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7장. 고 대표가 입국했습니다.
청와대 방문 요청을 내팽개치고 공항 밖으로 나오니 김덕영이 준비한 차량이 눈에 들어왔다.
시커멓게 선팅된 캐딜락 에스컬레이드 5대와 클래식의 대명사 롤스로이스 한 대가 쫙 늘어서 있다.
한국에 들어오기 전, 제이코가 미리 공수해 보낸 차들이다.
캐딜락은 물론이고 롤스로이스 역시 모두 방탄처리를 했다고 들었다.
김덕영은 보기만 해도 뿌듯하다는 듯 활짝 웃는 얼굴로 차 문을 열었다.
“타시죠. 대표님.”
경호팀과 비서팀이 캐딜락에 나누어 타고 나와 엘리스, 로버트는 롤스로이스에 탐승했다.
운전대는 김덕영이 직접 잡았다.
한때 잘 나가던 외교관이 운전사까지 자처한다는 게 웃기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김덕영은 아무런 불만이 없었다.
결국 면직 처리되면서 공무원 생활이 끝나버렸지만, 그때 나관종 의원을 데리고 들어가 사고를 친 것이 인생 최고의 기회가 되었다고 생각할 정도다.
“각 차량 내비게이션에 순서대로 오늘 미팅 장소를 모두 입력해 두었습니다.”
김덕영의 말에 로버트가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로버트는 경호팀에 곧바로 무전을 날렸다.
“내비게이션에 입력된 순서대로 움직인다.”
― 확인했습니다.
“1호, 2호가 선두. 나머지는 제로 후방을 따른다.”
― 1호 차 브라이언 선두로 이동합니다.
― 2호 차 준비됐습니다.
선두 차량이 출발 준비를 마쳤다는 무전이 날아들자 후방 차들도 각각 보고를 마쳤다.
“출발.”
― 옛 설.
선두 차가 움직이자 김덕영이 출발을 알렸다.
“첫 미팅 장소. 제일 법무법인으로 출발하겠습니다.”
“네. 안전운전 부탁합니다.”
“무사고 20년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롤스로이스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묵직하면서 안정된 느낌이 발끝을 타고 올랐다.
* * *
주몽을 섭외하는 데 실패한 양상도 비서관은 썩은 표정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도대체 뭐야. 뭐 하는 놈들이기에 저렇게 거만해!”
양상도는 곧바로 수석실에 전화를 넣었다.
“양상도입니다.”
― 어. 그래. 오고 있어?
“그게 말입니다. 초청을 거부했습니다.”
―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자기들 스케줄 때문에 시간을 뺄 수가 없답니다.”
― 허. 이거야 원. 골치 아프네. 그래서?
“그걸 무시하고 청와대로 가야 한다면 기회비용을 책임지라고 했습니다.”
― …….
정무 수석은 잠깐 말이 없어졌다.
“수석님?”
― 아. 알았어. 그것 말고는 문제없었지?
“네.”
― 그래 수고했어. 들어와서 이야기하자.
“저기 수석님.”
― 어.
“고주몽이라는 사람. 뭐 하는 사람입니까?”
― 일단 들어와. 괜히 여기저기 말 퍼트리지 말고.
정무 수석은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뭐야? 화를 안 낸다고?”
다른 때 같으면 당장 언성이 높아졌을 사람인데, 그냥 그랬냐는 듯 순순히 넘어가니 오히려 당혹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김동석 씨.”
양상도는 통역을 맡았던 김동석을 불렀다.
“네. 비서관님.”
“아까. 그 사람들 뭐라고 이야기하던가요?”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김동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양상도를 바라봤다.
“아까! 자기들끼리 뭐라고 했잖습니까.”
“아…….”
김동석은 그제야 기억이 났다는 듯 능청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뭐든 좋으니까. 뭐라고 했는지 말해 봐요.”
“비서관님 말씀에 집중하느라 듣질 못했습니다.”
“네?”
“목소리도 너무 작았고 말입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코앞에서 떠들어 댔는데.”
양상도는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며 언성을 높였다.
“진짭니다.”
김동석은 전혀 아는 바가 없다며 입을 꾹 다물었다.
변호사에 경호원에 떼로 몰고 다니는 사람의 사적인 대화를 입 가벼운 양상도에게 이야기한다?
김동석은 제 손으로 목을 조르고 싶은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양상도는 김동석의 태도에 엄중한 경고를 했다.
“나랏일입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입을 다무시겠다?”
“몰라서 모르겠다고 하는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뭐라고 해야 할지…….”
김동석은 억울하다는 눈빛으로 양상도를 바라봤다.
“만에 하나 나중에라도 다른 내용이 있었다는 게 밝혀지면 각오하는 게 좋을 겁니다. 통역관 자리를 지키고 싶다면 생각 똑바로 하세요.”
“물론입니다.”
김동석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통역 일이야 이곳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잡을 수 있지만, 미국 법정에 끌려가 소송당하는 건 절대 사절이라고 이 아저씨야.’
양상도는 잠시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법무부에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나 상도다.”
― 무슨 일이냐. 이 시간에 전화를 다 하고.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 뭔데?
“제일 로펌 쪽에 아는 사람이 있나 해서.”
― 아침부터 전화해서 로펌은 무슨. 송사라도 걸렸냐? 무슨 일인데?
“내가 잠시 일이 있어서 공항에 좀 나왔거든.”
― 나 출근 중이다. 용건만 간단히 하자.
“고주몽이라고 미국에서 입국하는 사람이 하나 있는데…….”
― 누구?
“고주몽. 혹시 알아?”
― 상도야.
“어.”
― 내가 친구 맞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 그러니까. 내 말 잘 들어.
양상도는 갑자기 말투가 바뀐 친구 목소리에 싸한 기분이 들었다.
“어. 그래.”
―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 건드릴 생각하지 마라. 옷깃에 물방울이라도 튕겼다간 그냥 죽는다고 생각해.
“야. 그게 무슨 소리야?”
― 네가 청와대 소속이라서 이 정도라도 이야기해주는 거다. 그러니까. 근처에도 가지 마.
“야. 일표야.”
친구 정일표는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뭐야. 뭔데 이래?”
* * *
한참 출근 중이던 정일표 사무관은 통화를 끝내자마자 곧바로 장관실에 전화를 넣었다.
“정일표 사무관입니다. 장관님께 긴급 보고가 있습니다.”
― 어. 날세. 무슨 일인가?
“고주몽 씨가 오늘 아침 입국을 했다는 정보입니다.”
― 고주몽 대표가?
“청와대에서 사람을 보낸 것 같은데, 아무래도 첫 만남부터 분위기가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정일표의 보고에 법무부 장관 나관형이 잠시 침묵을 보였다.
― 일단 들어오게.
“네. 그리고 고주몽 씨 목적지를 파악했습니다.”
― 어디지?
“제일 로펌입니다.”
― 그래. 나도 알아. 그쪽은 내가 알아보지. 수고했네.
“아닙니다. 들어가서 뵙겠습니다.”
양상도는 고주몽이 로펌과 약속이 있다는 말에 뭐라도 건져서 들어갈까 전화를 했지만, 되레 눈치 빠른 정일표에게 일급 정보를 가져다 바친 신세가 되어버렸다.
정일표의 전화를 받은 나관형은 곧바로 부총리에게 전화를 넣었다.
“부총리님. 저 나관형입니다.”
― 네. 이 시간에 무슨 일로…….
“고 대표가 입국했습니다. 외교부에서 아직 연락이 없습니까?”
대표단으로 미국에 다녀온 부총리 일행은 한국에 들어와서도 고주몽과 관련된 사항은 꼼꼼히 정보를 주고받고 있었다.
― 아직입니다. 그런데 확실한 정보입니까?
“네. 행선지도 파악했습니다. 제일 법무법인을 방문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첫 행선지가 법무법인이라…….
“청와대에서 접촉했는데, 실패한 것 같습니다.”
― 외교부도 모르는 그의 입국을 BH에서 먼저 파악을 했다는 말이군요.
“해외 파트에서 정보를 받았을 겁니다. 외교부는 출입국 전산 쪽으로 확인을 하니까요.”
― 고 대표가 움직였다는 법무법인. 선이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정 사무관이 들어오면 곧바로 확인을 해볼 생각입니다.”
― 좋습니다. 추가 정보가 들어오면 알려주세요. 육성철 장관과는 내가 따로 이야기하겠습니다.
“네. 부총리님.”
* * *
주몽은 이번 입국에 한국이 아닌 미국 여권을 사용했다.
통합시민권을 얻은 기념으로 타국 여권을 이용해 한국에 들어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한국인 고주몽의 입국 여부를 확인하고 있던 외교부에선 미처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과거 협상단 멤버들이 바쁘게 전화를 주고받는 사이, 주몽 일행은 첫 번째 미팅 장소 제일 로펌에 도착했다.
미리 마중을 나와 있던 제일 로펌 변호사들의 안내를 받아 대표 변호사실까지 다이렉트로 이동을 마쳤다.
“환영합니다. 고주몽 대표님. 제일 법무법인 대표 이제일입니다.”
흰머리 지긋한 학자풍의 신사가 일행을 맞이했다.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GO 컴퍼니 대표 고주몽입니다.”
“하하. 별말씀을요. 일단 앉으시…… 아이쿠. 여기선 다 앉지도 못하겠네요. 괜찮으시면 회의실로 옮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미팅 장소가 곧바로 회의실로 바뀌었다.
회의실 주변을 경호팀이 둘러싸자 곧바로 도청장치 확인해 들어갔다.
“요즘 들어 워낙 듣는 귀들이 많아서 말입니다.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당황한 표정의 이제일 변호사에게 양해를 구했다. 일부터 저질러놓고 양해를 구한다는 게 웃기기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로버트와 도·감청 팀원들은 어딜 가든지 묻고 따지지도 않고 이 일부터 시작하는데.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이제일 변호사는 언제 당황했냐는 듯 손사래를 쳤다.
“이상 없습니다.”
도·감청팀은 감청 장치 확인이 끝나자 이번엔 노이즈 발생기를 테이블 위에 떡하니 올려놨다.
“제 신분에 대해선 김덕영 씨가 이미 말씀을 드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네. 깜짝 놀랐지 뭡니까. G20 복권 당첨자가 한국인이었다니. 정말 축하드립니다.”
이제일 변호사는 활짝 웃는 얼굴로 복권 당첨을 축하해 줬다.
“제가 제일 로펌에 찾아온 이유는 두 가지 용건이 있어서입니다.”
“네. 말씀하시죠.”
“한국에 100억 달러의 투자금이 들어와 있습니다.”
“굉장히 큰돈이군요.”
“네. 이걸 국내에 투자하려면 여러모로 한국 변호사들의 도움이 필요해서 말입니다.”
이제일 변호사는 당연히 그럴 거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로펌에서 이 일을 전담해주셨으면 합니다.”
“기회를 주신다면 마다할 일이 아니죠.”
이제일 변호사는 기분 좋게 웃음을 보였다.
“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소송 건입니다.”
“소송이요?”
“대왕 그룹과 작은 소송 하나가 진행 중입니다.”
대왕 그룹이라는 이름이 흘러나오자 이 변호사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대한민국에서 대왕이라는 이름이 주는 압박감은 몇 마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다.
“하필이면 대왕 그룹과…… 어떤 소송인지 들어봐도 되겠습니까?”
“사표를 썼더니 저를 스파이로 몰아세우더군요.”
“스파이라면 기업 정보를 다른 곳에 넘겼다는 그런 이야기겠군요.”
“네. 하지만 보다시피. 제가 그럴 이유가 있습니까?”
글로벌 복권 당첨자가 돈 몇 푼 때문에 기업 정보를 팔아먹는다?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소송은 한국뿐 아니라 G20 각국에서 진행 중입니다. 다른 나라들은 미국에 있는 로펌에서 관리를 하고 있습니다만, 변호사님도 아시다시피 한국은 좀 특수성이 있어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그렇죠.”
이제일은 고민스러운 표정이 됐다.
투자 관련 업무를 전담하게 되면 로펌 입장에선 엄청난 수익이 예상되지만, 전제 조건이 대왕 그룹과의 소송이라니.
자칫 대왕 그룹과 어긋나기라도 하는 날엔 로펌이 활동하는데 여러 가지 불편한 일이 생기게 될 것이다.
“일을 받으신다면 개인적으로 로펌에 투자를 하겠습니다. 법인을 운영하시는 데 큰 도움이 되실 겁니다.”