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8장. 내 것도 아닌데 애지중지한다고?
이 기억을 어디에 써먹을까 고민하던 나는 노트북을 열어 나와 관련된 인물의 정보를 찾았다.
섬네일이라도 좋으니 일단 사진만 있으면 기억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단편적이고 짧은 기억이지만 핵심은 담고 있으니 뭐든 도움이 될 것이다.
가장 먼저 이진상의 사진을 확인했다.
► 대왕 그룹 회장 별세! 이진상 상무 대왕 전자 사장 취임!
► 아들에 밀려난 왕! 대왕 전자 전(前) 사장 이광수 모든 직위에서 물러나.
► 천기득 비서실장 임시 회장직 수행, 이진상 상무의 숨은 공신?
► 천기득 임시회장, 교통사고로 사망. 이진상 사장, 회장 자리에 오르나?
► 충격! 월드 스타, 정은영. 보라카이에서 휴가 중 사망! 강간, 교살로 추정!
한 줄 뉴스라 할 수 있는 정보가 주르륵 떠올랐다.
“독한 놈. 끝내 형과 조카들을 누르고 올라서는구나.”
내가 사는 세상의 이진상은 아니지만, 이유야 어찌 됐든 대원군처럼 상갓집 개 역할을 아주 잘 연기해 낸 모양이다.
“천기득 비서실장이 임시회장에 올랐다가 교통사고로 사망을 한다고? 거기다 정은영 뉴스가 왜 이진상 기억에 포함된 거지?”
이건 아무리 봐도 냄새가 난다.
천기득은 딱 봐도 토사구팽이고 정은영은 이곳에서나 저쪽에서나 이진상의 암수를 피하지 못한 것으로 보였다.
아, 이쪽에서는 나 때문에 일단 목숨은 건졌다고 봐야겠구나.
하지만, 이진상이 멀쩡히 살아 있는 한, 언제고 정은영에게 위험이 닥치리란 생각도 떨쳐지지 않는다.
“악연은 악연이구나.”
나는 천기득 비서실장의 사진을 찾아 돌아다녔다.
다른 이들과 달리 외부에 나서는 일이 적어서인지 사진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그나마 찾아낸 사진도 사람들 사이에 가려진 멀리서 찍은 사진뿐이다.
“직접 만나봐야 알 수 있나.”
이번엔 사이코패스 이진선을 검색했다.
새벽 방송에 나왔던 캡처 사진이 올라와 있다. 그런데 아무리 노려봐도 별다른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진상에게 죽었거나. 아니면 한국에서 쫓겨나 미국으로 간 것일 수도 있겠군. 그게 아니라면 신분을 드러내지 않고 암중에서 계속 활약을 했거나.”
나는 곧바로 엘리스를 불렀다.
“네. 보스.”
“천기득 실장에게 연락이 왔다고 했지?”
“네. 그렇습니다.”
“연락을 넣어봐. 만약 만나자고 한다면 장소는 이쪽으로 하자고 하고.”
예상치 못한 지시라 생각했는지, 재차 확인했다.
“천기득에 대한 정보를 끌어모은 다음에 만나시려는 것 아니었습니까?”
“아니. 생각이 바뀌었어. 일단 만나본 다음에 고민하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박 실장 일행은 어떻게 할까요?”
“아. 박 실장이 있었지. 들어오라고 해.”
“네. 보스.”
엘리스가 나가고 곧바로 박산호 일행이 다시 들어왔다.
무슨 일인지 몰라 다들 불안해하는 눈치다.
하긴, 첫 인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갑자기 축객령이 떨어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미안합니다. 갑자기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어서.”
나는 정은영에게 먼저 사과를 건넸다.
“아니요. 아닙니다.”
정은영은 내가 사과까지 할 거라곤 생각 못 했는지 깜짝 놀란 표정이 됐다.
“그래. 정은영 씨라고 했나요?”
“네. 대표님!”
정은영은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너무 긴장하신 것 같네요. 조금 전 일 때문에 그런 거라면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네…….”
정은영이 안도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이진상 상무 이야기는 들었나요?”
“네. 박 실장님이 설명해 주셨습니다.”
“놀라셨겠어요.”
“네. 하지만, 대표님 덕분에 그런 일을 피할 수 있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앞으로 계획을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정은영은 잠시 머뭇거리는가 싶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갑작스럽게 닥친 일이라…… 아직은.”
“따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거나. 예를 들면…… 외모가 훌륭한데 그걸 바탕으로 연예계에 나서 볼 생각이라든지.”
정은영은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깜짝 놀란 표정이 됐다.
과거 한때 잠시 그런 생각을 가진 적이 있긴 했지만, 짧게는 3년 길게는 5년 이상 연습생 생활을 해야 한다는 말에 포기했었다. 집안 형편상 도저히 그럴 능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에 잠시 생각을 한 적이 있긴 하지만, 생활이 어려워서 포기를 했습니다.”
“아.”
다른 세상의 정은영과 달리 이 세상의 정은영은 자신의 성공보다 가족을 먼저 생각한 모양이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나이 때문에 어렵기도 하고. 지금은 더 나은 직장을 찾는 게 우선입니다.”
정은영은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의 형편을 이야기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올해 나이가.”
“스물여섯입니다.”
정은영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현재 나이 스물여섯이라. 보기엔 스물둘, 셋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으니 상당한 동안이다.
기억에 의하면 열여덟에 데뷔해서 아이돌 생활을 하다가 연기로 전업. 10년 뒤 할리우드에 입성한다.
아이돌 생활을 몇 년이나 하고 연기로 전향하는진 모르겠지만, 최소로 잡아도 스물여덟이다.
나에게 전이된 기억이 최소 2년, 최대 5년 정도로 예상됐다.
문제는 그게 내 후년인지, 아니면 5년 끄트머리에 벌어지는 일인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대왕 회장이 죽고 난 다음 이진상이 전면에 나선다는걸 보면 그때를 시작점으로 잡으면 될 것 같기는 한데.’
이쪽과 상황이 완전히 같지는 않으니 다양한 변수가 있겠지만, 큰 문제가 없다면 회장의 죽음은 기억대로 흘러갈 게 분명하다.
내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이 되자,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박 실장이 의견을 냈다.
“비서팀에 들어가면 어떻겠습니까?”
“비서팀이요?”
“네. 미국에서라면 모르겠지만, 여긴 한국입니다. 한국 쪽 일을 보좌할 사람이 한 명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언어적 측면이나 생활적 측면에서 말입니다.”
듣고 보니 그것도 나쁘진 않다.
매번 통역이 필요한 것도 그렇고 모두 한국 사정에 어둡기 때문이다.
거기다 말만 비서팀이지 변호사들로 급조한 조직이라 비서 역할을 하기에 어려운 점도 많다.
나는 정은영을 바라보며 의견을 물었다.
“박 실장님 생각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어떻습니까?”
“…….”
정은영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내 눈치를 봤다.
“조금이라도 불편한 마음이 있다면,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이야기해도 됩니다. 회사 잘 다니는 사람 끌고 나온 셈인데, 뒷감당은 해줘야죠.”
“아닙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꼭 해보고 싶습니다!”
“정말 괜찮겠어요?”
“네!”
정은영이 연신 고개를 끄덕이자, 박산호가 다시 나섰다.
“정 대리는 자재과에서 일해놔서 물건이 됐든 시간이 됐든 관리하는 쪽엔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습니다. 대표님께도 도움이 될 겁니다.”
“좋습니다. 본인이 그렇게 하고 싶다면 받아들이기로 하죠.”
엘리스에 이어 정은영까지. 미모로는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은 여자 두 명이 내 옆에 있게 됐다.
그림의 떡이긴 하지만, 이것도 나름 출세라면 출세다. 내 평생에 이런 미녀들과 일할 기회가 다 생길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말이다.
‘좌 엘프. 우 선녀란 소릴 들을 수도 있겠네.’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이란 생각이 들자 기분이 묘해졌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정말 열심히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일단 정은영 씨 문제는 그렇게 하기로하고. 박 실장님 대왕의 천기득 비서실장 아시죠.”
내 입에서 천기득이라는 이름이 흘러나오자 박산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박 실장님 표정을 보니, 이름만 들어도 무서운 분인가 보군요.”
“기조실 전체를 움직이시는 분이다 보니. 그런데 천 실장님은 왜…….”
“연락이 왔어요. 한번 보자는 것 같은데. 혹시 도움이 될만한 게 있나 싶어서 그렇습니다.”
천기득에게 연락이 왔다는 말에 박 실장은 표정이 복잡해졌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저로선 가늠이 안 되는 분입니다. 그저 모든 일에 철두철미하시고 그룹을 위하는 일엔 피도 눈물도 없다는 정도입니다.”
박산호는 이렇다저렇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했다.
“그룹을 우선시 한다라. 그 말은 그룹에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는 그 누구라 해도 가만두지 않겠네요.”
“그렇기는 합니다만, 회장님의 혈족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한쪽으로 치워놓기보다 관리를 하는 측면이 강합니다.”
박산호는 내가 누굴 염두에 두고 물어본 것인지 알겠다는 듯 곧바로 답을 내놨다.
“그룹을 우선시하지만, 회장 일가는 처 내기보다 관리를 하는 쪽이라 이 말이군요. 그룹에 피해를 줬다고 해도 말이죠.”
“제가 봐온 실장님은 그렇게 일을 하셨습니다.”
“알겠습니다.”
“큰 도움이 못 돼 죄송합니다.”
박산호는 고개를 숙여 보였다.
“아닙니다. 그 정도로도 충분히 도움이 됐습니다. 그리고 박 실장님과 임 과장님.”
“네. 대표님.”
“네. 대표님.”
“며칠 지켜봐서 알겠지만, 나는 물론이고 내 주변도 모두 급조된 팀입니다.”
두 사람은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조직 구성이나 관리를 놓고 본다면 말 그대로 주먹구구식이죠. 그래서 말인데.”
나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한국에서 손발처럼 움직여 줄 제대로 된 팀이 필요합니다. 두 분이 그걸 해주셨으면 합니다. 아, 기조실처럼 뒷작업을 하는 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비서실입니다.”
처음엔 살짝 표정이 어두워졌던 두 사람은 언제 그랬냐는 듯 표정이 밝아졌다.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박 실장과 임 과장은 힘찬 목소리로 대답을 했다.
“로버트 그리고 이 자리엔 없지만, 제이코와도 상의 부탁드립니다. 주먹구구식 팀이라고 해도 그 두 사람이 지금껏 나를 도왔으니까요.”
“물론입니다.”
“네. 그럼 나가보세요.”
박 실장과 임 과장이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가는데 정은영은 어중간한 자세로 나를 바라봤다.
“할 말이 남았습니까?”
“아, 그게 아니라. 비서 일을 시작…….”
“지금 당장 일부터 하려고요? 뭐가 그렇게 급합니까. 일단 나가서 연봉에 관한 이야기도 나누고 고용계약서도 써야죠. 밖에 나가서 김덕영 씨를 찾으세요.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아. 네. 알겠습니다.”
정은영은 활짝 웃는 얼굴로 꾸뻑 고개를 숙이더니 후다닥 박 실장을 따라나섰다.
혼자 남은 나는 곧바로 제이코에게 전화를 넣었다.
― 네. 보스.
“엘리스에게 이야기를 들었어요. 어렵다면서요?”
― 네? 뭐가 말입니까.
“대왕 전자나 JTB 방송 말입니다.”
― 아닌데요.
“네? 아니에요? 엘리스 말로는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고 하던데. 거기다 대왕 전자는 주식이 떨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올라가고 있다면서요.”
내 말에 제이코가 킬킬거리며 웃음을 보였다.
― 엘리스가 그런 말을 해요? 신기하네.
제이코는 대왕 전자나 JTB 방송 쪽 일보다 엘리스의 반응이 더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보였다.
“그게 이상한 건가요?”
― 엘리스는 확정되지 않은 정보는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보스의 질문에 개인적 의견을 냈다고 하니 그렇습니다.
제이코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이코.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 아닙니다. 엘리스 이야기는 나중에 만나서 하기로 하죠. 보고부터 드리겠습니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