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장. 방송 사고?
이진상과 통화를 끝낸 천기득은 마뜩잖은 표정을 짓더니 다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김 회장님. 저 천기득입니다.”
― 이 늦은 시간에 전화라니. 천 실장은 세월이 지날수록 예의가 없어지는군.
ST 미디어 그룹 김한올 회장은 불편한 감정을 감추지 않았다.
“저라고 이 시간에 전화를 드리고 싶었겠습니까. 단지, 양해를 구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이렇게 전화를 드렸습니다.”
― 양해라.
“네. 양해입니다.”
천기득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전파를 타고 김한올의 고막을 자극했다.
― 용건이 뭔가?
“회장님 방송국에서 전파 낭비를 하고 있어서 말입니다.”
― 전파 낭비?
김한올은 끌끌 혀를 차며 어이없다는 듯 웃어버렸다.
― 그래서. 방송국 두꺼비 집이라도 내려 달라는 말인가?
“필요하다면 해야지 않겠습니까.”
김한올은 당치도 않은 요구에 화가 났지만, 담담하게 반응을 했다.
자정이 넘은 이 시간에 전화해 올 정도면 대왕 그룹에 급한 일이 생겼다는 의미다.
― 특별 생방송 때문인가 본데, 이유를 모르겠군.
“김 회장님도 대왕과 불편해지는 건 원치 않으실 거로 생각합니다만.”
김한올은 천기득의 협박에 내심 웃음을 흘렸다.
급한 건 자신이 아니라 대왕 쪽이지 않은가 말이다.
― 생방송을. 이걸 억지로 멈췄다간 방송사고란 말이지.
“세상 살면서 그런 일이 한두 번이겠습니까.”
― 하지 않아도 될 일에 굳이 힘을 낭비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네만.
“대왕과 관계 개선에 큰 도움이 될 기회입니다.”
― 알아는 보지.
잠시 말이 없던 김 회장이 확인해 보겠다는 말을 꺼내자 그제야 천기득의 목소리도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도움을 주신다면 이번 일. 잊지 않겠습니다.”
― 천 실장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때도 다 있군. 기억해두겠네.
천기득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마를 톡톡 두들겼다.
튀어나온 못 하나 때문에 지지 않아도 될 빚이 생겼다.
천기득이 직원들을 돌아보자, 무슨 지시든 내려만 달라는 듯 반짝이는 눈으로 천기득을 바라봤다.
“고주몽에 대한 것. 그게 뭐가 됐든 간에 내가 모르는 게 없었으면 좋겠군.”
“네. 실장님!”
“그리고 기조 1팀에 전해. 이 상무가 함부로 움직이지 않게 밀착 마크하라고.”
“네!”
“관리 3팀은 JTB 상황 확인하고 법무팀 호출 해.”
“네. 실장님!”
“자금 관리팀. 그룹 주식 변동 상황이 있는지 확인해. 조금이라도 이상한 조짐이 보이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말고 지급으로 보고하고.”
“네. 알겠습니다!”
“심리분석팀 출근시키고 이 상무의 약점이 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지운다.”
“기조 6팀에게 지시해 놓겠습니다.”
폭풍처럼 지시를 내리던 천기득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서랍을 열었다.
다양한 종류의 구형폰들이 덜컹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2G 구형폰 하나를 꺼내 전원을 켜고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나, 천기득일세.”
― 네. 실장님.
“자네 팀이 해줘야 할 일이 있네.”
― 지시만 내려주십시오.
“JTB 방송의 인터넷 반응을 확인해서 문제가 될 내용이 있으면 마킹 처리하고 우리 쪽에 불리한 내용은 최대한 뒤로 밀어내게. 사람들의 시선을 돌릴 수 있는 이슈 거리도 몇 개 준비해 넘겨주지.”
― 네. 실장님. 바로 작업하겠습니다.
지시를 마친 천기득은 서랍에서 다른 구형폰 하나를 더 꺼내 들었다.
“늦은 시간에 미안하군.”
― 아닙니다.
“이슈 거리가 몇 개 필요하네.”
― 용도를 알 수 있겠습니까.
“JTB.”
― 복권 생방송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연예인 이슈나 마약 정도로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국민적 관심이 너무 많이 올라갔습니다.
“그런가.”
― 네.
“자네 판단이 맞겠지. 그럼 더 위에 있는 걸 꺼내서 던지시게.”
― …….
상대가 잠시 뜸을 들이자, 천기득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음 정권 총장 자리는 자네에게 돌아갈 거네. 약속하지.”
― 준비해 보내드리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천기득은 폰을 던져넣고 의자에 깊숙이 몸을 기댔다.
“실장님. 방송 출연자들 모두 이진상 상무의 수행비서입니다.”
“수행비서? 언제부터 소모품을 수행비서라고 불렀는지 모르겠군.”
“죄송합니다. 수발을 들었던 직원들입니다. 확인 결과 모두 퇴사 처리되었거나 자진해서 사표를 쓰고 회사를 떠났습니다.”
천기득은 깍지를 끼고 턱을 괬다.
“김 회장이 손을 쓰겠다고 했어도 우리가 필요한 만큼 시간을 벌어주지는 않을 것 같으니…… 방송 틀어봐. 뭐라고 하는지 직접 들어나 보지.”
“네. 실장님.”
* * *
한성희의 리시버에 PD의 다급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 국장. 사장님 지시입니다. 방송을 중지하라고…….
한성희는 잠시 눈 끝을 찡그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니까. 고주몽 씨는 물론이고 지금 스튜디오에 나오신 분들 모두 대왕 전자 이진상 상무의 수행비서였다는 말씀이군요.”
“네. 그런 셈이죠.”
내 대답에 한성희는 눈을 반짝였다. 방송 전 주몽이 말했던 ‘특종’이 지금, 이 순간을 말한 것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 국장. 어쩌려고요! 사장님 지시가 내려왔다니까요!
한성희는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PD의 목소리에 아예 리시버를 뽑아 버렸다.
카메라 밖에서 다급한 목소리로 방송 중지를 요청하고 있던 PD가 헛바람을 들이켰다.
“씨발. 다 뒤졌다. 국장 눈 돌아갔어.”
“하 PD. 어떻게 좀 해 봐.”
JTB 사장 김만석이 PD를 재촉했다.
“어쩝니까. 국장이 들은 척도 하지 않는데.”
“그럼 광고라도 때려! 자칫하면 대왕과 전쟁을 치를 수도 있다고.”
“미치겠네.”
하 PD는 급히 스케치북을 가져오더니 정신없이 글을 적어 내렸다.
― 국장. 광고 한 번 갑시다. 제발! 이러다 방송사고 납니다. 두꺼비 집 내려간다고요!―
한성희가 바로 확인할 수 있도록 스케치북을 정신없이 흔들어댔다.
하 PD 쪽을 힐끔 확인한 한성희가 미간을 찡그렸다. 두꺼비 집 내린다는 말까지 나왔다는 것은 강제로라도 방송을 멈추겠다는 의미다. 생방송 중에 화면 정지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끝까지 갈지, 아니면 여기서 잠시 상황을 확인할지 고민이 됐다.
하 PD가 다시 뭔가를 적어 스케치북을 흔들었다.
― 회장님 지시!―
사장을 넘어 회장 라인에서 내려온 지시라는 말에 한성희의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말은 방송을 타는 순간 걷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질 것을 의미했다.
지금, 이 스튜디오에서 벌어질 일이 그저 단순히 특종이라는 단어만으론 설명하기 힘든 그 이상의 뭔가가 있다는 말이다.
한성희는 PD 쪽 카메라를 바라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PD는 ‘억’ 소리를 내며 머리를 잡아 뜯었다.
반골 기질 다분한 한성희가 지시를 무시하고 결국 밀어붙이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고주몽 씨.”
“네. 국장님.”
“이 세 번째 안건이 저에게 말씀하신 특종인가요?”
한성희의 입에서 특종이라는 말이 흘러나오자 사장의 안색이 까맣게 죽었다.
“하 PD! 회장님 지시라는 말 못 들었어?”
사장이 터질 듯한 얼굴로 하 PD를 노려봤다.
“어쩝니까. 국장이 계속 가겠다는데.”
“이거 징계로 끝날 일이 아니야! 너희들 밥줄이 달렸다고.”
“젠장. 그렇게 답답하시면 직접 두꺼비 집을 내리시던가요!”
하 PD는 자신도 모르겠으니 알아서 하라는 듯 손을 들어 버렸다.
“너 이 새끼!”
사장이 하 PD의 멱살을 잡고 손을 들어 올렸다. 뺨이라도 올려붙일 기세다.
“내가 이래서 한성희는 물론이고 너희들을 데리고 오는 걸 반대했던 거야! 알량한 기자 정신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말을 안 들어 처먹어!”
하 PD의 표정이 삽시간에 딱딱하게 굳었다.
“자르려면 자르시던가. 방송국이 JTB 밖에 없나.”
개국한 지 몇 년 되지 않는 방송국이라고 해도, 낙하산에 아무리 무능하다고 해도 방송국 사장의 위치는 일개 PD가 함부로 입을 털 수는 없는 존재다.
하지만 한성희가 지시를 거부하고 방송을 강행하는 순간, 자동으로 사표가 제출된 것과 다름없다. 애초에 JTB에 들어 올 때부터 한성희와 묶음으로 들어왔으니 쫓겨나는 것도 결국 그렇게 될 것이다.
어차피 쫓겨날 것. 못할 말이 뭔가.
솔직히 그동안 참아 온 것만으로도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어라 취재하고 준비하면 뭘 하냔 말이다. 보도국 권한을 수시로 침범하질 않나, 툭하면 불가 판정을 내려서 모든 걸 허사로 만들어 억장을 뒤집어 놓던 사장이다.
목구멍이 포도청이어서 참고 살았지만, 맞아가면서까지 일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손 떼시죠. 이거 고소할 겁니다.”
“미쳤어?”
“아, 몰라요. 방송 젓도 모르는 양반이 사장이라고 나타나서는 툭하면 코치야. 그렇게 방송을 떡 주무르듯 하고 싶으면 당신이 PD 하든가!”
하 PD는 사장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너…… 너!”
사장은 황당함을 넘어 분노한 표정으로 PD를 손가락질했다.
“이 바닥에서 밥 먹고 살 생각은 버려야 할 거다.”
방송사고는 이미 벌어졌다. 이제 와서 이걸 막는다고 막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어설프게 건드렸다간 오히려 후폭풍에 쓸려나갈 거라는 판단이 들었다. 하 PD는 고개를 저었다.
“사고는 국장이 쳤으니. 내 밥그릇 정도는 챙겨주겠죠.”
은근슬쩍 국장에게 책임을 전가한 하 PD는 아예 헤드셋을 벗어 버렸다. 이젠 될 대로 되라는 표정이다.
사장과 PD의 소란은 카메라 밖을 넘어 스튜디오 안쪽까지 전달이 됐다.
로버트와 경호원들이 ‘나설까요?’ 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는 방송국 내부에서 일어난 문제다. 외부인인 자신이 끼어들면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튈 수도 있다.
“국장님.”
“네. 고주몽 씨.”
“지금 방송에 문제가 생긴 것 맞죠?”
“호호호. 생방송 중인데, 그런 말씀을 하시면 되나요.”
“위에서 중지하라고 그런 것 같은데.”
“네. 사장에 회장님까지 나서서 방송 중지시키라고 지시가 내려왔다네요.”
한성희는 아예 막 나가기로 했는지,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다는 말까지 대놓고 해 버렸다.
“이젠 예전 같지 않다고 하시더니 여전히 용감하십니다. 하하하.”
“그냥 꼴통이라고 해 두죠.”
방송을 보고 있던 시청자들은 ‘엉?’ 하는 표정이 됐다.
갑자기 사장, 회장이 튀어나오고 방송을 중지시키니 마니 하는 이야기까지 그대로 전파를 타 버렸기 때문이다.
JTB 특별 생방송에서 벌어진 예기치 못한 사건은 금세 다른 방송국에 전해졌고 ‘뉴스 속보’가 되어 또다시 전파를 탔다.
“무리하시는 것 같은데.”
“내가 한때는 전쟁터도 마다하지 않고 뛰어다니던 여자예요. 기자 자존심이 있지. 아무리 사장이라고 해도 이건 선을 넘었어요. 그동안 지긋지긋했는데 잘 됐죠.”
“잘리면 갈 곳은 있으십니까?”
“내가 그걸 왜 고민해요. 돈 많은 분이 앞에 앉아 계시는데.”
“하하하. 지금 이거 생방송입니다.”
“이공계만 지원하지 마시고 이번 기회에 방송 쪽도 관심을 가져보시는 건 어떨까 싶네요.”
여장부라는 말은 들어왔지만, 이렇게 대담무쌍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생방송 중에 이런 사고를 칠 줄이야.
“사실 얼마 전부터 그만둬야 하나 고민이 많았거든요. 언젠간 일어날 사고였는데, 이렇게 든든한 물주가 있을 때 사고가 나서 오히려 다행이네요. 최소한 밥줄은 끊기지 않을 것 같으니까. 그렇게 해주실 거죠?”
“하하하.”
내가 웃음을 보이자, 한성희는 초대 손님들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아직 카메라에 불 나간 건 아니니. 마저 이야기할까요?”
전직 수행비서이자 내 직장 선배들은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는 듯 다들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필리핀 마약범으로 죽을 고생을 했던 선배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들었다.
“제가 먼저 해도 될까요?”
지금이 아니면 앞으론 기회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습이다. 대기실에서부터 눈빛이 만만치 않더니, 죽더라고 할 말은 해야겠다는 표정이다.
“그래요. 언제 방송이 끊길지 모르니. 빠르게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인사 발령을 받고…….”
나는 한성희와 전직 수행비서 김학선의 대화를 들으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제대로 된 방송은 물 건너갔으니 방송이 끊어질 때까지 느긋하게 구경이나 할 생각이다.
그나저나 생방송을 멈출 생각까지 한 걸 보면 대왕 그룹에서 급하긴 급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