸음이 밀려들었다.

“그래서 케이블에 진출한…… 보스?”

“…….”

“하아.”

엘리스는 주몽의 잠든 모습을 보며 답답한 표정으로 한 숨을 내쉬었다.

나름 열심히 조사해 왔는데, 몇 분 듣지도 않고 잠이 들 줄이야. 내심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엘리스 대리님.”

“네. 정은영 씨.”

“방금 보고하신 내용.”

“네.”

“한국 사람이라면 다들 아는 내용입니다.”

“네?”

“TS 미디어 그룹 말입니다. 한국 사람이라면 다 아는 내용이라고요.”

“…….”

엘리스가 잠시 말이 없어졌다.

“엘리스 대리님?”

“정은영 씨. 내가 보고를 할 때 아까 보스가 뭐라고 했었죠?”

“네?”

“아라? 그거 또? 뭐 이런 말이었는데.”

이번엔 정은영이 잠시 말이 없어졌다.

“정은영 씨?”

“I know.”

“I know…….”

엘리스는 자신이 조사한 내용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태블릿 화면을 꺼버렸다.

주몽이 잠이 들고 정은영과 엘리스가 동시에 입을 다물자 차 안에는 내비게이션 안내음만 종종 흘러나왔다.

“정은영 씨.”

“네.”

“보스는 어떤 사람. 아, 한국은 어떤… 아니. 한국 사람은…….”

엘리스는 자꾸만 말이 꼬이자 미간을 찌푸렸다.

“한국이란 나라와 한국 사람에 대해 알고 싶다는 뜻이죠?”

“네. 맞습니다.”

엘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 드릴까요?”

“어디서부터?”

“미국의 역사는 200년 정도 됐죠?”

“네.”

“한국은 5천 년 정도 됐어요.”

“왓?”

엘리스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정은영을 바라봤다.

“한국에 대해서 알려면 역사적 배경을 빼놓을 수가 없거든요.”

“아. 네. 이야기해 봐요.”

“그런데 어렵습니다.”

“한국의 역사가?”

“아니요. 영어 실력이 부족해서. 설명이.”

“…….”

엘리스는 잠시 어이없는 눈빛으로 정은영을 바라봤다. 그러면 애초에 설명이 어렵다고 할 것이지 오천 년이니 뭐니 역사 이야기를 꺼낼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엘리스 대리님이 한국어를 공부하거나, 아니면 내가 영어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합니다.”

엘리스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 됐다.

“한국어. 어렵나요?”

“한국인이 영어를 배우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 이해했어요.”

정은영은 한국어와 영어가 완전히 반대편에 있는 언어라는 뜻으로 한 말이지만, 엘리스는 정은영이 빠르게 익숙해진 시간을 생각했다.

한 달도 되지 않아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라면 자신도 그 안에 한국어를 익힐 수 있다 생각했다.

“그 정도면 나도 어렵지 않게 배우겠네요.”

“네?”

정은영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엘리스를 바라봤다.

“교재를 구해줘요. 보스와 함께 움직이려면 한국어 배워두는 게 좋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한국에 온 외국인들이 어학원에서 반년 정도는 고생해야 더듬더듬 듣고 말하기가 가능하다고 들었다.

하는 일도 많은 엘리스가 그 정도 습득을 하려면 최소 1년은 걸릴 것이다.

이걸 설명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하는데, 내비게이션에서 일산에 도착했다는 안내음이 흘러나왔다.

“대표님 깨워야 할 것 같습니다.”

엘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주몽의 어깨를 가볍게 흔들었다.

“보스. 일어나셔야 합니다.”

“음…….”

“보스.”

“어. 도착했어?”

“도착 예정입니다.”

“그래. 깜빡 잠이 들었네.”

나는 몸을 추스르고 자세를 바로 했다.

창밖을 내다보니 일산 시가지가 눈에 들어왔다.

잠시 뒤 차가 멈춰 섰다. 경호 차량에서 경호원들의 먼저 내리고 잠시 뒤 차 문이 열렸다.

처음 한국에 들어왔을 땐, 로버트가 과잉보호를 하다시피 해도 그냥 넘어갔지만, 오히려 그게 사람들의 시선을 끌자 지금은 방법을 바꿨다.

근접 경호는 줄이고 주변 경호를 늘리는 형태로 사람들 눈에 띄지 않게 한 것이다.

덕분에 요란스럽지 않게 밖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됐다.

“약속 시간에 늦진 않았지?”

“네. 대표님.”

정은영이 건물을 올려다보며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정은영의 모습에 엘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죠?”

“아. 그러니까. 여기는…….”

정은영은 잠시 단어를 떠올리다가 스마트 폰을 꺼내 들었다. 단어를 검색해 엘리스에게 내밀었다.

“hostess bar?”

“네.”

엘리스는 뭐가 문제냐는 듯 정은영을 바라봤다.

여자가 운영하는 바(bar) 정도야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 어느 곳에서나 흔하다.

“그러니까. 여기는.”

정은영이 부족한 영어로 어떻게든 설명을 하려고 하는데 엘리스가 ‘나중에’ 하더니 주몽을 따라나섰다.

정은영은 잠시 난감한 표정을 짓다가 엘리스를 쫓아 움직였다.

내가 경호원들과 엘리베이터에 오르는데, 엘리스와 정은영이 껌딱지처럼 달라붙었다.

“엘리스.”

“네. 보스.”

“밖에서 기다려.”

“네?”

“여긴 남자들이 술 마시는 곳이야.”

“…….”

“스트립바 같은 곳이라고.”

“그래서요?”

“어?”

“스트립쇼 보려고 오신 건 아니지 않습니까.”

“어. 그거야 그렇지.”

“설사 스트립쇼를 보러 왔다고 해도 제가 가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말입니다. 남자 몸을 봐야 한다면 불쾌한 일이지만, 여자가 여자를 보는 건 별 다를 게 없지 않습니까.”

딱히 틀린 말은 아닌데, 그렇다고 맞는 말도 아니다. 그리고 스트립바를 예로 들었을 뿐이지 그곳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다. 거기다 오늘 약속은 그다지 유쾌한 만남도 아니다. 함께 들어가 봤자, 불쾌감만 늘어날 것이다.

“제이코가 없을 땐 제가 수행비서이고 책임비서입니다.”

이럴 땐 열심히 일하지 않아도 되는데, 쓸데없이 열심히 하네.

“여자 입장에서 불편할 수도 있으니까 그렇지. 차에서 기다려.”

내가 명령조로 이야기하자, 엘리스는 조용히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초창기 같으면 이것저것 이유를 가져다 붙이며 고집을 피웠을 테지만, 불합리한 지시가 아닐 경우엔 내 의견을 최대한 따르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사이에서 눈치를 보던 정은영 역시 엘리스를 따라 엘리베이터 밖으로 이동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야. 그리고 정은영 씨.”

“네. 대표님.”

“그냥 기다리지 말고 엘리스와 근처에서 간단하게 야식이라도 먹어요. 퇴근할 시간이 한 참 지났는데 여기까지 오게 해서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수행을 해야죠.”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주몽의 모습이 사라지자 엘리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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