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장. 예스 or 노
“진상이를 쫓아내면 되겠는가?”
원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충분히 고려해 볼 수 있다는 쪽으로 이야기를 했다.
“회장님 일가는 건드리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것도 나름이지. 이건 관리만으로 마무리 지을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니.”
그룹에서 내쫓는다? 사실 이것도 집행유예나 다름없다. 언제든 분위기가 달라지면 특사 소리를 들으며 다시 돌아올 테니까.
그런데 내가 겨우 그 꼴을 보려고 이렇게 입을 털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시겠다는 건지 듣고 싶군요.”
“당연히 상무 자리는 내려놓을 것이고…….”
들으나 마나 한 소리를 뻔뻔하게 늘어놓기는. 그 정도로는 안 된다니까 그러시네.
“이건 어떻겠습니까.”
천기득은 뭐든 이야기해 보라는 듯 나를 바라봤다.
“제가 말입니다. 남 뒤치다꺼리에 매달려 살다 보니, 이게 내 인생인지 남의 인생인지 도무지 모르겠더란 말입니다.”
천기득의 눈썹이 슬쩍 구부려졌다. 이진상을 어떻게 해야 싸움을 멈출 것인지 이야기를 하다말고 뜬금없는 소리를 들었단 표정이다.
“그래서 제안을 할까 합니다. 물론 선택은 천 실장님이 하시는 겁니다. 강요는 없으니 편하게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강요는 없다. 단지, 뻥카와 협박이 난무할 뿐.
“제안?”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겠습니다. 실장님께 투자하죠. 대왕 그룹. 실장님이 드세요.”
“!”
표정 변화 없이 담담히 대화를 이어나가던 천기득이지만 이 말은 그에게도 예기치 못한 일이었다. 처음으로 흔들리는 표정이 됐다. 하지만 곧바로 표정을 붙잡고 어이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 * *
밖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녹음하고 있던 박산호와 엘리스가 깜짝 놀란 표정이 됐다.
“미스 고든. 대표님이 지금 하신 말씀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요.”
엘리스는 자신도 처음 듣는다며 고개를 저었다.
“이거 괜한 소리를 해서 판이 깨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천 실장님은 최대한 이진상을 처리하는 쪽으로 이야기를 하시는 것 같은데.”
박산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하자, 엘리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결정은 보스가 합니다.”
“물론입니다. 그저 걱정이 돼서…….”
팔짱을 끼고 대화를 전해 듣던 로버트가 입을 열었다.
“승부는 끝나기 전까지 끝난 게 아니다. 다들 넘겨짚지 말도록.”
로버트의 한 마디에 설왕설래 의견을 주고받던 이들이 모두 조용해 졌다.
“미스터 김. 당신은 계속 통역해야지. 당신까지 입을 다물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지 않나?”
로버트는 자신을 위해 통역을 하고 있던 김덕영까지 입을 다물자, 어이없다는 듯 그를 쳐다봤다.
“그런데 말입니다. 대표님은 기업 운영에…… 진짜 관심이 없습니까?”
김덕영은 통역하다 말고 로버트에게 되레 질문했다.
“이 대화는 미국에서도 듣고 있다. 통역에 집중했으면 좋겠는데.”
* * *
“미쳤군.”
천기득은 냉기 좔좔 흐르는 표정으로 나를 미친놈 취급했다. 그래도 상관없다. 그런 소리 당연히 들을 거로 생각했고, 단번에 속내를 드러낼 거라고 믿지도 않으니까.
“저는 기업 운영이나 이런 쪽으로 재능이 없습니다. 지금 당장 몇 안 되는 직원들 관리하는 것도 버겁더라고요. 대왕 전자? 그룹? 저에겐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이진상은 그냥 못 넘어가겠습니다. 아, 이진선이라고 한 명 더 있군요.”
“…….”
“나랑 원수진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아득바득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사람 죽이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성격들이라서 그런가?”
내가 대놓고 살인자 운운하자 천기득 실장이 표정이 딱딱해졌다.
마치 '너 지금 선을 넘고 있어!'라는 암묵적 압박을 주겠다는 듯.
이럴 것 같아서 청심환도 두둑이 챙겨 먹고 나왔다. 그럼에도 번뜩이는 눈을 마주하니 은근히 떨린다.
하지만, 내친걸음이다. 흔들리지 않게 마음 단단히 먹고 다시 주둥이를 털었다.
“대왕 그룹을 흔드는 것. 저로선 돈 좀 낭비한다 생각하면 어려울 것도 없습니다. 어차피 삼시 세끼 먹고 사는 건 거기서 거기 아닙니까. 오래 살아봐야 백 년인데. 그 정도 세월 세끼 먹을 정도만 챙겨두고 남은 돈 다 집어넣어서 불을 싸질러 버려도 그만입니다.”
“무모한 건가. 아니면 용감한 건가? 그 많은 돈을 대왕 그룹을 흔드는데 다 집어넣겠다고?”
“돈이 목적이 아니어서 그런가 봅니다.”
나는 속에도 없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으며 몸을 느긋하게 뉘었다.
“천 실장님은 딱 보면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무슨 생각으로 이 싸움을 벌이고 있는지.”
“감정적으로 다가설 일이 아닐세. 고 대표.”
두끝보기 섯다 화투를 치시면 심심치 않게 할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있다.
자고로 뻥카를 칠 땐 진짜 죽을 것처럼 쳐라!
들은 게 있고 봐온 화투판이 있으니 나도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거기다 별것도 아닌 인간 때문에 더 이상 내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지지부진하게 계속 매달려 있느니 손해 좀 보더라고 단숨에 악연을 끊어버리고 싶다.
앞으로 한국에서 귀찮게 구는 것들은 바로바로 치워 버려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니 선택하세요. 전쟁입니까. 아니면 머슴살이 끝내고 주인이 되실 겁니까?”
* * *
“천 실장에게 기업의 주인이 될지, 아니면 계속 노예로 살다 죽을지 결정을 하라고 합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질문이군.”
김덕영의 통역에 로버트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이들도 처음엔 걱정스러운 표정이 앞섰지만, 대화가 진행될수록 살짝 놀라는 표정이 됐다.
주몽이 이렇게까지 말을 잘하고 대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갈지 아무도 예상치 못했기 때문이다.
특히, 누구보다 엘리스의 놀람이 컸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녀가 봐 왔던 주몽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엘리스의 모습에 로버트가 씩― 웃어 보였다.
자신과 제이코는 주몽과 지내는 두 달 동안 이미 의외의 모습을 적지 않게 봐 왔다.
평소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배우는 자세로 일관하다가도 어느 순간이 되면 깜짝 놀란 이야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
더 재미있는 것은 말도 안 될 것 같은 그 아이디어가 당연하다는 듯 성과를 낸다는 것이다.
그럴 때마다 제이코는 알다가도 모르겠다며 고개를 흔들었지만, 로버트는 그런 주몽의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가 바라본 주몽은 타고난 천성이 순한 편에 속했다.
하지만, 한 번씩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내놓을 때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로 재주가 뛰어났고 감정적으로 돌변할 때는 누구보다 무서운 성격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덕영이 '진짜 기업 운영에 관심이 없냐고' 물어봤을 땐 이런 주몽의 모습 때문에 자신도 선뜻 답하지 못했다.
기업가보다는 말 그대로 사람을 부리고 모으는 쪽에 재능이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기업가도 사람을 부리니 얼핏 비슷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성격의 일이다.
“보스에게 저런 모습이 있는지 처음 알았어요.”
엘리스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직은 제대로 여물지 않아서 어설픈 듯 보이지만, 내가 지켜본 주몽은 보스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다. 그걸 스스로 자각하고 자리를 잡을 때까지 잠시 곁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생각해. 그러니 엘리스 너도 주제넘은 짓은 삼가는 게 좋아.”
로버트는 엘리스만 들릴 정도로 이야기했고 엘리스는 로버트를 바라보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스와 로버트 사이에 대화가 오고 가든 말든 김덕영의 통역을 계속됐다.
“천 실장이 못 들은 척하니까. 대표님이 장난하냐고 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천 실장이 웃고 있네요.”
김덕영의 통역에 로버트가 한소리 했다.
“웃음소리는 통역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아듣는다.”
* * *
“뭐라?”
“다 들어놓고 못 들은 척하면 내가 한 말이 없었던 것처럼 됩니까?”
“크큿. 푸하하하하!”
천기득은 미친 사람처럼 광소를 터트렸다.
나는 천기득이 웃든 말든 관여치 않고 커피잔을 들어 목을 축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계열 분리 정도를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은데.”
천기득이 웃음을 뚝 그쳤다.
“이진상은 그걸 눈뜨고 지켜볼 놈이 아닙니다. 모르죠. 어느 날 갑자기 교통사고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하게 되실지도.”
“모를 일이군. 고 대표의 자료 어디에서 이런 말은 없었는데 말일세. 보기보다 날카로운 면이 많군.”
날카로운 게 아니라, 전이된 기억에 그렇게 나오길래 한 번 질러본 거죠. 아니면 말고. 기면 좋고.
“아무리 그렇다 해도 고 대표가 함부로 입에 담을 말이 아니네.”
천기득의 말에 이번엔 내가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도 잘하십니다. 내가 내 방에서 왜 하고 싶은 말도 못 합니까. 듣기 싫으면 실장님이 귀를 막으셔야죠. 여긴 우리 둘밖에 없습니다. 생각이 있다면 있다. 없으면 없다. 쉽게 가면 좋겠습니다.”
“돈이 좋긴 좋군. 나는 평생을 바쳐 일했어도 지금 자리가 전부인데.”
“평생을 바쳤다고 누구나 실장님 자리에 있는 건 아니죠. 그리고 제 돈 쉽게 번 게 아닙니다.”
쉽게 번 돈이 아니라는 말에 천기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확천금의 복권 당첨자가 저런 말 하니 어이가 없다는 눈빛이다.
“천문학적 확률을 뚫은 겁니다. 지구에서 유일하게. 천 실장님이 많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그 자리에 앉아 계신 것처럼.”
* * *
“천문학적 확률의 지구 유일의 남자랍니다.”
김덕영의 말에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로또에 당첨되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이 로또를 사는 거라고. 그게 무엇이 됐든 과정 없이는 결과는 없는 법이다.
“천 실장도 대표님의 말에 이해했는지 천문학적 확률을 인정하는군요.”
* * *
“허허허. 그래. 듣고 보니 틀린 말은 아니군, 천문학적 확률이라. 맞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 그저 일확천금이라고 쉽게 볼 일이 아니었군.”
“그리고 그 천문학적인 확률의 사나이와 이렇게 마주 앉아, 미래를 이야기할 확률은 얼마나 될 것 같으십니까.”
“계산이 안 되는군.”
“그만큼 제 제안은 특별하다는 걸 잊지 마셔야 합니다.”
말없이 차만 들이키던 천 실장이 답답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 속에만 있는 생각을 어떻게 알아냈는진 모르겠지만, 고 대표 말대로 이대로 물러날 생각은 없네. 계열 분리가 됐든 아니면 다른 방법을 쓰든 내 몫은 챙길 생각이지. 그래서 그룹이 망가지는 걸 두고 볼 수가 없는 거고. 내 물건에 상처가 나는 게 싫거든.”
천기득은 내 말에 처음으로 긍정과 인정을 했다.
내가 워낙 당차게, 대차게 다 아는 것처럼 이야기하니 무작정 부정만 할 수도 없다 생각한 모양이다.
주몽을 찾아온 애초의 목적 '적절한 대가를 치르고 평화를 얻는다'는 무의미해졌다.
어느덧 대화는 제안을 받을 것인지, 아니면 거부할 것인지로 이동을 했다.
“하지만, 회장님이 아직 살아계시네. 흉중에 생각이 있다고 해서 진행할 수 없는 일이지. 최소한의 의리는 지켜야겠네.”
그건 안될 말이다. 회장은 빨리 죽어도 내 후년. 늦게 죽으면 5년 뒤다.
내가 미쳤나? 그때까지 이진상과 드잡이질을 하고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