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5장. 전격 X맨 작전! - 4
“제가 원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그것만 지켜주신다면 경영권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실 겁니다.”
“두 가지라면 어떤.”
“다들 아시는 것처럼 나는 대왕 사주 일가와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내 말에 정진호와 한중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천기득은 묵묵히 술잔만 기울일 뿐이다.
“왜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도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네. 대충 전해 듣기는 했습니다.”
“첫 번째 조건입니다. 여러분은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주변 관리 좀 잘해주세요. 회사 직원이 노예는 아니지 않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저만 그런 기분을 느끼는 건 아니겠네요. 천 실장님도 그러셨지만, 두 분도 배신감이 장난 아니라고 하던데.”
평생을 바쳐 일했지만, 세 사람 모두 지주회사 설립이 끝나면 토사구팽당할 처지에 있다. 단순히 배신감만으론 설명이 되지 않을 것이다.
“…….”
정진호와 한중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번째. 돈 필요하면 나에게 말해요. 엉뚱한 사람 붙잡고 하소연하지 마시고. 그것만 지켜주시면 두 분의 경영권은 이모탈 급으로 보장해 드리죠.”
말을 마친 나는 젓가락을 들고 두부김치를 집어 올렸다. 막 입에 넣으려는 찰나, 한중근이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 그 두 가지만 지키면 되는 겁니까?”
“네. 그 두 가지면 됩니다. 아, 그렇다고 회사를 개판으로 운영해도 된다는 건 아닙니다. 그건 알고 계시죠?”
“당연합니다. 더는 무능한 이들 손에 회사가 망가지는 걸 볼 수 없어서 나선 겁니다. 절대 그런 일은 없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나는 두부김치를 우물거리며 그러면 됐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천기득 실장이 내 잔에 술을 채우더니 질문을 던졌다.
“고 대표.”
“네. 실장님.”
“그래서 지주회사 지분은 얼마나 챙겨 줄 건가?”
내심 욕심은 나더라도 지분 이야기는 꺼내지 못하고 있던 두 사람이 기대감 어린 눈빛이 됐다.
나는 손가락을 하나 들어 올렸다.
“1퍼센트.”
천기득 역시 1%는 예상치 못한 수치였는지 살짝 놀라는 눈빛이 됐다.
대왕의 지주회사가 완성되면 말 그대로 대왕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힘을 얻게 된다.
말이 1%지. 시가총액을 기준으로 따지면 4조가 넘는 돈이다.
선진 그룹의 정진호는 육천오백억. 진영 그룹의 한중근은 삼천이백억 이란 거금이 지분으로 주어지는 것이다.
물론 실질 가치는 그에 미치지 못하겠지만, 머릿속에 휘리릭 지나가는 대략적인 금액만으로도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일 퍼센트를 보장해 주시는 겁니까?”
“네.”
“저… 정말 그 지분을 주시는 겁니까?”
한중근의 목소리가 살짝 떨림을 일으켰다.
세 사람 모두 그룹 내(內) 실질 지분은 한 톨도 없이 말 그대로 월급쟁이 생활을 반복해 왔다. 자신들이 예상했던 것을 훌쩍 뛰어넘는 포상이 주어지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두 가지요?”
“네. 방금 말한 것처럼 지분 1%를 받는 방법과 0.2% 지분을 받고 5% 지분의 배당금을 받는 방법이죠.”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지분을 가지고 싶다면 1%를 줄 것이고. 0.2% 지분을 받는다면 5% 수준의 배당금을 지급하겠다는 겁니다. 은퇴할 때까지. 매년.”
“아!”
평소라면 단번에 알아들었을 말을 워낙 정신이 없다 보니 재차 확인하고 나서야 이해를 했다.
“외국과 달리 한국은 배당금 주는데 굉장히 인색하더라고요. 나는 그런 관행도 고쳤으면 합니다. 아, 배당금 주자고 회사 운영에 손해를 보라는 말은 아닙니다. 적당히 줘도 될 때 주라는 말이니까.”
기업을 손에 넣으면 뭘 하겠는가.
배당금 한 푼 받지 못하고 손가락만 빨아야 한다면 그거야말로 멍청한 짓이다.
이것도 투자라면 투자니 적정 수준의 이득은 챙겨 먹을 생각이다.
물론 대한민국 대기업 세 개를 집어삼켰다는 만족감은 별개로 말이다.
“아무튼 어떤 결정을 내리든 상관없습니다.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리겠습니다.”
“내 생각보다 후한 포상이군.”
천기득 실장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후하기는요. 대한민국 재계 1위, 8위, 13위 그룹을 제 주머니에 넣어주신 분들인데요. 마음 같아선 더 해 드리고 싶지만, 제 자금관리인이 거기까지가 맥시멈이라네요. 사실 천 실장님은 0.5%가 적당하다고 이야기가 나왔는데. 내가 반대했습니다. 무슨 일이든 선착순이란 게 있으니까요. 이번 일에 최대 공신은 누가 뭐래도 천기득 실장님 아닙니까.”
내 말에 천기득 실장이 허허거리며 웃음을 보였다.
나는 비어 있는 세 사람 잔에 술을 채웠다.
“계약서는 오면서 챙겨왔어요. 어떤 선택을 하든. 지금 이 자리에서 마무리될 겁니다. 아, 지분을 파실 경우엔 제가 1순위입니다. 엄한 놈에게 팔면 화낼 겁니다.”
“물론입니다. 계약서에 명시하겠습니다.”
정진호가 당연한 일이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정하시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할까요? 편하게 술을 마시고 싶은데.”
천기득이 먼저 입을 열었다.
“1%”
“콜.”
네가 콜사인을 외치자, 안쪽에서 제이코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즉각 지분계약서가 천기득 앞에 놓였다.
“통화만 하고 처음 뵙겠습니다. 제이코입니다.”
“아, 제이코 대표.”
천기득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이코와 악수를 나눴다.
서로 마주 보고 웃음을 나누는데, 전화 통화를 하면서 꽤나 친해진 모양이다.
“두 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도 1%입니다.”
정진호도 천기득과 같은 선택을 했다. 나는 한중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는… 배당금을 받겠습니다.”
나는 한중근의 선택에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세 사람 중에 가장 규모가 작은 그룹이다. 앞으로야 모를 일이지만, 배당금도 그룹의 성장 규모에서 결정을 될 것이다.
삼천억 넘는 돈을 포기하고 육백억 가량의 지분에 배당금이라.
나는 흥미로운 눈길로 한중근을 바라봤다.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지금은 비록 13위지만, 진영그룹은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많은 기업입니다. 저는 미래를 선택하겠습니다.”
한중근의 말에 정진호와 천기득의 눈 끝이 꿈틀거렸다.
미래 일이야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은연중 대왕이나 선진보다 더 큰 기업으로 커나갈 거라는 선전포고처럼 들린 것이다.
나는 한중근의 선택에 고개를 끄덕였다.
“콜!”
선택은 각자의 몫이라고 했으니, 결정에 따라주면 그만이다.
정진호와 한중근 앞에도 계약서가 놓였다.
“시원하게 사인하시고 성공을 위해 건배 한번 하죠.”
내 말에 세 사람은 거침없이 사인을 마쳤다.
제이코는 각각 날인된 계약서를 나누어 주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건배할까요?”
내가 잔을 들어 올리자, 세 사람도 각각 잔을 들었다.
“시원하게 해치웁시다.”
“시원하게!”
“해치웁시다!”
“위하여!”
우리는 시원하게 술을 들이켜고 두부김치를 안주 삼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그리고 깜짝 놀란 사실 하나.
천기득 실장은 물론이고 정진호 실장과 한중근 상무까지. 세 사람 모두 서자이거나 서자 취급도 받지 못하는 기구한 인생을 살아왔다는 점이다.
특히 천기득 실장은 이씨 일가와 아예 성이 달라서 그런 기미를 알아차리지 못했기에 더욱 놀랐다.
“실장님도 사주 일가였다는 말입니까?”
“사주 일가라는 말은 빼주시게. 나는 잊힌 사람이나 마찬가지니. 호적은 둘째치고 성마저 물려받지 못했으니까.”
“재벌가에 출생의 비밀이 많다고는 들어왔지만, 솔직히 놀랐습니다. 잠깐만. 이거 이러면 이번 작전이 성공했을 때…….”
내가 말을 하다 말고 말끝을 흐리자 천기득이 피식 웃음을 보였다.
“무슨 소리를 할지 나도 알고 있네. 서자의 역습이니 반란이니 하는 말들이 나오겠지.”
“네. 아무래도 그렇게 될 것 같네요.”
“무슨 상관인가. 없는 소리를 하는 것도 아니고. 떠들고 싶은 대로 떠들라고 놔두게. 아, 하긴 고 대표야 딱히 신경 쓸 일도 없겠군.”
“뭐. 저야. 그렇죠. 그리고 그게 더 좋고 말입니다.”
이번 작전을 위해 투입되는 돈은 페이퍼 컴퍼니 수백 개로 쪼개져 주인을 확인하기 어렵게 만들어놨다.
겉모습만 본다면 외국계 투자회사 정도로 보일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이번 작전을 입안하고 실행한 나는 철저히 감춰져 있다는 뜻이다.
밖으로 드러나 봤자, 경계만 사고 소란만 일어날 테니 그저 정체 모를 소유자로 남아 있는 게 최선이다.
경영일선에 나서야 한다면 모르겠지만, 괜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봤자 귀찮기만 할 뿐이다.
“고 대표. 아니, 총괄회장님이라고 해야겠군.”
“아이고. 그냥 고 대표라고 해주십시오.”
나는 급히 손을 흔들었지만, 천 실장의 말에 정 실장과 한 상무까지 총괄회장이라는 말을 입에 담았다.
천기득은 빈 잔을 채우더니 다시 건배를 제의했다.
“총괄회장님 미래에 건투를 빕니다.”
“건투를 빕니다!”
천기득의 선창에 두 사람도 목소리를 높였다.
또래들끼리 만남이라면 그저 장난이려니 하겠지만, 노인 두 명과 중년 사내가 목소리를 높이니 민망함이 밀려들었다. 나는 머쓱한 얼굴로 건배를 했다.
“세 분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몇 순배 술잔이 돌고 나자 D데이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자료는 모두 잘 준비하고 있지?”
천기득의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시작할 걸세. 일단 들어가고 나면 단숨에 빠져나오지 못하게 총력을 다 해야 해.”
“물론입니다. 그런데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일을 맡겨야 할 텐데 말입니다.”
정진호가 검찰 쪽 인사를 들먹였다.
“그건 걱정하지 말게. 내가 죽으면 같이 죽어야 하는 인사로 선정을 했으니. 총장 자리에 올라서기 위해서라도 사력을 다할걸세. 이번 비자금 사건은 그에게도 훈장이 되어줄 테니까.”
“그럼 다행입니다.”
정진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한중근이 입을 열었다.
“일이 터지기 전에 각자 쥐고 있는 지분을 지주회사로 넘기는 사인을 받을 겁니다. 다들 자신들 돈이 지주회사에 들어갔다고 생각할 테니. 신나서 사인을 하겠죠.”
“자금 세탁한다고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었다고 했으니, 다들 의심하지 못하겠지. 당연히 자신들 돈으로 만들어진 회사라고 생각할 거야.”
천기득이 일이 재미있게 돌아간다는 듯 큭큭 웃음을 흘렸다.
“네. 제 돈으로 만들어진 회사죠.”
내가 세 사람 대화에 살짝 끼어들었다.
“하하하. 네. 총괄회장님 돈입니다. 하지만 우리 세 사람을 제외하곤 누구도 모르지 않습니까.”
“거기다. 비자금을 세탁해 각각 주인들에게 돌려준다고 했으니. 다들 기대를 하고 있을 텐데 말입니다. 일이 터지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해 죽겠습니다.”
정진호가 기대 어린 눈빛으로 웃음을 보였다.
“검찰에서 돈 주인을 확인하는 것도 누워서 식은 죽 먹기겠죠. 돈에 이름표까지 붙여 놨으니. 빠져나갈 구멍이 없을 겁니다.”
비자금이든 빚낸 돈이든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어 지주회사에 투자하는 형태로 작전을 설계했다. 하지만 그 돈은 지주회사를 만드는데 십 원짜리 한 장 쓰이지 않고 불법 자금, 외환관리법 위반의 증거물이 되어 돈 주인의 숨통을 졸라맬 것이다.
지주회사에 들어가 지분을 움켜쥐는 돈은 오직 나 고주몽의 돈뿐이니 작전이 끝나고 나면 세 개 그룹 모두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이다.
희미한 불빛 아래 모여서 작당모의를 하고 있다 보니, 우리가 악당이 된 느낌이다.
조만간 뒤통수 얻어맞고 길바닥에 나앉을 쪽에선 악당 정도가 아니라 악마라고 불러도 부족하겠지만.
“작업이 마무리되고 나면 다들 아시죠?”
내 질문에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곶감 빼 먹듯 회삿돈 가져다 쓴 책임을 물어야죠. 비자금은 비자금대로 날리고 남은 재산은 손해배상을 걸어 모조리 털어버릴 생각입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길게는 30년. 짧게는 10년간의 비리입니다.”
한중근은 그동안 맺힌 게 많았는지 눈알을 부라렸다.
“네. 반격의 기회 따위는 바보들이나 주는 겁니다. 손을 대지 않았다면 모를까. 끝도 깔끔하게 마무리 짓죠.”
마음 같아선 좀 더 술을 나누고 싶었지만, 이 일 말고도 또 따로 준비하는 작전이 있었기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이코.”
“네. 보스.”
“먼저 갈 테니까. D데이 자금 운용에 대해서 확실히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와요.”
“걱정 마십시오.”
“먼저 일어나야겠습니다.”
“이거 아쉬워서…….”
정진호 실장이 아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작전 끝나고 나면. 그땐 이렇게 숨어서 말고 밝은 곳에서 밤새도록 마시면 되죠.”
“하하하. 네. 그렇게 해야죠.”
“천 실장님. 저 가 볼게요.”
“그래. 고 대표. 덕분에 이 친구들도 불안감이 가신 것 같으니.”
“아니 형님. 내가 언제 불안해했다고.”
정진호 실장은 절대 그런 일 없었다며 손사래를 쳤다.
나는 정 실장의 장난스러운 모습에 가볍게 웃어준 뒤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럼 다음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