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글로벌 벼락부자, 역대급 깽판을 치다-29화 (30/224)

029장. 다녀왔습니다.

이진상은 한심하다는 듯 박산호를 바라봤다.

“고주몽의 위치를 아직도 확인하지 못했다고?”

“죄송합니다.”

박산호는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에이스 로펌이라고 했던가?”

“네. 상무님.”

“보기보다 실력이 좋은가 보네. 대왕 그룹 기조실에서 한 달이 넘도록 흔적조차 찾아내지 못하는 것을 보면.”

“…….”

“일주일도 아니고 한 달이 넘도록 손을 대지 못했다라…….”

이진상은 재미있다는 듯 웃음을 지었다.

잘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장롱 밑으로 굴러 들어갔는데, 아무리 손을 휘저어도 잡히지 않는 느낌이랄까.

“손으로 안 되면 물건을 써서 끄집어내야지.”

“미국 법원에 서류가 접수된 상태입니다. 자칫…….”

“자칫 뭐?”

“긁어 부스럼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진상은 ‘흠’ 하는 소리를 내더니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부스럼이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잖아.”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박산호 실장.”

“네. 상무님.”

“기조실장이 언제부터 이렇게 겁쟁이가 되셨을까?”

이진상은 박산호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맡은 일도 제대로 해치우지 못하고 말이야. 고주몽 집안이 그렇게 대단해? 긁어 부스럼이 될 정도로?”

“아닙니다. 시골에서 농사짓는 집입니다.”

“그래. 그런데 무슨 부스럼이야. 고주몽이 꼭꼭 숨어서 나오지 않고 있으면 수풀을 흔들어줘.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라면 모를까. 가족들 걱정은 하지 않겠어?”

“…….”

박산호는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박 실장!”

“네. 상무님.”

“평소처럼 처리하라고. 왜 자꾸 뜸을 들여. 일을 맡았으면 책임을 져야지.”

“상무님. 죄송합니다.”

박산호는 다시 한번 면목이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아까부터 뭐가 그렇게 미안해?”

“소송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고 대리의 가족들도 건드릴 수 없고 말입니다.”

“장난해?”

“에이스 로펌에서 가족들까지 관리하고 있습니다. 함부로 다가갔다간 오히려 덜미만 잡힐 겁니다.”

박산호의 말에 이진상이 ‘푸!’하고 숨을 내뱉었다.

“대왕 그룹 기조실도 다 옛말인가 봐. 이 정도 일도 처리를 못 해서 소송씩이나 하게 만들고 말이야.”

박산호는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조심스럽게 올렸다.

“제대로 모시지 못한 점.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제가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습니다.”

“뭐야, 이거. 사표?”

“네.”

“아 놔. 사표 내는 게 유행도 아니고. 지금 뭐 하자는 거야!”

이진상이 결국엔 성질을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였다.

“회장님께서 아시게 됐습니다.”

“뭐?”

이진상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쪽은 잘 틀어막고 있었잖아.”

“그룹 법무팀이 움직였습니다. 제가 막을 수 있는 선을 넘었습니다.”

“젠장. 그러게 그전에 정리했어야지!”

“죄송합니다. 저뿐 아니라 기조실 식구들 모두 이번 일에서 제외됐습니다. 비서실장님이 직접 움직이실 것 같습니다.”

“젠장. 그 늙은이가?”

박산호의 입에서 비서실장이란 호칭이 흘러나오자 이진상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안하무인으로 날뛰는 이진상이라해도 비공식적으로 그룹 부회장 직위를 가지고 있는 그룹 비서실장 앞에선 고양이 앞에 쥐다.

이진상은 책상 위에 올려진 봉투를 들어 쫙쫙 찢어 버렸다.

“그러면 더 사표를 내선 안 되지!”

“상무님께는 예의상 제출한 겁니다. 제 소속은 전자가 아니라 그룹 본사지 않습니까. 회장님 허락도 없이 상무님 일을 도와 드렸다는 게 알려져서 기조실 전체가 통째로 분해됐습니다.”

정확히는 이진상과 떨어지기 위해서 자폭을 했다는 말이 맞지만, 앞에서 티를 낼 이유는 없다.

“젠장! 일단 가서 기다려. 비서실장과 직접 만나서 담판을 지을 테니까. 이번 기회에 아예 전자로 자리를 옮겨.”

박산호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상무실을 벗어났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임 과장이 박 실장을 반겼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어떻게 되긴. 내일 방송이 나가고 나면 그룹이 발칵 뒤집힐 거야. 그러니 고 대표 사람들에게 딱 달라붙어서 몸 상하는 일 없도록 해. 다들 알지? 이젠 돌이킬 수 없어.”

“알고 있습니다. 어차피 이대로 그룹에 남아 있다고 해도 무사하긴 글렀습니다. 다른 팀들과 달리 우리는 하는 일이 좀 그렇지 않습니까.”

“미국으로 보낸 가족들은?”

“새벽에 도착했다고 에이스 로펌에서 연락 왔습니다.”

“정은영은 퇴사 처리됐지?”

임 과장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따로 만나서 상황 설명하고 가족들과 안전한 곳에 숨겨놨습니다. 직원들이 옆에 붙어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일 고 대표 일이 끝나고 나면 같이 만날 거야. 문제 안 생기게 관리 잘해. 전임자들은?”

“장 변호사와 함께 있습니다. 방송국 근처에 숙소를 마련해서 대기 중입니다.”

“장 변도 마음 단단히 먹었나 보군.”

“장 변호사도 기조실 뒤처리 변호사보단 에이스 로펌에 소속되는 게 백배 나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힘들게 공부해서 변호사까지 됐는데 기껏 한다는 일이 깽값 물어 주러 다니는 게 전부였으니. 말은 안 해도 자괴감이 들었을 거야.”

“솔직히 그동안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저도 그렇고 기조실 애들도 전부 같은 마음입니다.”

“이 상무 옷자락이라도 잡고 기조실 벗어나고 싶었던 게 그 때문이었나?”

“그건 실장님도 같은 마음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결국엔 이 일을 벗어나지 못할 팔자였나 봐. 고 대리. 아니, 고 대표 쪽에 가서도 비슷한 일을 하게 생겼으니.”

“그래도 지금보다는 낫겠죠. 최소한 불법적인 일은 안 할 것 아닙니까.”

“오히려 더 힘들지도. 고 대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진 모르겠지만, 대왕 그룹과도 거침없이 소송하는 걸 보면…….”

“다른 재벌들이나 정치인들과도 그다지 사이좋게 지낼 것 같지는 않다는 말이죠?”

“그쪽에서 암수를 가해오면 그걸 막아야 하니.”

임 과장은 히죽 웃음을 흘렸다.

“그래도 되치기만 잘하면 나름 재미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솔직히 그동안 더러운 꼴을 너무 많이 봐놔서 그 인간들 엿 먹는 걸 보면 되레 스트레스가 풀릴 것도 같고.”

임 과장의 말에 고개를 피식 웃음을 보인 박 실장은 차에 올랐다.

“가면서 이야기하자. 주왕시라고 했지?”

“네!”

* * *

“보스. 일어나시죠. 거의 다 도착을 했다고 합니다.”

단잠을 자던 나는 로버트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창밖을 내다보니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대왕 전자 입사를 축하하며 동네잔치를 벌였던 그 날 이후. 가끔 전화 통화만 했을 뿐, 이렇게 집에 온 것은 2년 만이다.

“김덕영 씨.”

“네. 대표님.”

“할아버지와 부모님 모두 잘 지내시죠?”

“네. 아주 잘 지내십니다. 갑자기 경호원이 붙고 종일 따라다니면 불편해하실 만도 한데, 평상시처럼 지내시더라고요. 대표님 내려오시면 잔치를 벌이신다고까지 하시더군요.”

겉으론 크게 내색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이래저래 걱정이 많으실 것이다.

“대표님. 도착했습니다.”

경호 차량과 비서팀 차량 거기다 내가 타고 있는 롤스로이스까지 까맣고 번쩍이는 차들이 집 앞에 줄줄이 멈춰서자 대문이 벌컥 열리며 할아버지와 부모님이 달려 나오셨다.

하지만 선뜻 차에 다가오지 못하고 머뭇거리셨다.

마음 같아선 당장 차에서 내려 달려가고 싶었지만, 이동 간 경호에 관해선 무조건 로버트의 말을 듣기로 했기에 마음을 진정시키며 차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먼저 차에서 내린 로버트가 경호팀을 지휘해 공간을 확보했다.

이미 김덕영이 고용한 경호팀이 주변 안전을 지키고 있었지만, 로버트는 그들을 그림자 취급하며 철저히 매뉴얼대로 행동했다.

“보스. 내리시죠.”

“고마워요. 로버트.”

내가 차에서 내리자 머뭇거리고 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가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다녀왔습니다.”

내가 인사를 하자 그제야 말문이 트이셨는지 바쁘게 다가오셨다.

“주몽아.”

“아들!”

“울 장손 왔나.”

“모두 건강하시죠.”

나는 활짝 웃는 얼굴로 큰절을 올렸다.

“옷에 흙 묻는다. 어서 일어나.”

할아버지가 내 어깨를 감싸 일으켜 세웠다.

“헤헤. 장손이 돌아왔습니다. 할아버지.”

“오냐. 그래. 어서 들어가자.”

“네! 아버지. 어머니. 아들 왔습니다.”

“그래. 몸 상한 곳은 없지?”

어머니가 내 몸을 만지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럼요.”

“들어가자. 안 그래도 너 온다고 해서 종일 기다렸다. 일이 손에 잡혀야 말이지.”

활짝 열린 대문을 지나 마당에 들어서자 경호팀이 집 주변을 단단히 감쌌다.

“로버트. 적당히 해요.”

“아닙니다. 보스.”

로버트는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 보라며 고개를 저었다.

“저 사람들은 다 누구다냐?”

할아버지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로버트 일행을 바라봤다.

“경호원들입니다.”

“덩치들이 어마어마하네. 미국 사람들이냐?”

“네.”

“저 사람들도 들어오라고 해라. 밖에 저렇게 서 있으면 동네 시끄럽다.”

할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골집이지만 마당이 좁은 것도 아니고 저렇게 밖에 세워두는 것보단 나을 것이다.

동네 사람들도 밖으로 몰려나와 고개를 기웃거렸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이지만 로버트와 경호원들 때문에 선뜻 다가오는 사람은 없다.

“로버트. 할아버지가 다 들어오라고 하네요. 동네 사람들 신경 쓰인다고.”

“아닙니다. 이런 일은 예외가 없어야 합니다. 비서팀과 대동하시죠. 각자 맡은 바 임무가 있으니 그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아무래도 로버트를 설득시키는 것보다 할아버지에게 설명해 드리는 쪽이 빠를 듯싶다.

“그러니까. 자기들 해야 할 일이라고 그냥 있겠다고?”

“네.”

“알았다. 일단 들어가자.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이야기 좀 들어봐야겠다.”

방 안으로 들어간 나는 세 분을 모시고 그간 있었던 일들을 차분히 설명해 드렸다.

“한동안 떠들썩했던 그 복권 당첨자가 우리 주몽이었다니.”

“그래. 그런 일이 있었구먼. 허허. 그래서 그 복권 당첨금이 얼마라고?”

“우리 돈으로 800조가 넘습니다.”

나는 조심스럽게 금액을 말씀드렸다. 너무 놀라서 심장에 무리가 가면 어쩌나 싶은데, 내가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다.

“너무 큰 돈이라서 그런가? 그런가보다 싶네.”

할아버지의 말에 아버지가 한마디 보탰다.

“그러게 말입니다. 백 억짜리 로또에 당첨됐다고 하면 억! 하고 뒤로 넘어갔을 건데, 조조 그러니까 이게 상상이 안 되네요. 하하.”

두 분 말씀에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여셨다.

“그러면 회사는…….”

“그만뒀어요.”

“아니 왜. 그래도 회사는 다니지.”

어머니 말씀에 아버지가 쯧쯧 혀를 차셨다.

“하여간에. 대왕 그룹 회장보다 돈이 많다잖아. 그런데 그 밑에서 어떻게 일을 해.”

“그건 그렇긴 한데. 아까워서 그렇지. 주몽이가 회사 들어가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었는데.”

“그런 소리는 그만하고. 그래서 앞으로 뭘 어떻게 할 생각이냐? 팽팽 놀면서 십 대가 먹고 놀아도 될 돈이긴 하다만.”

먹고 놀자고 하면 십 대가 아니라 백 대도 먹고 놀 돈이지만, 아버지는 앞으로 계획이 궁금하신 표정이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앞으로 좀 바쁘게 돌아다닐 것 같습니다. 어려운 사람들도 돕고 제 회사도 하나 차려서 일도 하려고 생각 중이거든요.”

“그런 일을 하려면 이것저것 알아야 할 것도 많을 것인데…… 그러다 괜히 돈만 날리고 그러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사업이 돈만 있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아버지는 걱정 섞인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당연히 그렇죠. 그래서 전문가들도 만나고 함께 일할 사람도 찾아볼 생각입니다. 지금도 도와주는 변호사분들도 계시고 말입니다.”

내 말에 할아버지가 마당에 서 있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저 사람들 말이냐?”

“네. 저 사람들도 그렇고 미국에 조언을 해주는 분이 있습니다. 사실 여기까지 오는데, 그분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다고 하니까 그래도 다행이다마는.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간에 사람들 말 안 나오게 하는 게 중요해. 세상에서 젤 무서운 게 구설수여.”

아버지는 엉뚱한 곳에 돈을 날리면 어쩌나 걱정하시는 눈빛이지만, 할아버지는 갑자기 없던 돈이 생기면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한둘이냐며 언행에 조심할 것을 이야기하셨다.

“네. 할아버지.”

“대답만 하지 말고. 저기 적송면 면장 아들 기억나냐?”

적송면 면장 아들이라면 나보다 다섯 살 위 형이다.

“아. 네. 시내에서 오토바이 장사하는 정식이 형 말씀이시죠?”

“그래. 그래도 그놈이 어렸을 땐 인사도 잘하고 착실했잖냐.”

할아버지 말씀에 고개를 끄덕였다.

친하게 지내진 않았지만, 그럭저럭 소식은 듣고 지내던 사이다.

“그놈이 베트남인가 어딘가로 중고 오토바이 파는 장사를 해서 돈을 엄청나게 벌었어.”

“그래요? 잘됐네요.”

“잘되긴 뭐가 잘 돼. 손에 돈 좀 만지더니 싹수라고는 하나도 없어졌어. 가게에서 일하는 애들이 다 동네 사람들이었잖냐.”

“네…….”

“그런데 옳은 말 몇 마디 했다고 사람 모가지를 냉큼 잘라버리면 되겠냐 안 되겠냐. 똥오줌 못 가리고 장사 시작할 때 이래저래 도움 준 것이 적지 않은데. 그새 변해서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느닷없이 직원을 해고했다는 말이 뜨끔한 심정이 됐다.

나도 고향에 내려오는 동안 엘리스를 해고해버렸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그랬다고 생각하지만, 할아버지 말씀을 듣고 있으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과거의 고주몽과 지금의 고주몽이 같을 수는 없다.

주변 상황이 많은 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내가 그동안 당하고 살아온 게 있기에 적어도 이진상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한 바가 있다.

그런데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것처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변해 버린 건 아닌지 내심 걱정이 됐다.

“사람이 일을 하다 보면 이래저래 말싸움도 나고 서운한 것도 있고 당연히 그러는 건데 올챙이 적 생각 못 하고 그렇게 함부로 행동하면 되겠냐 안 되겠냐. 한평생 살붙이고 산 부부도 툭하면 싸우는 게 사람이다. 언제나 멀리 보고 사람을 대해야 한다 이 말이다.”

“네. 그렇죠.”

“달다고 삼키고 쓰다고 뱉어버리면 애들이랑 다를 바가 없어. 어른이 아닌 것이여.”

“네…….”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 난 거 아니다. 너는 명심하고 절대 사람 가슴에 못 박는 짓은 하지 말아. 내가 걱정하는 것은 그게 전부다. 돈 좀 생겼다고 사람이 변하면 안 되는 것이여.”

한 번 말문이 트이시니, 본래 모습처럼 거침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으셨다.

“…….”

“너도 취직하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었냐. 그런데 내 손자를 누가 그렇게 툭 잘라버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한동안 맘고생을 좀 했다. 고향 떠나서 외지 생활하면 누구 기댈 사람도 없을 것인데 그런 일을 당하면 얼마나 황망하겠냐.”

내가 한 짓이 있었기에 선뜻 대답을 못 하고 머뭇거리는데, 어머니가 한 말씀 끼어들었다.

“그래. 돈 좀 생겼다고 헤프게 쓰면서 술이나 먹고 다니고 그러면 큰일 난다. 몸 상하면 돈이고 뭐고 다 필요 없어.”

손자가, 아들이 수백조 부자가 되었다는 데도 돈보다 자식 걱정이 먼저인 분들이다.

“네. 명심할게요.”

“오늘 바로 올라가는 건 아니지?”

“네. 어머니가 해주신 밥도 먹고 두 분이랑 막걸리도 한잔하고 그래야죠. 오늘은 자고 내일 올라갈 겁니다.”

“그래. 안 그래도 내가 장 좀 봐 놨다.”

“같이 온 사람들이 한둘도 아닌데, 동네 사람들 불러서 손 좀 보태라고 해라. 울 장손이 출세해서 저렇게 미국 경호원까지 데리고 왔으니 잔치는 한 번 벌여야지.”

“네. 아버님.”

“아범은 왕 이장한테 전화하고. 거의 2년 만에 동네 잔친데 올 사람은 다 오라고 해.”

“네. 알겠습니다.”

“주몽이 너는 멍석 깔…… 아니다. 너는 데리고 온 사람들 챙겨야제.”

“아니요. 제가 할게요. 손도 많은데 같이 해야죠.”

“그래. 그럼 힘 좀 써봐라. 멀리 미국에서 여기까지 왔는데 저 사람들도 밥은 먹여서 보내야지.”

“네. 할아버지.”

내가 마당으로 내려가자 할아버지는 함께 온 사람들을 둘러봤다.

세상이 바뀌어서 TV만 틀어도 외국인들이 심심치 않게 나오지만 그래도 눈앞에서 노랑머리를 코쟁이를 보는 건 색다른 느낌이 드시는 모양이다.

“허허. 아무튼,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여. 내가 코쟁이들하고 막걸리를 다 마실 날이 오고.”

나는 마당 한구석에 멀거니 서 있는 엘리스에게 다가갔다.

“엘리스.”

“네.”

“음. 그게…….”

“?”

“아까 차에서 말이야. 내가 좀 성급하게 행동했던 것 같아서. 괜찮다면 따로 시간을 내서 그 부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 어떨까 싶은데. 그런 이야기를 오는 중에 차 안에서 그렇게 할 것은 아니었다 싶은 생각도 들고.”

엘리스는 표정 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제 행동과 말에 대해서 생각을 하던 참이었어요. 보스가 그렇게 이야기를 꺼냈을 땐 나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이었을 테니까요.”

엘리스는 담담한 목소리로 자기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래. 그렇게 하자. 물론 내가 내린 결정을 손바닥 뒤집듯 하고 싶진 않아. 나도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서 그랬던 거고 지금도 엘리스의 행동이 과하고 앞서 나갔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어. 그런데 이게 앞으로 살아가면서 내가 한 실수 중에 하나로 남는 것도 바라지 않아. 그러니까…….”

“네. 어떤 결정을 내리던 받아들일게요. 오히려 보스가 먼저 이렇게 이야기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저도 제 성격에 문제가 많다는 걸 모르진 않아요. 그리고 저 역시 후회를 담고 싶진 않아요. 그러니 진지하게 대화에 임하겠습니다.”

내가 할아버지 말씀을 듣고 가슴이 뜨끔해졌다면, 엘리스 역시 나름대로 내가 그런 결정을 내린 것에 고민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 그렇게 하자.”

돌아서서 창고 쪽으로 걸어가는데 왠지 창피한 기분이 들어 얼굴이 화끈해졌다.

올챙이 적 생각 못 하면 어린애와 다를 바 없다는 할아버지 말씀이 자꾸만 심장을 쿡쿡 찔러댔다.

나는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젠장, 이래서 졸부란 말이 생겨났나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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