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장. 안 하면 아쉽고 하면 짜증 나는 것.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반대를 외쳤다.
“실장님이 말하는 그 의리 말입니다. 죽어버린 사람은 절대 알아주지 못합니다. 그러니 남겨진 사람들을 생각하십시오.”
“…….”
“회장님이 돌아가시고 일을 벌이기엔 늦습니다. 제가 이진상이라면 그 전에 작업을 끝내 둘 거고 제가 대왕 그룹 회장이라면 실장님의 생각 정도는 어느 정도 예상을 하고 있을 테니 말입니다. 이방원이 아들에게 권력을 물려주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이 뭔지. 그걸 떠올리세요. 바보 같은 소리 그만하시고.”
머릿속에 숙청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는지, 천 실장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음…….”
이진상과 악연을 풀어내고 관계를 개선하려고 찾아온 자리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말들을 연속으로 듣게 되자 천기득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그리고 이건 참고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실장님의 그런 마음이 외부로 알려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모르긴 해도 이씨 집안 전체가 들고일어나 실장님을 찢어버리려고 하겠죠. 감히 머슴 따위가 오르지 못할 나무에 탐을 냈다고. 나와 등을 돌리면 세상 사람들 다 알게 될 겁니다. 천기득이 사실은 대왕 그룹을 갈라 먹으려고 꼼수 부리는 중이라고.”
“강요는 없을 거라더니…….”
“협박하지 않는다고 한 적은 없습니다만.”
천기득은 ‘크큭’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천기득에게 협박을 하는 인간을 다 보는군. 그것도 한 참 어린 사람에게.”
“협박에 나이가 어디 있습니까. 센 놈이 약한 놈에게 언제든 할 수 있는 게 협박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누가 강자인지 잘 생각해 보라고 했다.
“내가 하겠다고 하면 돕겠단 말이지.”
“대신, 이진상과 이진선을 완전히 밀어버리는 조건입니다.”
“내가 뒤통수를 치면 어쩌시려고 그러는가.”
“그땐 대왕 그룹과 대화 따위는 의미가 없다는 소리 아니겠습니까. 한국 국적 버리고 외국으로 나갈 겁니다. 물론 그 전에 총잡이들에게 돈 좀 쥐여줘야겠죠. 심플 이스 베스트! 가장 쉬운 방법 아니겠습니까. 막 나가고 싶다면 저 역시 환영입니다. 이렇게 골치 아픈 방법들까지 들먹이며 천 실장님을 설득할 필요도 없으니 말입니다.”
내친김에 킬러를 고용하겠다는 말도 던져 넣었다. 말을 하다 보니 점점 간덩이가 불어 올라서 이젠 그런 말도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온다.
“허허허. 말이 심하군.”
“에이. 심하다니요. 기조실 해 왔던 일 들어보니까. 아주 시궁창이 따로 없던데. 천 실장님도 내로남불입니까? 내가 하면 정당하고 남이 하면 비겁하다는 뭐 그런 겁니까?”
내가 기조실 이야기까지 꺼내 들자 천기득은 말이 없어졌다. 그러다 문득 떠오르는 게 있는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랬군. 박 실장이 보이지 않는다 싶었는데, 그새 고 대표에게 붙었어.”
“연륜도 있으신 분이 붙었다가 뭡니까. 이직했다고 그렇게 말씀을 해주셔야죠.”
“허허허. 이직이라.”
“요즘 이직 신청을 하는 분들이 워낙 많아서 광화문까지 줄을 세워야 할 판입니다. 거꾸로 제가 이직을 제의하는 분들은 아주 극소수죠. 그중에서도 이직이 아니라 손을 잡자고 한 분은 실장님이 처음이고 말입니다.”
* * *
김덕영이 박산호 실장을 바라보며 통역했다.
“박 실장이 대왕을 배신하고 대표님에게 붙었다고 합니다.”
“이것 보세요. 김덕영 씨!”
박산호가 불쾌한 표정으로 언성을 높였다.
“그런데, 대표님이 말 곱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직! 한 거라고.”
김덕영의 이어지는 통역에 박 실장을 제외한 모두가 킥킥 웃음을 터트렸다.
* * *
“…….”
“예습니까. 놉니까? 서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빨리 끝내죠.”
“나는…….”
“이진상 성격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압니다. 천 실장님을 밀어내고 나면 그걸로 끝일 거 같죠. 아닙니다. 천 실장님과 관계된 사람들은 물론이고 마시다 떨어트린 커피 얼룩까지 빡빡 문질러서 지워버릴 놈입니다. 그 안에는 천 실장님 가족도 포함될 겁니다. 이진상이 그런 짓을 하는 걸 옆에서 2년 넘게 지켜봤으니까요.”
내 입에서 가족 이야기가 튀어나오자 단단했던 천기득도 표정이 구겨졌다.
“미국에서 자신의 비서팀도 싸잡아 묻어버린 인간입니다. 설마 모르신다고 하진 않으시겠죠?”
“으음.”
욕망은 끓어 오르는데 선뜻 입은 못 열겠다 이건가? 이렇게까지 말을 했는데도?
“노로 알겠습니다. 돌아가시죠. 앞으로 대왕 그룹과 협상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20개국에서 진행되는 소송. 기대하십시오. 빨다 버린 걸레처럼 너덜너덜하게 만들어드리죠. 애지중지하는 대왕 그룹 어찌 되나 두고 봅시다.”
나는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하겠네.”
“…….”
“그렇게 하지.”
천기득의 입에서 다시 한번 예스가 흘러나왔다.
나는 천기득 실장에게 슬쩍 손을 내밀었다.
천 실장은 내 손을 잠시 바라보더니 주름진 손으로 맞잡았다.
“연락처 하나 드릴게요.”
“연락처?”
“제이코라고 실력 좋은 변호사인데. 그 사람과 통화하고 합의를 끝내면 곧바로 지원이 시작될 겁니다.”
“에이스 로펌의 대표 변호사 말이로군.”
나와 관련된 정보는 이미 모두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제이코의 명함을 내밀자 곧바로 누군지 알아차렸다.
“네. 맞습니다. 바로 그 사람입니다.”
천기득이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문득,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천 실장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천 실장님. 혹시 동병상련이라는 말씀을 하십니까?”
“당연한 소릴 하시는군.”
이번엔 또 무슨 소리를 꺼내려고 사자성어까지 들먹이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말입니다. 대왕이 아니더라도 천 실장님처럼 가슴앓이하는 분들이 계시지 않을까요?”
“…….”
“나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인데, 그렇게 눈까지 치켜뜨십니까. 있으면 있다. 없으면 없다 그러면 되는 것 같은데. 아무튼, 그런 분들이 계신다면. 물론 계신다는 전제하에 드리는 말입니다.”
“계속해 보시게.”
“그분들 역시 지원을 해 드리고 싶습니다.”
“허허허. 고 대표. 설마 이 나라 대기업들을 그런 식으로 손에 넣을 생각인가?”
“그럴 리가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기업가 체질이 아닙니다. 손에 쥐여줘도 절대 못 합니다.”
“그런데 왜?”
“원래 이런 일은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럿이 하는 게 욕을 덜 먹지 않나 싶어서요. 칭찬은 함께 듣고 욕은 나누어 먹으라는 말이 갑자기 생각나지 뭡니까. 그래서 드린 말입니다. 그냥 못들은 걸로 하십시오.”
천 실장은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듯 어이없는 눈빛으로 한참 동안 나를 바라봤다.
“듣고 보니 틀린 말도 아니군. 혹, 같은 아픔이 있는 사람이 있는지 한 번 둘러는 보겠네. 하지만 너무 기대는 하지 말게. 솔직한 마음으론 지금이라도 이 명함을 내려놓고 싶은 심정이니.”
“명함이 무겁게 느껴지신다면 직접 배송해 드릴 수도 있습니다.”
“됐네. 농담도 못 하게 만드는군. 나름대로 배포가 있다는 나도 긴장감에 손이 떨릴 정도의 일이니 쉽사리 달려드는 이가 없을 수도 있다는 말이네.”
“물론입니다. 제가 그런 거로 기대하고 실망하기엔 쌈짓돈이 너무 많은 사람이지 않습니까.”
“자신이 다니던 회사를 배신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 자칫 말이라도 흘러나가면 서로 골치 아픈 일이 생길 수도 있으니 말일세.”
나는 천기득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배신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컴퍼니라면 모를까. 코퍼레이션은 주주가 왕입니다. 한 줌 되지도 않는 주식을 가지고 큰소리치는 게 더 이상한 일 아닙니까. 눈치 보지 말고 떳떳하게 쟁취하십시오.”
“허허허.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헛소리하지 말라고 했겠지만, 고 대표 말은 무시할 수가 없군. 오늘은 이만 가 보겠네. 에이스 로펌과 이야기가 끝나면 나중에 웃는 얼굴로 다시 보기를 바라지.”
전쟁을 막아 보겠다고 찾아왔던 천기득은 엉뚱한 소리만 잔뜩 듣다가 제이코의 연락처가 박힌 명함 한 장을 들고 돌아갔다.
그가 정말 대왕 그룹에 정확히는 이씨 가문에 충성하는 사람이었다면 내 제안을 단칼에 잘라버렸겠지만, 사람이란 게 늙을수록 놓지 못하는 게 많다는 말을 실감하는 시간이 됐다.
솔직히 이게 될까 싶었던 나도 얼떨떨한 심정이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듯 큰소리 빵빵 쳤지만, 막상 협상이 끝나고 나니 절로 한숨이 터져 나왔다.
“후―”
문이 열리며 엘리스와 박 실장이 얼굴을 내밀었다.
“대단하십니다. 그런데 천 실장님이 계열 분리를 생각하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아신 겁니까?”
박산호는 진짜 깜짝 놀랐다는 듯 눈이 휘둥그레졌다.
“알기는요. 그냥 찔러 본 겁니다.”
“네?”
박산호는 또 다른 의미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니까…….”
“찔러도 보고. 뻥카도 치고. 아니면 말고였죠.”
“하긴, 결과가 좋은데 그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녹음은 깔끔하게 됐습니다. 혹, 다른 마음을 먹으려 든다면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겁니다.”
박산호는 어깨를 으쓱이며 미소를 지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 짓는데, 가슴에서 진동이 일었다. 스마트 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하니 역시나 제이코다.
“어때요? 쓸만했나요?”
― 굿!
“천 실장에게서 연락이 가면 잘 부탁합니다.”
― 지분구조를 빠삭하게 아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단단한 성도 내부에서부터 무너트리면 순식간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네. 고생해요.”
제이코와 통화를 끝낸 나는 엘리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녁 식사는 술도 한잔하고 싶은데.”
“네. 준비하겠습니다.”
“나 혼자 먹겠다는 게 아니고. 다 같이.”
“네? 다 같이 말입니까?”
“엘리스도 한국에서 지내려면 ‘회식’ 문화 정도는 배워둬야지 않겠어?”
“회식? 그게 뭡니까.”
“안 하면 아쉬운데, 한다고 하면 짜증 나는 것.”
“네?”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며 엘리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자, 박 실장이 웃음을 터트렸다.
* * *
천기득이 주몽을 만나고 돌아오자, 소식을 들은 이진상이 곧바로 찾아왔다.
“놈을 만났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만나고 왔다.”
“뭐라고 합니까?”
“끝까지 가보자더구나.”
이진상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보였다.
“멍청한 놈이 주머니에 돈 좀 생겼다고 아주 막 나가는군요.”
“졸부들의 특징이지.”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회장님께 말씀드려 그룹 내 지분구조를 바꿀 생각이다.”
그룹의 지분구조를 변경한다는 천기득의 말에 이진상이 눈을 번뜩였다.
“그 말은…… 지주회사를 만들겠다는.”
“지금 같은 순환출자 구조는 공격에 취약해. 그룹 전체를 한 손에 쥐고 움직일 수 있는 사령탑이 필요할 때다. 고주몽은 무시해도 그만이지만, 그가 가진 돈은 무시할 수가 없으니까.”
이진상은 오히려 잘됐다는 듯 웃음을 보였다.
“그럼 약속대로 나를 밀어주는 겁니다.”
“당장은 어렵다.”
천기득의 말에 이진상이 미간을 찌푸렸다.
“방송국 일을 잘 처리하면 저를 돕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도울 것이다. 하지만, 지주회사 전환에 네 이름을 대놓고 집어넣을 수는 없다. 그런 일을 벌였다간, 네 형제나 조카들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
“흠.”
이 부분에 있어선 이진상도 딱히 방법이 없는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 됐다.
“그래서 차명회사를 만들 생각이다.”
“차명회사요?”
“주인이 누군지 모르는.”
“페이퍼 컴퍼니로 나를 숨겨주겠다는 말씀입니까?”
“네가 드러나지 않고, 지주회사의 주식을 손에 넣을 방법은 그것뿐이니까.”
이진상은 언제 얼굴을 찌푸렸냐는 듯 활짝 웃는 모습이 됐다.
“감사합니다. 실장님.”
“돈이나 제때 마련해. 내가 빼낼 수 있는 주식은 한계가 있으니까.”
“총알이야,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습니다.”
“정체가 불분명한 돈을 함부로 들일 수는 없다. 냄새나지 않게 세탁을 해줄 테니 내가 신호하면 그때 돈을 움직여라.”
“당연히 그래야죠. 실장님이 냄새까지 지워 주신다는데.”
자신이 가진 비자금을 출처까지 만들어주겠다고 하자 이진상은 웃음꽃을 피웠다.
자신의 돈임에도 불구하고 이리저리 흩어져 다른 사람 돈처럼 굴러다니는 중이라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걸 이번 기회에 법적 주인으로 만들어주겠다니 당연히 반가울 수밖에 없다.
“그러니, 구설수 타지 않게 조용히 있어라. 다른 녀석들이 냄새라도 맡고 달려드는 날엔 그것조차 어그러질 수 있으니.”
천기득이 다독이듯 이야기했다.
“하하하. 진즉에 실장님에게 손을 내밀 걸 그랬습니다. 밖에선 그렇게 발버둥을 쳐도 한치를 나가기가 힘들었는데.”
“문제를 일으키면.”
“네네. 조용히 있겠습니다. 조금만 참으면 끝날 일인데 그걸 못 참고 밥상 엎을 일 있습니까.”
이진상은 흥겨운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천기득이 피곤하다는 듯 손짓을 하자, 이진상은 ‘네네, 쉬십시오.’ 하며 사무실을 벗어났다.
혼자 남은 천기득은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주머니 속 명함을 꺼내 들었다.
대포폰에 번호를 입력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나 대왕의 천기득이요.”
―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제이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