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글로벌 벼락부자, 역대급 깽판을 치다-34화 (35/224)

034장. 노오력에 돈을 쓰겠습니다.

“보스는 돈을 어떻게 쓰고 싶으십니까?”

제이코의 질문에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게 참 재미있어요.”

“재미라면 어떤 부분을 이야기하는 겁니까?”

“대학을 졸업하고 첫 번째 목표는 취업에 성공하는 거였어요.”

제이코는 의자에 몸을 기울이며 편안한 자세를 취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들을 때 보통은 앞으로 몸을 숙이던데, 제이코는 오히려 뒤로 뉘는 자세가 집중하는 모양새다.

끼어들지 않고 내 이야기에 집중하겠다는 표시다.

“대왕 전자는 솔직히 리스트에 없던 회사였죠. 내가 가진 졸업장이나 스펙으로는 넘볼 수 없는 그런 회사였거든요.”

나는 캔 맥주 하나를 꺼내 들었다.

냉장고엔 온갖 고급 와인과 들어보지도 못한 고급술들이 즐비했지만, 아직은 맥주에 먼저 손이 갔다.

“제이코도 하나 줄까요?”

“저는 와인으로 하겠습니다.”

제이코는 자신이 즐겨 마시는 와인과 잔을 챙겨왔다.

“처음 합격 소식을 들었을 땐, 전산 오류라고 생각했다니까요.”

내가 전산 오류를 들먹이자 제이코는 쿠쿠 웃음을 보였다.

“그런데, 진짜 합격을 했더군요.”

“기분이 굉장히 좋았겠군요. 보스가 생각했던 것 이상의 결과가 나왔으니까.”

“뭐, 처음엔 그랬었죠. 나름의 포부도 있었고.”

“포부라면 어떤 부분일까요.”

“셀러리맨의 길을 걷는다면 다들 한 번쯤 생각해보는 거죠. 내가 다니는 회사의 대표가 되는 것.”

제이코는 고개를 끄덕이며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뽑았다.

붉고 투명한 액체가 삼 분의 일쯤 잔에 채워졌다.

향을 음미하던 제이코가 다시 질문했다.

“포부도 있었다는 말은, 얼마 되지 않아 포기했다는 말처럼 들리네요.”

“네. 뭐…….”

나는 맥주를 들이켜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제이코도 이제 알고 있잖아요.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보스도 이제 알고 있잖아요. 과거는 더 이상 중요치 않다는 것을.”

제이코는 내 말투를 흉내 내며 씩 웃음을 보였다.

“돈을 어떻게 쓰고 싶냐고 물었죠?”

“네. 보스의 생각에 따라 그에 맞춰서 지출계획을 세워야 하니까요.”

제이코는 투자가 아닌 지출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거의 비슷할 겁니다. 좋은 직장, 만족스러운 월급 그리고 한 몸 뉠 수 있는 집. 착하고 좋은 여자를 만나 결혼하고 아이들을 낳고…….”

“보스. 그건 한국 젊은이들만이 아닙니다. 누구나 하는 생각이죠.”

제이코는 어깨를 으쓱이며 와인을 머금었다.

“하하. 그렇겠네요.”

나는 뻔한 이야기를 늘어놨다며 하하 웃어버렸다.

“첫 월급을 받으면 이걸로 무엇을 할까. 적금을 부어서 만기가 되면 이걸로 무엇을 할까. 그다음엔 또 무엇을 할까.”

“…….”

“나에게 돈이란 그런 거였어요. 내일을 향해 참고 달려갈 수 있는 이정표라고 할까.”

“공감합니다. 그 어떤 대단한 이론을 가져다 붙여도. 궁극적으론 그런 과정에 있죠. 제가 보스를 만나기 전에 꿈꿨던 일들도 그와 다를 바 없으니까요.”

“나를 만나기 전에 제이코는 어땠나요.”

“처음 만났을 때 이야기했었어요.”

“마음에 들지 않는 의뢰인에게 그냥 닥치고 벌 받으라고 하고 싶다던 그 말이요?”

“하하하.”

제이코는 내 말에 큰 소리로 웃어버렸다.

“뭐. 대충은.”

“그냥 제 생각이지만, 제이코는 변호사라는 직업을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아요.”

제이코는 말없이 와인을 들이켰다. 그리고 내가 맥주를 마시고 지었던 것과 비슷한 씁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선택은 언제나 책임을 동반하죠.”

제이코의 말에 나도 동감하는 표정을 지었다.

“네. 누군가 그러더군요.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다시 돈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제이코는 이런 이야기보다 돈 쓰는 이야기가 더 재미있겠다고 했다.

“한국의 복권 중에 로또라는 게 있어요.”

“로또는 한국 말고도 많은 국가에서 발행하는 중입니다.”

“쯧. 대충 넘어가요.”

“네. 로또. 말씀하세요.”

“백만 달러에서 삼백만 달러 정도? 그 정도 당첨금이 나오죠.”

제이코는 계속해 보라는 듯 와인 잔을 흔들었다.

“당첨이 됐든 되지 않았든. 가까운 미래를 설계하기에 적절한 금액이랄까? 차도 사고. 집고 사도…… 직장을 때려치우고 자유 선언을 할 정도는 아니지만, 어떻게 돈을 쓸까 고민할 수 있는 적당한 돈이죠.”

제이코가 무슨 말인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상식 범위 내의 소비를 말씀하시는군요.”

“상식 범위라. 그렇게 이야기할 수도 있겠네요. 아이스크림이 인생의 목표였던 꼬마에겐 쥐어진 돈이 1달러든 100달러든 큰 의미가 없죠. 목표는 아이스크림이 전부니까.”

“하지만, 손에 넣을 수 있는 아이스크림의 개수와 지속해서 구매할 수 있다는 재정 안정성이 확립되죠.”

제이코는 '아이스크림 목표론'에 자신의 생각을 첨삭하며 빈 잔에 와인을 채워 넣었다.

“돈을 어떻게 쓰고 싶냐는 질문을 다른 형태로 바꿔보죠.”

“다른 형태요?”

“네. 예를 들면, 재벌이 되고 싶습니까? 라던지.”

재벌이라. 하긴, 내가 돈이 많다고 해서 재벌이라고 불릴 수는 없는 일이다. 재벌과 부자는 엄연히 다른 개념이니까.

“한국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니 재벌이라는 단어가 꽤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더군요.”

“사전까지 찾아봤어요?”

“우리에겐 없는 단어니까요. 아, 없는 건 아니군요. 콘체른이라는 단어가 존재하고 있으니.”

“콘체른이라면…….”

“한국의 재벌과 비슷합니다. 일정 이상의 자본과 지배구조를 지닌 기업집단? 대충 그런 의미입니다.”

제이코는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한국의 재벌은 일반적인 콘체른 개념에서 좀 더 봉건주의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네요.”

“훗. 우리도 그런 말을 하곤 합니다. 법은 평등을 보장하고 신분적 계층을 인정하지 않고 있지만, 현실은 전혀 다르니까요. 제이코 말대로 재벌은 자본주의 킹덤의 한국식 표현이죠.”

“네. 그래서 묻는 겁니다.”

“재벌이라. 내가 재벌이 되고 싶다면 그에 맞춰 지출계획을 세우겠다는 거죠?”

“물론입니다. 돈이 많은 부자와 지배계층을 둔 자본가는 그 성격이 전혀 다르니까요.”

제이코는 부자와 재벌의 성격을 한 마디로 구분했다.

“그래서 재벌이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은 다른 재벌을 무너트리고 점령에 나서는 겁니다. 과거 귀족들이 벌인 영지 전을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전쟁이 필요하다는 말이군요.”

“당연합니다.”

“하하하. 제이코의 말을 듣고 있으니 질량 보존의 법칙이 생각나네요. 소유자만 달라질 뿐 그 자리에 있던 것들은 변함이 없으니.”

“틀렸습니다.”

다른 재벌의 것을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든다는 말에 그저 생각난 것인데 제이코는 정색한 얼굴로 고개를 내 저었다.

“네?”

“질량 보존의 법칙은 그 가치가 변하지 않습니다. 시간이 걸리지만 결국 본래 모습으로 환원할 수 있죠. 하지만 이 경우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 런가요?”

“굳이 가져다 붙이자면, 엔트로피의 증가가 더 정확한 말입니다.”

엔트로피? 학교 다닐 때 언 듯 배웠던 것 같기도 한데, 용어의 정확한 개념이 떠오르지 않았다.

“물질이 변형되어, 원래의 상태로 환원될 수 없는 현상을 말합니다. 자원이든 인력이든 한정적입니다. 질량 보존의 법칙이 인간사에 적용이 된다면 굳이 뺏고 뺏는 싸움을 할 필요가 없죠. 적당히 나눠 쓰면서 인생을 즐기면 될 테니까요. 그런데 현실도 그렇던가요?”

“제이코가 그렇게 정색하면서 이야기한 거 처음 봐요.”

“보스.”

“네. 제이코.”

“보스의 말엔 상대를 강제 할 힘이 있습니다. 언제나 그걸 명심하세요.”

한마디로 요약하지만, 함부로 떠들지 말라는 뜻이다. 수시로 듣는 말이지만, 여전히 익숙지 않은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말이 주는 의미가 어떤 것인지 정도는 이해하는 중이다.

“미안해요. 깊게 생각하고 진지하게 이야기할게요.”

내가 사과를 하자, 제이코가 슬쩍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제 말이 지나쳤습니다. 사과드립니다.”

“아니요. 언제든 좋으니까. 해야 할 말이 있을 땐 망설이지 마세요. 나는 아는 것도 부족하고 경험도…… 이제부터 쌓아가야 하잖아요.”

나와 제이코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크흠. 그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갈까요?”

“네. 재벌이 되고 싶냐고 물었죠?”

“되고 싶습니까?”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엔트로피의 증가보다는 그 반대 현상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듭니다.”

“엔트로피의 반대 현상이라…….”

“예를 들면 개념적 측면에서 접근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설명이 필요하겠군요.”

제이코는 와인을 추가하며 몸을 느긋하게 만들었다.

“공장과 노동자의 재벌이 아니라 지식의 재벌은 어떨까요?”

“호~! 연구와 특허 분야를 말하는 거군요.”

제이코는 내 말을 단박에 알아들었다.

“네. 어떻게 생각해요?”

“미래가치의 선점입니다. 마다할 이유가 없죠. 어쩌면 보스에게 최상의 선택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이코는 마음에 든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 * *

나는 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당첨금 중 일부를 한국에 투자금으로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일부라면 어느 정도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백억 달러입니다. 우리 돈으로 십조가 넘는 돈이죠.”

“와우. 십조가 넘는 돈이라. 엄청난 금액이군요. 혹시, 국내 기업에 투자할 생각입니까?”

한성희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이 돈은 철저하게 개인에게 투자할 생각입니다.”

“네? 십조가 넘는 돈을 개인에게 투자한다고요?”

어마어마한 금액을 개인에게 투자한다는 말이 흘러나오자, 인터넷 채팅창이 또다시 폭발하기 시작했다.

“한국의 유행어 중에 노력 말고 노오력이라는 말이 있죠?”

내 질문에 한성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하지만 좋은 의미로 쓰는 말은 아닙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와 관련해 이야기할까 합니다.”

노오력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겠다는 말에 한성희는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십조가 넘는 투자금과 노오력이 무슨 상관관계를 가졌는지 파악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전국에 계신 이공계 학생, 연구자 여러분. 여러분의 노오력에 투자를 하고자 합니다. 이쪽 분야에 계신 분들은 공돌이를 갈아 넣는다. 통조림 한다는 등의 말을 잘 알고 계실 겁니다.”

나는 카메라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말을 이었다.

“남 좋은 일 그만 시키세요. 아무리 노오력하고 개발에 전념하면 뭘 합니까. 여러분에게 떨어지는 것은 성과급 몇 푼이 전부인데 말입니다.”

― 고주몽 씨. 선동성 발언은 자제를…….

방송이 시작되고 온갖 곳에서 연락을 받는 PD는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주몽을 바라봤다.

“그 노오력,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본인을 위해서 하시길 바랍니다. 통조림을 당해도 본인 스스로 당하고 맷돌에 갈려 나가도 직접 어처구니를 잡는 사람이 되십시오.”

“저기. 고주몽 씨. 지금 그게 무슨 말씀인지.”

리벤지 파운데이션에 이어 또다시 엉뚱한 말을 꺼내 들자 한성희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특히나 지금 하는 이야기들은 정부나 연구소, 관련 기업들에 굉장히 불편한 말들이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한국에 들여온 투자금 백억 달러는 십 원짜리 한 장까지 여러분의 연구비로 투자가 될 겁니다.”

“투자금 전부를 말입니까?”

한성희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디어와 실력을 갖췄음에도 날품팔이를 해야 했던 이공계 여러분. 망설이지 말고 저에게 연락을 주세요. 말도 안 되는 연구주제라도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망설이지 않고 투자하겠습니다. 그러니, 백 년짜리 계획서라도 망설이지 말고 가지고 오세요.”

나의 투자 제안에 한성희는 물론이고 방송을 보고 있던 이공계 출신 인력들 모두 입이 쩍 벌어졌다.

“저는 이 방송을 보고 있는 여러분이 미래의 노벨상 수상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노벨상이 그 나라 과학의 척도라고 보기엔 너무 무리수 아닌가요?”

“하지만, 수상자가 많은 나라일수록 더 많은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죠.”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대한민국의 발전을 놓고 본다면 무관의 제왕이라는 말도 종종 있습니다만, 그것과 이것은 별개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기초연구 분야를 등한시하고 눈앞의 성과만 안달하는 정부와 기업들에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금은 위험한 발언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한민국은 남북전쟁 이후 세계 최빈국으로 내려앉은 역사가 있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가 놀랄 정도로 놀라운 성장을 이뤄냈죠.”

한성희는 눈앞의 성과를 보고 달려온 것을 마냥 부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고 했다. 어떤 방식이든 현실에 맞는 또는 요구하는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 * *

카메라 밖에서 열심히 인터넷 반응을 확인하던 김덕영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갑자기 입을 다무는 거지?”

인터넷 반응을 실시간으로 읽어주던 김덕영이 갑자기 말을 멈추자 로버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게 말입니다. 입이 좀 험한 녀석들이 있어서…….”

“듣기 불편한 내용인가?”

“하하.”

김덕영이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뭐, 상관없다. 모두 캡처해 두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관련 팀을 꾸려뒀습니다. 선 넘은 글들은 모두 캡처하라고 했으니…….”

“보스가 그러더군. 생각 없이 함부로 말하는 놈들에겐 인생이 왜 실전인지 보여주면 된다고.”

로버트는 담담한 표정으로 인생실전론을 입에 담았다.

“그럼요. 인생은 실전이죠. 연습이 어디 있겠습니까.”

김덕영은 로버트의 말에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계속 읽어. 놈들이 보스에게 뭐라고 하는지 내 귀로 똑똑히 들어야겠으니까.”

“듣기 거북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신나게 키보드를 두들겨 대고 있는 철없는 인간들에게 김덕영은 조용히 명복을 빌어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