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장. 그 안에 자리를 잡을 겁니다.
문고리를 잡는 엘리스를 급히 막아섰다.
‘응? 그런데 내가 이렇게 동작이 빨랐나?’
문에서 일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엘리스보다 침대에 엉거주춤 걸터앉아 있던 내가 더 빨리 문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엘리스의 동작을 막는다는 것이 문고리를 잡으려던 그녀의 손을 낚아채는 모양새가 됐다.
“아야!”
팔목을 잡힌 엘리스가 얼굴을 찡그리며 비명을 질렀다.
“엇. 쏘리.”
나는 급히 손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섰다.
엘리스는 팔목을 쓸어내리며 인상을 쓰더니 나와 거리를 벌렸다.
“잠깐 기다리라고 했잖아.”
“그렇다고 손을 잡을 이유는 없지 않습니까.”
“허!”
나는 어이없는 눈빛으로 엘리스를 바라봤다.
“노력? 말은 좋네. 내가 특별한 감정을 담아서 손을 잡은 것도 아니고.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을 하면서 노력을 하겠다고?”
“…….”
엘리스는 ‘이런!’ 하는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이래도 고집을 피울 겁니까?”
엘리스는 만지작거리던 손목을 뒤로 감추더니 자세를 반듯하게 했다.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음을 인정합니다.”
“뭐?”
“앞으론 주의하겠습니다.”
“…….”
“끝까지 해보겠다. 이건가?”
“도전이나, 고집이 아닙니다. 보스의 눈빛을 믿기 때문입니다.”
내 눈빛? 내 눈빛이 뭐가 어땠다고?
“그게 무슨 소리지?”
“처음 만났던 날.”
“어.”
“잠시 놀라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그게 전부였으니까요.”
잠깐. 그러니까. 이게 지금…… 이런 남자는 처음이야. 뭐 그 증후군인가?
“처음입니다. 그런 눈빛.”
맞네. 이런 남자 증후군. 그런데 이거 한국 여자 전용 아니었어? 금발에 외국 여자도 통하는 거야?
“솔직히 놀랐습니다.”
아니. 그건 네가 사람 같이 안 생겨서 그런 거지. 마네킹 보고 흥분하는 놈이 이상한 거라고.
“애초부터 그게 아니었다면 서울까지 따라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저를 사적인 눈빛이 아니라 업무적인 관계로 바라본 사람은…….”
“잠깐!”
나는 급히 손을 들어 엘리스의 입을 막았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내가 엘리스의 트라우마 대처품이 된 기분이다. 그리고 내가 의도치 않은…… 오해? 뭐 아무튼 이건 지적하고 넘어갈 문제다.
혹시라도 나중에 배신감이니 어쩌니 하면서 난리를 치면 나만 또 이상한 놈이 되는 거다. 그리고 그 중후군은 나 같이 평범한 남자가 아니라 나쁜 남자 전용 스킬이라고.
어딜 봐서 내가 나쁜 남자냐고.
“첫 번째!”
“네.”
“내가 엘리스를 보고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은.”
“네.”
“엘리스가 마네킹처럼 느껴져서야.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마네킹을 보고 흥분하는 건 이상하잖아. 난 변태가 아니라고.”
“마네킹이요?”
“그래.”
“쇼윈도에 그 마네킹?”
나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아니 왜요?”
“어?”
“내가 왜 마네킹이냔 말입니다.”
“그거야 사람 같이 안 생겨…… 음.”
말을 하다 보니 너무 멀리 와 버렸네. 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두 번째도 말씀해주시죠.”
“두 번 째랄 것까지는 아니고…….”
“어차피 마네킹에게 이야기하는 건데 그렇게 불편한 표정을 지으십니까. 마네킹에게 감정이입 하는 성격입니까?”
히야. 이걸 또 이렇게 반격을 하네. 개인적 관계가 어쩌고저쩌고 남자의 시선이 불편하니 마니 하더니 그래도 여자라 이건가?
“이미 말했었어. 나는 직원이 필요한 거지. 상사가 필요한 게 아니라고. 조언 정도는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지만, 내 의사나 지시에 반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니까.”
“그 부분이라면 충분히 인지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겁니다. 저 자신도 반성을 많이 했으니까요. 로버트가 말했다시피 업무적, 문화적 차이에서 오는 오류였을 뿐입니다. 오류는 수정하면 문제 될 게 없습니다.”
“좋아. 그건 그렇다 치자고. 하지만, 나는…… 이걸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
“편하게 말씀하시죠. 이미 못할 말이 없는 상황입니다.”
“첫 만남 운운하며 이런 남자는 처음이었다고 했잖아.”
“뜻이 살짝 이상하지만, 일단 그렇다고 해 두죠.”
“한국엔 이런 말이 있어.”
“네.”
“이런 남잔 처음이야. 이런 여잔 처음이야.”
“네?”
“정확히 말하자면, 나에게 이렇게 대한 남자는 처음이야.”
“지금 그 말씀은…….”
“응. 엘리스 네가 느끼는 감정 또는 생각이 그 같은 경우라고. 그동안 경험했던 것과 색다른 또는 나에게 도움이 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까지는 좋은데. 나도 남자라고. 언제 어디서 그 생각이 깨질지도 모르고 또 그걸 깼다고 해서 내가 잘못을 한 것도 아니잖아. 어디까지나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엘리스 혼자 느끼고 판단하고 결정한 거니까.”
“…….”
“그러면 당연히 관계가 불편해지겠지. 기존보다 더!”
“…….”
“나는 그걸 감수할 생각이 없다는 걸 명확히 해 두고 싶다.”
엘리스가 유리알 같은 눈동자를 떼룩떼룩 굴리며 내가 한 말의 의미를 확인했다. 그러더니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결과에 책임을 지지 않으시겠다는 그런 말씀이군요.”
응? 아니 왜 그런 결론이 튀어나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네. 인정하겠습니다.”
“뭐?”
“말씀을 들어보니. 그 뭐라고 하셨죠? 이런 남자…….”
“나에게 이렇게 대한 남자는 처음이야.”
“네. 맞습니다.”
“맞아? 뭐가.”
“지금 이렇게 저를 대한 남자는 보스가 처음입니다.”
아무리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그게 사실이라고 대놓고 이야기하면 내가 어색하잖아! 그리고 그게 그렇게 당당하게 인정할 일이야?
“뭐라는 거야?”
“누구도 이렇게 직설적으로. 또 확실하게 관계 개선을 요구한 사람은 지금껏 단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제이코 역시 이런 부분에 있어선 조심스러울 뿐이었죠.”
분위기가 묘하긴 한데, 이상하게 설득력 있네. 이것도 변호사 스킬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
“노력하겠습니다. 저의 감정이나 개인적 견해에 책임을 지실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니 서울에 남아 일하는 걸 허락해주십시오.”
엘리스의 당찬 요구에 이번엔 내가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보스의 그 얼굴. 아마도 이번 일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으셨기 때문이죠?”
“어…… 뭐. 대충 그런 거지.”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고 계신 상태였다면 더더욱 행동을 바르게 해야 했는데. 보스의 말대로 비서로서 실격이었습니다.”
“…….”
“몸 상태가 어떤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어. 뭐. 묻는 것 정도야.”
“알려주십시오. 케어하겠습니다.”
“딱히 몸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고. 배는 좀 고프네. 아, 조금보다는 많이 고파.”
“네. 식사부터 준비하겠습니다. 그리고 새벽 방송 여파와 다양한 매체, 기관에서 연락이 와 있습니다. 그에 대한 보고도 준비하겠습니다.”
“엘리스. 나는 엘리스가 서울에 남는 걸 아직 허락하지 않았어.”
“그래서 쫓아버리실 겁니까?”
“…….”
와! 대놓고 저렇게 바라보니, 선뜻 말이 안 나오네. 열심히 하겠다는데 무턱대고 꺼지라고 하기도 그렇고…….
“한 달. 지켜보고 결정하자.”
“네. 보스!”
엘리스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활짝 웃는 얼굴이 됐다.
얼음 땡이 웃었어? 그것도 활짝?
나도 모르게 심쿵해 버렸다. 물론, 마네킹론(論)에 입각해서 말이다.
‘예쁘긴 예쁘네…… 하지만.’
스크린 속 여배우가 활짝 웃는다고 해서 거기에 감정이입 하는 멍청이는 없잖아. 그냥 잠시 통나무 같던 엘리스가 웃을지도 안다는 사실에 놀랐을 뿐이다.
그래도 한마디 해놓긴 해야겠다.
얼음 땡도 불편하지만, 활짝 웃는 얼굴도 그다지 반갑진 않다. 사람이 아닌 게 사람 흉내를 내는 기분이랄까. 오히려 섬뜩해졌다. 보통 영화에서 강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여자가 남자를 보며 그런 웃음을 지을 땐 언제? 잡아 죽이고 싶을 때다.
“엘리스.”
“네.”
“웃지 마.”
“네? 제 기억이 맞다면 웃는 게.”
“아니. 굳이 웃어달라는 말은 아니었어. 찡그리거나 너무 딱딱하게 행동하지 말라는 뜻을 곡해 한 것 같다.”
“네. 이해했습니다.”
엘리스는 잔잔한 미소 정도로 표정을 관리하더니 밖으로 걸어 나갔다.
엘리스가 밖으로 나오자, 조용하던 비즈니스 룸이 언제 그랬냐는 듯 부산스러워졌다.
“식사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배고픈 시간이기는 하지.”
로버트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경호팀 직원에게 눈짓했다. 그리고 엘리스에게 손짓하더니 한쪽으로 데리고 갔다.
“이야기는?”
“네. 잘했습니다.”
“살짝 언성이 커지는 것 같던데. 보스에게 또 실례를 한 건가?”
“아닙니다. 서로 간에 오해하는 부분이 있었고. 그걸 풀었을 뿐입니다.”
엘리스는 특유의 얼음 땡 기운을 풀풀 풍기며 고개를 저었다.
“그럼 서울 스테이?”
“한 달 한정입니다만, 그 안에 자리를 잡을 생각입니다.”
“다행이군.”
“네?”
“그래도 일은 엘리스가 가장 잘하니까. 나로선 환영할 일이지.”
“네. 문제없게 하겠습니다.”
로버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발길을 돌렸다.
“저기. 로버트.”
“응?”
“보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안색이 좋지 않다는 게 무슨 말이지?”
“아무래도 며칠간 심적으로 스트레스가 많았던 것 같습니다.”
“내가 들어가 보지.”
“네. 부탁드리겠습니다.”
업무적 측면에서 본다면 엘리스 자신이 챙기는 것이 맞지만, 아직은 자신보다 로버트가 움직이는 게 더 낫다.
“하지만 앞으로도 계속 경호팀에 맡겨둘 일은 아니지.”
엘리스는 로버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비서팀으로 이동했다.
“보고서!”
“네. 엘리스!”
멀뚱히 지켜만 보던 엘리스가 팀에 참여하자, 어딘지 어수선해 보이던 비서팀의 움직임이 빠르고 정확해지기 시작했다.
그때 초인종 소리가 나며 방문객이 있음을 알려왔다. 경호팀 한 명이 문을 열고 방문객을 확인했다.
엘리스가 질문을 던졌다.
“누구죠?”
“미스터 박입니다.”
“미스터 박? 아, 박산호.”
엘리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 실장과 임 과장. 그리고 여자 한 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스 고든.”
“네. 미스터 박. 그런데 누구…….”
“오늘 보스와 만남이 예정되어있는 정은영 씨와 함께 왔습니다.”
박산호의 말에 스케줄을 관리하는 비서팀 직원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습니다.”
“그렇군요. 일단 들어오시죠. 폴, 이분들 안쪽으로 안내 좀 해.”
“네. 엘리스.”
“저는 업무처리가 바빠서. 아, 식사는 하셨나요?”
“하하.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아직입니다.”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사양치 않겠습니다.”
박산호 일행은 비서팀 폴의 안내를 받아 이동을 시작했다.
미국의 펜트하우스를 경험했던 박산호와 임성철은 별다른 표정 없이 안으로 들어섰지만, 정은영은 호텔 내부의 화려함에 살짝 눈이 커졌다.
“정은영 씨.”
“네. 실장님.”
“긴장하지 않아도 됩니다. 대표님이 정은영 씨를 보자고 한 것은 도움을 주려는 겁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정은영은 표정을 관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에게 예정돼 있던 비극에 대해 이미 충분히 설명을 들었고 새벽 방송 역시 하나도 놓치지 않고 시청을 했다.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계속 회사에 남아 있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밖의 공간보다는 작지만, 세 사람이 앉아 있기에 충분히 큰 방이 배정됐다.
“식사는 곧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네. 부탁드립니다.”
폴이 방문을 닫고 나가자, 정은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런 곳은 처음 와 봤습니다.”
“솔직히 이야기하면 나도 처음입니다. 스위트룸 정도는 경험해 봤지만, 체어맨 등급은 기업 회장님들도 잘 사용을 하지 않는 공간이니까요.”
“체어맨 등급이요?”
정은영이 궁금한 표정으로 박 실장을 바라봤다.
“국가급 수장, 또는 영빈이 왔을 때 제공되는 곳입니다. 내가 알기로 이 호텔에서도 일 년에 다섯 번 정도밖에는 사용이 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큰 공간을 일 년에 다섯 번 밖에는 사용하지 않는다고요? 낭비 같은데.”
“하하하.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습니다만, 반대로 생각하면 급이 되지 않는 사람은 머물 수 없다는 뜻도 됩니다. 청와대가 비어 있다고 아무나 들어가서 지낼 수 없는 것처럼.”
“아…….”
정은영은 박 실장의 말에 어느 정도 이해가 됐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아깝긴 하네요.”
“여기 하룻밤 묶는데 들어가는 돈을 알게 된다면 그런 말이 쏙 들어갈 겁니다.”
“얼마나…….”
“서비스 포함해서 하루에 사천 정도 생각하면 됩니다.”
“사천만 원이요?”
정은영은 말도 안 된다는 표정으로 박 실장을 바라봤다.
“스위트룸만 해도 몇백은 기본입니다. 외국에는 이것보다 더 비싸고 대실이 까다로운 호텔도 여럿입니다. 일 년에 몇 차례 열지 않는 공간은 단순히 가격으로 평가되지 않죠. 모를 일입니다만, 만약 대표님 밑에서 일을 하게 된다면 앞으로 이런 일은 일상이 될 겁니다.”
정은영은 설마 그런 일이 벌어지겠냐며 부정적인 표정이 됐지만, 박산호 생각은 달랐다. 솔직히 한참 아랫사람이나 다름없는 정은영에게 말을 높이는 것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이진상 상무가 아껴먹고 싶어서 철저히 관리만 하라고 했기에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직접 만나 실물을 보니 사진에 비할 바가 아니다. 벌레떼가 꼬이지 않게 따로 관리하라고 할 만큼 확실히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
가정환경이 열악하다는 점에선 아쉬운 감이 있지만, 외모는 물론이고 그간 회사에서 보인 능력을 생각한다면 주몽의 비서실 직원으로 들어가도 부족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몽과 접점 자체가 악연으로 시작한 데다 아직은 용역 비슷한 처지에 있기에 조금이라도 빨리 자리를 잡고 싶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튼튼한 줄도 하나 잡아 놓으면 금상첨화 아니겠는가.
호텔에서 제공한 식사가 도착하고 세 사람은 나름 흡족한 점심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잠시 뒤, 주몽의 호출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