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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벼락부자, 역대급 깽판을 치다-28화 (29/224)

028장. 쏘리.

오전 스케줄을 마무리 짓고 주왕시로 이동하는 차 안.

엘리스는 아까부터 뭔가를 묻고 싶어 하는 눈빛을 보였다.

“그냥 물어봐. 왜 그런 표정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입니다.”

“이해?”

“네.”

어떤 부분에서 이해가 필요할 정도로 궁금증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확실히 물어봐. 어중간하게 말 던지지 말고.”

“에이스 로펌은 보스 소속으로 만들었지 않습니까. 에이스 로펌에 비하면 제일 로펌은 규모가 큰 것도 아닌데 그 정도는 얼마든지 손에 넣을 수 있었지 않습니까.”

“아…….”

그제야 엘리스가 뭘 궁금해하는지 이해를 했다.

“투자만 한 게 의아했나 보군.”

“네.”

엘리슨 고개를 끄덕였다.

“투자는 언제든 돈을 빼 버릴 수 있지만, 구매해 버리면 반품이 안 되잖아.”

“반품이요?”

엘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상품에 신뢰가 없잖아.”

“그건 에이스 로펌도 마찬가지 아니었나요?”

엘리스가 더욱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땐 발등에 불 떨어진 상황이라, 이것저것 가리고 말고 할 겨를도 없었고. 무엇보다 에이스 로펌은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생면부지였으니까.”

“그건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제일 로펌 역시 첫 만남이었으니까요.”

“푸흣.”

“무슨 뜻입니까?”

“똑똑한지 알았는데, 은근히 빈 구석도 있는 것 같아서 웃었어.”

“…….”

“에이스 로펌이 정식으로 내 손에 들어온 것은 당첨금이 수령된 다음이야. 그전까지는 그저 말뿐인 거래였단 말이지.”

지금 생각해보면 제이코도 참 재미있는 사람이다.

당첨자보다 더 신나서 흥분하던 모습이 떠오르자 슬쩍 웃음이 나왔다.

많고 많은 로펌 중에 에이스에 찾아갔던 거야말로 행운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로펌이나 변호사는 겪어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자신이 생각하던 보통의 변호사와는 확실히 달라 보였다.

엘리스는 계속 이야기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와 지금의 차이가 뭐라고 생각해?”

“말뿐이었던 계약이 실체화되었다?”

“아니지. 돈이 들어오기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제이코는 내가 가진 돈이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넘치도록 이해를 했어. 당첨자인 나보다도 더.”

“제일 로펌은 다르다는 말인가요?”

“당연히 다르지. 그들은 내가 가진 돈보다 대왕 그룹의 눈치를 봤으니까. 한국에선 말이지.”

“네.”

“아무리 돈이 많아도 쉽사리 대우해주지 않아.”

“의미는 다를지 모르겠지만, 그건 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가? 그래도 미국은 부자가 존경받는 사회라고 들었는데.”

내가 어설픈 상식에 빗대어 이야기하자 엘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부자는 존경받죠. 그가 얼마나 노력을 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척도니까. 물론 도덕적 기준을 제시한다면 다른 이야기 되겠지만.”

“크크. 하긴 어디서든 벼락부자, 아니 졸부는 인정받기가 어렵지. 지금 내가 가진 돈은 내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철저히 운에 의한 것일 테니까.”

내 말에 엘리스는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그래서요?”

“그래서는 무슨. 한국에서 대왕 그룹의 힘은 무소불위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라는 거지. 내가 아무리 많은 돈을 제시했다고 해도 제일 로펌은 절대 자신들을 팔지 않았을 거야.”

“왜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힘의 척도나 다름없는데. 제이코가 말하길 한국은 그런 문화가 다른 곳보다 더 강하다고 하던데.”

엘리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여줬다.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해.”

엘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국은 작은 나라야. 그래서 특정 직업군들은 얽히고설켜서 한 다리만 건너도 다들 아는 사이거든. 그 말은…….”

“그들 그룹에서 배척받을 수도 있다는 말이군요. 그리고 그 말은 언제든 자신들 입장에 따라 말을 바꿔 탈 수도 있다는 말이 되는군요.”

“그건 나도 모르지. 그걸 알았다면 적당히 돈만 담그고 물러날 이유도 없었을 테고. 제일도 그 조건을 받아들였을 리 없으니까. 뭐랄까. 서로 적당히 간을 봤다고 하면 적절하겠군.”

“신뢰할 수 없다는 말. 이제 이해했어요. 한국 사회가 지연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것도.”

“그래. 아무리 잘 나가는 변호사라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한국에서 일이지. 한국을 벗어나면 딱히 알아주지도 않는다고. 그런데 그들이 과연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포기하고 한국을 떠나서 살 수 있을까? 은퇴해서 휴양지에 들어간다면 모를까.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좁은 사회군요.”

“좁지. 그것도 굉장히. 한국에서 내 일을 도우려면 그런 분위기도 공부를 해 놔야 할 거야. 여기저기 트러블 일으켜봤자 득 될 게 없으니까.”

“제이코였다면 그깟 소송 백 년이든 천년이든 얼마든지 해주겠다고 이야기했을 겁니다.”

엘리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이코는 시작은 물론 앞으로도 같이 달려갈 파트너야. 그걸 전제로 관계를 시작했으니까. 한 몸이나 마찬가지지.”

“보스가 무너지면 제이코도 무사하지 못한다는 말이군요.”

“그래. 제이코는 내가 맺어왔든 또는 맺어갈 모든 이들을 상대할 위치에 있어. 보편적 신뢰 관계보다 더 끈끈하다고 봐야겠지. 거기다 대왕이라는 이름만으로 껄끄러운 표정을 짓던 제일 로펌과 달리 제이코는 나보다 더 신나서 대왕을 패는 중이거든.”

엘리스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궁금증은 풀린 건가?”

“네. 그리고…….”

“응?”

“다행이네요.”

“뭐가.”

“제이코가 로펌을 팔아 버렸다는 말을 들었을 때 솔직히 화가 많이 났거든요.”

엘리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자신이 느꼈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했다.

“그랬었나.”

“제이코에게 실망을 했거든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돈에 휘둘렸으니까요.”

엘리스가 아는 제이코가 어떤 제이코인진 모르겠지만, 내가 만난 제이코는 나를 탈출구 또는 자유행 티켓으로 여겼었다.

돈에 휘둘렸다기보단, 휘두를 수 있는 돈이 있다는 말에 오히려 손뼉을 쳤던 것 같다.

엘리스의 궁금증 때문에 시작된 대화지만, 엘리스를 만난 뒤로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긴 처음이다.

필요한 말만 하고 얼음장처럼 굴기에 말수가 없는 사람인가 했는데, 그건 아니었나 보다.

“그런데 왜 다행이라는 거지?”

“최소한 돈만 많은 멍청이는 아닌 것 같아서요. 뭐든 돈이면 다 된다는 마인드는 솔직히 재수 없거든요. 제이코 부탁 때문에 보스와 함께 움직이고는 있지만, 맘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그만둬도 된다는 약속도 받아놨었고.”

아, 그래서 그렇게 까칠하게 툭툭거리셨군.

사표 수리가 되진 않았지만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상태라면 확실히 눈치 보고 말고 할 것도 없을 것이다.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다른 로펌에 들어가거나 개인 변호사로 활동을 해도 그만일 테니까.

“그런 일이 있었군.”

“네.”

“그러면 앞으론 좀 더 부드러운 모습을 기대해도 되는 건가?”

“부드러운?”

엘리스는 그게 무슨 의미냐는 듯 나를 바라봤다.

“모셔야 할 보스가 바보 멍청이는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했잖아.”

“그것과 내가 부드러워져야 할 이유의 상관관계를 모르겠군요.”

엘리스는 딱딱한 목소리로 그것과 이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고 했다.

“그래?”

“네. 저는 저의 일을 할 뿐입니다.”

“쏘리.”

“아닙니다. 성격이 그런 것이니…….”

“아니 그 쏘리 말고.”

내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이야기하자 엘리스의 고개가 내 쪽으로 향했다.

“비서팀 일은 오늘까지만 하는 걸로 하자고. 내일 서울로 올라가면 미국으로 돌아가.”

엘리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지금 저를 자르겠다는.”

“응. 아무리 일을 잘해도 대놓고 까칠한 사람과는 함께 할 수는 없지. 엘리스 성격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부하 직원 눈치 봐가며 일하고 싶진 않아. 그리고 엘리스도 나를 판단하고 일을 할지 말지 결정을 하려고 했다고 했지?”

“…….”

“나는 그걸 나쁘게 생각하지 않아. 누구나 각자의 생각이 있는 거니까. 막말로 그만두고 싶은데 그만두지 못하는 게 어떤 기분인지 누구보다 잘 알거든.”

“…….”

“엘리스 말대로 직원이 사장을 고를 수 있듯이 사장도 직원을 고를 권리가 있는 거잖아. 서로 감정 상하기 전에 좋게 헤어지자고. 제이코에겐 이미 말을 해 놨다니까 복잡할 것도 없겠네. 그렇지?”

무표정 전문가 엘리스의 얼굴에 잠시 어이없는 빛이 흘렀다.

대놓고 해고 통보를 받을 거라곤 미처 예상치 못했던 모양이다.

“며칠 안 되는 짧은 시간이나마 고생했어. 그만둔다고 하면 제이코에게 퇴직금은 잘 챙겨주라고 할게.”

“진심입니까?”

“이런 걸 농담해서 뭐하게. 진심이야.”

그러게 말을 이쁘게 했어야지.

오는 말이 그따윈데 가는 말이 고울 거라고 생각한 것 자체가 난센스잖아.

“그리고 돈이면 다 된다는 그런 마인드 말인데.”

“네.”

“돈이 없다면 모를까. 있는 것도 제때 쓰지 못하는 병신은 될 생각이 없어.”

“…….”

“이런 마인드를 싫어한다고 했으니. 오히려 잘 된 것 아니겠어?”

엘리스가 황당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깔끔하게 무시하고 김덕영에게 말을 건넸다.

“방송국 쪽은 스케줄 맞춰놨죠?”

나와 엘리스의 대화에 귀를 쫑긋거리고 있던 김덕영이 재빨리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내일 밤 10시. 생방송입니다. 방송국은 JTB고 MC는 한성희 아나운서입니다.”

“일 잘하시네요.”

“하하. 별말씀을요. 오히려 방송국에서 이게 웬 떡이냐 했을 겁니다. 글로벌 복권 당첨자가 한국인인 것도 놀라운 일인데 직접 인터뷰를 하겠다고 했으니.”

김덕영은 자신이 잘해서라기보다 소스 자체가 훌륭해서 일이 잘 풀렸을 뿐이라며 겸양을 보였다.

“그리고 지시하신 것처럼 방송 광고는 따로 하지 않기로 했고, 저녁 뉴스가 끝날쯤 한성희 아나운서가 클로징 멘트로 직접 이야기하기로 했습니다.”

“다른 곳에 말이 새나가지 않게 했죠?”

“물론입니다. 쓸데없는 말이 흘러나가면 다른 방송국으로 옮겨버리겠다고 했으니 입을 딱 다물더군요. 방송 전까지 보안을 철저히 지키기로 했습니다.”

“잘했습니다.”

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데뷔전은 벼락 졸부의 등장을 공식적으로 알리는 것도 있지만, 대왕 그룹에 빅엿을 선사하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소송 시작부터 정신줄을 쏙 빼 버릴 생각이다.

“저기. 대표님.”

“네. 김덕영 씨.”

“그런데 방송은 왜 나가시려는 겁니까? 얼굴이 알려지면 귀찮은 일이 많아질 겁니다.”

“유명해지려고요.”

“네?”

김덕영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나를 바라봤다.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이 많아서요. 그래서 유명세가 필요해요. 벼락 졸부 소리를 피할 수는 없겠지만, 어차피 한 번은 겪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기도 하고.”

“아. 네…….”

“그렇다고 계속 졸부 소리만 듣겠습니까? 사회적으로 존경도 받고 그래 봐야죠.”

“당연히 그래야죠.”

김덕영은 꼭 그랬으면 좋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외교관 인생은 어차피 끝장이 난 데다, 나관종 의원 밑으로 들어가 정치에 입문하려던 계획도 어긋났다.

이제 남은 거라곤 고주몽뿐인데, 이게 썩은 줄이 되지 않으려면 여기저기 욕먹는 졸부보다는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주는 게 그나마 밑에서 일하는 맛이라도 있지 않겠는가.

“지금도 정치에 관심이 있나요?”

“솔직히 말해도 됩니까?”

“굳이 숨겨봤자 김덕영 씨에게 득이 될 게 없잖아요.”

“네. 하고 싶습니다.”

김덕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 의원을 데리고 왔던 것도 그에게 잘 보이려고 했었다고 그랬었죠?”

“부끄러운 일이지만, 그랬었습니다.”

“내일 일은 모르는 거잖아요. 언제든 기회가 오면 망설이지 말고 열심히 해보세요. 최소한 방해는 하지 않을 테니까.”

“네. 대표님.”

이왕이면 도와주겠다는 말을 듣고 싶었겠지만, 어떤 정치를 어떻게 하고 싶을지 알아서 그런 약속을 하겠는가.

이런 주제는 적당히 이쯤에서 넘어가는 게 좋았다.

“로버트.”

“네. 보스.”

“박 실장 쪽은 어떻게 한다고 합니까?”

“오늘 일괄 사표를 제출한다고 합니다. 전임자들도 모두 준비가 끝났다고 그렇게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로버트는 질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나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람들 내일 방송에 함께 출연할 겁니다.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경호 잘 부탁합니다.”

“네. 보스.”

조수석에서 뒤를 바라보며 이야기하던 로버트가 엘리스 쪽을 힐끔 바라보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버렸다.

“집까지는 얼마나 남았죠?”

“두 시간이면 도착합니다.”

“안전운전 부탁해요. 나는 잠시 눈 좀 붙일게요.”

“네. 대표님. 걱정하지 마십시오. 무사고 20년…….”

같은 말 두 번씩 할 필요 없다며 가볍게 손을 내 저은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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