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1장. 여자친구야?
엘리스와 경찰 사이에 언어 소통에 문제가 생기자, 구석 귀퉁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김덕영이 재빨리 모습을 나타냈다.
“미스 고든. 제가 도와드릴까요?”
엘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김덕영은 곧바로 통역을 시작했다.
“이 스튜디오는 관계자 외 출입이 금지된 장소입니다. 허가받지 않은 침입. 위협, 폭력 사태에 대해 보호를 요청합니다.”
김덕영의 말에 ‘영어 할 줄 아는 사람’을 찾던 경찰이 반가운 표정이 됐다.
“우리도 그 때문에 온 겁니다.”
경찰의 말을 엘리스에게 통역하자, 엘리스는 곧장 데스크 쪽을 가리켰다.
“그럼 저 사람을 체포하면 되겠군요.”
경찰들의 시선이 이진상 쪽으로 이동했다.
“갱스터를 데리고 스튜디오에 난입한 사람입니다.”
“이진상 상무를 체포하면 된다고 합니다. 아, 참고로 여기 이 아가씨는 변호사입니다. 그것도 미국 로펌 소속이니 잘 생각해야 할 겁니다.”
김덕영이 엘리스의 말을 통역하며 은근슬쩍 미국을 들먹였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지만, 여전히 외국인. 특히 미국인이라고 하면 관(官)에서는 껄끄러워하기 때문이다.
경찰은 이진상을 체포하라는 말에 살짝 난감한 표정이 됐다. 지원 요청을 받고 급하게 달려오긴 했지만 고주몽의 신변을 보호하라는 명령만 받았을 뿐, 누군가를 체포하라는 지시는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보고만 있냐고 물어봅니다.”
“크흠. 그게. 우리는 고주몽 씨의 안전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받고 온 거라.”
엘리스가 김덕영을 바라봤다. 경찰이 뭐라고 하는지 알려달라는 눈빛이다.
“대표님을 보호하려고 왔다는군요.”
“그래요? 그러면 당연히 저 사람을 체포해야겠군요. 보스의 안전을 위협한 사람이니까요.”
김덕영은 엘리스의 말을 통역해 경찰에 전달했다.
“안전을 위해서 체포를 해 달라는 말입니다. 이진상 씨가 위협을 한 당사자니까요.”
“그게…….”
경찰은 선뜻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다가 자기들끼리 속닥거렸다.
“어떻게 하냐.”
“선배가 결정해야죠. 여기서 제일 선임인데.”
“미쳤냐. 뭐가 어떻게 됐는지 알고 대왕 그룹 상무를 그것도 혈족을 체포해?”
“그럼 어쩝니까.”
“미치겠네.”
“선배. 우리가 책임질 이유가 있습니까. 그냥 윗선에서 시킨 대로만 하고 애매한 것은 물어보고 움직입시다.”
“그래. 그게 좋겠다.”
경찰은 일단 시간을 버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체포하든 아니면 이대로 돌아가든 상부에 이곳 상황을 알리고 지시에 따르기로 한 것이다.
“당장 위험한 상황은 넘어간 것 같으니. 일단 지켜보겠습니다.”
방송을 지켜보고 있던 네티즌들이 경찰의 머뭇거리는 태도에 곧바로 분노를 쏟아냈다.
▶ 천사한테 마이크 좀 달아주면 안 되나?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 내가 입 모양 좀 읽거든. 이야기해 줘?
▷ 그냥 해. 뭘 물어보고 그래.▶ 천사가 이진상 가리키는 것 보니까. 체포 어쩌고저쩌고하는 걸로 보인다.
▷ 맞네. 현행범이잖아. 조폭들 데리고 들어왔으니까.
▷ 경찰들 표정이 이제 이해된다. 오긴 왔는데, 건드리긴 무서워서 저러는 거다.
▷ 와, 경찰 미친거임? 전 국민이 다 보고 있는데?
▷ 국민들 눈치 보는 경찰이었으면 국회의사당 진즉에 텅텅 비었지.
▷ 헬조선 하루 이틀임? 저거 잡아가도 바로 풀어주는 각. 인정?
인터넷 채팅 글을 확인한 이진상이 피식 웃음을 보였다.
“한 국장님. 저에 대한 체포 글이 올라오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진상의 질문에 한성희는 어색한 표정이 됐다.
“저는 방송인이라 답하기가 곤란하군요. 이런 문제는 법을 아시는 분이 이야기하는 게 맞지 않나 싶습니다.”
한성희의 말에 이진상이 하하 웃음을 보였다.
“그럼 직접 물어보죠. 경찰이 이곳에 있으니 말입니다.”
이진상이 자신의 체포 사항을 직접 확인하겠다는 말에 인터넷이 다시 시끄러워졌다.
“당사자가 그렇게 하고 싶으시다면야.”
한성희는 하 PD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세 사람에게 마이크 채워줘.”
하 PD의 지시에 FD가 바쁘게 움직였다.
마이크 착용을 요청받자, 경찰은 급히 손사래 쳤다.
“아닙니다. 우리는…….”
경찰이 급구 고개를 젓자 하 PD가 직접 나섰다.
“전 국민이 보고 있습니다. 경찰이 제대로 된 입장을 밝히지 않는다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 PD가 협조 부탁한다며 재차 마이크 착용을 밀어붙였다.
경찰 책임자는 재빨리 후배 한 명을 앞으로 내밀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이 친구로 합시다.”
“선배…….”
“네가 해. 산적같이 생긴 내가 나가는 것보다, 멀쩡하게 생긴 네가 나가는 게 좋겠다.”
“아니 그래도 이건.”
“명령이다.”
경찰 책임자는 눈알을 부라리며 ‘지금 이것도 다 찍히고 있거든. 빨리 좀 하자. 어영부영하다가는 내일부터 욕을 바가지로 처먹을 수도 있다고.’ 하며 복화술을 선보였다.
‘아니. 그러니까. 그런 일에 왜 내가 총대를 메냔 말입니다. 막말로 지금 상황만 보면 체포해야 하지 않습니까.’
후배도 능숙하게 복화술을 선보였다.
‘그래서. 체포하겠다고?’
‘그러니까요. 나 보고 어쩌라고?’
‘적당히 분위기만 맞춰줘. 위에서 지시 내려오면 움직이자. 나 솔직히 부담스럽다.’
‘뭐야. 내 목은 나일롱입니까? 왜 나보고 죽으래?’
‘억울하면 계급장 떼든지. 까라면 까.’
‘여기가 군댑니까?’
‘그래서 뭐?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놈들인 건 맞잖아.’
‘아씨. 술 사요. 그리고 일 잘못되면 나 혼자 안 죽습니다.’
‘꼼장어도 산다.’
누가 마이크를 찰지 결정이 되자, 책임자는 후배의 어깨를 두들겼다.
“이 친구가 할 겁니다.”
그렇게 엘리스와 김덕영 그리고 젊은 경찰 한 명에게 마이크 착용이 마무리됐다.
스튜디오에 의자가 추가되고 세 사람은 데스크에 자리를 잡았다.
▶ 오! 여신 등장!
▷ 목소리가 궁금하다.
▷ 하악하악.
사회문제를 이야기하며 열띤 토론을 벌이던 채팅창은 엘리스 등장 이후 살짝 변태스러워졌다. 그래도 생방송 중임을 인지하고 있는지, 다행히도 블록 처리당할 내용은 올라오지 않고 있었다.
“새롭게 출연자가 결정됐습니다. 간단하게 본인 소개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한성희는 젊은 경찰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 네. 저는. 일선 경찰서. 강력. 2반. 박경도 경장입니다!”
▶ 푸하하하. 다큐찍냐?
▷ 본 사건은 일천구백팔십팔 년! 서로 간의 견해 차이에 의해 발생한 사건으로! ― > 경찰청 사람들 재현 방송이다!
▷ 조용들 해 봐. 여신 목소리 듣는 데 방해다.
박경도 경장의 소개가 끝나자, 곧바로 엘리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에이스 로펌 소속, GO 컴퍼니 비서실 대리를 맡고 있는 변호사 엘리스 R 고든입니다.”
김덕영은 시청자들을 위해 재빨리 통역했다.
“호, 변호사시라고요.”
한성희가 살짝 놀란 표정으로 엘리스를 바라봤다. 엘리스가 데스크로 나오고서부터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나상선과 이진상 역시 살짝 눈이 커졌다.
한성희는 시청자들의 성화에 엘리스의 미모를 언급했다.
“같은 여자가 봐도 매우 아름다우신 분입니다. 변호사가 아니라 모델, 배우라고 해도 믿을 정도군요.”
김덕영에게 한성희의 말을 전해 들은 엘리스가 특유의 무표정하고 싸늘한 말투로 한 마디 툭 던졌다.
“대왕 그룹 이진상 상무의 체포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싶답니다.”
“아. 네…….”
정색하며 이야기하는 엘리스의 태도에 한성희는 살짝 당황한 눈빛이 됐다.
정치인이든 연예인이든 평범한 일반인이라고 해도 카메라 앞에 나서면 긴장을 하거나, 조금이라도 잘 보이려고 노력을 한다. 그런데 엘리스는 자신의 용건 외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였다.
▶ 씨바. 카리스마!
▷ 벼. 변호사라니! 저 얼굴에!
▷ 금 숟가락이고 뭐고, 여신 엘리스 앞에선 침 흘리기 바쁘네.
▷ 그러니까. 변호사인데 고주몽의 비서다 이 말인 거야?
▷ 돈은 안 부러운데 비서는 부럽다.
▷ 오. 단호한 거 봐라. 한성희 당황한 거 봤냐? ㅋㅋㅋㅋㅋ
▶ 예쁜데 변호사야. 그런데 말도 잘해. 나 완전 뿅 갔다.
▷ 응. 너 말고도 뿅 간 애들 천지야.
▷ 다들, 진정하고 체포 건에 대해서 들어봅시다. 한국 사람 망신입니다.
▶ 이쁜 걸 이쁘다고 했을 뿐인데, 이쁘다고 말한 게 망신이면 저는 어쩌란.
▷ 하…… 장금이 끝난 지 몇 년인데, 아직도 저런 드랍을 치는 놈이 있네. 그런데 이쁘긴 이쁘다.
▷ 어. 뭐라고 해도 여신 인증.
▷ 카리스마도 인증.
▷ 실화로 한 번만 봤으면 좋겠다.
▶ 엘리스가 비서라고 했으니까. 고주몽은 저 얼굴을 온종일 보는 거네.
▷ 복 받았다. 복 받았어!
쉬지 않고 올라오는 채팅창을 바라보며 내심 실소를 지었다.
하긴 나라도 화면으로만 보고 있다면 ‘어억!’ 하고 눈 돌아갈 만큼 이쁘게 생긴 건 사실이다.
하지만 애들아. 엘리스 저거 극저온 냉동고야. 어설프게 들어갔다간 다 얼어 죽어. 이쁜 것도 적당히 이뻐야 마음이 가지. 마네킹 보고 헉헉거리면 변태 소리 듣는다.
거기다 같이 있으니까 좋겠다고? 한 시간만 같이 있어봐라. 숨 막혀 죽어버릴 테니까.
나는 쯧쯧 혀를 찼다.
“형. 여자친구야?”
“응?”
엘리스에게 시선을 뺏기고 있던 또 한 사람. 나상선이 툭 치고 들어왔다.
“미쳤냐? 아니. 미쳤으니…… 아. 호칭 애매하네.”
“그냥 평소대로 하면 되지.”
“그렇게는 한데. 그래도 방송에선 다들 존칭하던데.”
“지금, 이 방송 말하는 거라면, 그거 진즉에 물 건너가지 않았나?”
나상선은 이제 와 무슨 예의 운운하냐며 히히 웃어버렸다.
썅. 나 보고 웃지 마! 소름 끼친단 말이야.
나상선은 내가 자신의 정체를 모르고 있다고 생각하니 비서실 막내 가면을 쓰고 웃음을 짓고 있지만, 저 웃음과 함께 목숨이 날아갔던 나로선 그저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여자친구냐고.”
“아니. 일 봐주는 로펌의 변호사야.”
“그래?”
개인적 관계가 아니라 공적 업무를 주고받는 관계라고 하자, 나상선의 얼굴이 부쩍 밝아졌다.
‘뭐야. 사이코패스. 너도 반한 거냐?’
나는 어이가 없는 눈빛으로 상선을 바라봤다.
“그럼 내가 말 좀 걸어도 괜찮다는 거지?”
싫어! 어디 중증 사이코패스가 내 변호사에게 찝쩍거리겠다는 거냐!
“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반한 사람이 생긴 것 같아.”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러니까. 형이 좀. 응? 다리도 좀 놔주고. 응?”
그러니까. 지금 내 손으로 중증 사이코패스 살인마에게 엘리스를 넘겨 달라는 뭐 그런 의민가? 엘리스가 누굴 만나든 내가 상관한 바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살인마 새끼와 만나는 걸 멀뚱히 보고만 있을 생각도 없다.
“싫어.”
“아니 왜?”
“방송 중이다. 사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나중이든 언제든 다시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냥 대왕 그룹으로 돌아가서 너희들끼리 사이코패스 짓을 하든 살인마가 되든. 나는 좀 빼주라. 부탁이다.
나와 상선이 옹알거리듯 대화를 나누는 사이, 이진상 체포에 관한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이 됐다.
“엘리스 변호사가 체포 요청을 했다는 말이군요.”
이진상이 엘리스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김덕영이 재빨리 그녀의 말을 통역했다.
“로이어 고든이라고 칭해주십시오.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은 실례입니다.”
“아, 뭐. 그거야 어려운 게 아니니.”
이진상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박 경장님?”
“네. 이진상 상무님.”
“요건이 된다면 체포에 응하겠습니다.”
이진상이 스스로 체포에 응하겠다는 말이 나오자 데스크에 있는 사람들 모두 의아한 눈빛이 됐다. 누가 봐도 이진상이 불리한 입장인데 체포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해도 된다고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