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글로벌 벼락부자, 역대급 깽판을 치다-54화 (55/224)

054장. 전격 X맨 작전! - 3

재계 8위 선진 그룹 실무책임자이자 총괄비서직을 가지고 있는 정진호가 ‘CLOSE’ 명패가 달린 변두리 조그마한 일식집에 발을 들였다.

비밀스러운 회동이기에 회사 차량은 물론이고 개인 차량마저 타지 않았다.

오랜만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다 보니 익숙지 않아 불편한 점도 있었지만, 준비 중인 일을 생각하면 그보다 더한 불편도 참아야 할 시간이다.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천기득이 아는 척을 했다.

“왔는가.”

“먼저 와 계셨군요. 제가 늦었습니다.”

선진 그룹의 총괄비서 정진호가 천기득에게 인사를 했다.

“늦기는. 먼저 와 있었을 뿐이네.”

지금이야 밖에서 애를 만드는 경우가 드물지만, 이태주 회장도 그렇고 옛사람들은 배다른 형제들이 꽤 많은 편이다.

그중엔 호적에 올려 자식으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고 정진호가 몸담은 선진 그룹 회장처럼 피를 나눈 형제라도 남처럼 대하는 이도 존재했다.

문제는 그런 이들 중에 적장자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이들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선진 그룹의 총괄비서를 맡은 정진호도 바로 그런 경우다.

누구보다 더 열심히 그룹을 위해 일하고 희생했지만, 정작 손에 쥐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는 남보다 못한 존재.

조카들의 후계 구도가 마무리되면 도태되거나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던 정진호다.

그런 그에게 갑작스레 천기득의 연락이 날아들었다. 죽기 전에 세상을 바꿔보지 않겠냐고.

고민 끝에 참여를 결정했고, 드디어 그 결실을 눈앞에 둔 상태다.

정진호가 자리를 잡고 앉는 사이 또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재계 13위 진영 그룹의 한중근 상무.

그 역시 정진호와 같은 처지에 있었고 천기득의 제안을 받아들여 이 자리에 왔다.

주몽이 말했던 것처럼 동병상련에 이심전심인 사람들끼리 모인 것이다.

“다들 와 계셨군요.”

“나도 방금 전에 왔네. 어서 오게나.”

천기득과 정진호가 같은 세대 사람이라면 한중근은 한 세대 밑의 사람이다.

나이로 따진다면 아들뻘인 데다 평소에도 서로 친분이 있던 사이라 편하게 말을 했다.

천기득이 술병을 들어 두 사람 잔을 채웠다.

“준비들은 잘 돼가나?”

“네. 형님 말대로 진행을 했더니, 비자금은 물론이고 사채까지 끌어오더군요.”

정진호가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 상무는?”

“다를 게 있겠습니까. 출자 구조가 불안정하니 이번 기회에 경영권을 확실히 하겠다고 물불 안 가립니다. 거기다 대왕 그룹 홀딩스가 롤모델이라고 했더니 두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더군요.”

대한민국의 한 축을 담당해온 거대 그룹들은 하나 같이 출자 구조에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짧은 시간에 몸집을 키우고 돈이 된다 싶으면 서슴없이 기업을 확장하다 보니 벌어진 일이다.

“연기금과는 이야기가 잘 됐고?”

술잔을 기울이던 정진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지주회사 지분과 맞교환을 하자고 하니 쌍수를 들고 환영하더군요. 뭐, 형님이 먼저 물꼬를 터놔서 어렵지 않았습니다.”

지분구조를 정리해서 지주회사로 몰아넣을 수 있는 기업도 있지만, 지배구조가 약해진 기업은 작업이 쉽지 않다.

결국 돈을 들여 주식을 끌어모아야 한다는 건데, 한두 푼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대왕 전자도 그렇지만 선진 그룹과 진영 그룹 역시 주력 기업의 최대 주주는 사주가 아니라 연기금이다.

나랏돈으로 운영되는 투자금이기에 안정적 측면도 있지만, 워낙 지분율이 높다 보니 불편한 점도 적지 않았다.

사주 일가의 경영권을 방어하고 지지를 얻는데 최대 우군이지만, 반대편에 서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야말로 재앙이나 다름없다.

물론 대한민국에서 재벌들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겠는가만은 그래도 눈치를 봐야 한다는 건 달라질 게 없다.

이번 지주회사 전환 작업에 연기금이 가지고 있는 주식을 교환하는 작업은 돈을 아낄 수 있다는 점도 있지만, 연기금의 권한은 축소되고 지주회사의 권한은 최대치로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어찌 보면 지주회사 전환 작업을 하는 그룹에 유리한 일이지만, 딱히 돈의 가치가 달라질 일도 없는 데다 적잖게 밑돈도 받아먹을 기회니 마다할 이유가 없다.

연기금이 자신들 돈도 아니고 가치만 유지하면 징계를 당할 일도 없다.

이럴 때 도움을 주고 나면 은퇴 후 각 그룹에서 이사 자리 하나는 받아 챙길 수 있으니 담당자들에게 호재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지주회사 지분은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 이번 기회에 잡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을 것이다.

“대왕 전자도 연기금이 최대 주주죠?”

정진호의 질문에 천기득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까지는 그렇지. 하지만, 며칠 남지 않았네.”

정진호와 한중근에게 조언했다시피 천기득은 이미 연기금과 협상을 끝낸 상태다.

전자의 지분과 대왕의 지주회사 지분을 맞교환하기로 서류를 작성한 것이다.

교환 비율은 1대 3. 큰 이변이 없다면 전자 지분 30%는 지주회사로 들어오고 연기금은 10%의 지주회사 지분을 받아가게 된다.

작업이 마무리되면 대왕 전자의 지배구조는 흔들림 없이 굳건해질 것이다.

“형님. 그런데 말입니다.”

“응.”

“투자자를 한 번 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 말로야 소유만 하고 경영엔 관심이 없다고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것 아닙니까. 일 끝나고 나 몰라라 하면 우리만 엿 되는 겁니다.”

정진호가 살짝 불안한 표정으로 투자자를 입에 올렸다.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중근 역시 궁금한 눈치다.

“그렇지 않아도 오늘 만나기로 했네.”

“아. 그렇습니까?”

“자네도 중근이도 내심 불안해하는 것 같으니 일 시작하기 전에 관계를 확실히 해 두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천기득의 말에 두 사람은 가게 내부를 슬쩍 둘러봤다. 하지만, 맞은편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있는 요리사를 제외하곤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급할 것 없네. 기다리고 있으면 올 테니까. 우리도 함부로 움직이기 어려운 위치지만, 그쪽도 만만치가 않거든.”

“움직이기 만만치 않다는 말은 꽤 알려진 사람이라는 소린데. 더욱 궁금해지는군요.”

정진호의 말에 한중근이 입을 열었다.

“혹시 말입니다.”

“혹시?”

“그 사람 아닐까 싶습니다.”

한중근이 예상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정진호가 눈을 반짝였다. 천기득이 술잔을 비우며 한중근을 바라봤다.

“한 상무가 예상하는 사람이 누군지 나도 궁금하군.”

“현 상황에서 그룹 세 개를 동시에 지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굴까 생각해봤습니다. 처음엔 외국계 투자자들도 생각했습니다만, 천 실장님이 그런 돈을 받아 올 리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누구보다 대왕을 사랑하시는 분인데, 지주회사를 만들어 외국인 손에 넘겨주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계속해 보게.”

“그렇다면 내국인 중에서 찾아야 하는데, 처음엔 명동 임정례 어르신을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오더군요. 아무리 현금왕이라 불리셔도 이번 작업에 들어가는 돈은 그분이라고 해도 감당할 수 없는 액수니 말입니다. 거기다 그분 성격을 생각하면 이번 일과는 맞지 않습니다. 그분은 장기간 돈이 묶이는 걸 누구보다 싫어하니까요.”

“재미있군. 그래서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한중근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얼마 전 크게 이슈가 된 사람이 있지 않습니까. 고주몽이라고.”

한중근의 입에서 고주몽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왜 그 사람이라고 생각했는지 물어봐도 되겠나?”

“일단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현금왕입니다.”

“그리고?”

“방송을 보니, 경영하는 쪽보단 뭔가를 만들거나 연구하는 쪽에 관심이 많더군요.”

“그 두 가지 이유로 고주몽이라 생각했다는 건가?”

정진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무엇보다 고주몽은 대왕 그룹에 감정이 좋지 않은 사람입니다.”

한중근의 말에 정진호가 고개를 저었다.

“대왕 그룹에 감정이 좋지 못한 사람이 천 실장님과 손을 잡는다? 그게 더 이상한 일 같은데.”

“고주몽을 투자자로 생각하는 세 가지 이유 중에 하나를 꼽자면 세 번째에 걸겠습니다.”

한중근은 고개를 돌려 천기득을 바라봤다.

“실장님. 제 생각이 틀린 겁니까?”

“크흐흐흐. 한 상무가 평소 눈치가 빠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어? 형님. 진짭니까?”

그럴 리 없다며 고개를 흔들고 있던 정진호가 깜짝 놀란 표정이 됐다.

“기다려 보면 알겠지. 어차피 오늘 이 자리에서 함께 만나게 될 테니까.”

천기득은 키득키득 웃으며 술잔을 채웠다.

“한 상무.”

“네. 실장님.”

“그런데 왜 내가 고주몽과 손을 잡았다고 생각한 건가? 진호 말대로 대왕과는 적이나 다름없는 자인데.”

“저와 같은 마음이시지 않습니까. 여기 계시는 정진호 실장님도 그렇고 말입니다.”

셋 다 신분적 한계를 가지고 있고. 누구보다 사주 일가에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다.

이번 작전을 통해 그룹의 경영권을 손에 넣는 것은 물론이고 사주 일가가 다시는 고개를 들지 못하게 망가트릴 계획까지 준비했다.

실패하면 자신뿐 아니라 가족은 물론이고 따르는 이들까지 송두리째 뽑혀 나갈 일이다.

“제가 실장님이었다면, 누가 됐든 간에 가장 가능성이 높은 사람의 손을 잡았을 겁니다. 이왕이면 공동의 목표를 가진 사람이 좋지 않겠습니까?”

“형님. 한 상무 말이 맞는 겁니까”

그때 세 사람이 앉아 있는 테이블에 접시 하나가 놓였다.

“두부김치 나왔습니다.”

일식집에서 난데없이 두부김치?

정진호와 한중근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두부김치를 가져온 요리사는 머리에 쓰고 있던 두건을 벗어버리고 천기득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제가 아직 회 뜨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 말입니다. 자취할 때 종종 해 먹던 기억으로 한 번 만들어봤습니다. 반갑습니다. 고주몽입니다.”

“헛!”

“아…….”

정진호는 물론이고 고주몽을 투자자로 의심하고 있던 한중근까지 깜짝 놀란 표정이 됐다.

설마 이런 식으로 모습을 나타낼 거라곤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요한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데, 남에게 주방을 맡길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듣는 귀를 하나라도 줄여야 성공확률이 높아지죠. 덕분에 안주가 평범해지긴 했지만.”

나는 웃는 얼굴로 술잔을 내밀었다.

“한잔 안 주십니까? 그래도 명색이 투자자인데.”

“아. 네.”

한중근이 재빨리 술병을 들어 잔을 채워줬다.

술잔이 채워지자, 천기득이 정식으로 소개를 했다.

“인사들 하시게. 두 사람이 만나고 싶어 하던 바로 그 투자자일세.”

“반갑습니다. 선진그룹의 정진호입니다.”

“진영그룹의 한중근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GO 컴퍼니 대표. 고주몽입니다.”

천기득이 잔을 내밀자, 곧바로 건배로 이어졌다.

단숨에 술을 넘긴 네 사람은 탁자 위에 잔을 내려놨다.

“대왕그룹 시가총액 460조. 재계 1위. 선진그룹 65조. 재계 8위. 진영그룹 32조. 재계 13위.”

내 입에서 각 그룹의 시가총액이 흘러나오자 다들 시선이 집중됐다.

“다 합쳐서 530조쯤 되나요?”

내 말에 한중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왜…….”

“일 끝나고 쫓아내면 어쩌나 걱정하시는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네?”

“20개국에 투자한 돈이 200조입니다. 한국에도 20조가 들어와 있죠. 그리고 남은 돈이 660조.”

“꿀꺽.”

연이어 ‘조, 조’ 하는 말이 튀어나오자 정진호가 마른침을 집어삼켰다.

“제 변호사 말에 의하면 이번 작업에 들어간 돈이 750억 달러 정도 된다는군요.”

“80조…….”

“그래도 580조 남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불어나는 중이죠. 이자만 해도 어마어마하거든요.”

“네…… 그렇겠습니다.”

“그런데 내가 뭐 하러 경영까지 해야 합니까? 미친놈처럼 살아도 몇백 년은 거뜬한데 말입니다. 회사에 매여 있는 생활은 내 쪽에서 사절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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